“등산 만큼 일반화된 레포츠도 없을 것이다.지난 해 국립공원을 찾은 사람은 2천200만명.국립공원을 제외한 산에 오른 등산객까지 추산하면 한 해 3천만명 이상이 산에 오른다.
그러나 정말 산을 좋아하고 등산을 즐기는 ‘등산가’인지 어쩌다 뒷산 약수터에 오르는 ‘무늬만 등산가’인지를 확실하게 가늠하는 척도가 있다.‘알퐁소 등산화’를 신었는가(혹은 아는가)아니면 외제 등산화를 하나 장만한 것을 자랑하는가.
등산화야 신어서 편하고 오래 걸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첫번째 조건일 게다.그러나 발에 딱 맞는 등산화를 찾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그래서 산에서는 곧잘 좋은 등산화가 공통화제가 된다.
그런데 “내가 만든 등산화라면 누구의 발에나 꼭 맞는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장인이 있다.20년이 넘게 서울 미아리 고개에서 등산화를 만들어온 ‘알퐁소 등산화’의 김택규(66)사장.그는 살이 없는 길쭉한 칼발이라 발목이 자주 삔다는 사람에게도,볼이 넓고 두툼한 발이 콤플렉스인사람에게도 차별없이 편안한 등산화를 만들어준다.
알퐁소 등산화가 그렇게 유명해진 이유는 분명히 있다.수제화인 이탈리아제 최고급 등산화도 한결같이 가죽조각을 이어 만드는데 알퐁소는 통가죽 등산화를 고집한다.표준치수를 정해두고 구두에 발을 맞추라고 하지도 않는다.손금 만큼 발모양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으로 치수를 재고 발모양과 특성에 맞춰 등산화를 만든다.그래서 알퐁소 등산화는 단골들로부터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내 등산화’라는 말을 듣는다.
알퐁소 등산화의 자랑은 그뿐이 아니다.한 번 판 등산화는 무려 10년간 보증한다.10년동안은 언제든 끈이나 장식이나 안창까지도 모두 무료로 수선해준다.그래서 그는 7∼8년씩 신었다는 고물 등산화의 밑창을 갈아달라는 손님도 마치 오랜 친구나 친지처럼 맞는다.
“등산화는 적어도 10년은 신어야지요.신을수록 편안하다고 밑창만 몇 번씩 갈고 신으시지요.단 겨울산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새로 방수를 하셔야해요.물론 그것도 제가 무상으로 해드립니다”
김 사장은 고객의 발을 직접 잰다.그것도 ‘인터뷰’를 하면서.얼마나 많은 산에 올랐는가,주로 어느 산을 찾고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물론 이때김 사장은 발의 모양과 특징을 관찰할 뿐아니라 고객의 나이와 몸무게까지체크한다.이 수치들을 앞에 두고 그만의 노하우를 적용해서 등산화를 만든다.
“제 손님들은 최고급 등산화를 몇 켤레씩은 신어본 분들이세요.그러니 어떤 세계적 명품보다도 더 잘 만들지 않고는 인정받을 수 없어요”
김 사장은 1년 열 두달 쉬는 날이 없다.그러나 어쩌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 손님이 다녀가면 가족들은 그날 좀 ‘괴롭다’.나이가 얼마나 됐더냐?몸무게는? 등산은 얼마나 한 분이더냐?“도대체 신발을 만들면서 아버지처럼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아들의 볼멘 소리가 나올 만도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을 생각은 아예 없다.“산에서는 등산화가벤츠보다 낫다”던 한 단골의 말을 떠올리면서.세계 명품 등산화뿐아니라 벤츠자동차와도 겨루는 것같아 보인다.이는 그가 처음 등산화를 만들던 20여년전부터 ‘세계 최고의 등산화’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달라질 수 없는 태도다.
그는 전남 곡성출신으로 근방에선 뜨르르 알아주던 부잣집 아들이었다.그러나 6·25 이후 몰락한 집안으로 인해 청춘기는 ‘팍팍했다’.구두공장 조수부터 안해본 일이 없었지만 타고난 손재주로 청량리에서 큰 구두가게를 경영하기도 했었다.그러나 ‘돈맛’에 쉽게 길들여졌던 탓인지 70년대 중반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다.절망에 빠져 죽을 생각만 하며 방황하던 그때,그를다시 일으켰던 것이 바로 최고급산 등산화였다.‘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그를 살리기 위해 한 신부님이 등산화 한 켤레를 주문했고,그는 영원히 다시는 신발을 안 만들 것이라던 고집을 꺾었다.
“이것보다 더 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잘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뜬금없이 들었고… 구두에 대해서는 이미 10여년이나 해왔으니 등산화 공부만 조금 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명품을 만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상호인 ‘알퐁소’는 성인의 이름이자 천주교 신자인 그의 세례명이기도 하다.성인의 이름을 신발 밑에 놓아도 되겠느냐고 신부님에게 문의했을 때 “성인이 신발을 받쳐주면 얼마나 편안하겠느냐?”는 답을 듣고 이를브랜드화했다.그리고 20여년만에 알퐁소는 등산화로는 첫 손에 꼽히는 명품이 됐다.
그는 국내산 원자재를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물론 4년전 공장건물을 지으면서 등산용품 복합매장을 함께 오픈했기 때문에 수입품도 구비해 두고 있긴하다.그중에는 고무창을 처음 사용해 구두의 역사를 바꾼 이탈리아의 비브람도 있다.그러나 그는 등산화를 맞추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국산품도 이에못지 않습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고무창을 발명한 비브람이란 구두장이의 이름이 유명 브랜드가 됐어요.불과 65년전 일이랍니다.우리 ‘알퐁소’도 40년후 세계적인 명품이 못될 이유가 없습니다.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요”
오만하지 않은 그의 자신감은 참 보기가 좋다.그 자신감은 고객에게서 확인된다.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신었다거나 김수환 추기경도 고객의 명단에 올라있음은 익히 알려졌다.고건 서울시장과 강덕기 전 서울시장도 그의 단골.이름을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이 해외출장이 잦은 CEO들도 알퐁소의 단골이다.최근들어선 대구나 제주도에서는 물론 일본여행객들도 찾아들고,러시아에까지 배달도 했다.
등산화뿐아니라 현장답사가 많은 교수나 연구원들에게는 평상화도 제공한다.파워 엘리트들이 신는 이 신을 그는 아예 ‘인텔리화’라고 부른다.
알퐁소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을 아들들이 이어받았다는 점이다.종수(34)씨와 문석(32)씨,두 아들은 구두공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부인 박춘자(60)씨는 김 사장이 ‘인정하는’국내 최고의 구두재단사.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표준치수로 공장을 기계화,대형화하고 구두가격도 현실화하며 인터넷 판매도 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한다.이는 ‘값싸고 편안한 구두를 만든다’는 아버지의 생각과 다르지만 그외는 3부자는 의견충돌이 없다.특히 대학졸업후 다른 직장대신 작업복을 입고 구두공장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 김 사장은 여간 고맙지 않다.그래서 “기술은 아직 멀었지만 이론으로는 나를 훨씬 앞질러 이미 박사”라고 칭찬한다.
11만원짜리 등산화를 사면 10년이나 보증한다는 고집의 알퐁소 등산화.그리고 김택규 사장가족.미아리 고개 한켠에서 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키운다.그리고 그 꿈은 쑥쑥 자라고 있다
“손톱이 다 빠지도록 신발을 만들었어도 만에 하나 이상이 있다면 두말 않고 새로 만들어 드립니다.
몇번 신었어도 상관않죠. 제가 만든 신은 최소 10년을 보증합니다.”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는 김택규씨(64). 미아리고개에 자리잡은 수제 등산화점 ‘알퐁소’에는 그의 30년 등산화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씨는 등산화 한 켤레 한 켤레마다 혼을 담아서는 딸아이 시집보내듯 애틋한 마음으로 고객에게 넘겨준다.
혹 트집이라도 잡히면 기꺼이 새로 짓는다. 고객의 실수로 훼손이 됐다 하더라도 10년 동안은 아무런
대가없이 고쳐준다. 이 모든 것은 김씨가 돈보다는 고객에 대한 신의를 중시하는 까닭이다.
그 결과 김씨는 ‘등산화 명장’이라는 돈으로는 감히 환산조차 할 수
없는 큰 명예를 얻었다.
사실 산깨나 탄다는 사람 치고 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이름만 되면
“아!” 할만한 사람들도 김씨의 고객.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일본인, 미국인 등 나라 밖의 손님들도 많다.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그의 등산화를 한번 신어본 사람이면 열에 아홉은 친구나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솜씨는 새삼 거론할 여지도 없는 셈이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유명해졌을까. 그것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연많은 그의 인생살이와 깊은
관계가 있다.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농사를 짓다 30살에 서울로 올라온
김씨는 한 때는 이름난 양화점을
세 개나 운영할 정도로 잘나갔다. 그러다 평생 갚아도 다 못갚을 것같은 큰 빚을 안은 채 폭싹 망하고 말았다.
그때가 79년. 오직 ‘죽기 위해’ 집을 나갔을 정도로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좌절감에 빠졌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 쉬 목숨을 못끊고 방황하던 중 천주교에 입문하면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가게 이름이자 상표명인 ‘알퐁소’는 그 때 얻은 세례명.
“60년대 말 처음 등산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고 나니 돈은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더군요. 오직 세계에서 가장 좋은 등산화를 만드는 것만이 제 인생의 목표가 됐습니다.”
유명 외제품을 가져다가 뜯고 연구하길 십수년. 널리 인정받는 지금도 김씨는 끊임없이 연구하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7평 남짓한 작업실을 지킨다. 제품 하나 하나가 예술품이라는 김씨의 장인정신은 아들에게까지 이어진다.
둘째 아들 문석씨(29)가 가업을 잇기 위해 목하 수업 중. 등산화 ‘알퐁소’는 앞으로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제품으로 고객과의 신의를 지키게 한다는 김씨의 바람이 아들에 의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월간 서울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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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SBS에서 방송된 수제 등산화 만드는 곳 아시는분 없나요.
강북 어디였는데 할아버지가 오직 손으로만 직접 만든다고 하는데
매장은 없고 주문생산만 한다는것 같았는데...
혹시 아시는분 리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내용출처:다음검색 지난자료이므로 가격은 변동사항 있을듯...아마 만만치 않다는 소문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