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well being)"이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주목 받고 있다.
미디어마다 웰빙족에 대한 기사가 넘치고, 그들만을 상대로 한 마케팅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벌써 제법 모양을 갖춘 흐름이 돼 가고 있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이나 안녕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문화 코드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웰빙족이라 부른다. 자연, 건강, 안정 등 정신적인 가치까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은 뉴욕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전염돼 가는 중이다. 얼마 전 이 웰빙족 기사를 접하며, 문득 세상의 유행을 만들어 간다는 뉴욕커보다 더 트렌드에 앞서가고 있는 스쿠버 다이버들을 떠올렸다.
오리지널 웰빙족의 여성은 요가와 스파를 즐기는 것이 기본이며, 남성 웰빙족은 등산이나 암벽 등반 등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취향이 다른 웰빙족이 더욱 진화한다면 그들은 분명 스쿠버 다이버의 길로 들어 설 것이다.
웰빙족이 추구하는 것은 세속적인 삶의 행복이 아니다. 말이 좋아서 세속적인 삶의 행복이지, 그건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하나를 취하면 둘을 원하고, 둘이 채워지면 셋을 원하는 것이 우리 욕망의 실체다. 그러니 그렇게 채워지지 않은 세속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하지는 않겠다고 진화한 족속들이 웰빙족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과 하나며, 삶의 궁극적인 기쁨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 비로써 획득되어 진다는 걸 이해한 사람들이다.
이런 웰빙족보다 왜 스쿠버 다이버들을 앞서가는 족속들이라는 것인가? 우리는 스쿠버 다이빙으로 명상을 하고,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고, 자연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명상의 기본은 내 속의 나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하며 자신의 오가는 마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내 속의 나를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스쿠버 다이버가 슈트를 입고 BC를 착용하고 공기탱크에 레귤레이터로 한 호흡 한 호흡하며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명상과 다름없는 행위다. 명상에서는 호흡이 거칠면 내면으로 들어 갈 수 없고, 그 호흡마저 잊어야 진정한 내 속의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스쿠버 다이빙에서도 호흡이 거칠면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호흡도 잊고 바다와 하나가 되었을 때 진정한 스쿠버 다이버가 된다.
웰빙족의 또 하나의 트레이드마크로 등산이나 암벽등반을 꼽는다. 등산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다. 한라산, 설악산도 필요 없다. 북한산쯤만 올라가 봐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말이 너무 무지몽매한 말이며, 인간이 자연에 의해 얼마나 상처 받고 다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다.
겨울, 하산 길에 잠시만 방심하면 발목을 삘 것이고, 그것이 동반자 없는 등산이라면 조난은 물론이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갈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오른 순간 세상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자연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검푸른 바다에 뛰어드는 스쿠버 다이버들은 어떻겠는가? 우리가 바다를 우습게 알면, 그 순간 바다도 우리를 우습게 맞는다는 걸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스쿠버 다이빙의 시작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절대 시작할 수도 없고, 시작해서도 안 되는 것이 스쿠버 다이빙이고, 대자연의 품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스쿠버 다이버다. 삶이 무엇입니까? 하고 제자가 물었다. ‘삶이란 한 호흡, 한 호흡하는 순간이다’라고 싯달타 붓다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다 속 스쿠버 다이버들이다.
세 편으로 된 영화 매트릭스. 그 일 편에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은 다르다’는 정말 멋진 대사가 있다. 길을 안다는 것은 책상 위에 지도를 펴 놓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길을 떠난 다는 것은 내 몸을 그 길 위에 던지는 것이다. 웰빙족은 이제 길을 가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스쿠버 다이버들은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같다.
말 배우기 가이아 클럽의 가이아는 지구를 하나의 생명으로 칭해 부르는 고유명사이다. 가이아 클럽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으로, 우리를 그 생명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멋진 사람들이 모임이다. 정모를 알리는 메일을 받고도 번번이 못나가지만 그래도 가이아 클럽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꽃은 대지의 웃음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그리고 늘 떠올릴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 지는 말이다.
어느 날 가이아 클럽에서 온 정모 메일을 받은 순간, 그것이 가이아로부터 온 메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생명은 진화하고, 가이아가 진화해 이젠 나에게 이메일도 보내는구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었다. 가이아 클럽의 이메일로 내게 ‘열심히 일한 그대! 떠나라!’는 광고 메시지처럼, ‘열심히 일하는 척하는 그대, 잠시 일을 놓고 가이아 클럽으로 떠나라!’ 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구약성서가 시작된다. 말이 씨가 되고, 말이 인간사의 시작이다. 아기도 말을 시작하며 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세상에는 인간의 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의 말도 있고, 바다의 말도 있고, 풀의 말도 있고, 나무의 말도 있다. 이런 말들은 쉽게 배우지 못한다. 우매한 품성을 타고 나선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야 겨우 배우기 시작한 정말 어려운 말이다.
그 어려운 말 중 얼마 전 한 책에서 읽은 청산(靑山)과 하늘과 물과 바람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다.
청산은 내게 말없이 살라하고
하늘은 내게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버리고 성냄도 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하네.
이 글을 처음 안 것은 십여 년 전이다. 법정스님이 불일암에 계실 적에 벽에 붙여 놓았다는 시구다. 물론 게을러서 원전이 무엇인지 확인도 못하고, 그저 이미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달 서점에서 책을 뒤척이다 다시 접하고는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는 나도 산이 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고, 하늘이 하는 소리를 이해하고, 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몇 해 전 중광스님이 해탈하셨을 때였다. 마지막 남긴 말씀이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왔다’라고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을 혼자 웃었다. 네 줄을 시구를 단 한 줄로 바꿔 논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매일 40매의 원고와 3~4시간씩 계속되는 회의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고 살며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 하나 있다. 그건 뭐든 내려놓는 것이다. 내 몸을 가만히 지켜보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위가 움직이는 것도, 허파가 힘들어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건 누구나 연습을 하면 느낄 수 있다. 흙탕물 같은 마음을 가라앉히면 누구나 그렇게 감각이 되살아난다. 어깨에 걸린 스트레스도 느껴진다. 그때 어깨의 스트레스를 가만히 내려놓는 것이다. 내 몸에는 기쁨도 스트레스고, 슬픔도 스트레스고, 즐거움도 스트레스고, 애틋함도 스트레스다.
그런 것들을 그저 다 내려놓을 때, 그때 묘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 평화가 행복이라고 한다.
왜 사는가? 란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싯달타 붓다나 예수께서 이미 그 답을 찾아주었다.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 할 일이,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토사를 저기에 주고, 저기서 얻은 토사는 이쪽에 다 내 주는 게 물이다. 그렇게 사막의 모래를 움직여 언덕을 만들고, 그렇게 비구름을 몰고 오는 것이 바람이다.
우리는 가이아의 한 부분이다. 물이나 바람도 우리와 같다.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먹는다고 했다. 우리보다 더 오래 이 가이아의 한 부분이었던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면 무슨 떡이 내게 올까? 김치 국물부터 마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첫댓글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