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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경성(京城)
지금으로부터 대략 백 년 전 지금의 한반도의 살던 재조일본
인들이나 조선을 여행한 '내지' 일본인들에게 경성은 어떠한 곳
으로 각인되고 표상되었을까?
바위가 드러난 산, 혹은 미처 겪어본 적이 없는 경성의 추위라
는 자연을 배경으로 남녀노소의 사람들과 전차로 붐비는 경성 시
가지의 모습이 활사되어 있다. 이처럼 경성을 모티브로 한 단카
들은 경성이라는 공간 속의 여러 사물과 배경들을 잔잔하게 읊어
눈앞에 과거 경성 거리의 풍광들을 떠올리게 한다,
* { 경성 풍경 } *
거리는 온통 물건 파는 사람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각양
각색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지나다닌다.
거리의 위를 전차는 달린다네. 저 멀리 바위가 드러난 산이
물결처럼 펼쳐져 보인다.
경성의 시가지가 해가 저무는 서쪽 산으로부터 기루가
일어 어슴푸레해졌네.
경성에 찾아온 어마어마한 추위로 거리에는 참새의 모
습도 그림자도 안 보이누나.
[ 2 ] 경성역(京城驛)
현재 서울역사 옆의 복합문화공간으로 1905년부터 남대문역이
라 불리다 1923년부터 1947년까지 경성역이라 일컬어졌다. 일본
인이 설계한 근대적 건물인데 1922년 남만주철도주식화사에서
착공하여 1925년 10월 15일 준공되었다. 서양에서 18세기 이래
유행한 절충주의 양식으로 건립되어 둥근 지붕과 붉은 벽돌의 이
국적 건물 외관 때문에 건립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다. 2004년 지
금의 서울역사 신축으로 구(舊) 역사는 폐쇄되었고, 2011년 복원이
완료되어 사적번호를 살려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 서울 284' 가
되었다.
* { 경성역의 이별 } *
부산행의 승강장에는 배웅 나온 사람들 몹시도 많아
마음은 붕떠서 가라앉지 않는다.
경성역 앞의 광장에 우두커니 지쳐 서 있는 지금 나의 눈
에서는 눈물조차 떨어지지 않음은
차분히 말을 나눌 사이도 없이 비 내리는 밤 역사에서 그
대와 속절없이 헤아졌기 때문이라네.
[ 3 ] 남대문(南大門)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남쪽 문으로 한양 성
곽과 함께 1396년에 만들어졌으며 일제강점기 때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어 남데문이라고도 불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
조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2008년 화재로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예부터 도성
의 정문이자 상징 건축물로서의 역할을 해온 남대문은 단카 속에
서도 그 존재감과 역사성이 느껴진디.
* { 남대문의 가을 } *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마치 옛날의 이조시대의 남대문이
이야기하듯 서 있네.
거리 가운데 홀로 남겨진 성문에 가을 찾아와 담쟁이 덩
굴에도 단풍물이 들었다.
빌딩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옛 나라 모습 간직한 남대문을
볼 때에 애잔하구나.
[ 4 ] 남산(南山)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도성 남쪽에 위치하는 산
이라 남산이라고 불렸으나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이다. 예나 지
금이나 남산을 주변으로 다양한 명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강
점기 때는 남산 중턱에 왜성대공원, 경성신사(京城神社), 조선신궁(朝鮮
神宮) 등 일제의 식민통치 산물들로 얼룩지기도 하였다. 또한 남산
아래 남촌(南村) 일대에는 일본인 마을이 발달하여 남산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
* { 남산의 소나무 } *
우뚝 서 있는 남산의 봉우리에 내가 서 보니 커다란 경성
도읍 눈 바로 아래 있네.
가을이 된다 사람들 말하지만 남산은 아직 단풍도 안 보
이고 소나무는 그저 파랗구나.
나는 비록 서글플찌라도 어느 때나 언제까지나 남산 위
의 소나무는 영원하리라.
[ 5 ] 경복궁(景福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으로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
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경복궁 내에는 근정전(勤
政殿),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등의 정전과 누각 등의 주요 건물
들이 보존되어 있다. 다소 쓸쓸하고 폐허처럼 포착된 단카 속 경
복궁의 모습은 과거의 시간 속에 멈춰 있는 듯하며, 경복궁에서
시해된 명성황후(1851~1895)를 떠올리게 하는 단카도 보인다.
* { 명성황후를 떠올리며 ~ } *
정원 안 깊이 들어가서 보려고 생각했지만 거친 풀들이
자라 내 어깨 키를 넘네.
절절한 마음 우러러 보노라니 높은 나무의 꼭대기 쪽으
로만 바람이 모여 았다.
이 근처에서 민비가 덧없이도 인생 최후를 다한 곳이라
듣고 여름 풀 밟아본다.
[ 6 ] 경회루(慶會樓)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1412년 태종 때 본격적으로 조성되었
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배풀던 곳이
다. 근정전(勤政殿) 서북쪽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세운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정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경복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경회루를 보며 옛 사람들의 모
습을 상상하고 감상을 읊은 단카가 눈에 들어온다.
* { 경회루의 추억 } *
여기 누각의 계단의 새겨 있는 모란꽃들이 지는 일은 없
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여기에서 항상 펼쳐지던 연회의 술잔 기울어지 듯 나라
도 기울어지고 말았네.
넓은 연못에 거위 무리 노니는 고요함 속에 희미한 궁궐
의 흔적은 서글프구나.
[ 7 ] 덕수궁(德壽宮)
현재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 본래 명칭은 경운궁
이었으나, 1907년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
라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경내
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大漢門), 중화전(中和殿), 광명문(光明門), 석어당
(昔御堂) 등이며 특히 근대 서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石造殿)은 이국적
인 풍경을 자아낸다. 단카 속에는 덕수궁의 옛 왕조의 자취와 흔
적이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정취를 느끼게 한다.
* { 덕수궁의 정취 } *
월산대군이 거주하셨던 궁전 터였던 곳이 오늘날 개방되
어 사람들이 노닌다.
대한문 아래 지나가면 가까운 중화전 건물 기와지붕이
크게 휘어 솟아 있다네.
폐허된 궁전 낮에도 조용하다 지붕 위에는 냉이풀 마구
자라 키가 커져 있구나.
세월 오래돼 한국식인 게 좋게 보이는 문을 지나니 느릿
느릿 흰옷의 노인 나와.
덕수궁 안의 잔디밭에는 붉게 불타오르는 사루비아의 꽃
이 한창 피었다.
옛날 임금의 궁궐에서의 삶을 그려보면서 잔디밭에 서 있
으니 비둘기들 다가온다.
[ 8 ] 광화문(光化門)
경복궁 남쪽의 정문으로 1395년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경
복궁과 함께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
궁을 중건하면서 재건되었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
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의 위기에 놓였으나 많은 이들의 반대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광화문 단카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
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에 이르러서
이다.
* { 광화문의 수난 } *
광화문 있던 자리에서 철거돼 조선총독부 새로운 청사
위치로 정해져 버렸네.
'연민을 담아 다스리고 우러르게 하리라' 하면서 어느덧
장엄하게 우뚝 솟아 버렸네.
이젠 위엄이 있는 문의 그 뒤편으로 있던 한국식 궁궐의
그 풍경이 보기 어려워졌네.
[ 9 ] 북한산(北漢山)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오대 명산
으로 삼각산, 한산, 북악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한산 일대는 백
운대(白雲臺), 인수봉 등 스무 개가 넘는 높은 봉우리로 이어져
있으며, 특히 화강암 봉우리들은 기암절벽과 함께 경승을 이루고
있다. 또한 북한산 내 오백 나한(羅漢)을 모신 기도처 또한 유명하
다. [조선의 도시 ; 경성, 인천(大陸情報社, 1930)]에서도 북한산을 '기
이한 봉우리의 산' 이라 하여 경성의 명소로서 소개하고 있다. 북
한산을 그린 대다수의 단카는 북한산의 모습을 사계와 어우러진
풍경으로 포착하고 있다.
* { 북한산의 풍경 } *
가을 햇빛이 비치는 산 불당은 고요해지고 오백 개의 나
한상 줄지어 계시었네.
소는 북한산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며 울음을 그치질 않
는데, 바위는 눈에 덮여 있네.
북악 정상은 눈 녹다 남았어도 산기슭 부근 나무들은 싹
들을 움틔우고 있두나.
[ 10 ] 종로(鍾路)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연결되어 있는 도로로 종각(鐘閣)이 종로
사거리에 있어 이 거리를 종루십자가(鐘樓十字街) 또는 종가(鍾街),
운종가(雲鍾街)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화
가로 단카에서도 종로의 생기 있는 분위기가 전해져 온다.
* { 종로의 생기 있는 분위기 } *
한 해가 지는 세밑에 번쩍번쩍한 놋그릇과 함께 밝게
빛나는 화신백화점
종로는 습하고 온돌의 매연 낮게 깔려 코를 찌를찌라도
멋진 장식등의 낙원회관
북적거리는 밤의 종로 거리에 조선의 고서 판다고 떠들
어도 멈추는 이 없구나
누각 건물의 매달린 종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소리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네.
아침 저녁에 시각을 알리는 종은 멀고먼 과거 운종가의
거리에 울려 퍼졌겠구나.
겨울의 한낮 시간 종로를 거닐던 여행자는 보신각 안의
종을 둘러 보는구나
[ 11 ] 파고다 공원
지금의 탑골공원을 일컬으며,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
초의 공원이다. 이전에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파고다
(pagod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파고다 공원이라 하였으나,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탑골 공원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공원
안에 있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3호인 원각
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현재 산성
비 때문에 유리 보호막이 쳐져 현대적인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
는데, 여기 단카들에서의 탑의 모습은 과거 모습 그대로를 담아
내고 있다.
* { 파고다 공원의 탑 } *
나무 그늘에 조그마힌 탑이라 보며 왔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올려다보고 있네.
대리석의 탑 표면으로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희미하게 새
겨진 부처님 조각상들.
대리석으로 된 탑 한쪽 표면 거뭇거뭇이 남은 불탄 흔적
을 지금 보고 있다네.
황량한 겨울에 파고다공원은 적적했지만 마침내 탑에
봄날의 기운이 감도네.
[ 12 ] 경성운동장
경성운동장은 옛날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었으며, 본래 그 터
의 일부는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과 군사훈련을 담당
하던 훈련원 터였다. 1925년 10월 이곳에 일제에 의해 경성운동
정이 준공되었으며, 1926년 전조선여자정구대회, 1927년 전조선
축구대회, 1934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열리는 등 일제강점기
때 다양한 대규모 채육 경기가 개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
서 경성운동장에서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고 현재는 복합 문
화 공간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으로 변모하였다.
* {경성운동장의 볼 차는 소리} *
훈련원 터에서 서로 얽혀서 힘을 겨루는 넒은 노천 운동
장으로 변해 버렸구나.
나는 아카시아 나무에 기대어서 서 있으니 안개의 물방
울이 이따금 떨어지네.
나는 안개 자욱이 낀 언덕을 걸어오노라니 볼 차는 소리
시원스럽게 들려오네.
[ 13 ] 동대문(東大門)
흥인문(興仁門)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동쪽 문으로 사대문 가운
데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1996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그
때까지 사용하던 동대문을 원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으로 환원하
였다. 단카에서는 당시 동대문의 모습과 함께 교통 요지로서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 { 동대문의 전차 } *
가을철의 국화꽃을 손에 든 소녀, 허둥지둥 시가 전차로
바쁘게 환승하는구나.
낮의 한적함 속에 용이 회오리치듯 바삐 달려와 여기에
전차가 정차하는구나.
동대문까지 여기에서 전차로 두 구역이라 버스를 보내놓
고 갈아타러 왔다네.
이윽고 자욱하게 낀 아침 안개 흘러가니 동대문의 모습
도 곧 드러나게 되리라.
[ 14 ] 대학병원(大學病院)
오늘날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1907년에 설립된 대한의
원이 조선총독부의원 관제가 공포되면서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
칭되었다. 1912~1913년 증축공사를 거쳐 1926년 경성제국대학에
편입되어 대학병원으로 이어졌다. 1928년 지금의 서울대학교병
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었다. 광
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되었고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 병실 풍경 } *
아침 병실에 어슴푸레히 날이 밝아오지만 마음은 고요하
지 않고 걱정에 잠긴다.
건물 앞마당 초록색이 선명한 단풍나무 잎 습기를 머금
고서 차분하게 있구나.
하얀 밀랍벽 스며들은 약 냄새, 의자에 기대 맡고 있노라
니까 쓸쓸하기도 하다.
저녁노을의 붉은 구름 사이로 음력 초사흘 달은 흐린 빛
내며 모습을 드러냈네.
사람 한 명이 복도의 판자 바닥 슬리퍼 소리 울려 퍼지게
하는 심야의 울림이여.
[ 15 ] 청계천(淸溪川)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 북악산에 남쪽 기슭과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일제강점기 '조선하천령' 이 제정되면서
상류의 청풍계천을 줄여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선
하천령이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어업 및 하천 이
용에 관해 내린 규제 명령으로, 하천이 국유로 규정되었다. 1927
년 1월 22일 공포되었으며, 6월 조선하천령 시행규칙을 실시하였
다. 현재 청계천 복원이 이루어진 후 현대적인 도시 공간의 일환
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청계천을 소재로 한 단카에서는
빨래를 하는 여성들, 고기를 잡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 등을 찾아
볼 수 있어 현제와 대조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 { 청계천 풍경 } *
고추 말리고 있는 집들 늘어서 있는 마을을 통과해 걸어
와서 청계천에 나왔네.
여자들 여기 모여 빨래한다고 얼마 안 되는 지저분한 물
길을 막아 세우는구나.
물이 줄어든 청계천 모래밭에 부는 바람은 어렴풋하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네.
연무가 내려 어쩐지 슬픈 느낌 자아낼 만한 밤의 강 물가
에는 등불 흐르고 있네.
지면에 안개 자욱이 낀 청계천 강 하류에는 모래밭, 저녁
무렵 동대문 거뭇하게 보이네.
평소 청계천 물이 부족했는데 이번 비에 물 불어나서 아
이들 고기 잡는다 모여.
[ 16 ] 한강(漢江)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서울 등 한국 중부를 거쳐 서해로
유입하는 큰 강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교통의 요지이며 많
은 사람들이 여가활동을 통해 소통을 하는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
할을 해왔다, 노량진 흑석리에 위치하였던 한강신사(漢江神社) 아래
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단카 속에서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빈민촌, 겨울철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 얼음 실은 마차가
대기하는 모습, 한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모습 등 이색적인 과거
의 한강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단카들이 주목할 만하다.
* { 이색적인 과거의 한강의 모습 } *
연일 맹추위로 한강의 얼음 정말로 깊이 얼어 다리를 떨
며 밟아 건너고 있다네.
꽁꽁 얼어 있는 강에서 사람들 스케이트를 타며 오고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네.
한강의 기슭 늘어서 있는 마차 위 실어놓은 얼음은 햇빛
으로 빛이 나고 있구나.
강의 변두리 빈민굴은 여기나 저기나 낡은 판자를 늘어
놓고 담으로 삼고 있네.
[ 17 ] 이조묘(李朝廟)
현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하고 있는 종묘를 뜻하며, 조선 왕조
의 역대 제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다,
* { 이조묘가 보이네 } *
화창한 날에 나무 사이로 이조묘 건물이 보이니 더 없이
좋은 주거 생활이구나.
[ 18 ] 봉은사(奉恩寺)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년)에 연회국사가 창건한 사찰이
었는데 선릉 자리에 있던 것을 조선 명종 17년(1562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고부터 봉은사라 불렀다. 절의 분위기는 단카의 과
거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경건하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는데, 현재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게 되어 현대
적인 주변 경관과 대조를 이룬다.
* { 봉은사의 풍경 }*
올려다보면 파란 둥근 모양의 보리수 열매, 풀잎 안쪽 처
지고 꽃이 자리 차지해.
석가모니가 불멸의 깨달음에 달하였을 때, 이 보리수 나
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물고기의 눈 감길 일도 없다는 가르침대로 목어가 커댜
랗개 매달아져 있구나.
주위의 벽에 십대지옥의 그림 으스스하여 어두운 불당에
서 눈을 감아버렸네.
[ 19 ] 도봉산(道峯山)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및 양주시에 걸쳐 있
는 산으로 망월사, 천축사, 원통사 등 크고 작은 사찰과 도봉 서
원 등의 명소가 있으며, 우람한 기암괴석과 뾰족이 솟은 바위 봉
우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계곡과 숲길, 유명한 송추폭
포 등이 자아내는 비경으로 연중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 도봉산의 풍경 } *
눈앞에 바로 천축사가 보이네. 백여 년 세월 흘렀다는 백
단의 향목 이것이구나.
천축사 경내 불당 안쪽이 약간 어두워 있고 불상이 몇 구
인가 늘어서 계신 것이 보이네.
부처님 가슴 불룩하고 굵은 선 마치 맥박이 뛰고 있는 것
처럼 도드라져 있구나.
약수 마시러 온 바위굴에는 풀고사리의 잎사귀가 나 있
어 차가움 더하구나.
몇 번씩이나 목을 축여도 계속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
게 되는 산골짜기 시냇물.
댑싸리들이 무리지어서 피는 여기부터는 여울 흐르는 소
리 울림도 드높구나.
물이여 물이여 흘러 흘러 여기까지 도달했으니 물은 폭
포가 돼야 하는 운명이로다.
멀리서부터 우리를 보고 있는 부락엔 아이들 벌거벗고
바위에 쭈구려 앉아 있네,
앞서 올라간 사람이 떨어트린 돌멩이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튀어 오르네.
시자담에서 얼굴을 씻은 다음 올려다보니 사자바위 턱
쪽에 햇빛의 아지랑이.
[ 20 ] 청량리(淸凉里)
청량리의 동명은 이 지역의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청량사(淸凉
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청량리를 노래한 단카에는
붉게 칠한 왕릉이 등장하는데 이는 홍릉(洪陵)이라 불리던 명성황후
의 능으로 평온한 분위기에 왕릉의 엄숙함을 노래한 단카들이 조
화를 이루고 있다.
* { 청량리의 풍경 } *
연못 수면 위 연꽃은 풍요롭고 둥둥 물에 떠 흔들리는 푸
르름 아침이 오고 있네.
어린 소녀들 치맛자락 날리면서 공차기 노래 부르며 노는
데에 정신이 팔린 대낮.
산에서 날은 저물어오고 왕비 사당 보면서 지나가니 갑
자기 조심스러워지는구나.
나무 사이로 통해 보이는 붉게 칠한 능이네. 쥐죽은 듯 고
요해 매미 한 마리 없다.
왕릉을 향해 가는 길이로구나. 소나무 숲길에 한줄기 시
원한 바람이 함께하네.
[ 21 ] 청량사(淸凉寺)
청량사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도량으로 예
부터 청량리동 청량사, 보문동 보문사, 옥수동 미타사, 숭인동 청
룡사와 함께 사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하였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명성황후기 시해된 이
후 홍릉이 조성되자 홍릉 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인
동대문구 청량리1동 61로 옮기게 되면서 사세가 기울고 있던 돌
꽂이 승방도 이때 합병되었다고 한다. 청량사가 비구니들의 절이
었던 만큼 단카 속에서도 당시 여승들에 모습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청량사의 풍경 }
온돌 방 안에 불단을 갖추어서 고요할 때에 공손히 손을
모아 절을 올리겠구나.
손님으로 온 우리들 앞을 지날 때에 저절로 여승은 손을
합장하고 지나가고 있구나.
[ 22 ] 신촌(新村)
신촌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새터말' 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신촌(新村)이라 표기한 데서 유래하였다. 신촌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신촌리(新村里)로 불리었으며 광복 후 서대문구 신촌동이 되었다. 현
재는 대학가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지만 단카 속 신촌의 모습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 신촌의 풍경 }
낮 시간 고요한 가운데서 산을 넘어 온 들국화, 골짜기에
흐드러지게 꽃 피우네.
줄무늬를 한 언덕을 내려와 보니 논 가운데로 누렇게 물
든 벼들이 고개 숙이네.
와우산 정면이 마주보이는 나의 집 마당에서는 닭들이
이리저리 노니는구나.
터널 속에서 잠시 익숙해지는 어둠 속. 눈에 끝도 없이 보
이는 푸르른 신촌 언덕.
[ 23 ] 영등포(永登浦)
현 서울 한강의 이남 중 영등포구 및 과거 영등포구에 속했던
지역들의 총칭을 이른다. 대한제국말기 신식 교통수단인 철도가
영등포를 지나고, 영등포역이 설치되면서부터 일약 교통의 중심
지가 되었다. 현재는 번화가로 이름난 영등포이지만 단카 속 영
등포는 딱따구리가 울고 벌판과 논두렁이 펼쳐져 있던 소박한 마
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영등포의 풍경 }
기차 내리니 길에 바로 이어진 눈 쌓여 있는 너른 밭 안
으로 계속 이어졌구나.
뒤돌아보니 마을엔 어슴푸레 달빛 비치네. 딱따구리 우는
두렁 애들과 돌아가네.
[ 24 ] 오류동(梧柳洞)
오류동 동명은 예부터 오류동 123번지 일대와 그 서쪽에 오동
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오류꿀' 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
되었다. 단카 속에서도 자연의 정취가 풍부하고 향기로움이 느껴
지는 노래들이 동명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 오류동의 풍경 }
고요한 낮 시간대에 밤꽃이 좋은 향기가 감도는 샛길을
따라서 걸어가 보누나.
문 열어둔 방은 환하게 밝기도 한데, 새빨갛게도 찔레꽃
무성하게 담에 피었네.
오류동 산 속 깊이 있는 풀더미 헤치고 가는 나를 둘러싸
고는 벌레 몹시도 우네.
아득하게 먼 산자락 달려가는 트럭의 먼지 뿌옇게 이는
모습 보여서 쓸쓸하다.
[ 25 ] 조선은행(朝鮮銀行)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발권은행인 구 한국은행은 1909년 10월
에 설립되었다. 1911년 8월 15일 일본이 '조선은행법' 을 공표하
면서 명칭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산하에 놓
이게 되었다. 광복이 된 이후 1950년 한국은행법에 의해 조선은
행을 인수하여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새로 세워졌다.
{ 은행의 풍경 }
돌로 지어진 하얗게 말라 있는 은행 건물의 그늘진 조용
한 곳 아래로 와 보았네.
하늘 가운데 둥근 달이 나와 있는데, 그 아래로 사통팔달
에 위치한 은행이 있네.
[ 26 ] 프랑스 교회
프랑스 교회는 현 명동성당으로 불란서 교회로도 불리었다.
[조선의 도시 : 경성, 인천](六陸情報社, 1930)에 '메이지초(明治町)의 높
은 지대에 높게 솟아 있는 것이 프랑스 교회이다. 교회에 올라서
보면 이 대경성이 눈 아래에 보인다' 고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 교
회는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교회의 주교는 1877년 조선에 포
교라는 사명을 가지고 단신으로 조선으로 건너 온 프랑스 선교
사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Gustav Charles Marie Mutel, 1854~1933)이
었다.
{ 교회의 풍경 }
하얗게 흔들리는 라일락 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현신
하신 모습이 여기 계시네.
늦은 저녁에 편히 누워 있으니 프랑스 교회 종소리가 시
원하게 들려오는구나.
거리엔 낮게 가라앉은 연무가 있고, 높은 곳엔 프랑스 교
회 탑이 굳건하게 서 있네.
[ 27 ] 조계사(曹溪寺)
현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사찰로, 1910년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란 이름으로 창
건되었다. 당시 각황사는 일제하 최초의 포교당이었으며 사대문
안에 최초로 자리 잡은 사찰이었고, 황건문(皇建門)은 고종이 평양에
이궁으로 세운 풍경궁(豊慶宮)의 정문이었던 황건문을 경성 조계사
로 옮겨 일주문(一株門)으로 하였던 것이다.1937년 각황사(覺皇寺)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듬해 삼각산에 있
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 이름도 태고사로
개칭하였다.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는 불교정화운동으로
조계사라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조계사의 풍경 }
조계사 안의 범종을 보고 싶어 와서 봤더니 언덕의 코스
모스 벌써 피어 있구나.
여름 아침에 황건문의 흙 위에 해를 받으며 누워 잠들어
있는 걸인들이 보이네.
조계사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도 깃든 소나무 산
에 깊숙이 스며 드네.
조계사에서 어두운 언덕길을 다 내려오니 꽃길을 따라서
만든 등불들을 만나네.
[ 28 ] 장충단(奬忠壇)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년 뒤 고종이 지
금의 영빈관 자리인 남소영(南小營)에 지은 사당으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초혼단이다. 일본은 1908년 대일감정을 악화시킨
다는 이유로 제사를 금지시키고 이 일대에 벚꽃을 심어 '장충단
공원' 으로 만들었다. 6-25 이후 장충단은 폐허가 되었으며 장충
단비만이 남아 있다. 장충단비의 위치는 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
충동이다.
{ 장충단의 풍경 }
걸어가는 길 굽은 모퉁이에서 어린 아이는 달이
떳다고 아버지를 부르네.
달이 뜬 밤에 언덕을 내려오는 지게꾼 등에 어렴풋하게
파의 향내가 감돌았네.
길가 가까이 무성한 키 큰 소나무들을 따라서 걷다 보니
바로 골짜기가 보인다.
서리를 맞은 붓꽃 포기들 일렬로 서서 개천의 기슭 방향
으로 기울어져 있구나.
[ 29 ] 서대문(西大門)
서울 성곽의 사대문 가운데 서쪽의 큰 문으로 돈의문(敦義門)이
정식 명칭이다. 서대문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돈의문은 한양도성
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1915년 3월 돈의
문을 헐어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전차가 들어서면서 철거
되었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
문 터' 라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 서대문의 돌멩이 }
서대문을 부순다고 하는 날. 살짝 소매에 넣어서 집에 왔
네. 바로 이 돌멩이를.
[ 30 ] 이태원(梨泰院)
현재 서울의 외국인이 많이 찾는 번화가로 관광명소가 된 이
태원은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전용 거주지로 조성된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이곳에는 미아리, 이문동, 만리동, 여의도, 연
희동 등과 함께 공동묘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을 노래한 단
카들에서도 볼 수 있는 '묘산(墓山), '묘지(墓地)', '묘(墓)' 등의 단어에
서 전해져 오는 당시 이태원의 모습은 현재 글로벌한 명소가 된
이태원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이태원의 풍경 }
묘지 있는 산을 넘어서 왔더니 소나무 새로 보이는 한강
물에는 서리가 앉았네.
묘표에 있는 필적은 모두 같아, 이 묘지들에 묘표를 적었
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구름도 희미해진 날이 저무는 때에 묘지로 가보니 순간
순간 쓸쓸한 마음 솟네.
[ 출처 ] 단카(短歌)로 보는 경성 풍경( 엄인경, 김보현 편역 )
* 단카란? { 서른 한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대표적 단시형 문예 장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