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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여행
11월 12일 오후 김해공항 국내선 청사 출구에서 아들이 나오기만 기다리는 나는 내심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지난 16년의 긴 세월들이 스쳐 지나간다.
지나간 세월 다시 돼 돌릴 수만 있다면, 있다면,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그 해 우리 가정은 너무나 행복 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아내와 결혼하여 딸아이 하나를 두고 매일 매일이 꿈같은 날들 뭐 하나 부러 울게 없었던 행복하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은 매일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아주 평범한 가정 이였다.
내 아내는 나의 첫 사랑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교내 축제 때 만나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닐 정도로 주위에선 부러움을 샀던 커플 이였다. 내가 학군단인 관계로 자주 데이트를 못 했지만 언제나 보고 싶은 가슴깊이 사랑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임관 후 85년 결혼을 했고 다음해 둘을 쏙 빼 닮은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그 리고 1년이 흘러 이제 두 돌이 지난 딸아이의 재롱을 보노라면 하루가 짧을 정도로 행복했던 우리 가정은 그 해 가을 마지막 날을 몇 칠 앞두고 있는 11월 24일 산산 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곤 그 해 내겐 남겨진 딸아이와 아들 하나가 더 생겼다. 딸아이보다 두 살이 많았고 똘똘하고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 이렇게 나와 아들하나 딸 하나가 16년 세월을 아 응 다 응 싸우며 흘러왔던 것이다.
김해공항 출구 아들이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부 이 자를 보이며 성큼성큼 다 가 온 다. 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아들을 덥석 껴 않았다.
어느새 나보다 커버린 아들 녀석 “첫 마디, 아 부지 밥 챙겨 묵었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옆자리에 앉은 아들 녀석을 흘낏흘낏 처다 보니 아들 녀석 아버지 와! 카는 데,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한다.
나는 얼른 정색을 하며 아니야, 오랜만에 아들 얼굴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여 여행갈 준비를 대충 하고 저녁에 아들하고 같이 찜 질 방에 가기로 하고 회사로 가서 대충 업무확인하고 매장 들러보고 초 목 원 확인하고 저녁 11시가 들어오니 아들 녀석 아직 안 들어 왔다 아들 녀석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니 친구들 만나고 들어오고 있단다.
정말 오랜만이다
아들 녀석하고 찜 질 방에 온 것이 딸아이가 빠졌지만 그래도 남자들만 오는 것 두 괜 찬을 것 같다 사우나 실에서 대충 샤워를 하고 찜 질 방에서 그렇게 아들과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시 잠을 청하곤 13일 오전 지리산으로 향했다.
두어 시간 쌍계사입구에 도착하여 차를 주차하고 늘 가는 부산식당으로 가서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 한 되 부침개 한 접시를 시켜 먹고 휴식을 취한 뒤 쌍계사 절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늘 사찰을 지키고 있는 금송이 반겨준다.
나는 아들에게 "민아 이 금 송이 너와 나이가 비슷할 꺼 야, 너 가 어려서 왔을 때 너 키만 했는데 이제 너 키보다 서너 배는 되는 구나 한참을 금 송 앞에서 이야기를 하다 경내로 들어가 아들과 부처님께 합장을 하고 목례를 했다.
아들이 교회를 다녀 절은 하지 않기로 했다.
목례를 하면서 잠시 기도해본다.
오늘 이 아이에게 나는 출생의 비밀과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도와 주 십 시요 도와 주 십 시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해 본다. 이렇게 나는 마음을 굳게 결심을 하면서 아들 손을 잠시 힘껏 잡아본다.
이야기 하다.
11월 13일 저녁
섬진강 변 조그마한 식당
나는 매운탕을 시켜 놓고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아들에게 잔을 주며 술을 부어주었다.
아들에게 입대전날 술 한 잔을 부어주고 이번이 두 번 째주는 술잔이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 나 또한 아들에게 술을 가르쳐 주었다.
잠시 아들 녀석 군대 이야길 한 다 푸념에 가깝다 그래도 자부심을 가지고 할 만하단다.
유독 대대장이 아들 녀석 중대만 독하게 훈련시킨다고 푸념 아닌 푸념 그 덕에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해서 기분이 좋단다.
속으로 나는 아들아 미안하다 다 너를 위해서야 너희들을 위해
사실 나는 아들이 자대 배치 받고 나서 대대장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조금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라고 맨 앞에 세워 훈련을 시키라고
몇 년 전인가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으로 기억 된다 나는 회사에서 작은 각목으로 몽둥이를 만들어 학교를 방문했다. 아들의 담임이 한문선생 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몽둥이를 만들어 갓 다 주며 매로 다스리라 했다.
그때 한참 방송에서는 모 여상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아이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을 폭행하여 문제가 되는 그런 때다. 아들의 학교에서는 학부모가 몽둥이를 만들어 가져왔다는 소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매사에 아이들에게 철 처 히 특히 아들에게 혹독하리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훗날 일어날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바로 오늘처럼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잠시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들 녀석 "아 부지 무신 고민 있나, 한다. "그래 고민 있다. 우 짤 레, 무신 고민 무신 고민이고 말해바라, 아들 녀석 다그친다.
“오늘은 너에게 할말이 있다, 가자 꾸나, 아들과 일어나 가까운 섬진강 변에 있는 미리 내 호텔로 들어가 아이에게 먼저 샤워하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어제먼저 실어 논 작은 밤색의 007 가방이 있었다. 바로 16년간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가방 가방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만감이 교차 한다. 눈물이 난다. 차 트렁크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에서 벨이 울 린 다 아들이다. “아 부지 뭐 하 노, 일찍 주무시란다.
마음을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올라가 아들에게 이리 와보렴 하고 불러 앞에 앉히곤 "이제 부 터 아버지가 하는 말 잘 듯 거 라, 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다. 입양 된 것을 나는 입양 프로그램을 통하여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입양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자연스럽게
입양되던 해 아이나이 벌써 네 살 숨길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입양되었는지는 16년 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음 아내를 만난 것부터 시작해 아들에게 이야기의 끈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16년 전11월 24일 목요일 엄마는 여느 때와 같이 시장을 갓 단다.
시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고 사고를 낸 차에도 어른 두 분이 계셨고 아이 하나가 있었다. 두 분은 엄마와 같이 현장에서 돌아가셨고, 아이는 다 행이 뒤 자석에 타고 있어서 팔이 부러지고 조금한 찰과상 만 입은 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 아이가 바로 너야,
아들이 울먹이며 "아버지 무슨 말인데, 무슨 말인데, 라며 나를 쳐다보며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 숙이고 울기만 한다. 아들과 나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렸을까? 나는 울고 있는 아들을 도닥거리며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아들의 부모 사진과 가족사진 사망 진단서 사본 옛 호적등본이 들어있다.
아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16년 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아들에게 처음으로 친부모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16년만의 재회 사진을 든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이제 너 가 어른이 되었기에 그리고 너 가 가장 정신적으로 강해 있을 때 이야기하노라고 말하였다.
나는 아들을 믿는다. 건강한 정신 강한 정신을 가진 아이기에 이번 일로 흐트러지진 않을거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들에게 "너를, 입양 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너는 나의 아들이며 내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귀한 내 소중한 희망이라고 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너를 믿는 다,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가고 새벽이 오고 있다. 섬진강 강가의 바람이 차갑게 볼을 스쳐온다.
저녁녘에 사두었던 담배 하나를 물었다. 속까지 파고드는 그리움에 연기를 길게 뿜었다
당신보고 있으면, 나 좀 도 와 주오 도와주오.
16년만의 만남
11월 14일
어둠이 걷혀 가는 새벽녘 제법 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섬진강 새벽 강바람이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참을 걸었을까 아이 걱정도 되고 해서 호텔로 돌아오니 아들은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어있다.
눈이 퉁퉁 부은걸 보니 한참을 울었나보다
잠자는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아이를 쳐다보니 10 여 년 전에 일이 떠오른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퇴근을 하여 집에 돌아오니, 집에 원 아이또래의 꼬마와 여자 분이 계셨고 그 여자 분은 날 보자마자, 쌍소리를 하며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우리아이를 이리 패났느냐며 흥분을 하시며 자기 아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아이의 이마엔 시퍼런 멍이 있었고 입에서는 피가 보였다.
나는 일단 사과를 하며,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며, 너 가 때렸느냐, 라고 물으니 아이는 그랬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아이와 여자 분에게 거듭 사과를 드리고 치료비를 드려 겨우 돌려보내고,
아이를 불러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이미 아이는 겁에 질려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 아이가 아들에게 학예회 때 엄마도 없는 아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래서 하교 길에 돌로 때려 버렸다고,
그 날 아들 아마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죽을 만큼 많이 맞았다. 아이는 자기 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방바닥에 업 드려 자고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지쳐 자고 있었다.
문득, 나의 어릴 적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국민 학교 5학년 때인가, 뒷산에 있는 고구마 밭을 동네 꼬마들을 다 데리고 가 흔히 말하는 서리라는 것을 했는데, 그날 저녁 고구마 밭주인이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그 날,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께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다 .
그때 울다 지쳐 잠들어 있는 나를 나의 아버지는 안 티 푸 라 민을 들고 오셔서 피멍이 들은 내 종아리를 문지르시며 “잘 했다, 어릴 적에는 다, 그런 거야 그래도 아버지가 너를 혼낸 것은 그것도 하나의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때 다리를 문질러 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에 잠이 깼지만 일어 날수가 없었다.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웠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옛 생각에 나도 약통에서 맨 소래 담을 꺼내와 아들의 종아리를 문질러 주며 잘 했다. 그래도 남자는 함부로 무기를 드는 게 아니야. 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아마 아들도 그때 잠에서 깨어 눈을 감고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아들을 보채 평 사리로 차를 돌렸다. 소설 토지 속에 나오는 최 부자 집 동네로 가기 위해 달리니 하동의 차 밭 들이 스쳐 지나간다.
오르막길을 약간 오르니 최 부자 집이 눈앞에 보인다.
얼마 전에 새로 수리를 해서인지 크고 깨끗해 보였다. 주위의 개인 도자기 작품 실들로 둘러보았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묵묵히 말이 없다. 애써 말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후 5시30분을 알려 준다.
아이에게 갈 곳이 있다고 태우고는 곧장 진주로 향했다. 차안에서 아들에게 잘 견디자고, 이겨내자고,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 가는 곳은 진주 명석 면으로 너의 고향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지금은 고모 한 분이 살아 계시고 오늘 너를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다고, 말을 했다.
아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그 져 스쳐 지나가는 창 밖만 처다 보면서
6시30분경 차는 명석 면에 도착 곧장 만나기로 한 고모댁으로 향했다. 고모댁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받고 진주시내서 사시는 고모식구들도 와 있었다.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아들에게 인사를 시키나 아들이 받아들이기가 힘든 모양이다.
고모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내 새끼 내 새끼 하시며 울면서 아들의 손을 잡으려 하지만 아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자 고모는 땅바닥에 주 져 않으시며 절규를 한다.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를 한다.
내 어찌 저 분의 고통을 모를까.
어색한 만남은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여 아들에게 쉬라하고 내일은 산소에 가자고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대충 샤워하고 컴퓨터 앞에 않자 비망록을 쓰고 아내에게 시 두 편을 올렸다. 그리고 내일 가겠노라고 당신의 선물과.
용서
15일 아침 일찍 서둘렀다. 먼저 아들의 부모 산소를 먼저 가기로 했다. 부산 공원묘지로 차를 몰았다. 10시경 공원묘지에 도착하여 비석번호를 확인하고, 이름을 확인했다. 가슴속에 내재 되어있던 울컥함이 쏟아 질 것 같았다.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 까?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용서하지 않기로 용서 할 수 없다고 다짐을 하고 다짐을 했지만 나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왔다.
저 많 치 말 없이 서있는 아들을 불러 너 부모님이다. 라고 말을 하며 소주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향도 피웠다.
비석 앞에 앉자 목례를 하면서 속으로 울 부 지었다.
당신들 보십시요, 당신들 보십시요, 당신들의 아들입니다. 아들입니다. 16년 만에 만나는 당신들의 아들입니다.
나는 보여주고 싶었다. 군복 입은 저 당당한 아들의 모습을 이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제 20살 어른이 된 아들을 위해 당신들을 용서한다고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하기로 하였습니다. 라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산소를
아이에게 잔을 올 리라 했다.
잔을 들고 앉은 아이에게 술을 부어 줬다. 나 왔다고 아들 왔다고 인사하라 했다.
아이는 말없이 그렇게 술잔을 들고 울기만 한다. 자리를 피했다. 아들에게 부모님과 이야기하라고
멀리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앉자 흐느끼고 있다. 그래 실컷 울어라 그리고 풀 자 꾸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이를 달래 일으켜 세우고 아내에게 가기 위해 마지막 인사를 두 분에게 했다.
이제 매년 아들을 보내겠노라고 이제 매년 아들이 지어준 따듯한 밥상을 받아보시라고 이제 편안히 잠드시라고 그리고 용서한다고,
아들과 다시 김해 공원 묘원으로 향했다. 멀리 아내의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원통해 걸을 수가 없다.
한참만에야 아내의 무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비석을 가슴에 안았다.
그 져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엉엉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저만치 있는 아들도 울기만 한다.
아내에게 소주한잔을 따라 주었다. 매년 아이들과 같이 왔지만 오늘은 왜 이리 복 바쳐 울음이 나는지 아내에게 자랑했다. 당신 아들 왔다고 자랑스럽지 라고 아내의 무덤에 기대어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불렀다.
찔레꽃 피는 .........
내가 태어나 처음 사랑한 사람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 행여나 나타날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뛰어나가던 미치도록 그립던 사람 추운 겨울 문밖 가로등 아래서 긴 밤 올수도 없는 사람을 기다리던 그 사람 그 사람이 한 줌의 흙이 되어 여기에 이렇게 16년을 누워 있다.
아내에게 말해 주었다. 이제 그들을 용서했다고 당신도 이제 편히 잠들라고
사랑
11월 16일 아침부터 요란스럽다.
왈가닥 딸 순 이가 같이 여행 간다고 내려와 아침부터 온 집안을 난리 친다. 아들 녀석하고 조용히 갈려고 했는데 아들 녀석이 어제저녁 전화를 한 모양이다.
이 가시나 내 뜸 내방으로 들어오더니 "아빠 너무 한다, 있나 우 째 오빠하고만 여행 갈려고 하는데 딸 램 이는 자식 아이가, 하고. 따지기 시작하는데 한마디로 무 대 보다.
하긴 동네에서 여자 깡패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어디 시집이나 갈 런지 쯧 쯧쯧
어쩔 수 없이 여행 경비는 더 늘어 날 것 같고 오붓한 부자간의 시간들도 적어 질 것 같고 밑져봐야 본전 딸 순아~~하고 불러 너 거 앉자봐라, 정색을 하고 "너 좀 빠져 주면 안 되나 하니, 조건이 있단다. 뭐냐고 물으니 호적에서 파 달란다. 그럼 안간 다고,
어느덧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제주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 받고 있던 전용 택시 기사 형님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우 째 식구들이 다 왔느냐며 묻는다. 그렇게 됐습니다. 라고 답한 뒤 남 제주 상 모 리 로 출발했다.
얼마 전 준비해 놓은 촌집이다. 철모르는 딸 순이 는 지 세상 만났다고 창밖으로 고개 내밀고 온 난리 법석을 떨고 아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제주의 풍경만 쳐다본다.
상 모리 촌집에 대충 짐을 풀고 아이들과 송악산으로 올랐다. 이미 아이들도 여러 차례 온 적이 있어 분위기 파악은 하는 것 같다. 절벽 위 난간에 서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얀 포말이 일어나는 가을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오고 있다.
아내와 같이 바라보던 제주바다의 수평선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들과 조금은 어색한 제주에서의 여행은 점차 아들의 예전 모습을 돼 찾아 갖고, 조금 씩,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남몰래 가슴 알이 하던 일들이 조금씩 사라져 갓 다.
19일 4일간 아이들과의 제주여행을 마무리하고 금요일 오후 혼자 송악산에 올랐다. 매번 그리울때 송악산을 와도 송악산은 변하지 않는데 20대 후반의 나이에 온 것이 이제 중년의 나이에 오늘 이렇게 또 섰다.
처음엔 마냥 그립고, 사무치는 마음에 그리고, 세월이 약이라고 잊혀 지겠지, 하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것이, 이제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결코 흔하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힘든 유혹과 절망감 외로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마지막 선물 내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들과 딸이 있었기에, 그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아내와의 사랑인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아들의 몸에 나와 아내의 피가 흐르지 않지만 16년 성인이 되기까지 노심초사 길러온 나의 아들은 나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 행복을 빼앗아간 그분들의 아이로 나는 다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아내에게 송 악 산에서 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당신 생각 날 때 또 오겠다며 그러나 못 올지도 모른다고, 당신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겠다고,
21일 저녁 부산 구포역 귀대 날짜가 월요 일 이라 아들을 보내야 했다.
입장권을 사서 탑승 장까지 따라 들어갔다.
군복의 옷깃을 만져주며 건강 하라고 했다.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애써 참으며 아들을 꼭 껴안았다.
한참을 꼭 안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우리 아들 사랑한다고,
멀리서 열차가 들어온다. 아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처다 보았다 입술을 깨물고 울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열차가 서고 막 열차에 오르던 아들이 편지 봉투를 하나 얼른 주면서 아빠 사랑한다고 말한다,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열차가 멀리 사라져 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열차의 철커덩거리는 소리가 너무 정겹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이 준 편지를 뜯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편지와 돈 5만원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빠께
아빠 많이 힘 들 제 나도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아빠랑 이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존대 말로 쓰는 것 보다 그냥 평소대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쓴다.
아빠 한때는 아빠를 무척 원망을 많이 했다, 다른 친구들의 집보다 너무 엄하신 아빠를 보고 어린 마음에 나를 미워서 그러는 구나, 라고 생각에 아빠가 미웠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가면서 조금씩 아빠를 이해하고 어떤 땐 아빠가 너무 불쌍해 많이 울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챙겨주고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고 그런 아빠가 어릴 땐 그 져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 인줄 알았는데 철이 들면서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알았다. 그러나 표현은 못했다.
아빠 일에 너무 시달리지 말고 적당히 했으면 한다.
건강도 챙겨가면서 해라,
요 몇 칠 무척 혼란스러웠다.
첫 휴가라서 아빠하고 놀 아 줄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 아빠 고맙다. 늘 커 오면서 알고 싶던 일들인데, 아빠가 이렇게 해 줄줄은 몰랐다. 조금은 당황했고, 힘들었지만, 아빠보다야 힘들었겠나. 아빠 마음 다 알고 있다.
아빠 나 몇 칠 몰래 많이 울었다.
처 음보는 사진들을 보고 또 아빠 이야기를 듣고,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아빠밖에 없다. 어제 저녁 아빠가 준 사진이랑 서류 모두 태웠다.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은 아빠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이해해 줬으면 한다.
아빠 이제 내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생각하는 예전의 어린애가 아니야, 아빠처럼 늘 당당히 모든 일에 자신 있는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 하께 아빠도 이젠 아빠의 행복을 찾았으면 한다.
몇 년 전 아빠 방에 들어 갖다가 엄마 사진첩을 올려놓고 주무시던 아빠의 모습 그때 왜 그리 아빠가 엄마를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지 그때 알았다. 엄마 제사 때 제사상과 국화 꽃 한 다 발을 같이 놓는 이유도 그때 알았다.
앞으로 1년6개월 열심히 군복무 하면서 결코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는 아들이 될 게 아빠한테 이등병 월급 받은 것 모아 밥 사줄라 했는데 못 했다.
5만원 작지만 맛있는 것 사먹었음 한다.
그라고 아빠한테 처음으로 말한다.
아빠 많이 사랑한다.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겐 아빠밖에 없다.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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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고 눈물이 앞을 가려 읽기가 어려울 정도로 숙연해지더군요... 세상에 이런 분도 계시네요.. 살아 있는 부처님같은 분이시네...
참..가슴을 징~하게하는 글입니다..// 나같은사람은 흉내도 못낼거 같네요..참 훌륭한분입니다..
진선인님의 사연인줄 알고 놀랐습니다... 암튼 범인으로써는 갖기 힘든 사랑이네여...
잘읽었슴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