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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편 <下>
(22)
旅毒에는 등산이 藥이다
2004년 3월 어느 분으로부터 태백산 등산 서면안내를 부탁하는
e-mail을 받은 적이 있다.
산에서 우연히 내 주소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대간이나
정맥에 부착한 내 표지기용 명함을 보게 된 것 같다.
그 분은 해외 출장이 잦은 무역회사 직원이라 했다.
시차(時差) 적응의 애로를 등산으로 푼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의 안내 받아 지리산 종주도 한 바 있는 그 분에게서 얼마 전
mail 이 왔다
지금은 일본에서 근무중이라는데 등산의 진수를 터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2002년 5월 30일 밤 나는 태백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밤샘한 거나 다름 없는 몸이 미국에서 바쁘게 보낸 3주간의
여독을 안은 채 새벽같이 백두대간을 향해 나섰다.
상당한 공백과 여독이 진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지레 걱정을
했으나 막상 부딪쳐 보니 정 반대였다.
그 당시는 현아의 문제라는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지고 다니느라
힘이 들었다가 그걸 어느 만큼은 벗어버린 후라 마음이 홀가분
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시차가 겹친 여독에는 등산이 최고의
약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아직도 성함(Song bokyung) 외에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 분의 처방이 가장 현명하다는 결론이다.
행복 퍼레이드의 재가동과 나홀로 철쭉제
혈리골의 김영규는 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새벽 2시 45분 태백역에
나와서 늙은 山나그네의 행복 퍼레이드를 다시 가동시켜 주었다.
그들 부부는 나로 인해 이 밤 전체를 설치게 되었다.
먼동이 틀 무렵 김영규를 뒤로 하고 화방재(일명 어평재)를 떠났다.
꼬불꼬불 돌고 도는 차로를 왼 쪽에 버리고 박차를 가하니 수리봉.
다시 완만한 능선과 놀이하듯 오름을 계속해 철조망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군 시설을 끼고 돌아 1.330m 만항재에 올라 섰다.
영월과 태백을 가르는 화방재와 정선 고한을 이어주는 이 재는
백두대간 남반부에서는 가장 높다.
위 / 만항재
아래 / 함백산 정상 : 우측 뒤가 통신시설
너덜지대로 이어진 1.573m 함백산 정상이 수월한 오름은 아니다.
통신시설이 있는 정상부 까지 차편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4주 전보다 오히려 더 양호한 몸 상태를 느끼게 한 것은
막힘 없이 툭 터진 사방을 시원스레 감상하라는 듯 맑은 하늘과
상쾌한 바람의 공이리라.
새벽녁 까지도 비를 뿌리던 날씨였는데...
게다가 중함백에 이르기 까지의 활짝 핀 왕철쭉은 더욱 흥을
돋구었다 할까.
다만 이 늙은 이를 기다리다 약간 지쳤음인가.
현란한 자태에 비해 생기가 조금 적어 보이는 것이.
중함백의 철쭉 : 아스라히 보이는 안테나가 함백산 통신시설이다
꽃방석고개라고도 하는 화방재가 태백산과 함백산을 가른다.
태백산의 철쭉 감상하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여러 번 시도했으나
매번 어긋나기만 했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와 무관하게 오른 함백산에서 연분홍 왕철쭉
축제를 벌이고 있다 할까.
나홀로 꽃축제가 벌어진 셈이다.
좀 낮은 안부라 세찬 바람에 시달리지 않아서 인지 우람하게 자란
나무들에 함빡 피어있는 탐스런 꽃들을 혼자 감상하자니 미안하고
아쉬웠다.
재들의 운명, 격세지감을 느낀다
최장 터널 자리를 4.600m의 죽령에게 양보했지만 열차 터널로는
여전히 1위인 4.505m 정암터널 위임을 느끼며 오른 은대봉에서
지척인 금대봉에게 잠간만 기다리라는 손짓 한 번 하고 두문동재
(싸리재)에 내려 섰다.
붐비던 재마루 마고할미탑 앞 주차장이 썰렁했다.
마침 사람을 가득 태운 소형 승합차 한 대가 올라왔다.
산나물 채취하는 분들인 듯한 그들은 목이 타는지 잔득 싣고 온
먹거리 중에서 우선 수박을 꺼내 먹다가 내게도 한 조각 주었다.
하우스 재배일 텐데 냉장이 잘 된데다 당도가 어찌나 높은지 한
입에 삼켜버렸더니 또 한 조각을 주었다.
문득 식중독으로 고생하던 차갓재 ~ 황장산 구간에서 얻어 먹은
참외가 생각났다. (17회 참조)
그 때처럼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내가 이제껏 먹은 수박중
가장 달고 시원한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주는 대로 다 받아 먹었을 것인데 그 것으로 끝이어서 아쉬웠다.
위 / 두문동재
아래 / 마고할미탑
1.418m 대덕산 금대봉의 산불감시초소 역시 빈 집.
'양강발원봉'이라는 푯말이 말해주듯 쑤아밭령 왼 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한강 발원지 검용소에 이르고 오른 쪽으로는 낙동강
발원의 황지가 있는 태백으로 내려가게 된다.
일명 천의봉인 매봉산은 정상부 일부를 제외하면 서북쪽은 모두
고냉지 채소밭이다.
지나온 비단봉 아래에서 피재 바로 옆까지.
그러나 비단봉에서 되돌아 보는, 밟고 온 함백산과 금대봉은
장대했으며 매봉산에서 바라볼 때는 마치 P턴 한 것처럼 다시
지근 거리로 나타나는 것이 요술을 부리는 듯 했다.
두문동재도 터널 개통 이후의 다른 많은 재들과 다를 바 없다.
정선 고한과 태백시를 넘나드는데 유일했던 1.268m 이 고개는
양면 공격을 받은 꼴이다.
터널의 개통과 화방재와 고한 간(만항재)의 다목적 지방도로의
개설로 아사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헤일 수 없이 많은 재들 중에 더러는 다시 터널을 뚤거나 절개지
위로 통로를 조성했으며 앞으로도 그리 할 것으로 예견된다.
다소 더디더라도 처음부터 터널로 시작했더라면 자연 훼손을
피하고 비용도 절감하는 이중 효과를 볼 수 있었으련만....
이 두문동재의 경우만 해도 구불구불 험한 비포장 도로의 확장과
포장에 막대한 비용과 세월을 바쳤건만 지금은 거의 무용지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당시에는 우리의 기술과 국가 재정이 뒷받침 되지 못했으니까.
요즈음이라면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소위 SOC(Social
Overhead Capital) 투자가 활발하며 당연히 절개보다 훨씬
용이한 터널공법을 택할 것임이 틀림 없는 국력으로 격상되었다
하겠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그런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백두대간 보전회를 비롯하여 수 많은 환경단체와 종주자들이
절개지에 대해서는 융단 폭격하듯 질타하면서도 대간 곳곳에
드넓게 파헤쳐진 광활한 고냉지 채소밭들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대간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도 잘
느낄 수 있다"고 해 대간의 기여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도로 개설이 채소밭 개간에 뒤진다는 의미인가?
경제논리로 접근해도 그렇다.
지역경제에 기여 운운하겠지만 일부 특정인의 이해에 한정된
채소밭이 불특정 다수의 이익에 직결되며 국가의 동맥인 도로
보다 더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요 불급한 도로 개설을 위해 마구 절개한 곳이 있다고 하나
무분별하게 파헤쳐 대간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채소밭들의
피해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매봉산도 예외가 아니다
대간 주능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전에 은대봉 아래에서 만난 젊은 이가 채소밭을 통과하는데
1시간을 허비하며 죽도록 고생했다는 말이 실감났다.
밝은 낮 보송보송한 흙을 밟고 가로지르는데도 수월찮았는데
칠흙 밤에 비에 젖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흙을 털어내며
길을 찾느라 고생했다는 그의 말이.
마룻금 정도라도 남겨 놓을 수 마저 없었을까.
게다가 기독교 수도원인 예수원은 자기네 목장지역이라며
아예 철조망으로 막아버렸다.
정맥들의 사정은 더욱 참담하다.
골프장, 공원묘지, 아파트, 공장 등등...
절개지를 비판하는 수 많은 목소리와 필봉들은 다 어디 갔나?
왜 눈 감고 귀막고 입 닫고 있는 걸까?
그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사실이다.
더구나 지난 해 '백두대간보호법'이 제정되자마자 대간 마룻금에
인접한 토착민들의 거센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
시행되기도 전에 개정해야 할 정도로 허술하고 사려깊지 못한
이 법이 장차 저지를 행패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누더기 법이 되거나 유명무실할 운명일 것이고.
우리에게 백두대간은 무엇이며 우리는 백두대간에게 어떤 존재
이기에 이토록 핏발을 세우는 것일까.
우리 민족의 정서적 고향이며 자연과 자원의 보고임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혹여 백두대간을 위한 백두대간을 만들까 무려되어서다.
본말이 전도되는 우(愚)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
삼수령 有感
아홉시간 반을 강행했음에도 마감하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라는
느낌이 삼수령을 박차고 전진을 계속하게 했다.
항상 그러하듯 오후 4시 이후에는 가속이 붙는다.
노루메기 이후 그다지 심하지 않은 오르내림을 십여 차례 한 후
오후 6시, 알맞은 시각에 비포장 도로 위에 내려 섰다.
건의령, 일명 한의령이다.
삼수령을 넘어 계속 나란히를 한 31번 국도와 만났다.
자주 왕래하던 예수원이 지척인 상사미 마을이다.
hitch-hike를 허락한 청년은 자기의 목적지 당골을 두고 계속
달려 나를 혈리골쉼터에 내려 놓는 호의 + A를 베풀었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개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 곳 삼수령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 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 밖에 없는
빗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삼수령 만이 전해주고 있다.
삼수령 조형물에 쓰여진 '빗물의 운명'이다.
수 많은 난리를 겪으며 생활 또한 빈한하기 그지 없던 시절
운명처럼 안고 가슴 아프게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이 워낙
많아서 일까.
애절한 느낌이게 하는 것이...
삼수령 표지석과 피재 입간판
예수원과 혈리골쉼터의 김영규
예전에 삼척에서 피난 넘어온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해발 920m 피재가 바로 삼수령이다.
나는 애절한 전설의 이 재를 수 없이 많이 넘었다.
피재 이후로는 형편 없는 비포장 도로였던 때다.
삼척시 하장면 하사미 마을의 예수원에 가느라 그랬다.
1965년에 중국태생 미국인 성공회 신부 대천덕(R.A. Torrey)이
세운 수도원(Abbey)이다.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기면 가서 명상의 집(Meditation Room)
십자가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주로 밤에 넘었다가 아침에 되넘어 왔다
예수원과 대천덕 신부
초근목피도 어려웠던 초기의 예수원,
창립 기념일에는 참담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 바다를 이뤘다.
이런 간난을 극복하며 "노동은 기도다"를 실천한 그 때의 구성원들은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고 어느 땐가 재정의 여유가 감지되면서 부터
냉랭한 분위기로 변해가더니 백두대간 마룻금 까지 자기네 꺼라며
철조망으로 차단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수시로 드나들던 그 곳에 어느 날 김훈 부부와 넷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변질되어 버린 것을 확인하고 그 밤으로 삼수령을
도로 넘음으로서 인연을 맺게 된 곳이 혈리골쉼터다.
어느 덧 8년 전의 일이다.
십 수년 이상 묵상하고 기도하던 곳, 마음이 어려울 때면 찾아가던
그 곳을 바로 곁에 두고 멀리 혈리골쉼터를 향하며 생각했다.
내게 혈리골쉼터는 어떤 곳이기에 여기 만도 못한 예수원으로
전락되고 말았단 말인가.
나는 지금 예수 떠나버린 예수원의 가식과 허위 보다 진솔한
사람들의 순박한 정을 찾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혈리골쉼터의 김영규와 나
김영규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이고 무엇인가.
대간과 정맥을 타느라 소홀한 기간을 제하고 6년여 동안 북한산
다음으로 많이 태백산에 오른 것은 산이 좋아서 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김영규네가 좋아서 였다는 표현이 정답일 것이다.
혈리골쉼터는 글자 그대로 나의 쉼터가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이 지역 진입과 탈출을
도맡아 해결했다.
최근엔 건강과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해 운영을 남에게 일임한
상태지만 그들 내외의 지극한 정성은 변할 줄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