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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스라엘 투데이 원문보기 글쓴이: 이강근
이 글은 "인물과 사상" 2005년 1월호에 기도한 글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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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풍운아, 목숨이 아홉 개나 있는 고양이, 중동 테러의 원흉, 야세르 아라파트. 지구상에서 아라파트만큼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정치인이 또 있을까?
"나는 한 손에는 권총(전쟁)을, 다른 손에는 올리브 가지(평화)를 들고 있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비정부조직인 PLO의 대표 자격으로 국제연합(UN) 정기총회에 참석한 아라파트가 유엔 연단에 올라서 한 유명한 연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아라파트와 그의 민족 팔레스타인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부한다.
"오늘날 중동에서 작은 땅 팔레스타인은 결코 작지 않다. 아라파트는 영향력 있는 세계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완의 국가의 공식 대통령도 아닌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 민족의 수반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아라파트 그리고 그의 민족 팔레스타인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너무도 모른다. 정부의 무지만큼 언론의 이해도 없다. 이제라도 우리는 중동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아야 한다. 외교는 통상적인 외교수준에 맞는 대응도 있지만, 실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코 경제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중동의 정치 현실을 적극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결국은 국익과 국민의 안전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동의 거물 아라파트
중동의 풍운아. 목숨이 아홉개나 있는 고양이. 중동테러의 원흉. 야세르 아라파트.
지구상에서 아라파트 만큼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정치인이 또 있을까?
없다.
청년 아라파트가 그이 30대인, 1958년 대 이스라엘 저항단체 ‘파타’를 창설해서 2004년 11월,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장구한 세월의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벌인 아라파트는 중동은 물론 세계 정치사의 거물이였었다. 그간 그의 대 이스라엘 저항을 통해 쏟아놓은 수백만의 언어들은 세계 유수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전달되어 방관하는 세계의 양심을 뒤흔들어 노았다.
중동의 주요 사건이 있을때마다 아라파트와 그의 민족 팔레스타인은 재조명 되었고,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각국의 언어로 수 없이 제작되어 왔다. 세계 정치 및 중동관련 학술지에는 아라파트와 팔레스탄을 분석하는 수백여편의 논문들이 실어졌다. 세계적인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 ‘Arafat’란 키워드를 쳐서 발견된 아라파트란 제목으로 출판된 단해본 만도 60여권에 이른다. 세계의 어느 정치인이 이렇 수 있었을까?
중동의 헤드라인은 아라파트에서 시작해서 아라파트로 끝난다. 중동 저편에서 일어 터져도 아라파트의 반응을 살폈고, 아라파트와 관련된 일은 일초라도 먼저 전하기 위해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의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그와 인터뷰 기회를 얻기 위해 있는 인맥을 동원했고, 인터뷰 승락이 떨어져도 마음이 내키면 불러들이는 그의 기질 때문에 며칠씩 인근에 호텔을 잡아놓고 대기해야만 했다.
아라파트 사망으로 더욱 부각된 그의 위상
아마도 아라파트의 위상은 최근 그의 사망을 깃점으로 극을 이루었을 것이다. 지난 2004년 11월, 팔레스타인 정치수반 야세르 아라파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곧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시시각각의 그의 동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은 뜨거운 취재경쟁이였다. 그가 라말라 청사를 떠나 파리에 도착해서 치료받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사망해서 그의 시신이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하는 전과정, 그의 장례식은 물론 그의 집무실이였던 무카다 한켠에 안장되는 전 과정이 Cnn bbc sky 등 세계 언론에 생중계 되었다. 특히 그렇게도 증오하고, 아라파트의 장례식에 조문단은 커녕 극악한 테러리트라고 악평을 하는 이스라엘 주요방송사들도 전 과정을 여과없이 생중계 하였다. 최대 일간지 예디옷 아하로놋은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 살아있는 사람의 장례식이라는 헤드라인을 붙였다.
오늘날 중동의 작은 땅 팔레스타인은 결코 작지 않았고, 아라파트는 중동과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그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상이다. 세계 어는 지도자가 사망한 들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보일 수 있을까. 특히 그의 나라는 서지도 못했고, 그 미완의 국가의 공식 대통령도 아닌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 민족의 수반일 뿐이였다. 아라파트는 강대국 이스라엘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의 자주를 위해 몸부림 치는 팔레스타인의 한 수장에 불과했었다.
아라파트를 아라파트로 만든 것은 유대인
지구촌의 작은 땅, 양을 치고 터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2천년의 방랑생활을 끝내고,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걸쳐 다시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에 의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없었다면 팔레스타인 땅에선 아라파트란 인물이 나올 수 없었다. 낙후된 문명과 천연자원의 부족으로 그리 매력없는 땅에선 그의 출생지 확인할 길 없는 외진 땅이였다.
지난 11월 아라파트가 프랑스 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그의 병상기록 공개 때 그의 출생지를 예루살렘으로 발표했다. 프랑스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즉시 아라파트의 출생지를 이집트 카이로로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생전에 아라파트를 여러 차례 만난 그는 직접 그로부터 카이로 태생임을 직접 들었다는 주장이다.
아라파트의 출생지는 아직도 각각의 주장만 있을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들어 그의 예루살렘 출생지가 주장되어 왔다. 세계 3대 종교의 성지요, 팔레스타인이 그렇게도 건국될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주장하고 있는 있는데다, 아라파트 자신이 사망전부터 예루살렘에 묻히기를 유언했다는 점을 볼대 그의 출생지 예루살렘은 필연적인 것이여야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생전을 두고 이를 인정한 적이 없다. 그의 전기나 언론사마다 다른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통신사인 AP는 예루살렘으로 기록하고 있고, 영국의 저명한 주간지 TIMES는 카이로 태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라파트에게 유대인의 첫 경험은 어린시절을 보낸 예루살렘이였다. 1929년생 아라파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였고, 어머니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슬람 율법가의 친척이였다. 이는 아라파트가 어린시절을 그의 예루살렘 친척집에서 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과 아랍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 정점에 다다를 때인 1930년대 예루살렘 그의 친척집이 몰려든 유대인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괴당하는 현실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다.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강한 첫 인상이였다. 특히 부유한 상인이었으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증오심에 그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라파트의 강한 기질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가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아라파트는1952-6년 가자지역의 팔레스타인 학생연맹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이집트로 내려가 카이로대학에서 토목과를 졸업하고 토목기사가 되었다. 이집트 군 장교로 임명되어 56년 수에즈 전쟁에 참가하였다. 아마도 이때가 그가 유대인의 이스라엘 군대와 싸운 첫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1967년 6일전쟁에서는 그의 군대 450여명을 이끌고 15,000여명의 이스라엘 군대를 격파한 승리는, 이스라엘이 6일만에 전 중동국가들을 상대로 승리한 전사에 길이 남을 역사 이면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아라파트 자신에겐 전설적인 또하나의 투쟁역사을 장식했다.
1956년 수에즈 전투와 67년 6일전쟁 사이에 쿠웨이트로 건너간 아라파트는 “자유팔레스타인 건설회사”를 세워 무장투쟁의 자금을 지원했고, 1958년 동료들과 함께 PLO의 모태가 된 무장조직 파타의 결성에 참여했다. 이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주요한 군사조직체가 되었다. 아라파트는 67년 6일전쟁 직후 파타의 대변인이 되었고, 68년엔 PLO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의장이 되었다.
1968년 PLO의 의장이 된 후 1971년엔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아라파트는 무장게릴라를 이끌며 1960년대 항공기 납치, 19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에 이르기까지 약 70여 회에 걸쳐 이스라엘의 주요시설 파괴작전을 성공시켜 명성을 높였다. 세계적인 주간지 TIME지는 PLO의장으로 세상에 드러난 아라파트와 73년 뮌헨올림픽 사건을 통해 TIME지의 커로스토리로 재조명 되었었다.
그러나 테러라는 악명과 함께 아라파트는 외교에도 능했다. 아라파트는 PLO가 국제테러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국제사회가 PLO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 74년 10월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를 400만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기구로 인정하였고, 처음으로 비정부조직인 PLO의 대표라는 옵저버 자격으로 국제연합(UN)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유엔 연단에 올라서며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나타난 아라파트는 "나는 한손에는 권총(전쟁)을, 다른 손에는 올리브 가지(평화)를 들고 있다. 내 손에서 올리브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1988년 제네바에서 열린 UN 임시총회에서는 이스라엘의 생존권 인정과 테러 포기를 선언했다.
82년 6월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으로 PLO의 거점인 베이루트에서 철군하여 망명에 망명을 거듭하였다. 여장을 하면 중동 각국을 전전하던 88년 11월, 알제리에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아라파트는 91년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평화협상에 참여하였고, 93년 9월 이스라엘과 가자·여리고의 자치협정안에 서명하였다.
이 평화의 무드는 결국 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 중동 평화 정착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수상,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1994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테러의 전사였던 아라파트가 평화의 전사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해 7월엔 27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어 1996년 4월 20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의 전단계로서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에서 의회의 과반수를 획득하여 초대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포장되고 포장되는 아라파트
정말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이 말하는 단순한 테러리스트인가? 겉으론 이스라엘과 평화를 열망하면서도 뒤쪽에서 테러를 부추기고 배후 조정하는 극악한 테러리스트였던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각종 기관과 집단들을 수색하면서 그 중거들을 속속들이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이스라엘에겐 아라파트는 협상 불가능한 너무 강경한 테러리스트로 인식되어 있다. 반면, 팔레스타인 강경론자들에겐 너무 온순한 기회주의자로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다. 아라파트 자신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진정한 팔레스타인 건국의 첫단계로 자치정부를 수락했다는 의도였으나, 하마스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투쟁을 포기하고 대통령 자리 욕심 때문에 자치정부 수준에 머문 배신자로 매도 되어왔다.
지난 2004년 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의하면,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즘에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원한다면서, 이런 이유에서 아라파트와 관계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협상 상대가 없어서 중동평화를 정착시키는데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말한다. 아파라트의 주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가 테러르 부추긴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중동협상은 항상 먼저 협상의 조건을 내걸어 놓고 이를 받아들이라 밀어붙이는 식이다. 약자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 말고 다른 지도자를 만나겠다고 한다. 우리에게 마음에 드는 지도자가 나올때까지 기다려보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민이 뽑은 대통려이 제쳐두고, 너 말고 다른 사람과 하겠다고 주장하는데, 만일 대한민국 대통령을 빼고 다른 사람과 협상하겠다면, 이를 동의 하겠는가?” 팔레스타인 수석협상대표 사에브 에라카드의 말이다. 결국 이제까지 협상과 독립국가 건설의 실패는 아라파트의 잘못으로 매도되어 왔다. 오슬로 평화협정을 깨고 테러로 돌아섰다든가,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아라파트의 과욕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 몰아붙인다. 이런 말이 나올적마다 아라파트는 분을 참지 못하며 억울해 해왔다.
그리고 또 하나 부각되는 것은 그의 재물축제와 부정부패이다. 아라파트의 사망발표 직후 아라파트를 평가절하하고는 말들이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의 행방이 관심을 부추기며 아라파트를 사리사욕을 채운 독재자의 이미지로 만들고 있다. 이는 아라파트 직후 이스라엘 정부가 반아라파트 이미지 부각 정책과 맡물리는 보도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라파트와 함께 오랜시간을 밀착취재한 중동전문 베테랑 기자들은 이에 동의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라파트 개인적으로 한번도 안락한 생활에 빠져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3년간은 라말라 무카타의 그의 직무실은 다 무너져버리고 남은 허술한 건물 귀퉁이에서 생활해 왔다.
아라파트는 측근들을 통해 계좌를 관리하기에 직접 돈을 만지지 않았고, 보좌관들이 사주는 필수품을 사용하기에 옷값이나 구두값조차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한번은 100달러가 정도의 가격의 구두에도 비싼 것을 사온 보좌관을 심하게 꾸짖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통제과 감시가 만들어낸 현실이었다. 명색이 팔레스타인 수반이면서 그가 거하는 건물이 전깃줄과 수도물 공급호수가 보기 흉하게 엉키고 설킨 그 자체가 오늘날 아라파트와 그의 민족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라파트 없는 중동은 없다
오늘날 중동에서 작은 땅 팔레스타인은 결코 작지 않았고, 아라파트는 세계 정치인 중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계 어는 지도자가 사망한 들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보일 수 있을까. 특히 그의 나라는 서지도 못했고, 그 미완의 국가 의 공식 대통령도 아닌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 민족의 수반일 뿐이였다.
이것이 아라파트와 그가 처한 팔레스타인의 국제적인 위상이였다. 미국 대통령 부시 재선 직후 만난 첫 정상은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였고, 그 정상호담에서 첫 논의가 팔레스타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발표한 첫 성명의 첫 문구가 바로 팔레스타인 독립논의 였다. 걸프전의 전쟁영웅이며 부시 행정부의 국무장관 파월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정책을 주장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의 가장 시급한 현안의 문제며, 세계 정치의 한 복판에 서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라파트, 그리고 그의 민족 팔레스타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라파트 사망직후 그래도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인 이스라엘 법무장관 요세프 라피드는 아라파트는 중동 터러의 근원지였다라고 평가했다. 시누이 정당이라는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의 말임에도 가장 보수적인 말로 이해된다. 아라파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시몬페레스 전 이스라엘 수상은 “아라파트가 평화를 추구한 것은 높이 살 일이지만, 그가 테러를 수단으로 택한 것은 그의 크 과오중에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중동의 문제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그의 테러 전술은 중동 테러를 태동시키는 효시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중동국가들이 대 이스라엘과 미국의 악 감정을 유발시키 원인이 바로 팔레스타인이였다. 중동의 아랍국가들은 아라파트를 지지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대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것이 곧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이였다.
한 번 보자. 중동의 반 미국 또는 반 이스라엘 태러의 명분엔 반드시 팔레스타인이 언급된다. 1948년, 1953년, 1967년, 1973년, 그리고 1982년 레바논 전쟁 등 중동의 굵직한 중동전쟁의 근본 원인은 바로 팔레스타인이며 이를 부추긴 지도자가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인다. 빈라덴이 911 테러 공격직후 밝힌 공격 명분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의 해방과 일방적인 친 이스라엘를 두둔하는 미국에 대한 복수였다. 이라크가 미국의 극적인 미움을 사고 악의 축이 된 이유중에 하나가 그의 끊임없는 대 이스라엘 위협에서 기인되었다. 90년대 초 걸프전 당시 아라파트가 이라크 사담 후세인을 두둔 했을 때 대부분의 중동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아라파트의 지원을 중단했다. 그때 모든 중동국가들이 보내오던 것 이상으로 아라파트를 금전적으로 후원한 사람이 사담 후세인이였다.
아무리 중동 아랍국가들이 서로간에 치고 받고 전쟁을벌여도 이스라엘만 등장하면 중동아랍국은 하나가 된다. 공식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의 역공격을 받고싶어 했고, 이스라엘을 전쟁 현장에 그렇게도 끌어들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0월 중순 일본인이 이라크에서 참수되었을때,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였음에도, 그 일본인의 여권에 이스라엘 입국스탬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이스라엘 주재 일본 외교관이 밝혔다.
아라파트에 무지한 한국
한국은 팔레스타인을 너무모른다. 일전에 한 교민 사업가가 팔레스타인 청년 청년 두명을 데리고 연수차 한국 공항을 통과할때, 이런 나라가 있나, 팔레스타인도 나라인가, 비아냥거리며, 그의 입국을 괴롭힌 한국 출입국 관리의 태도가 어쩌면 우리의 팔레스타인 이해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주요국이 이스라엘과 동시에 대사관은 아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표 사무실을 파견하고있다.
정부의 무지만큰 한국 언론의 이해도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상황을 전할 특파원 하난 나와있지 않다. 예루살렘은 인구 60만의 작은 도시이다. 그러나 예루살렘발 중동 뉴스는 세계 언론의 핵이다.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 파견된 특파원 수가, 세계 정치도시 워싱턴에 파견된 수많금 특파원이 나와있다는 사실은 과히 놀랄만하다. 당연히 우리의 이웃 일본과 중국만해도 신문 라디오 TV 특파원이 두 세팀씩 파견되어있다.
지난 11월, 아라파트 장례식 조문단에 대한민국 전 외교부장관이 파견되었다. 잘 했다. 그러나 지난 1995년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당했을 때 당시 대한민국 총리가 조문단으로 참석한 것에 비하면, 좀 더 호의를 베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평생 시리아 전대통령과 불편하게 지낸 점을 감안할때 그 아들 아사드 현 시리아 대통령의 아라파트 장례식 참석은 그 누구도 예견 못했었다. 프랑스 대통령은 운구직전 병친을 찾아 조문했고, 유럽각국들은 현직 외무장관들이 직접 카이로를 찾아 아라파트를 조문의 격을 높였다.
지금 중동의 한국 교민들은 한국의 이라크 파병으로 그 어느때 보다도 중동 아랍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라크 땅 깊숙히 들여놓는 상태를 감안한다면, 이번 아라 장례식이야 말로 우리의 선의를 표현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였는가. 아이러니 하게도 중동 땅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보다 북한이 더 인기가 있다. 핵문제로 미국에 당당히 대항할때 팔레스타인인들은 남북한 가리지 않고 그저 코리아를 반겨주고 기뻐했다. 이번 아라파트의 죽음을 위해 3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다니 더 기뻐할 것이다.
첫댓글 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글을 본 "뉴스앤죠이" 기자가 연재 기사 싣고 싶다고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읽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비판의 글도 있습니다. 저를 다듬는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스크랩을 하면 이곳에 다시 글이 올라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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