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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경순왕릉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릉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아닌 고려의 수도 송악(개경) 가까운 고랑포리 산기슭 에 있다.
이곳 화장산은 연천강과 월봉산이 있고 서쪽에는 거성산이 있으며 남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금능파가 있는 지역으로 거성산의 한줄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자리잡고 있다.
경순왕은 (897~978)신라 제56대 왕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부로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효종이고 어머니는 현강왕의 딸인 계아태후로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경순왕는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칩입으로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올랐다.경순왕은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신라는 .1.(혁거세)2.남해-3.유리- 5.파사-6.지마-7.일상-8.아달라
11.조분--14.유례
석씨 4.(석탈해)-구추-9.벌휴-골정-12.첨해_* 걸숙_15.기림
이매_10.나해-우로-----16.흘해
13.미추
김씨(김알지)-구도-미구-17.내물-19.눌지-20.자비-21.소지
(356~402)-습보-22.지증왕-23.법흥왕(514~540) 26.진평왕-27.선덕여왕
대서지(김알지후예)-18.실성 (500~514) 입종-24.진흥왕-동륜-국반-28.진덕여왕
(540~576)-25.진지왕-용춘-29.무열왕
(통일 신라)
30.문무왕-31.신문왕-32.효소왕 34.효성왕 37.선덕왕 -인겸-39.소성왕-40.애장왕
(661~681)(681~692)33.성덕왕 35,경덕왕-36.혜공왕(내물10세손) 41.헌덕왕
(742~765) 38.원성왕 42.흥덕왕
(내물12세손)- 충 공-44.민애왕-
헌정-43.희강왕-계명
예영 45.신무왕-문성왕
균정-47.헌안왕왕
48.경문왕=49.헌강왕-52.효공왕 54.경명왕
50.정강왕 박씨-53.신덕왕-55.경애왕 김씨 -56.경순왕(문성왕6세손)
51.진성여왕(887~897) (아달라 원손)
신라는 석씨 8왕, 김씨 37왕, 박씨 3왕의 족보를 가지고 있다.
935년 후백제의 갖은 침공과 각 처의 군웅할거로 강토는 날로 줄어들어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신하들과 큰 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935년 12월에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게 넘겨주고 재위8년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로써 신라 왕조는 992년 사직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큰 아들 마의 태자는 금강산(봄:금강,여름:봉래,가을:풍악,겨울:개골)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법공은 화엄사의 승려가 되었다.
훗날 왕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 받았으며, 녹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으로 임명 되었고 왕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
왕건의 딸 낙랑공주는 경순왕의 마음을 위로 하려고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지었다. 경순왕은 아침,저녁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경주를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며 언제 신라로 돌아가나 하는 마음, 하지만 경주로는 길이 있어도 갈수 없는, 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임짐각 건너편에 위치해 있는 도라산(道羅山)에서 경주를 향한 눈물 바람을 삭일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시조 왕건 사후에도 35년을 더 살았던 경순왕, 그사이 5대 경종까지 다섯명의 왕이 바뀌는 것을 보며 수를 누린 경순왕이다.
문산역에서 도라산으로 가는 경의선 기차는 한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서너번 운행한다. 도라산에 가도 산자락 아래서 저 산이 그 도라산이야 하고 처다보고 올수 밖에 없다.
군사지역으로 일반인의 통제가 제한되어 있어 현시점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일게 하는 산이다. 이곳에서 평양 까지 가는 거리는 승용차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더 더욱, 고려의 수도였던 송악 개성이 지척인데 발걸음을 떼 놓을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낙랑공주와 결혼한 경순왕은 43년후인 고려 경종3년(978)음력 4월4일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경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의 장례가 경주로 향하니 수많은 백성이 그뒤를 따르는 것에 놀란 고려조정은 왕의 시신은 도성100리 밖을 떠날수 없다고 하여 이곳 고랑포리에 장사 지내게 된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왕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고량포리 나루터 뒷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즈막한 구릉 중앙에 계좌 정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이후 실전되었다가 그후 800 여년이 지난 1747년(영조23) 왕를 주변에서 지석과 신도비를 찿게되어 감사 김성은과 첨정 김응호등이 봉축하고 제사 하였으나 한국동란후 또 실전 되었다가
1973년 25사단 군인들의 보고로 국가 사적244호로 지정되어 연천군에서 괸리중이다. 현재의 석물은 영조 23년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능은 원형의 봉분에 호석을 둘렀으며 얖면에 연꽃문양의 조각이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상원하방(上圓下方)의 능비와 혼유석(가로103cm,세로44cm)이 상계(上階)에 있고 배계절(排階節),중앙에 장명등(長明燈)이있다.
좌우에는 석양1쌍,망주석 2기와 2단의 체계석으로 상계,중계,하계로 구분되었으며 석물은 중계에 설치되어있다. 봉분 삼면에는 방형의 곡장을 둘렀다.
1975년 이 후 복원한 것인데 오지벽돌을 쌓고 위에 기와를 덮은 형태이다.
각종 석물은 모두 조선 중 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묘가 위치한 구릉 좌측하단에는 경순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안에 있었으나 글씨 판독은 마모되어 알아볼수 없었다, 아니 거의다 보이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 불가능 하며 재질은 옥돌이라 부르는 백옥돌이다.
능 위로 올라가니 6.25전쟁의 접전지역 이었던 이곳에 흔적을 비석이 고스란이 안고 있다.
전란의 흔적으로 비석 곳곳이 깨져 있고 빨간 글씨의 "지뢰" 팻말은 아직도 끝맺지 못한 전쟁의 귀결점인 비무장지대, 땅굴,남북 한계선으로 대치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한데 교사로 퇴임 하셨다는 해설사님의 해설은 금방 끝날 기미가 아니다,
호루고루성은 임진강 북안의 넓은 벌판위에 있는 고구려 때의 성으로 재미산 또는 재미산성으로도 부른다.
호로고루는 오래된 성을 뜻하는 말로 고구려의 축성술을 잘 보여주는 성이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일원에 있다. 이 지역은 처음 고구려의 강 지역이었다가 고구려가 망하면서 신라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은 고구려가 남진하는 5C경 부터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호로고루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막는데 적합 하므로 통일신라 이후는 활용도가 그리 높지 못했다 싶다. 남쪽벽은 임진강에 면해 있는 80도의 가파른 절벽이고 북쪽은 이것 보다 완만 하지만 60도 기울기의 절벽이다.
남벽과 북벽이 서쪽에서 뾰족한 돌출부를 이루고 있어 동쪽만 잘 지키면 천혜의 요소가 될수 있다.
호로고루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있다. 하나는 이부근의 지형이 표주박(호) 또는 조롱박 같이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을을 뜻하는 홀(忽)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쳐져서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어학적 논리로 보면 후자의 주장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 이며 이 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 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 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사강목>에 보면 문무왕 2년(662년) 김유신은 당의 소정방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 할 뿐 아니라 군사가 피로하여 퇴각한다. 김유신 일행은 돌아올때 밤새 행군하여 호로하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추격하여 호로하(號擄河)에서 만나 크게 격파하였다고 되어있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 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때 약 400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이고 동벽은 현재 남아있는 부분이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 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유물은 성 서쪽과 동북쪽에서 주로 발견 되었고 신라 유물은 성 중앙부에서 많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구려 기와가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기와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임진강 방어선을 관장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지휘관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신라 유물로는 단각 고배류,옹기,그룻등이 있는데 이들은 7C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구려 기와의 특징은 적갈색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고 신라의 특징은 회청색의 경질토기,굽다리가 있는 접시 등 불교를 중심으로 한것이 많다
호루고성을 찿아가는 길목에는 인가가 별로 없었고 성 가까운 곳에 허름한 건물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종잡기 어려웠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무엇하는 곳일까 ? 궁금해 하면서 호루고성 팻말이 있는 곳을 따라 올라가니 뜨거운 뙈악볕 아래 무너진 호루고루성에 떼(잔디)를 입히는 남녀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의 기반석은 현무암으로 쌓여져 있으나 온존한곳 보다는 허물어진 곳이 많았고 정상은 나무계단을 오를수 있게 보수되어 있어 30m 의 정상을 오르니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시야에 들어찬다.
"어매 시원한 것" 감탄과 더불어 강 건너 일대가 훤히 보인다.
저 아래녘에 보이는 고량포 포구는 여울목 이라 ,배가 아닌 도보로 말과 사람들이 건너 다녔던 곳이라 한다.
신라 경주에서 철원을 거쳐 가장 단거리로 고구려로 갈수 있었던 길이었고,6.25 동란때 북한군은 이곳을 지나 의정부를거쳐 미아리 고개를 넘어 남한을 함락 시켰다 .
호시 탐탐 남한을 전복 시키려 하는 그들은 공비들을 투입시켜 청와대 칩입을 시도 했는데 그때도 이 고랑포구를 넘었다. 일정시대 고랑포구는 화신 백화점 분점이 있던 번화한 곳 이었다고 한다.
고랑포구 일대를 돌아보던 시선을 거두어 거의 다 허물어진 성의 넓이를 가늠해 보며 아주 아주 오랜 옛날,이 벌판에 성을 쌓으려 차출 되었던 고구려 민초들의 고단했던 삶을 연상해 보는것도 잠시,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쩔쩔매다
버스가 좁은 길로 들어서자 환호성을지르며,두지나루 매운탕 집으로 내달렸다.
연천에는 호로고루성 말고도 연천 당포성,연천 은대리성이 있는데 세개의 성 모두가 고구려 시대 성이다.
두지나루의 이름은 나루의 생긴 모습이 뒤주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은 수심이 깊어 민물고기가 많이 서식해 민물 매운탕으로 유명한 곳이다.
매운탕이 끓는동안 자연스럽게 다이어트 이야기가 포문을 열자, 먹는것은 다 살이 되어 한끼 양을 세끼로 나누어 먹는다는 동우의 고백은 쇼크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동우의 식사량을 살피며 식후 포만감에 젖어있는데 황포돗배 탈 사람 신청을 받는다.
지난번 딸아이와 왔을때는 장마 뒤끝의 흙탕 물살이 사나워 배를 타지 못했던 차라,신바람 나게 황포 돗배에 올라 선장겸 해설을 겸하는 "해설사" 선장님이 키를 돌리는 선미에 자리잡았다.
순풍에 돛 달고서 배 떠나간다,
물 맑은 임진강에 배 떠나 간다
이 배는 두리둥실 고량포구 갔다, 돌아 오는 배
배는 서서히 뱃머리를 고량포구 쪽으로 미끄러져간다. 왕복 6km,소요시간 40분 그리길지 않은 황포 돗배는 선장님의 입담과 돗배가 하나되어 구비치는 강물 따라 흐른다. 물색은 푸른색이 아니고 검은색이다.
철원의 화산이 분화되어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손으로 물을 떠보면 물의 색은 힌색이다.
남북 한계선으로 배는 고량포구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야 한다.
두지나루에 황포돗배는 전쟁이 나기 전 까지는 마포나루까지 소금,새우젖,생선,인삼,콩,쌀등을 실어 날랐다 한다.허나 어디 곡물만 실어 날랐을까 ?조선시대 한강을 왕래하는 서민들의 운송수단 이기도 했다.
12m가 넘는 대형돛을 바람에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배를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고,현재의 황포돗배는 동력으로 움직인다.옛날에는 무명천에 황포물을 들여 돛을 달고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짜맞추어 배를 만들었다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남북한 7개 시군을 통과해 한강과 합류하는 임진강은 연장 길이가 254km 되는 한강최대 지류로 가장 깊은 소의 깊이는 17m, 거북바위,빨래터바위를 지나는데, 이 지역 양반들이 임진강적벽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다.
겸재, 또는 난곡이라 불린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이 "연강임술첩','임진적벽도"를 그렸고 또한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자 서예가인 허목이 이곳 암벽에 전서체의 글씨를 남긴 장좌리 괘암(절벽바위)를 지난다.
60만년전 철원지역의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으로 생긴 현무암 적벽은 가장 높은곳은 15m,윗부분은 수직,아랫부분은 수평으로 형성된 모습으로 1줄에 1만년의 세월이 흘러 생긴 것으로 크고 작은 검붉은 돌기들의 형태로 경관이 뛰어나다.
멀리 고구려때의 호로고루성이스쳐 지나가고 보이는건 고랑포구, 고랑포구는 여울목으로 걸어서 건널수 있을 정도로 깊이가 얕다고 한다.
배는 고량포구 까지 가지 못하고, 선미를 오던길로 되돌린다.수심이 얕아 배가 다닐수 없기 때문이다.
내려가던 뱃길에 수심은 오른쪽 보다 깊어 배는 뱃머리를 되돌렸을뿐 내려왔던 곳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고랑포구에서 3km를 더가면 북한 지역 이라고 한다.
오호! 통재라!
휴전선이 없다면 자유스럽게 남과 북을 넘나 들수 있으련만, 고량포구는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으며 물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 였다.
배를 탔을때 좌측의 수심이 깊은곳으로 내려 갔고, 반대로 올라 올때는 우측에 보이는 토끼바위,원당리 폭포와 동굴을 가까이서 볼수 있었다.
겨울에 배를 타고 강을 오르 내리면 쇠기러기등 겨울 철새가 강에 내려 앉아 고기를 잡는 것이 볼만하다 한다.
경순왕릉,호로고루성 답사에 곁들인 두지나루의 매운탕과 황포돗배 유람은 답사의 즐거움을 배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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