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잡는 시인의 숙명, 파도너머 그리움
-정파 심종은 시인의 제4시집 상재에 부쳐-
한기홍(갯벌문학 주간)
‘내가 사랑한 파도’
비평가 클리언드 브룩스는 “과학의 진리는 역설을 제거한 언어를 요구하지만, 시인의 진리는 역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1) 고 말했다. 얼핏 보면 모순, 충돌되는 시어의 형태지만 시적주체가 극명한 톤으로 잠겨져 있는 반어의 구사에서 독자는 카타르시스와 시의 참맛을 느끼는 것이다.
정파 심종은 시인의 표제시 ‘너를 사랑한 파도’는 시적주체나 서정의 양상으로 볼 때, 파도에 빗댄 시인의 애상과 회포를 면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 제목 ‘너를 사랑한 파도’의 명명에서 시인이 암시하고 있는 역설적(Paradox) 이미지 형상화에 주목하게 된다.
파도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하얗게 개거품 빚어내듯
토해내는 설움
구슬지게 울어대는 소리
그 보다는 재가 되어 사라진
아버지의 유골이
물결 속에 고이 흘러간 아픔이
파도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을 억누른다
누가 파도를 그리움이라 했던가
까마득한 시절에 먼 나라로 떠난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을 못하는데
그 아버지 따라 엄니도 가버렸나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건
파도 네가 있음이니
찢어지는 가슴속 깊이 잠긴 사연을
파도야 너만은 분명 알고 있을 테지
- ‘너를 사랑한 파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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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리언드 브룩스가 1947년에 쓴 《잘 빚어진 항아리, The well wrought Um》에 한 이 말은 현대시에 있어서 역설의 정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연으로 구성된 길지 않은 시의 내용과 이미지에는 분명 시인과 파도의 대화를 빼면 제3자의 존재는 없다. 이미 작고하신 부모님을 회상하는 마음과 파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만이 물결친다. 그런데 왜 시인은 제3자인 ‘너’를 시제에 넣어 공간적 창출을 시도했을까. 그 아이러니야말로 정파시인이 추구하는 특유의 서정(시인이 시인으로서 오늘날 있게 한),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경배의식의 발로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기실 ‘너를 사랑한 파도’는 바로 ‘내가 사랑한 파도’라는 표현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파도를 보면서 그 만고불변의 철썩임과 망망대해에서 출생하여 우리네 삶의 근처인 해안갯벌까지 일렁이는 영원의 의미를 부여잡으면서, 그 불변의 진리 속에서 작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에 투영된 기쁨과 슬픔의 덧없음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파도를 사랑한 나(시인)’ 또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파도’를 ‘너’라는 시적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은 그리움의 주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시인들은 파도와 같이 유구하며 스케일이 큰 자연에 대한 서정들을 잃어버리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총아 PC속에 펼쳐지는 2.3차원적 영상들과 도시의 번잡한 속성 속에 묻히거나, 시멘트와 PVC 밀림 속 아스팔트 위에 꼬불대며 번식하는 굴절된 의식의 파편들에서 야기한 어수선한 시상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렇게 파편화된 세계의 사금파리같이 예리한 시어의 단면에서 사물의 현상과 각진 의식을 발현하려다보니, 우리 한국시 고유의 정형률을 간과하거나 정한情恨과 그리움이 일렁이는 담백하고 푸근하며 감동이 있는 시어의 향연이 점차 소멸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데 정파시인은 우직하게도 ‘정이 파도치는(情波)’ 아호처럼 전기한 우려들을 불식시키면서, 천진난만하고 편이한 시어구사와 서정으로서 우리 한국 서정시의 본령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시인의 시풍은 기교를 멀리하고, 난해하고 구조적인 해체이론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연과 본인의 인생에 자국을 남긴 추억의 영상에 몰입한다. 시인의 추상들은 대개 이루지 못한 아쉬움들이나, 실현되었기를 갈망하는 지난날의 모든 부끄러움에 대한 각성과 애정들로 점철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미래에 아득하게 느낄 ‘대오각성’의 깨달음마저 현재의 ‘능청스럽고 우화적인’ 낙천성으로 융화해 가고 있다. 실로 시인의 선한 품성과 천진함에 비례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파도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누가 파도를 그리움이라 했던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건 파도 네가 있음이니/
시의 각 연 모두冒頭를 장식하는 파도에 대한 시인의 심사는, 아릿한 가슴의 통증으로 시작한 일말의 수포가 거대한 파도의 포말로 승화되면서 성숙된 그리움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움의 전령사 정파시인
퍽 오랜 옛적부터
너는 이미 그리움이었나 보다
날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밤낮으로 울부짖는 사연.
하늘 바라보며 내뱉는 한 서림에
하얗게 거품 되어
그리움만 땅 끝에 물씬
토해놓는가 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너는 이미 외로움이었나 보다
갯벌에 질펀히 널린 조가비 모아
날 새면 통곡하는 모습.
가버린 세월 떠나보낸 한숨에
갯구멍 파고들어
외로움만 고랑에 잔뜩
채우려는가 보다.
- ‘파도’ 전문
직유와 은유의 기수지대를 파랑波浪 짓는 위의 시 파도는 전술한 ‘너를 사랑한 파도’에 담긴 시인의 지향점을 명확히 해설해 주는 시다. 그리움을 파도로 치환한 시인의 시적 이상향은 언제나 애틋하고 저린 정한을 포함하고 있는 ‘그리움’임이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 연의 ‘퍽 오랜 옛적부터/ 너는 이미 그리움이었나 보다’의 시어에서 정파시인의 그리움에 대한 처절하고도 투철하며 집요한 천착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내면에 깊게 자리한 그리움의 각인은 절로 번져 나와 시인의 주장 없이도, 스스로 외연을 넓혀 모두가 공감하는 그리움의 전령사로서 정파시인을 바라보게 한다.
파도는 무심하게도 억만년을 철썩이며 인류의 정신과 역사를 채근해왔다. 그 영겁의 철썩임은 지구에 생멸했던 모든 생령들에게 한없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갖게 했고, 결국 세계의 섭리는 서두르거나 혹은 침잠해 있다고 해서 현상이 돌변하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모든 생명들에게 주었다. 고고성을 터뜨릴 때 본 파도의 철썩임과 늙어 임종할 때 다시 바라본 파도의 모습은 언제나 묵묵부답으로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파도는 천년바위처럼 미동도 않는 고형체가 아니고, 포말을 튀기며 살아 아우성치는 격렬함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역동성과 변치 않는 철썩임에 모든 포한을 씻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리움과 정한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닦인 한과 쌓인 그리움은 윤회와 같은 관조로 빙글 돌면서, 유유히 흐르는 큰 줄기 강처럼 순치馴致되어 사무사思無邪(2)나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정신으로 파도를 그윽이 바라보는 것이다.
날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밤낮으로 울부짖는 사연. (1연 3~4행)
갯벌에 질펀히 널린 조가비 모아
날 새면 통곡하는 모습. (3연 3~4행)
외로움만 고랑에 잔뜩
채우려나 보다. (4연 3~4행)
- ‘파도’ 부분 발췌
시인은 그리움을 태우고 사룬지 반평생 만에 마침내 파도가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통한의 소리와 진정을 알았다. 퍽 오래 전부터 이미 그리움으로 자리한 시인의 시적주체야말로 파도의 또 다른 공명共鳴이었음을.
이번 시집은 시인의 제4시집으로서 등단 13년차와 반평생을 공직에 헌신한 뒤, 은퇴하는 기념으로 내는 뜻 깊은 시집이다. 공직사회와 시인의 길은 약간은 부조화처럼 느껴지기 쉽다. 공무원으로서 시를 쓰고, 문학을 하면 백안시당하는 시절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시인은 공직생활 중에도 시안詩眼을 감지 않고 면면히 정려하여 많은 창작물을 생산해놓았다. 비록 전반적인 시풍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치미精緻美에 몰두하지 않으며 어느 한 경향에 치우치지 않은 시정신은 현금 공직문단에서도 ‘뚝심의 시인’으로 인정하는바, 그 의지와 창작열은 시인의 고집이기도 하다.
시집에 수록된 ‘사랑66’은 파도시인 정파의 유장한 사랑학이자, 순수지향의 사랑관이 잘 녹아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아포리즘적 서술들은 시인이 얼마나 순결주의자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랑은 외길이다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다
- ‘사랑6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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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무사思無邪 ~ ‘詩經’에 나오는 시 300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어 진다는 것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 ≪논어≫ 爲政篇
아마도 신께서 시인에게 청춘으로의 회귀를 명령한다면 필경 시인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펼치다가 순애보적인 결말을 이어갈 것 같다. 그만큼 시인은 지순한 사랑을 이상으로 삼는 로맨티스트다. 근 십년동안 시인과 문단을 함께한 필자의 시인에 대한 인상을 정의해보면 이렇다. “말투는 어눌해도 눈빛은 깊고 푸르며, 누항에 주향을 흘려도 정직을 놓지 않는다. 파안대소 시름감춘 호기는 탱천해도, 돌아서서 먼 빛 하늘을 바라볼 땐 한줄기 낙조의 고독미가 흐른다.”
시인의 소망은 은퇴 후 ‘그리움이 풍겨나는’ 전원의 모옥에서 자연과 벗하며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피력한바 있다. 시인의 소박하지만 문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 오의奧義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2008.9.7 秋夕을 앞두고 桃源齋에서 漢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