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kill 박사의 기고문 전문 (원문과 번역문)
On Choe Pu Pyohaerok- Why I Chose It for My Doctoral Thesis
by John Meskill
Fifty years ago, when I began about a topic for a doctoral thesis on an East Asian subject, I could draw from the cornucopia of interests that I suppose most young scholars enjoy, including the achievements of the great Chinese dynasties, the distinctive cultures of Korea and Japan, and the influences common to all East Asia, such as Buddhism and trade.
In retrospect, what narrowed my search amid all the abundance and eventually led me to Pyohaerok must have been serendipity. Without being conscious of it as a characteristic trait, I had always been interested in what travellers to foreign countries in earlier times had reported about their experiences.
As a teen-ager I had chanced upon books in The Silent Traveller series of the Chinese artist Chiang Yee and delighted in the observations of a man who came from thousands of miles away and reported on such cities as Edinburgh and Boston. He may not have seen anything not already known to the natives, but he somehow saw with fresh eyes. Later, in college, when I read such books about my own country as de Toqueville's Democracy in America and Maurois' Miracle of America, I was impressed that these men from other countries could see new significance in matters that I thought I already knew.
As I began studying East Asia, the observations of foreigners interested me even more, for then their records often amounted to explorations of a new world. First my teacher, Professor L. Carrington Goodrich, put into my hands the book of Marco Polo(the A.C. Moule and Paul Pelliot translation), whose details about China transfixed me as they had others for centuries. It hardly mattered that modern scholars cast doubt on some of his statements. There could be no doubt that he had had found his way to a highly developed and lively civilization.
By then focusing on the idea of foreign accounts, I heard with special interest the news that Professor Edwin O. Reischauer at Harvard University was working on the diary of a Japanese Buddhist monk, Ennin(圓仁)who travelled to China during the Tang dynasty. When I wrote to Professor Reischauer he replied kindly and fully, describing the rewards that he found in the work-the concrete and detailed descriptions of Chinese events and practises- as well as the troubles- the need for research of the background, the peculiarities of Chinese written by a foreigner, and more. When his book was later published(Ennin's diary), I appreciated his achievement and hoped that I might take his work as a model. In the meatime I had read another work of a different kind, Japan in the Chinese Dynastic Histories, by Ryusaku Tsunoda, which showed me that even accounts admixed with travllers'tall tales could include nuggets of truth.
When the time had come to make a decision and set to work,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time narrowed the choices that I could make for research abroad. The United States and China viewed each other as enemies, and there was war in Korea. For undisturbed scholarship in East Asia, only Japan offered the appropriate conditions and resources. I was fortunate to receive a Fulbright grant for stydy there and doubly furtunate to be assigned to Kyoto University and the eminent sinologist Professor Miyazaki Ichisida(宮崎市定).
After hearing my interests{I later heard that he had consulted with Professor Makita Tairyo(牧田諦亮)}, Professor Miyazaki informed me of the existence of a diary, full of the experiences and observations of a Korean official who travelled for half a year thorugh China during the Ming dynasty. This was Pyohaerok. Professor Miyazaki introduced me to the private library that held a copy of this valuable book and arranged to have it photographed. Delighted with the opportunity, I then began the satisfying work that became my doctoral dissertation.
최부의 표해록에 대해서- 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표해록을 선정한 이유
John Thomas Meskill
(1925년생으로 Columbia Univ., Barnard College, 교수 역임)
50년 전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 테마를 생각하고 있을 때, 대부분 젊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생각되는 중국 왕조의 치적, 한국과 일본의 독특한 문화 그리고 모든 동아시아에 전반에 걸쳐 나타난 불교, 무역 등의 풍요의 뿔(번역자 주: 그리스 신화, 방대한 자료)에서 그 테마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회상해보면, 그 풍부한 자료 속에서 내 연구가 구체화되다가 결국《표해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분명 의외의 횡재였다.
표해록의 독특한 특성을 몰랐다 하더라도 나는 예전 여행가들이 기록한 외국의 견문에 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10대였을 때, 나는 우연찮게 중국의 화가였던 창이의《소리없는 여행가》시리즈 책들{번역자 주: 장이(蔣彝, 1903~1977)는 중국의 문인으로서 미술, 시, 서예에 능하였으며 1933년 해외로 망명, 가족과 떨어져 40여 년 동안 영국 미국등을 여행하면서 the Silent Traveller in London, the Silent Traveller in Edinburg, the Silent Traveller in Boston 등의 여행 기록을 남겼다}을 접하게 되었다.
수천 마일 밖에서 온 사람의 에든버러, 보스턴 등의 도시에 관한 관찰, 기록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 곳 주민들이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은 그도 목격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그는 산뜻한 눈으로 관찰하였다.
후에 대학에서 내 나라에 관해서 저술한 토크빌(Toqueville)의《미국의 민주주의》, Maurois의《미국의 기적》등과 같은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외국 출신의 이러한 분들이 내가 이미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구나라며 감명을 받았다.
동아시아 연구를 시작하면서 외국인들의 관찰에 대해 나는 한층 더 흥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들의 기록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의 스승인 캐링턴 굿리치(L. Carrington Goodrich) 교수는 A.C. Moule과 Paul Pelliot 번역본인 마르코 폴로의 책{번역자 주: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을 건네 주었다.
중국에 대한 기술은 수세기동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기술중 일부에 대해 지금 학자들이 의문을 던지는 일은 별반 중요치 않았다.
그가 고도로 발전된, 생동하는 문화를 찾아 나섰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무렵 외국기술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을 때, 하바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Edwin O. Reischauer)가 당나라때 중국에 갔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일기{번역자 주: 일승(日僧) 원인(圓仁, 796~894)의 저술로서 원 제목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로서 라이샤워 교수(1910~1990, 하바드대 교수, 주일 미국대사 역임)가 1955년 영문으로 출간} 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나는 라이샤워 교수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친절하고 구체적인 답변에서 이러한 연구에서 얻게 되는 보람-중국의 사건, 관습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술- 그리고 고생되는 점-넓은 배경지식의 필요성, 외국인의 난해한 한문 번역에 대한 관점 등등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알려줬다.
후에 그의 책(엔닌의 일기)이 출판이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그의 성과를 모델로 삼아야 겠다고 염두에 두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종류의 책, 류사쿠 쓰노다(角田柳作)의《중국 사상(史上)의 일본》을 읽게 되었는데
여행가의 과장된 이야기가 곁들여진 기술까지도 진리의 금괴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결정할 순간이 왔을 때 그 당시의 국제관계로 해외연구의 선택폭은 좁혀졌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적대시했으며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일본만이 합당한 조건과 재원을 제공하였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그곳에서 연구를 한 것은 행운이었다.
더욱이 교토대학에 가서 저명한 중국학 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시다(宮崎市定) 교수를 만나는 행운이 겹쳤다.
나의 관심사를 들은 후{후에 나는 그분이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교수하고 상의했다는 것을 들었다} 미야자키 교수는 명나라 때 한 조선인 관리가 6개월 동안 중국을 관통하였는데 그의 풍부한 견문과 관찰로 엮은 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것이 바로《표해록》이다.
미야자키 교수는 서재로 안내하여 이 귀중한 서책을 영인토록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박사학위 논문이 된 연구를 성공리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번역: 최철호, 교양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