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에 작년 봄에 가입했으니까 벌써 1년이 넘었다. 나는 장수생이었다. 그것도 보통 장수생이 아닌 초 수퍼 울트라
장수생이었다. 지금은 서울대 인문대 1학년이다.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때는 반에서
10등 정도 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조금 더 잘했다. 중 2때 전교 3등 한 적도 있다. 중 3때 제일 잘했을 때가
전교 16등이었다. 그 뒤로 놀았다. 공부하기가 싫었었다. 고등학교(인문계였지만 그 지역에서 그다지 좋은 학교는
아니었다)에 진학해서 배치고사를 봤는데 100 몇등이었다. 아버지한테 무지하게 맞았었다. 그래도 공부가 싫었다. 고 1때는
반에서 중간 정도 했었다. 고 2 2학기 때는 50명 정원에 40등 정도 했다. 고 3때는 조금 올라서 30등 대였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교련(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과목이 있었음)과 기타 몇 과목을 제외하면 미, 양, 가 이렇다.
운동도 싫어하고 몸도 약해서 체육은 항상 가였다. 내신? 당연히 좋을 리 없다. 고 3때 처음으로 학교를 무단 결석했다.
아마 내 소심한 성격에 그때 담임에게 무지 혼났더라면 최소한 출석은 잘 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공부 못하는 학생에겐 관심이 없던
담임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나는 결석을 일주일에 두어번은 했다. 집에서는 몰랐고 담임은 관심이 없었다. 아, 물론 담임
잘못은 아니고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끔 자기가 공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가 공부 못하는 것의 80%는 본인 탓이라고 생각한다. 방이 좁아서, 주의가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한다고?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도 만화는 집중해서 잘 보잖아?
그런데서는 공부하는게 창피한가? 월요일엔 우연히 용산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남산관광도로를 걸어올라가면서 책을 보며 갔다. 도서관에서 나오던 왠 여학생이 같잖다는 듯이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 여학생 눈에는
내가 유난떠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난 유난떨면서 공부할거다. 언제부터 공부하는 게 경멸받을
일이 된 거지. 나도 만화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만화 보는 거, 소설 보는 건 괜찮아 하면서 지하철에서 국사책보는 거
창피해하면 안 된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그땐 학력고사시절이었고 아마도 선지원 후시험이었을 게다.
난 내가 살던 곳의 4년제 대학중 가장 점수가 낮은 대학의 가장 점수가 낮은 과에 지원했다. 다행인지 어쩐지 합격은 했다.
입학한 후 하루 나가고 학교 그만 뒀다. 그 뒤로 삼수했다. 재수, 삼수하는 동안 공부 별로 안했다. 그래도 2년을
더 학원을 다니고 해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간신히 서울의 상당히 안 좋은 대학의 중간 정도 되는 과에 합격해서 1년 반을 다녔다.
하숙을 했는데 학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가고 하숙생들이랑 어울려 낮엔 자고 저녁때 일어나 하숙집에서 주는 저녁 먹고 나가서 동네
오락실이나(그땐 PC방이 없었다) 만화방에서 놀다가 밤에 하숙생들이 집에 돌아오면 모여서 술 마시거나 비디오보거나 포커치면서 새벽까지 놀다가
해뜨면 잤다. 그리고 다시 저녁때 일어나 어제의 반복인 생활을 1년 반을 했다. 그래도 이때 책은 많이 읽었다. 공부하는
건 싫어했지만 책 보는 건 좋아했다. 그 때는 전산화된 학생증이 아니었는데 도서관 대출수첩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속지가 14장 정도 되는데 1페이지에 책을 15권 정도 빌릴 수 있었다. 난 이 대출카드를 3번을 갱신해 가며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읽어 댔다. (그러니까 15*2*14*3권 정도의 책을 읽었고, 내가 이 당시 책도 엄청 많이 사대고 빌리기도 했으므로 실제로는
훨씬 많이 읽었을 것이다.) 자랑이 아니라 그 1년 반동안 내가 한 의미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었다. 출석 일수 미달로 학사 경고
3회 누적으로 제적당할 위기에 처하자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니 별 놈 다 있었다. 그래도 대학물 먹었다고
행정병 했다. 같은 부대 내에 서울대 기계공학과인가 다니다 온 사람이 있었다. 부대 개편으로 나중에 내 고참이 됐는데 난 이사람
무지 싫었다. 서울대생이라고 다 인간성 좋은 거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군대가서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가끔 이 사람이
학교다닐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솔직히 부러웠다.
동기중에 고대 다니는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은 착했다고
기억된다.(동기가 11명이나 되니 안 친한 동기도 있었다.) 이 녀석은 관물대에 자기 학교 교정에서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을 붙여놨는데
역시 부러웠다. 끼리끼리 논다고 난 동기 중에 조인성이 예전에 다녔던 학교에 다니는 녀석(이 놈하고는 지금은 연락이 안 된다)하고 신세계
백화점 남성복 코너에서 일하던 녀석(이 놈은 지금 원양어선 타고 있다)하고 친했다. 내 바로 위 고참이, 정체를 잘 모르겠는데 인테리어
사업을 해서 1억을 번 녀석이 있었다.(나랑 동갑이었다. 그런데 1억 벌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지금은 의심스럽다) 이 놈은 국내에 있는
대학은 시시하다고 미군 부대내에 메릴랜드 분교에 입학해서 다니다 미국의 대학에 편입하겠다고 항상 말하고 다녔다. 난 영어 문법을 못해서
그렇지 영어는 좀 한다. 그런데 이 놈이 보는 영어 책이라는 게 아카데미 토플인데 알고 보는 게 아니라 폼으로 보는 거였다. 이
놈은 지금 뭐하는 지 모르겠다.
제대했다. 제대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일본 유학간다고 난리를 쳤다. 일본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전혀 몰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보고 무작정 일본에 가고 싶었다. (한달 전에야 비로소
일본에 배낭여행 다녀왔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무지하게 맞고 나서 그래도 나이 좀 들었다고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집,
가난하다. 우리 아버지, 평범한 공무원이다. 내 여동생이 당시 대학 다니고 있었는데 두명 대학 등록금 대기 힘들었다.
여동생이 금년 봄에 시집갔다. 동생한테 엄청 미안하다. 사실 공부는 동생이 더 잘했고 나처럼 부모님 속 썩힌 적 없었다.
만약 내가 아들이랍시고 집의 지원을 더 받지 않았다면 동생은 자기가 되고 싶어하던 치과의사 됐을 거다.
아버지가 내게 다시
공부해서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 오셨다. (우리 아버지는 의사에 한이 맺히신 분이다) 난 이후 학사 경고 누적으로(물론
집에선 모른다) 위험한 기존의 학교 생활보다는 다시 공부하는 걸 택했다. 종합반에 등록했다. 놀랍게도 예비역 수험생 들이 많이
있었다. 이 때 알게된 친구들이랑 형들하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다들 의대, 법대 합격해서 잘 됐다. 나만 제일 늦게
됐다.
이 사람들 보면서 많이 느꼈다. 난 인생을 너무 쉽게 살려 했었다. 한마디로 노력을 안하고 운이 좋아
모든 게 잘 되길 바랄 뿐이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때 홍정욱(하버드 수석 졸업한 얘)이 한창 세간의 화제였다. 나도 '7막
7장'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부러웠다, 나도 이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해 여름이 지나면서 채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채팅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해 시험은 성적이 안 좋았다. 한 해 더 공부했다.
그 해
학원에서 여자를 사귀었다.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었지만 서로 좋아했다. 연애와 학업, 양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의대 못 갔다. 교대에 입학했다. 전액장학금은 아니지만 반액장학금 타고 입학했다. 내가 중학교 때 전교 3등 한 이래
처음으로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의대 못 간 걸 아쉬워 하셨지만 교대도 취직이 잘 된다며 나름대로 만족해 하셨다.
사실 이 해부터 교대 붐이 일어나서 커트라인이 많이 올랐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의대, 치대, 한의대 다음이
교대였다. 그 전엔 교대가 거의 바닥을 치던 때가 있었다. 이런 얘기하면 안 믿길려나? DJ정권때 교원 정년 단축하면서
신임교원이 엄청 많이 필요했다. 그전엔 교대 그저 그랬다. 지금이 교대의 상종가다. 내 생각엔 지금 교대가면 피본다.
나 교대다닐때 다 그런 얘기했었다. 지금의 이 교대 특수가 몇년 내에 끝난다. (아마도 5년 정도는 더 가지 않을까)
왜냐면 예전에 교원 정년 단축하면서 부족해진 신규 교사의 자리가 차츰 채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초과 수요 상태지만 이
상황은 곧 역전된다. 지금처럼 자녀 수도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는 초등학교 교사도 지금의 중, 고등학교 교사처럼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시대가 금방 온다. 보습학원 강사나 할려고 교대 갈 생각인 건 아니겠지?
여친은 아버지가 사업하다
망해서(중딩때) 집이 가난했다. 알바하면서 학원 다녔었다. 나보다 공부도 훨씬 잘했다. 하지만 걔는 목표가 뚜렷이 정해져
있었다. 가고싶어하는 대학과 학과보다 점수가 높으니 그다지 열심히 공부 안해도 무난히 합격했다. 장학금을 노렸었지만 장학금은 못
탔다. 여친은 서울로 떠나버리고 난 혼자 남았다. 여친은 알바하면서 학교생활 하다가(집에서 지원이 전혀 없었다) 결국 경제난을 못
이기고 학교를 중퇴했다.
난 1년간 교대를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다음해 휴학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양법 학자인 박춘호 선생의 '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라는 책을 우연히 읽었다.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홍정욱 책도 다시 읽었다.
다시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3개월간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모텔에서 객실
정리하는 것부터 해서 과외까지... 300만원 모았다. 혼자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식비, 교통비, 책값, 단과 학원비(종합반을
다닐 만큼의 돈은 안 되니까), 기타 생활비로 아껴쓰면 1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초절약모드로 생활해서 300만원으로 1년
살 수 있었다. 300만원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써보면 얼마 안 된다)
목표를 크게 잡았다. 서울대 법대로. 이게
작년 겨울의 일이다. 그러니까 서울대는 작년 입시에서 획기적으로 바뀌었었다. 내신은 삼수 이상이면 비교 내신으로 바뀌고(이게
얼마나 허울좋은 건지), 봉사활동은 필수고, 영역별 반영이었으며 구술 면접을 실시했다. 나는 차분하게 계획을 세웠다. 나는 수학을
못한다. 지금도 못한다. 대신 국어와 영어, 독일어 즉, 어학과목은 자신 있었다. 법대가 수학을 안 보는 관계로 수학은
종합 1등급안에만 들 수 있을 정도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과목에 치중했다. 걱정되는 건 봉사활동이랑, 다른 날고 긴다는
학생들이 들고올 경시대회 상장이었다. 내가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부터(3월) 준비해야 했다. 우선 경시대회
상장 같은 건 내가 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난 서울대랑
관련된 모든 시험과 국가 공인된 모든 시험에 응시했다. 이러한 것들은 서울대에서 인정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었기때문에 인정해
줄 지 알 수도 없으면서 하나씩 따 나가기 시작했다. 오직 내가 노력하는 학생이라는 걸 보여줄 의도에서 였다.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을 시작으로 인터넷 정보검색사 1급, 정보처리기능사, 한자능력검정 2급, PCT, 컴퓨터 활용능력 2급, TOEIC, TEPS,
G-TELP 2급, E-TEST professionals, 국어능력시험 2급, 독일어 능력 시험(ZD) 등등 닥치는 대로 시험 봤다.
거의 대부분은 붙었지만 PCT는 국어 능력 시험이랑 겹치는 바람에 실기를 응시할 수 없었다. 컴퓨터 활용능력 2급은 필기는
합격했지만 실기는 아직까지 못 봤다. 내년 봄에 볼 생각이다. 토익은 4번 봤는데(1달 간격으로) 처음엔 540점이었는데 마지막에
본 건 850 나왔다. 텝스는 2번 봤는데(이게 토익보다 더 어려웠다) 처음엔 670인가 나오고 다음엔 745인가 나왔다.
6월~7월까지 해서 자격증 따는 게 어느 정도 일단락 됐다. 봉사활동을 해야 했다. 우연히 지역도서관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걸 알았다. 정보가 부족했던 나는 서울대 갈려면 몇시간이나 봉사활동을 해야할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7월, 8월 2달간 300시간 봉사활동을 했다.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보니 나처럼 많이 한 사람이 없었다. 보통
규정시간만 이수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9월이 됐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자격증과 봉사활동 때문에 정작 수능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독서실에 들어갔다. 공부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2일동안 8~10시간 자면서 공부했다.
그러니까 이틀이 48시간이라 할 때 40시간을 계속 공부하고 8시간을 자고 하는 식으로 시험보기 보름 전까지 살았다. (이 방법은
별로 권해주고 싶지 않다. 난 당시 시험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서 거의 동물처럼 눈에 살기를 띄고 살았었다. 그리고 단기간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밥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이나 롯데리아에서 사온 1000원짜리 리브 샌드를 먹으며(그때 리브 샌드
할인기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봤다. 항상 나를 괴롭혀온 수학이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이때 모의고사를 처음으로 봤는데
330인가 340대가 나왔다. 지난해 시험이 쉬웠었기 때문에 390대가 나와도 서울대 갈까 말까한 상황이었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60일 남은 시점에서 잠을 줄였다. 이틀에 5시간 정도 잤다. 위궤양이 생겨서 하루종일 배가 아팠고 디스크도
생겼다. (지금은 디스크는 다 나았지만 위궤양은 좀처럼 낫질 않는다)
수학은 이해하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었다.
문제의 유형과 풀이 방법을 외워 버렸다. 수학을 못하는 나로서는 그것도 힘들었고 요령껏 공부한다는 심리적 저항감 때문에 끝까지
괴로웠다. 이후 파이날 문제집 풀면서는 70대의 성적이 나왔다.
시험 보기 보름 전에서야 차츰 다시 정상 생활로
돌아왔다.
수능 시험을 치뤘다. 1교시 언어는 평상시처럼 풀었다. 시험 볼 때는 어려운 지
몰랐는데(개인적으로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다른 학생들이 '재수해야겠다'고 떠들어 댈 때 장난인 줄 알았었다) 집에 와서
EBS보면서 어려웠다고 이만기가 얘기해서 그제서야 어려운 시험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2교시 수학은 망쳤다. 외워서 푸는 것은
실전에서 안 통했다. 더구나 어려운 난이도의 시험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점심 먹으면서 울고 싶었다.
3,4,5
교시 어떻게 풀었는 지도 기억이 안 난다. 시험장에서 시내까지 90분 정도 걸려서 걸어갔다. 9시였던가 시간이 되자 대형 서점에서
답을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시험은 잘 봤다. 수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실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서울대 갈 성적은
아니었다. 맥주 한 캔을 사가지고 마시면서 집에 걸어갔다. 도로에 뛰어들어 차에 받혀 죽어버리고 싶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집은 조용했고 난 몰래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헌데 아버지가 어두운 거실에서 안 주무시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술 마셨구나." ".......네" "수고했다. 들어가 자라" ".......네"
다음 날 점심 때 일어나서 신문을 보니 어려웠다고 나왔다. 차츰 추이를 보니 서울대에 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1달쯤 지나서, 성적표 나올 때쯤 해서 영역별 반영을 하는 서울대 인문대와 법대, 사범대에는 진학할 점수가 나왔다. 내
점수가 법대는 대성에서 발표한 커트라인이었고 인문대는 10점이 남았다. 1차는 무난히 합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커트라인에 걸리는
법대는 무서워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군엔 서울대 인문대를 썼다. 가군엔 고대 법대를 썼고 다군은 한양대 법대를
썼다. 고대 법대는 최초 합격했고 한양대 법대는 최초에는 불합격했다.(그 다음엔 한양대는 확인 안 해 봤다. 고대가 된 이상 한양대는 볼
필요도 없었고 당시 서울대 1차 전형을 통과해서 2차에 필요한 서류 준비하느라 바뻤었다) 서울대 인문대 1차 전형은 당연히(내게는 당연히
였다. 10점이나 남는 점수였으니까) 합격했다. 그 사이 우선 고법에 등록을 했다. 320만원이나 하는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
마련하느라 학자금 대출 받았다. (이 대출금은 지금도 상환하고 있다) 서울대 2차 전형이 문제였다.
서울대 삼수생
비교 내신, 이거 속으면 안된다. 서울대는 수능 종합 1등급이라고 내신 1등급 주는 거 아니다. 서울대 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내신을 30등급으로 매긴다. 참고로 난, 추정이지만, 내신 30등급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내신 부분에서는 0점이었다는 얘기다.
(30등급도 기본 점수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그 기본 점수는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점수다. 당시에 대성에서 예측하길 설법은
내신 1~3등급 - 한 등급당 점수 차이가 아마 1.5였던 걸로 기억 - 이어야 하고 면접을 엄청 잘 봤을 경우 최고 7등급까지 응시해 볼
만하다라고 했었다)
서울대 삼수생 비교 내신에 희망을 걸고 있는 학생들이 간혹 보이는 데 정말 수능 시험 잘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350를 맞고 설법에 지원했다고 치자. 그러면 섫법에 지원한 놈들 중 나랑 점수가 같은 놈들을 추린다.
보통 서울대 오는 얘들은 거의 내신 1등급, 간혹 2등급이지만 설대 입시에서는 이건 아무 의미가 없다. (다들 아는 얘긴가?)
학교 내신 1등급이 서울대 내신 3등급이 될 수도 있고 10등급이 될 수도 있다. 하여간 나랑 같은 350맞은 설법 지원자가
10명이 있는데 이들의 서울대 내신 등급(절대 학교 내신등급이 아니다!!!)을 평균하니까 3등급이 나왔다고 하자. 그럼 나도 3등급이다.
그러니까 345점으로 설법 쓴 지원자가 있는데 삼수생이라 하자. 비교내신을 내는데 같은 점수대의 내신을 평균하니까 1등급이었다.
그러면 같은 비교내신적용자이지만 난 350맞고 서울대 내신 3등급이고 다른 녀석은 345맞고 서울대 내신 1등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삼수생 비교 내신이라고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 최대한 수능 성적을 높여 놓아야 (왜냐하면 보통 수능 성적이
높으면 높을수록 내신도 높아지므로, 참고로 서울대 내신 1등급은 한 학교에서 몇 명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다) 내신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
경쟁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내신은 수능 전영역의 총점으로 산정하는데 난 영역별 반영 점수는 높았지만 수능 총점은 도저히 서울대
올 점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여름에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서 서울대에 와 보았었다. 그래서 여길 꼭
와야지 하고 의지를 불태웠었는데 겨울에 다시 그 길을 면접보러 올라 갔었다. 서류심사야 이미 끝났겠지만 면접을 기다리면서 초조하기도
했지만 민망했다. 지금껏 혼자 공부해서 몰랐었는데, 정말 내가 나이가 많은 수퍼 울트라 장수생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긴 원서 접수할 때 접수받는 사람이 주민등록번호 잘못쓴게 아니냐고 물어봤었으니까....
구술 면접은 2차에 걸쳐 봤는데
1차는 간단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교수들도 그다지 지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2차 면접은 분위기가 달랐다.(나만
그랬나?) 내 의견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나도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무슨 말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연륜으로 교수들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고 '지들이 날 죽이기야 하겠어'하는 생각으로 그다지 얼지도 않았었다) 분위기가 엄청 험악해져서 어떤 젊은 교수랑은 거의 싸울
지경에(물론 말로) 이를 정도가 되었다. 도저히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설인과 고법중 어딜 가지 하며 고민하는 게 일과였는데 막상 불합격 판정을 받으니 기분이 멍했다. 떨어지니까 더 가고 싶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떨어진 것을. 고법가서 사시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보결로 붙어버렸다. 이틀간 정말 열나게 고민했다.
아버지랑 주위의 친척들, 어른들이랑 다 상담했다. 상담한 거 별로 도움 안 됐다. 다만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아들이
서울대 합격했다고 알리고 싶으셨을 뿐이었다. 결국 설인 가서도 사시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학비가 고대의 반도 안 되므로 설인에
들어왔다. 당시 인문대 350명의 신입생 중 단 2명이 등록을 안 했었다. 그 2명 중에 내가 끼일 수 있었다. 난
쓸모없을 지도 모르는 그 자격증 들과 봉사활동을 300시간이나 한 성의 때문에 예비합격자 순위에서 2등 안에 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설인 다니는 얘들 중에 아는 사람 있으면 나 알지도 모른다. 나, 설인에서 대학원 빼고 제일 나이 많다.
석사과정에 있는 사람 중 몇은 나와 나이가 같은 걸로 알고 있다.
오늘 학교에서 후기 졸업식하느라고 학교가 난리였다.
나도 어서 졸업하고 싶다. 난 지금 고시 준비중이다. 하지만 사시는 아니다. 예전엔 고시는 사시가 다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대 법대 안가고 설인 온거 후회하냐고? 전혀, 난 설인 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법을 안 가봤으니 그 쪽 나름의 좋은 점이 있겠지만 난 지금의 내 생활에 만족한다.) 난 지금 외시와 행시 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마음은 외시에 끌리는데 나이제한 때문에 쉽사리 못 덤비고 있다. 어차피 졸업하면 연령제한으로 일반기업체 취직은 못하므로
내겐 고시 밖엔 길이 없다. 만약 내가 고법 갔으면 사시 외에는 다른 길은 생각도 안했겠지만 설인에 와서는 시야가 넓어졌다.
지금은 표면적으로는 고시 공부를 하고 있지만 나이 제한 없이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하는 것의 접함점에 있는
것을 찾고 있다. 조만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면 설법에 못 간 건? 그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별로
신경쓰이진 않는다. 어쨌거나 법대를 가려한 건 사시에 합격해서 늦은 만큼 빨리, 화려하게(?) 자리를 잡기 위해서 였다.
한마디 하자면 돈 많이 벌고 권력이 있으니까 사시보겠다고 하면 욕하는 사람들 있는데 욕할 거 아니다. 그럼 자네(욕하는
사람들)는 돈이 싫은가? 돈 없이 살 수 있나? 그럼 권력이 싫은가? 아마 권력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을 텐데 권력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그 권력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가 문제이지. 법조인이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직종이라면 아무도 안 온다.
(이런 예를 들어 미안한데) 청소부 아저씨를 생각해 보자. 청소부 아저씨한테 연봉 1억 준다면 아마 청소부 고시가 생겨날 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 사람들 어렸을 때 청소부가 꿈이었던 사람은 없을 거다.
900명 뽑는 사시에 응시생 수가 3만명을
넘어선 것은 그만한 보상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과 재화가 쓸데없는 곳에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낭비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우수한 인재들이(그래도 사시 본다는 사람들은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젊음을
불태우면서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서울대 오는 거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 그럴 만한 유인이 있으니까 지속적으로 서울대가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다양한 대학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미술은 홍대, 공학은 한양대,
법학은 고대, 의학은 연대, 어학은 외대 이런 식으로.
서울대가 세계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다.
(아래의 얘기는 내가 서울대생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서울대가 세계 몇 위에도 못드는 대학이라고 하는데 그런 얘기는 서울대
들어와서 해라. 그런 얘기 하는 자네는 세계에서 별볼일 없느 서울대에도 못 들어오는 신세가 아닌가? 아님 세계 수위를 다투는
예일이나 하바드, 옥스포드 다니면서 그런 얘기 해라. 혹은 서울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 얘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자기가 먹을 수 없으니까 저 포도는 신 포도일거야 하는 거랑 (내가 못 들어가니까) 별 볼일 없는
학교야 라고 하는 건 비겁한 태도다. 그러면 자네는 그 별 볼일 없는 학교의 학생들 보다 더 별 볼일 없다.
사시 얘기로
돌아와서. 다 잘살고 싶은 거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법조인의 목표가 되야 한다? 물론 이런 분들은 대단한
사람들이고 존경한다.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돈 많이 벌 수 있어서 고시 본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다고 경멸해서는 안 된다.
잠깐 내 여친 얘기를 하겠는데, 내가 석달간 돈 모았던 것은 내 여친의 고생담에 비하면
상대가 안 된다. 내 여친은 서울에 올라가서 잘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무슨 70년대 얘기같다고? 내
여친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원래 살던 데는 집도 자기 집이 아니고 외할머니네서 사는 거였다. 재수도 종합학원은 학원서 주는
장학금 타고 다녔고 생활비는 알바해서 벌어서 살았었다. 용돈?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받아본 적 없댄다. 그래서 가끔 내가
용돈하라고 돈 주면(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돈은 여친이 나보다 훨씬 많이 버니까 장난으로 하는
거다. 고등학생도 아닌데 더이상 외할머니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차라리 서울로 간거다. 여친 아버지? 여친이 번 돈이나 안 뺏어가면
다행이다. 여친 엄마? 연락 안된다. 고아나 다름없다. 밤에 밀리오레에서 새벽 5시까지 일하고 잠깐 잔 다음에 9시에
학교에 강의들으러 갔다가 강의끝나면 다시 밀리오레에서 오후 7시부터 일하는 생활을 한 학기를 했다. 이것 말고도 점심때 전단지 돌리는
알바를 했다. 이렇게 하고도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학교 제적당하고 돈 벌기 시작했다. 그때 내 여친이
나 붙잡고 울었다. 자기도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손님들한테 상소리 안 듣고 살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누워서 4시간 이상 자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난 성공해서 꼭 여친을 행복하게 해 줘야 겠다고 결심했다. 2년이 채 못 된 지금 여친은 자기 가게도
가지고 있고 액수를 정확히 밝힐 순 없지만 돈도 억단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는 돈을 모았다. 하지만 여친이 돈 모으느라 고생했던 것은
옆에서 봐온 내가 아니면 누구도 모를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긴 글을 썼을까? 고시정보카페에 가려다 실수로
들어왔다. 옛날 생각이 나서 몇몇 글을 읽다보니 갑자기 화가 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70일 남았는데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겠죠?" "공부가 안 돼 미치겠어요." "다 잘 될거라고 믿어요. 님들도 다 잘 되실 거에요." . .
. . 이런 글들.
공부가 안 되면 하지마라. 그건 네 길이 아니다. 공부가 싫으면 네가 잘할
수 있는게 분명히 있다. 그걸 해라. 그게 네 인생에 도움이 된다. 만약 공부가 네 길이라면 날 봐라. 이 나이에
다시 공부한다. 내가 돈오하기 전의 공부는 공부가 아니었다. 공부한다고 흉내낸 것에 불과 했다. 공부가 너의 길이라면 다시
이 길로 오게 된다. 다만 때가 지금이 아닌 것이다.
70일 남아도 안 늦었다. 하지만 그딴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넌 분명히 "60일 남았는데 저는 할 수 있어요"라든가 "30일 빡세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얘기하고 있을 거다.
다 잘 될거라고 믿기만 해서는 안된다. 어느 나라 속담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희망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망을
안고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왜 내 얘길 저렇게나 장황하게 길게 썼고 마지막엔 건방지게 혹은 싸가지없게
(나 원래는 글 이딴 식으로 안 쓴다) 알겠나? '수주대토'라는 말 알지? 자네들의 입장이 그 송나라 때의 농부와 뭐가 달라.
노력도 안 하면서 수능 대박이라는 토끼가 저절로 손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난 이런 말 할 자격있냐고? 그래 사실
나 학벌에 환장해서 이 나이에 신입생이고 그야말로 운으로 서울대 들어갔다. 입학은 정말 천운이었지만 난 행운도 실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행운이라는 실력은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거라고 믿는다.
난 지금은 공부하는게 좋다. 지금은 정말
하루종일 공부하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난 예전부터 인문학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평생 이 공부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나이가 많아서 아무리 좋아하는 학문이어도 학계로 나갈 수 없다. 교수가 되고 싶지만 나이가 많아서 임용이 안된다.
좋아해도 할 수 없는 게 있다. 아무리 플라톤 책 보는게 좋아도 굶으면서 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해서
난 가난한 게 싫다. 떼부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돈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사회적인 지위도 얻고 싶다. 남들이 날
인정해 주길 바란다. 이런게 싫다고? 그럼 왜 공부하고 왜 노력하지?
난 숭고한 희생정신도 없고 거룩한 직업 의식도
없다. 세상을 바꾸어 놓겠다는 신념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겠다는 의지와 결의였다. 난 그냥 평범한 속물이고 허영도 있고 인간성도 그리 썩 좋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가치관이
변해서 지금은 공부하는 게 좋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곳인 대학에 왔다. 그리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하는 길을
찾고 있다. 그리고 여친이랑 장래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소시민적으로 살고 싶다. 난 당신 맘에 안 들지는 몰라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좋은 대학 가고 싶지? 그럼 공부해. 공부하다보면 괜히 인터넷 하고 싶고, 밖에 나가고
싶고, TV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지. 근데 그거 안하면 죽냐? 안 죽잖아? 그리고 인터넷하고 싶어 죽겠다는 거, 이런 건
네가 그걸 간절히 원하는 게 아니라 단지 공부하기 싫은 그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거야. 이런 카페에 들어올 시간 있으면 책상 앞에 앉아
있어. 그리고 공부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아니야.
주위에 고시생이 많아서 (나 신림동 고시촌에 살거든) 가만히
관찰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와. 난 이제야 초짜 고시생이지만 고시생 세계에서도 꽤 나이든 축에 속해. 주위에 보면 공부하는
자세가 안 된 놈들이 보여. 예를 들어 한 2시간 공부하고 2시간 노는 놈. 오전엔 죽어라 공부하더니 점심 먹으러 나가서 저녁 때
오는 놈. 한 이틀 열나 하더니 며칠 팍 놀다 나타나는 놈. 오늘은 몸이 별로 안 좋네 하면서 이런 식으로 자기한테 공부안 할
합리적인 기회를 부여하면서 노는 놈....
고시생이라고 다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니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놈들 보면 다들 학교가 그렇게 썩 좋은 학교가 아니야 (물론 전부 다 그렇다는 게 아냐.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하는 놈들이라고
좋은 학교 다니는 것도 또 아냐)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더니 고3이라는 기간이라는 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인 적이 없는
녀석들이 고시생이 됐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거든. 아무래도 꾸준히 공부했던 녀석들이 학교도 좋은 데 가고 고시도 합격하고
그러겠지. 그러니까 설법, 고법에서 사시 합격자가 많이 나오는 거고.
물론 좋은 대학, 고시 합격 만이 인생의
성공은 아니지. 하지만 이 카페 이름도 그렇듯이 자네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대학에 가기 위함이겠지? 그럼 그 대학을 아무 대학이나
가려고 하는 건가? 막말로 말해서 SKY가면 좋은 거 아냐?
그리고 꼭 대학가야만 하는가 하면서 부모님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달면서 마지못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지. 그러면서 SKY도 별볼일 없다네 하는 사람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 뒤에서 비웃는
사람들. 그런 사람은 대학가지마. 네들도 비겁해. 대학이 필요없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이유를 달면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잖아. 그럴 여유 있으면 정말로 네가 원하는 걸 찾아 거기에 힘써. 뭐가 무서워? 대학 졸업장 없이
사회로 뛰어 드는게? 부모님하고 충돌하는게? 그게 무서우면 조용히하고 평생 겁장이로 살던가.
집안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아마 정말 힘든 시간일거야. 나나 내 여친이나 다행히 잘 풀렸으니까 내가 여기다 이런 말 쓰는
거지. 그냥 힘 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
난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물론 밤을 새는 거지) 동대문
도매상가(누존이나 에이피엠, 청평화 같은데)에 나가서 일하는데(무지 힘든 일이야. 거의 막노동이야) 잠깐 쉬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 스포츠 신문
읽거나 화투 치고 노는 시간에 혼자 책보고 있으면 (지금은 법정의 '무소유'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보고 있지) 분위기
쐬해지지. 하지만 난 신경안써. 그리고 여학생들에게 한가지 알려주겠는데 도매 상가에 오면서 옷 한벌씩 사러온다거나 좋은 서비스를
기대한다거나, 한 번 입어본다거나 하는 건 기대하고 오지마. 물건 배달하고 수거하는 나도 척보면 소매업자인지 아니지 아는데 점주들이야
오죽 하겠어. 그리고 점주나 알바들은 척 보면 알기 때문에 소매가로 팔아. 그리고 교환, 환불하러가면 욕먹으니까 그냥 보세는
두타나 밀리오레 같은 데 가서 사.
글을 오래 쓰다 보니 무슨 말을 쓰려 했는지, 무슨 말을 썼는 지도 모르겠네.
제목에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썼는데 그래 너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그냥 나무에 와서 부딪히는 토끼는 아닌거야.
그래도 우리가 어리석다고 비웃는 그 농부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토끼를 기다리는 노력이라도 하지. 하지만 여기에는 그런 노력도
안하는 녀석들이 더 많아. 그게 네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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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적이군.... 학창시절 나보단 공부를 잘했었꾼.. 자자 화팅!!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도대체 몇살에 1학년이 된거죠?
정말 감동의 글이군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