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왕이 어디 있으랴마는 세조만큼 흥미진진하고, 당대 및 후대의 평가가 뚜렷하게 나뉘는 왕도 드물다. 가까이 그를 도왔던 측근 한명회까지 포함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세조와 한명회 등은 당시 조선의 정치가 원칙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면, 왕위에 오르거나 출세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적장자였던 단종의 즉위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으며, 한명회는 한낱 경덕궁*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인가? 정상적인 시스템을 멈추게 했던 큰 ’변수’가 있었다는 말이고, 세조는 그 변수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냈던 인물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두 가지 진실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의 능이라서 그랬을까. 대부분의 왕릉에서 받는 현장감은 ’포근함’인데, 정자각부터 약간의 비탈 위에 자리 잡은 광릉에서는 당당함을 넘는 권위와 카리스마를 느끼게 된다. 또 하늘마저 가리는 아름드리나무가 호위하는 광릉으로 향하는 길과 능 위에 섰을 때 시야를 더럽히는 노이즈가 없는 전망은 광릉에 신비로움과 왕의 위엄을 더 한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고명대신** 김종서(1390~1453)와 황보인(?~1453) 및 그와 연결되었던 동생 안평대군(1418~1453) 등을 제거하고, 한순간에 조선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은 사건이다. 단종실록에 의하면, 당초 역모를 꾀한 무리는 김종서 일당이었다.
1453년(단종 1) 9월 25일, 수양대군에게 첩보가 들어온다. 보고자는 수양의 참모 권람(權擥, 1416~1465). 정보원은 그 집의 종인 ’계수’와 그의 갖바치 친구이다.
(갖바치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황보인)이 김정승(김종서) 등 여러 재상과 더불어 모여서 의논하여, 장차 임금(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 수양대군의 동생)을 세워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는 10월 12일과 22일로 기한을 정하였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나왔다.
또 말하기를,
"안평대군이 우리 주인에게 묻기를, ’어떤 꾀로 군사를 많이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우리 주인이 말하기를 (중략) 비밀히 황해도, 충청도의 군사를 배로 싣고 와서 마포에 대면, 안평대군께서 새벽을 타서 거느리고 들어와…… "
어디서, 어떻게도 나왔다.
그 현실 가능성을 차치하고, 역모 보고용으로는 완벽한 시나리오다. ’Why?’만 빠졌는데, 갖바치의 증언에서 그 부분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면, 그 첩보 자체가 의심을 받지 않았을까?
역적모의를 보고 받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양의 말대 로 "(왕께) 계청하여 주살誅殺(죄를 물어 죽임)하는 것이 상上策이나" 수양은 ’선조치 후보고’를 택한다. 그 선조치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최초 보고를 받은 지 보름만인 10월 10일, 드디어 수양은 놀라운 결단과 리더십으로 사태를 정면 돌파하고, 수하들을 설득하여 김종서를 위시한 간당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왕실을 지켰다. 이것이 세조 측의 논리다. 역사가 기록하는 계유정난이다.
문제는 ’단종실록의 기록을 과연 어디까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사료 비판이다. 태종의 1차 왕자의 난 때와 같은 깊고 진한 의문이 반복된다. 명색이 역모를 준비한다는 김종서 일당이 그토록 허술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의문은 출발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더 집착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 실록 말고 계유정난 당일을 기록한 다른 기록이 없으니, 더 캐고 싶어도 캘 수 없다.
사료의 진위가 어떻든 간에 계유정난 당시, 선왕 문종과 세종의 특별한 부탁을 받은 김종서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수양대군에게는 야심이 있었다는 두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호음지군 好飮之君
리더로서 세조의 판단과 행동양식에 주목한다. 일도양단의 리더십은 계유정난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또한 세조는 사육신과 같은 왕권 도전세력에 대한 대응도 일관적이었다. 바로 물리력을 수반한 철저한 배제였다. 죽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와 같은 강경책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호음지벽(好飮之癖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습관)’ 이는 세조가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했던 습관이자 본인의 정치스타일이었다. 실제로 세조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 엄밀히 말하면 술 자체를 좋아한 애주가 愛酒家라기보다 관계유지를 위해 술자리를 이용한 ’용주가 用酒家’라고나 할까?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로 검색을 했을 때, 세조가 467회로 1위이고, 2위는 그의 할아버지 태종으로 167회이다. 다시 ’설작(設酌 술자리를 베풀다)’으로 검색했더니, 역시 세조가 433회로 가장 많았고 2위는 아버지 세종으로 49회에 지나지 않았다. 삼대三代가 술에 흥건하다.
세조가 술자리를 베풀었던 대상 역시 전방위적이었다.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공신들은 물론이고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줄 종친과 고위관료(재추宰樞), 비서진(승지承旨)까지 설작設酌의 은혜가 미쳤다.
상참(常參 매일 신하들이 편전에서 왕을 뵙고 정사를 보고하던 일)을 받았다.
운성위 박종우, 영천군 윤사로, 화천군 권공, 의창군 이공, 익현군 이관, 하성위 정현조, 도승지 박원형, 좌승지 구치관, 우승지 한명회, 우부승지 조석문, 동부승지 윤자운, 강원도 관찰사 김광수 등이 입시하였는데,
박원형과 구치관에게 명하여 술을 돌리게 하고, 박종우에게 이르기를,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게 비할 바가 아니므로, 내 어제 중궁(中宮 정희왕후)과 함께 사정전에 앉아 인견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하였다.
- 세조 2년(1456) 5월 28일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고는, 이내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술에 취하여 영의정 정인지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대사헌 김순에게 명하여 마주 서서 춤추게 하였다.
(중략) 정인지가 아뢰기를,
"문신(文臣)이 되어가지고 주역(周易)을 알지 못하니, 마땅히 술로써 이를 벌주어야겠습니다."하였다.
(중략) 정인지가 머리를 들고 크게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중략) 임금이 또한 크게 웃었다. 정인지가 술에 취하여 부축을 받고 나갔다.
- 세조 3년(1457) 4월 9일
무엇을 위한 술자리였는가
술자리에 대한 이와 같은 기록이 세조실록에 한 두 번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때와 장소, 대상에 구애 없이 술자리를 베풀었기에 그 소소한 기록을 이루 다 인용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세조 재위 14년 간 모두 467회에 달하는 술자리가 확인된다.
세조의 이런 과도한 술자리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듯 보이기 도 한다. 그러나 세조의 입장에서 꼼꼼히 뜯어보면 대상을 향한 ’애정의 표현’과 ’관계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술자리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궁색한 그 목적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수양대군의 명분 없는 쿠데타와 즉위 또한 또렷해진다.
설작의 제 1목표가 관계유지와 ’내 사람 챙기기’라면, 이를 위해 노력하는 세조의 모습에서 후덕함을 넘어 애처로움마저 느낀다.
구치관이 … 문안하니, 이르기를,
"내가 빈사(賓死)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났으나 한 사람도 문안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제 경이 오니 내가 매우 기쁘다. 내가 생각하기를, ’경의 집의 술을 마신다면 내 병이 곧 낫겠다.’고 하였다."하니, …
명하여 구치관의 집에 가서 술을 가져 와서 술을 올리게 하고, 구치관에게 표피 아다개(豹皮阿多介) 1벌[事]과 소주 5병, 생록(生鹿) 1구(口)를 내려 주었다.
- 세조 8년(1462) 12월 23일(계미)
부작용은 없었는가
설작의 부작용은 자못 심각했다. 신하 중에는 과음으로 술병이 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세조 스스로 생각해도 술의 부작용이 과하다 싶었는지 하루는 신숙주에게 다음과 같이 상의한다.
"공신 등으로 과음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으니, 이계전, 윤암 같은 이가 그러하였다. 또 화천군 권공, 계양군 이증, 영중추 원사 홍달손 등은 비록 죽지는 않았더라도 또한 이미 파리해졌으니****, 이것은 크게 옳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한결같이 금하여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한결같이 금지하는 것은 어려우니, 과음(過飮)하지 말게 함이 편하겠습니다."하였다.
- 세조 8년(1462) 3월 27일(임술)
’설작 設酌’으로 상징되는 세조의 적극적인 정치적 제스처는 공포정치에 가까웠던 그의 집권 초기, 얼어있던 정국을 녹이고, 군왕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를 상쇄하며, 공신일당의 내부 결속을 다지는 등의 효과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공公의 리더십 차원에서 봤을 때, 조직을 정상적인 시스템과 원칙으로 운영하지 못하고, 일종의 편법에 기대어 운영했던 것이 과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목숨 내놓고 잡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설작 정치는 더 큰 목표를 향해 좀 더 빠르고 쉽게 가는 길’이라고 강변한다면야 달리 대구할 말은 없다.
세조는 또한 공신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러나 공신의 남발과 지나친 포상과 보상은 일부 세력에게 권력이 쏠리고, 그것을 그들 맘대로 사용하게 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안타깝게도 이는 그가 존경해마지 않았을 그의 롤모델 role model 태종과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下편에 계속됨)
註
* 경덕궁敬德宮 :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개성의 사저. 조선 건국 후 ’궁宮’으로 격이 올랐다.
** 고명대신顧命大臣 : 선왕先王이 승하 전에 국가의 대사, 즉 후계, 선정 당부 등을 부탁 받은 대신
*** 파리하다 :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글 = 이병유
한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학농민혁명 문화탐방], 조선왕릉가이드북 [왕에게 가다]를 냈다. 현재 (주)지오마케팅 비틀맵에서 역사와 지도, 여행에 관한 책을 기획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