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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 최 권사님
“엄마, 최영순씨가 누구야?! 최영순씨 찾는데” “할머니잖니” 그리고 저화기를 놓은 지 30분쯤인가 지나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나가 문을 열자, 할머니 나이의 노파 뒤를 따라 들어온 중년 신사가 갑자기 할머니 앞에 엎어져 할머니 손목을 잡으며 “어머니! 제 석환입니다. 석환이에요. 어머니!” 할머니는 석환이라는 신사를 와락 껴안으시더니 울음을 터뜨리시는 것입니다. “야 이눔아 니가 정말 석환이냐! 아이고 아버지 하나님!”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고 한 달인가 지나서 아침 운동을 나가셨던 할아버지께서 대문 밖 쓰레기통에 놓인 담요에 싸인 아기를 안고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아니,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왜 안고 들어오셨어요?!” 할머니가 역정을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침이라도 먹고 출근길에 들러도 늦지 않는데 뭐 그렇게 서두르느냐며 달래셨습니다. 아기가 하도 보채며 우니깐 할머니는 그렇잖아도 넘쳐나는 젖을 물렸습니다. 얼어붙은 아기의 뺨은 얼음보다 차가웠습니다. 할머니는 데리고 갈 때 가더라도 기저기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아이가 둘로 늘어난 할머니는 바빠졌습니다. “여보, 오늘은 아기 데려갈 시간 없겠는데. 바로 감독관 회의에 가야 해. 당신이 바로 파출소에 전화해서 데려가라 하면 되잖소.” 할머니 최 집사님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이 하나 더 키우라고 넉넉히 젖을 주신 것으로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반대였습니다. 공무원 월급으로 아이 둘 대학에 보내기도 빠듯한데 셋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일단 6개월만 키워보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름도 집 아이 오종환吳宗煥에 이어 오석환吳碩煥으로 지어주었습니다. 큰 불꽃처럼 그 인생 활활 타오르라고 석환으로 지어준 것입니다. 한자의 자수 음양도 잘 맞고 소리의 강약도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6개월이 가까워지자 부부는 곧잘 다투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변한 할머니는 계속 자식으로 키우자는 것이고 잘못하면 석환이 삼촌뿐만 아니라 고모와 아버지 온 식구가 잘못 될 화근의 뿌리가 될 수도 있으니 기관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복지기관에 신고한 지 일주일 만에 기관의 아주머니가 석환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 6개월 동안 자신의 젖을 먹이며 키운 자기 자식과 다를 배 없는 아이임을 들려주고 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석환이를 안고 바로 미국으로 직행했습니다. 2주쯤 지나서 그 아주머니가 미국 사람 양부모의 품에 안긴 석환이 사진 한 장과 그 집 사정을 자세히 알려주곤 가버렸습니다. 할머니는 며칠을 두고 우셨습니다. 아버지가 올해 43세시니깐 그러니 42년 만에 미국 신사 석환, 삼촌이 나타난 것입니다. 고마우신 양부모님의 배려로 뉴욕 근교 이름 있는 모 의과대학을 졸업 하고 그 대학 피부과 교수 겸 의사가 되었습니다. 마침 이민 온 한국계 2세 간호원 아가씨와 사귀게 될 때부터 한국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스티브 오, 오석환으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결혼식 전날 이곳 가족과 연결시켜준 복지기관 주소가 적힌 메모지와 자기를 안고 왔던 아주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 건너 주셨습니다. 그 동안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 아무런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아내가 조카 결혼 관계로 한국으로 가야하는데 이 기회에 같이 가면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로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 가운데 앉은 어디서 본 듯한 나이 든 부인이 보였습니다. 자기를 처음 한국으로 직접 안고 왔던 바로 그분 아주머니였습니다. 그분 앞으로 가서 사진과 메모지를 건넸습니다. 그 사진을 보시자마자 대뜸 “Are you O Seok-hwan?” “예, 제가 오석환이에요.” 자기를 처음 미국으로 품에 안고 데려왔던 부인은 두 사람을 상담실로 안내,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평생의 건강을 결정짓는 생후 6개월간의 황금기에 있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 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엔 생모 만날 꿈에 들떴다가 생각이 확 바뀌었을 뿐만 아니 라 생모보다 더 귀중한 사연을 알게 되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거듭 거듭 되뇌었습니다. 부인은 40여 년 동안 몇 차례 바뀐 지역 번호를 확인 뒤에야 통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실로 세상이 네 번이나 바뀐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도 만나고 모두가 오랜만에 즐거운 저녁을 보냈습니다. 미국으로 떠날 때 석환 삼촌께서 어머니께 비행기 표를 보낼 터이니 꼭 뉴욕으로 오셔야 한다고 당부당부하면서 여행자 수표 한 장을 건너 주었습니다. “여보, 여기 와보세요.” “왜 그래?!” “이것 보세요. 석환이가 주는 건네 이 도대체 얼마에요?!” “아니! 한 둘 셋…… 만 불이잖나!” 그렇습니다. 우리 돈으로 천만 원에 육박하는 큰돈입니다. 그래도 석환이에겐 오히려 약과였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 건강을 지켜준 고마운 사랑을 생각하면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돈 몇 푼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석환이 삼촌께서 떠나실 때 계속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여름 방학 때 저도 미국 구경 잘 했답니다. ‘와’ 삼촌 집 한 번 굉장하데요. 마당엔 수백여 년 된 아름드리나무가 댓 그루나 서 있고, 풀장은 기본, 맨해튼에 있는 병원을 보는 순간 입이 적 벌려지데요. 글 쎄 공부만 잘 하면 저를 유학시켜준댔어요. 와 신난다. 나도 공부 열심히 해야지.
미역 꾼, 김 권사님
태풍 지나간 이튿날 아침 갈고리 긴 장대를 들고 바다로 나갑니다. 여기 저기 떠다니는 길고 짧은 미역줄기를 건져냅니다. 한 두어 시간 이렇게 열심히 건져내면 한 리어카 채울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 권사님은 그저 감사하기만 합니다. 미역뿐만 아니라 뽕나무의 오디와 산딸기도 감사하기만 합니다. 수고 없이 그저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봅니다. 여러 차례 손이 가는 미역말리기는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 삼남매 아이들 짝지어 보낼 때까진 이것저것 팔아 공부시켰지만 지금은 오디, 딸기, 미역 따위는 반 갈라 목사님 댁과 대처 나간 삼남매치 네 등분 나누어 갈라 보내고, 나머지 반은 장에 팔아 감사 헌금합니다. 헌금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여름에서 가을까진 순 감자요, 추수 마친 가을에서 이듬해 봄, 햇감자 나올 때까진 쌀 한 톨 없는 깡 조밥만 먹던 그런 때를 생각하면 뽕나무 딸린 밭 열 마지기에 넓은 바다가 삶의 전부이지만 풍요롭지는 않지만 그저 드릴 것이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들에겐 지긋지긋한 태풍도 미역 꾼, 김 권사님께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만사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해물탕 집 사장, 이말례 권사
홀 밖 현관 입구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내어다 보니 좀 해선 남과 잘 싸우지 않는 임씨가 웬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과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샛까만 봉두난발에 차라리 옷이라기보다 걸레를 걸친 40 전후로 보이는 친구는 기어코 한 술 얻어먹고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해물탕 집 사장 이말례 권사님은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우선 먹겠다니 먹게 하곤, 임씨를 딸려 목욕과 이발, 그리고 옷도 갈아입게 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좀 전과는 아주 다른 몸집도 듬직한 말끔한 신사 한 분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도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3학년, 10살 때 어떤 아저씨가 영화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나선 게 화근이었습니다. 부두 식당에서 짜장면 한 그릇 얻어먹고 바로 똑딱선을 탄 게 끝이었습니다. 한밤 내린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고, 다음 날부터 철저한 감시 밑에 고기 잡는 뱃일에만 매달려 산 게 20여년, 정확한 나이도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데려간 아저씨가 무슨 병인가에 죽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부두에 내렸지만 밥 한 그릇 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통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이야길 듣고 있던 주인, 이 권사님이 갑자기 “청년, 너 이름이 뭐랬지?” “왜요, 박충시기요.” “충식이지?! 학교는? 보수학교지! 그렇지?! 아이고, 하나님 이 어찌 된 일입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야, 이놈아 네 충식이 맞지! 내가 네 어미야.” 첫눈에 몸집이 제 아빌 너무나 닮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눈매가 자신을 너무나 빼닮았습니다. 학원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 온밤 찾아 헤매길 시작으로 십여 년, 식당일도 접어 두고 전국을 헤매 다니던 남편은 그 길로 여러 가지 합병으로 앓다 돌아갔습니다. 그 후로 새벽기도는 물론 눈만 뜨면 중얼중얼 기도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충식이란 놈이 죽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선 그 간절한 기도를 20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란 은혜로 들어주신 것입니다. 비록 남편은 잃었지만 새로 아들을 얻은 일만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 충식이는 아무 쓸모없는 살아 있는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엇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에 선 것만으로도 이 권사님은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 나 집사님의 십의 일조
나 집사님은 요즘 고민 하나가 생겼습니다. 박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시면서 헌금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배시간에 형식적인 헌금 방식에서 벗어나 십의 일조 헌금, 생일 헌금, 각종 감사 헌금 등 헌금 봉투 색깔이 아예 구별되고 인적사항과 액수까지 기입하게 되어 있어 한 달, 두 달, 일 년 동안의 헌금 상황이 물론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박 목사님의 죽음에서 기적처럼 되살아난 체험적 신앙의 힘 있고 은혜로운 말씀에 이때껏 경험하지 못했던 신앙의 눈이 떠진 만큼 하루가 다르게 성도들의 영혼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교인들 스스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구도 개편하고 직접 전도대도 조직, 1주 2회 연중 노방전도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확장하는 교세와 함께 생활 방식마저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나 집사님은 자신의 수입 중, 십의 일은 물론 남편의 수입까지 합치면 그 얼마인데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하기야 헌금다운 헌금은 물론 감사헌금마저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당사자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나가는 것을 포기하는 건 더 못할 일이고, 머리 굴리기 명수인 나 의사로써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외과의 남편 김 박사는 자기 알아서 할 일을 그런다며 아예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문제가 어찌 혼자 처리할 일입니까. 그러나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으려는 주의였습니다. 이번 일은 액수가 액수인 만큼 함께 생각할 일이지만 모른 척했습니다. 누구와 의논할 일도 아니고 고1 때 담임 전도사님의 지도로 한참 신앙에 빠져 열심히 다녔으나 입시와 대학 공부로 멀어졌던 새벽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우선 새벽기도부터 나가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답 주실 것 같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기도의 응답이 다가왔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위에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의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구하는 일 중에 첫 번째가 기도 요, 십의 일조요, 전도며, 그리고 생활 가운데서 솔선수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응답이 왔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선배 신도님들의 밝은 얼굴은 천국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더 머뭇거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시 그 미신 비슷한 광신에 빠지지 말라는 혼자 똑똑한 체하는 남편 김 박사의 신앙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자신의 체면을 봐서도 김 박사를 안수집사에서 장로까지 올라 세워야 하는데 그 멀고 험난한 길이 눈앞에 선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 봉사하면 꼭 하나님께서 깊은 신앙으로 키워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 달 말 주일 아침에 의사 나 집사님은 자신의 수입의 십의 일조는 물론 남편의 것과 합산하여 수표 한 장으로 헌금봉투에 넣어 함에 넣었습니다. 평생에 살아오면서 그날처럼 즐겁고 기쁜 날이 없었습니다. 온 천지가 자기 것이었고 마음이 그렇게 넓고, 환할 수 없었습니다. 이듬 해 봄, 지금 성업 중인 자신들의 병원 건물을 제외한 도로 건너편 일대가 재개발된다는 시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의사 나 집사님보다 남편 김 박사님의 입이 더 크게 벌려져 있었습니다.
도우미 김복실 권사님
70년대 중반 한 때 ‘섰다면 목욕탕 굴뚝 아니면 교회 뾰쪽탑’이란 말도 있었습니다만 60연대 이전만하더라도 대중목욕탕이 한 동洞에 하나 있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명절 때는 목욕탕마다 생난리 법석이었습니다. 이웃끼리 날짜와 시간을 짜서 집단으로 출동했었던 것 기억하시죠? 아이들이 많은 집안에선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오륙 명이 넘는 아이들을 씻기려면 젖먹이로부터 연년생이 아니면 보통 2,3세 터울이다 보니 부부가 딸 아이 가릴 것 없이 두어 명은 데리고 가야합니다. 네댓 살 되는 커다란 머슴애들도 엄마 따라 여탕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입구에서 들어가지 않으려는 아이와 밀고 댕기고 한바탕 난리 끝에 찔찔 눈물을 짜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여간 커야지요. 온 목욕탕이 들썩들썩, 이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도우미 아줌마’ 한 분만 있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걸 생각해낸 분이 김복실 집사님이셨습니다. 김 집사님은 평양 모 교회 장로님의 따님이셨습니다. 남쪽 대구, 안동 하회 류씨 양반 댁 집안으로 도, 지적과에 근무하 던 공무원 남편과 결혼, 머슴애만 셋 낳고, 막내가 네 살쯤 되던 해부터 남편 유씨가 가끔 기침을 하며 살이 내리고 야위며 시름시름 앓다가 병명도 모른 채 입원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때 의술로는 불치로 여겼던 무슨 암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추측만 합니다. 명절 전날 아예 목욕탕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이집 저집 아이들 씻겨주고 돌봐주고 눈코 뜰 사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작 명절날은 몸살을 앓을 정도입니다. 교인 댁 아이들만 아니라 이웃집 아이들 보고 그냥 못 본 척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또 한 고비 어려울 때가 겨울 김장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난리 한 번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겨울나기 중에 가장 중요한 먹거리 중에 하나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아직 19공탄이 나오기 이전이라 연료가 더 큰 일이었습니다. 장작 땔감을 마구 벌채하던 때라 지금의 북한처럼 산은 벌거숭이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19공탄이 개발, 보급되고 사방공사 녹화사업 덕분에 푸른 산야로 바뀔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6.25 이전엔 미국에서 들어온 잉여농산물 ‘악수표’ 밀가루로 연명을 했지요, 매일 저녁 밀가루 수저비 아니면 칼국수 지겹도록 먹었죠?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면 라면 끓여 먹지’란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네들한텐 우스개가 될지 몰라도 우리에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아무튼 김복실 권사님은 오랜 세월 동네 도우미 집사님으로 권사님이 되신 회갑 가까운 연세에도 이 댁 저 댁 다니시면서 어려운 일 도와주시곤 하셨습니다. 남 어려운 일 보고선 가만히 계시지 못 하시는 진짜 하나님의 사자, 도우미셨습니다.
추어탕 집 고부 이야기
추어탕 집 고부 사이가 어떠했는지 온 시장 바닥 사람이면 알만큼 다 아는 일입니다. 처음 시집 온 새댁이 예수쟁이라는 게 구박의 이유였습니다. 새댁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제 할 일만 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하루 장사꺼리를 장 봐오시면 다듬고 영업 준비에만 골몰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아예 초장부터 교회 갈 생각은 포기했습니다. 아이들이 유치원 갈 5,6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어림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늘 범사에 감사하라고 속으로만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번뜻 떠오른 것이 새벽기도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숨 죽여 다녔지만 시어머니는 눈칠 채고 있었습니다. 부쩍 늘어난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찬송가라는 것을 얼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모르는 척 넘겼습니다만 제 버릇 남 주겠습니까? 요즘 손님이 떨어지고 탕 맛이 어떻다니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고, 몇 년 전에 있었던 지껄이고 지껄인 이야길 또 하고 또 하고 사람 징글맞게 늘어지는 지긋지긋한 잔소리, 예수쟁이 며느리는 못들은 척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을 계속 볶아대더니 마침 그날 큰댁에 제사가 있어 시어머니는 아침부터 차려 입곤 또 한 바가지 늘어놓곤 횅하니 나가셨습니다. 시어머니가 나가시고서야 화가 확 치밀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미꾸라지를 한 마리 한 마리 세듯이 넣는데 그날 며느리는 홧김에 한 움큼 듬뿍 더 넣어버렸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신축공사장 인부들과 그에 따른 손님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아! 잘 먹었다. 아지메 참 마싰네예. 솜씨 한 번 대단하시네요” 나가는 손님마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보통날과 맛이 달랐습니다. 미꾸라지 한 움큼 더 넣은 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잔소리쟁이 시어머니 미워 홧김에 한 움큼 더 넣은 게 맛을 확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그날 매상을 보고 시어머니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 이튿날도 예수쟁이 며느리는 시어머니 모르게 미꾸라지 한 움큼 더 넣어 끓였습니다. 그 건축공사 동안은 물론 이후에도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매일 문전성시 자리가 없을 만큼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끝없는 예수쟁이 며느님의 무려 6년 동안의 꾸준한 기도 덕에 새벽 기도는 물론 주일 밤과 수요 삼일 예배까지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두고 보세요. 얼마 가지 않아 하나님께서 시어머니도 교회 나오시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젊은 학자의 자살
S대 물리학을 연구한 젊은 학자 K씨가 유서 한 장 남기기 않고 아파트 15층 옥상에서 투신자살해버렸습니다. 시간 강사지만 강의도 나가고 박사 학위까지 획득한 처지라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훌륭한 유망주라고 주위에서도 부러워했습니다. 단지 한 가지, 30 넘도록 애인 한 사람 없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상상해 보지만 평소 밝은 그의 모습에 비해 전연 어울리지 않는 상상입니다.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멍하니 습관이 되어버린 정신 나간 모습은 옆 사람이 보기에 더 딱했습니다.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외사촌 언니가 찾아왔습니다. 모 교회 집사인 언니는 고아원 원장이기도 했습니다. 점심을 마친 언니 남 집사님은 차를 자신의 집 ‘꼬마 천사들의 집’ 고아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를 입양하라는 것은 아니고 가끔 들러 자원봉사도 할 겸 그러다 보면 차차 잊어버리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언니 네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풀리면서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 같은 것, 모처럼 흥분까지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입니까? 눈을 감고 가만히 음미해 봅니다. 이후 한 주에 한 차례씩 ‘꼬마 천사들의 집’ 고아원에 들러 봉사 활동에 전념하면서 절로 따라한 기도와 찬송 등의 예배로 자신도 모르게 신앙의 물결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한 해를 넘기고선 세례도 받게 되었습니다. 없는 아들 덕에 예수쟁이가 된 엄마는 자신을 찾게 된 것입니다.
윤 할머니의 큰 글씨 찬송가
할머니의 ‘큰 글씨 찬송가’에는 악보는 없고 주먹만 한 커다란 글씨만 있습니다. 70 평생, 성경책만을 끼고 다니신 할머니 윤 권사님은 이제 눈만 감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합니다. 요즘 감기 드신 할머니는 알토음정으로 설설 분위기만 맞춰 따라 갑니다. 옛날처럼 힘 있던 기도는 사라졌지만 할머니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은혜가 된답니다. 오늘 새벽에는 남편 이 장로께서 생전에 즐겨 불렀던 376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가 떠올랐습니다. 고된 훈련병 때 종군교회에서 처음 배웠다는 찬송간데 어려울 때면 의례 버릇처럼 흥얼거렸던 말하자면 18번곡이었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첫 추도 예배 때도 이 곡을 불렀습니다. 뉴욕에서 마취의사 일을 보던 아주버님은 자신이 없으면 병원 전체가 마비된다며 장례비용만 부치곤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섭섭해 하시던 어머니는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땐 형님은 잠자리가 불편하다면서 호텔 방을 얻어 사흘 동안 출,〮 퇴근하였습니다. 역시 돈이 좋긴 좋은 것인가 봅니다. 묘도 대리석으로 번듯하게 꾸며 놓으니 돈 많은 미국 자식 칭찬만 자자했습니다. 형님은 치매 시어머니 돌보느라 고생했다면서 봉투 하나를 건너 주셨습니다.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받아 나중에 열어 보았더니 걸세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빠닥빠닥한 달러 신권 오천 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딸아이 대학 입학금으로 잘 섰지 뭡니까.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빚을 내야하는 형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주신 은혜로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의 수척했던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역시 매일 새벽 드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증표로 믿게 되었습니다.
성가대원 설 집사님
백세에 얻은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명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온 힘을 다 해 번제의 향기보다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오니 하나님께 영광이요 저희들에겐 은혜와 큰 복 되게 하소서 성현이 엄마 설 집사님은 첫아이 성현일 가지면서 두 아일 키우기 7년 동안 성가대를 쉬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다시 봉사하고픈 생각이 들었지만 책임감 없이 지각이나 하고 그뜩하면 결석하고 그저 자리나 메우기 위한 대원이 될 바에야 처음부터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 두려움이 앞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즐겁고 재미난 황금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이것저것 찬양 이외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말려들 것이 걱정되어서입니다. 그러나 다시 봉사할 생각을 불러일으켜준 지휘를 맡은 선배 언니를 보면 자신의 걱정은 단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기우일 뿐 아무런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양한 성격을 지닌 아마추어 대원들을 상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곡을 완벽한 화음을 이뤄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성취감을 대원들에게 안겨드리기엔 어지간한 정성과 사명감 그리고 지혜로운 지도력을 지닌 지휘자가 아니면 이뤄내기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봉사의 상금은 천국 가서 받는다고 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봉사 자체가 선택 받은 축복일 뿐 아니라 가사와 곡에서 얻어지는 은혜의 순간, 뇌동腦動으로 분비되는 엔돌핀이 면역체계를 활성화시키고, 노화된 혈관 벽의 변화를 제거하며, 산성화 과정을 없앰으로써 노화를 방지하고, 통증 완화의 기능을 지닐 뿐만 아니라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위대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앙 좋은 성도 대대분이 나이보다 젊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장수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천국 가서만 얻어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가대장과 총무 그리고 대원들 모두가 합심일체 끝없는 노력 끝에 이루어낼 수 있는 은혜라 할 수 있겠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하고 즐겁게 찬양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의의가 이 땅 위에 이뤄지게.
김 박사님 넘어지시다
김 박사님은 이름만 대도 다 알만한 병원의 임상병리학 주임 교수였습니다. 비서 겸 도우미로 근무하던 이양이 결혼하게 되자 다음 타자로 내가 추천한 최양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일류 기업에 들어갈 실력은 되지 않고, 월급은 그리 많진 않으나 자기가 마다할 때까진 장래가 보장되어 여성 직종으로선 괜찮은 곳이라 생각되어 권유했던 것입니다. 동료의 돌도 되지 않는 여식이 백혈병으로 진단을 받았다며 한 번 확인해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들러 본 것이었습니다. 마침 점심을 마친 시간이라 최양이 고운 난백색卵白色 백자 다기와 함께 보온병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기막힌 향이 풍기는 두 잔의 차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차통 라벨을 보았더니 그럼 그렇지! 하동 쌍계사 야생 녹차 그것도 우전雨前이었습니다. 이 친구 호강 한 번 오지기하네. 질투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근데 이 친구 찻값이라도 옳게 주고 있는 것인가. 쌍계, 우전이면 8내지 10만은 거뜬히 넘을 턴데 세상 실정도 어두운 친구가 찻값이나 옳게 알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매번 대접만 받았지, 특히 아랫사람에겐 대접 한 번 해본 일도 없는 친구가 웬걸 싶었지만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지 10여년이 흐른 여름, 정년퇴직했다며 전화가 오고는 소식이 뜸했습니다. 나도 정년퇴직하고 매일 아침 등산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아침에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였습니다. 지난밤 기분이 좋지 않아 급히 병원으로 이송, 긴급수술을 받았기에 위급한 상황은 넘겼지만 조금만 늦었더라도 뇌졸중 즉 중풍으로 쓰러질 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술 마시는 걸 봐선 안 넘어 간 것이 이상하지! 퇴직 후 몇 년 동안 계속 저녁마다 술에 젖어 살았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즐기기만 하다가 올 일이 오고만 예견된 우환이었습니다. 퇴직 전 10년 동안은 최양이 아침마다 수삼, 대추, 감초를 넣어 집에서 따려온 약차로 숙취 해소와 더불어 위와 간의 보호와 점심 식사 뒤의 녹차 세 잔으론 혈액 속의 혈전 분해와 암 예방의 효험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퇴직 이후 그렇게 알뜰히 돌보아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 되는 이 여사는 찬이나 맛있게 만들고 돈 관리와 자식들 공부에만 신경을 썼지 건강에 대해선 절로 되는 것으로 전연 관심마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소 술 잘 마시고 다니니 건강한 줄로만 알고 믿었던 것이었겠지요. 알콜도 알콜이지만 기름진 안주가 더 문제였을 것입니다. 안주 속의 지방이 나쁜 콜레스테롤이 혈전으로 둔갑, 혈관에 축적하게 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아예 꽃병에 꽃다발 한 아름 안고 들어온 최양은 양지 바른 창가에 두곤 눈인사만 건네곤 나가버렸습니다. 20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가 벌써 30 중반의 노처녀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아우나 가족을 위해 절대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가끔 시내 호프집에서 김 박사와 최양이 만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기독학생회 총무까지 지낸 최양의 신앙이 탄탄하였기에 두 아우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두 조건의 상황이 맞물려 결혼을 포기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식물인간, 김 일병의 휴가
첫 휴가 나온 김 일병은 들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소 차분하고 침착한 청년이었지만 군인이란 신분과 첫 휴가란 분위기에 휩쓸려 더욱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쳤습니다. 걸친 정도가 아니라 집중 포화를 맞은 김 일병은 문자 그대로 넉 아웃 되었습니다. 큰 도로에서 골목을 돌아서는데 두 놈의 깡패가 달려들어 마구 구타하곤 지갑과 휴대폰, 심지어 동전까지 싹 털어선 달아났습니다. 근데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정신 잃고 넘어진 김 일병의 뒤통수를 걷어차곤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렇잖아도 반상회에서 골목 입구에 외등과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건의했건만 경찰에선 눈도 깜짝 하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당한 게 올해만 해도 너덧 차례 됩니다. 병원으로 실려 간 김 일병은 의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설마설마 한 것이 열흘이 지나서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야 부랴부랴 부대에 알리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지만 뾰쪽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군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지만 김 일병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대로 민간 병원에서 치료 하기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치료래야 산소마스크에 한두 차례 링겔이나 맞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김 일병 아버지 김 장로님은 아들 옆에 붙어 앉아 성경 한 구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 5:25> 읽곤 기도하고, 읽곤 기도하고, 김 장로님은 오직 한 가지 아들은 꼭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 하나만을 붙들고 기도에 기도를 거듭했습니다. 근데 웬 일이입니까? 의식을 잃고 누운 지 무려 87일 만에 김 일병은 거짓말처럼 눈을 부스스 뜨며 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듣는 자는 일어나리라’ 김 장로님의 굽힐 수 없는 강한 믿음, 신념, 정신력이 아들을 살린 것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믿음 하나만이 죽은 아들을 살려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휴가를 마친 김 일병은 이제야 털털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형, 장호씨
형 장호씨는 23세이던 11년 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8살이나 아래인 15세 아우 창호씨를 돌봐 왔습니다. 6년이 지난 아우 창호씨가 21세 된 3월, 생활을 비관해, 빙초산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식도와 위가 모두 오그라들어 대장과 식도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식도와 연결된 장마저 기능을 상실해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장 180센티, 몸무게 35킬로그램으로 말라버린 아우를 그냥 둘 수 없어 형은 생업을 포기한 채 동생의 간병에만 전념했습니다. 형은 그 동안 모아 놓았던 5천만 원을 다 쓰고 말았습니다. 수명이 다 된 걸 느낀 아우는 고향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아우 창호씨가 술 마시고 들어온 형에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 죽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형은 그날 저녁 아우 창호씨를 교살하고 자수했습니다. 2심 법원은 징역 3년 6개월이란 1심의 원심을 깨고 징역 3년에 집형유예 4년을 선고했습니다. ‘수년간 자신과 가족의 생활까지 희생하면서 돌봐 왔고, 스스로 자수했다는 점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했습니다. 과연 아우의 소원대로 죽여준 것이 잘 한 일인가?! 형 장호씨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봅니다. 아우의 죽여 달라는 부르짖음 이전에 아우를 죽일 생각을 해 본 일은 없었던가. 반성에 반성을 거듭 생각의 깊이를 파봅니다. 이젠 자신이 슬퍼집니다. 정말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고 무엇이 무엇인지 사리의 분별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울증의 깊은 단계. 어느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던 순간 어릴 때 아우와 함께 다녔던 교회주일학교 얼굴 고운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의 따님이었을 것입니다. 따님은 결혼 후 멀리 가셨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라오. 장호군이 하나님과 인연을 맺게 하시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각본이요. 어차피 당신은 찾아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어 있은 것이요.” 처음엔 이 황당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니 당분간 교회 다니기로 했습니다. 마음의 빛을 얻고 진짜 지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우를 살해했다는 사실보다 예수 믿지 않은 죄가 더 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란 고백이 기도의 첫마디가 되도록 많이 자랐습니다. 더욱 그 신앙 반석처럼 굳고 강한 신념으로 가득 차시길.
교도관 김 집사님의 휴가
교도관 김 집사님은 오늘 아내와 사소한 다툼 끝에 상처 준 죄목으로 2년의 형량으로 징역을 살고 있는 재소자 박재민씨로부터 부탁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길로 처는 나가버렸고 노모와 6살짜리 아들 하나가 있는데 벌써 두 달째 깜깜 무소식이란 것입니다. 혹시 무엇 하나 잘못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닌가 걱정되니 여름휴가 동안 한 번 다녀와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김 집사님은 쾌히 승낙을 하고 이번 휴가는 시골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벌써부터 입이 댓 발이나 빠져나왔습니다만 해수욕 가기보다 농촌 체험 학습의 좋은 기회라고 설득시켰습니다. 할머니와 박씨 아이에게 줄 옷가지 몇 벌과 선물 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노모께선 오래전부터 요통으로 꼼짝 달싹 못하고 누워 계셨습니다. 오히려 6살 아이가 할머니를 돕고 있는 형세였습니다. 논과 밭은 폐농상태였고 자기 농사도 바쁜 상황에 어느 누가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도관 김 집사님은 우선 집안 청소로부터 시작해서 집 안팎 텃밭에 물만 주면 채소와 오이를 따 먹을 수 있게 밭을 일구는 데만 2,3일 걸렸습니다. 아내는 이불을 시작해서 여기저기 쌓인 빨래 처리에만 시간을 다 빼앗겼습니다. 몸은 피곤하여 파김치가 되었지만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소장님께 자신의 재소자 가정을 방문했던 일을 보고하고 즉시 재소자 박재민씨의 특별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다음 날 즉시 결재가 나고 노모와 아들을 위한 5일간의 특별 휴가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사고 시엔 모든 책임을 진다는 교도관 김 집사님의 각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감꽃 목걸이
감, 감, 감꽃 목걸이 주렁주렁 걸어주시곤 초롱, 초롱, 꽃 초롱 초롱꽃 핀 교회 꽃밭에 앉아 “아버지 하나님, 이 말썽꾸러기 손자 녀석 훌륭한 하나님 일꾼 되게 하소서” 제 손 잡으시고 기도해주시던 할머니, 여든이나 되던 오월 어느 꼭두새벽, 새벽기도 가시다 넘어진 며칠 후 돌아가셨습니다. 감꽃 가득 늘려진 오늘 오후 교회 앞마당 지나 안개꽃에 흑장미와 백합 한 아름씩 안으신 할머니, 잠시 현관 앞에서 진주 빛 대문니 보이게 환하게 웃으시더니 교회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생전 여느 토요일처럼 꽃꽂이하러 오신 걸까요. 쑥부쟁이 모깃불 저녁 마치고 날이 어두워지자 할아버지께서 쑥부쟁이 한 아름 안아다 모깃불을 지피셨습니다. 진한 쑥 향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던 영식이는 오후 늦게 소 먹이다가 소를 놓치고 울면서 혼자 돌아왔을 때 그저 웃기만 하시던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하얗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영식이는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는 연기를 보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도 모깃불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속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어둔 등잔 밑에서 성경 읽으시던 할아버지도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영식이와 할아버지가 본 예수님 얼굴은 한결같이 따뜻한 양털 미소였습니다.
야호 어린이 집, 영원이
지금 ‘영아 전담, 야호 어린이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막 점심을 끝낸 아이들이 우유병 하나씩 들로 잠에 들었습니다. 영원이의 부모님은 지금 살아 계시지 않습니다. 한 해 전에 두 분 부모님께서 꼬마 승용차 마티스를 타고 새벽 기도 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교회 입구 좌회전을 기다리다 급히 달려오던 새벽 덤프차가 미쳐 헨들을 꺾지 못하고 바로 충돌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손써볼 사이도 없이 당하고 만 사고였습니다. 영원이는 겨우 돌 지난 한 살짜리 젖먹이. 할머니와 곤히 잠자리에 든 시간이었습니다. 당뇨를 앓아오시던 할머니로선 한두 달도 아니고 혼자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손자 영원이를 돌보고 키우기엔 무리였습니다. 하루 몇 시간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도와주었지만 친척 모두가 제 살기에 바쁜 판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어찌 할 도리가 없어 우선 이곳 야호 어린이 집에 오게 된 것입니다. 마침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아이 하나 얻지 못한 맞벌이 부부교사 설 집사님이 자기네들의 아기는 포기하고 양자를 들일 생각 하던 참이었습니다. 첫아이 자연유산 이후 백방으로 여러 병원을 다녀 보았지만 아기집이 약해 착상을 못해 희망이 없다나요. 저희들 수정란을 이식한 대리모도 접고, 영원이를 맞을 생각으로 굳히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매일 부부가 함께 새벽기도 다닌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 영원이 부모님도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신령님 떠나시다
영옥양이 배정 받은 고등학교는 미션 스쿨인 S 여고, 무당인 어머니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영옥양은 걱정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영옥양이 네 살 때 시름시름 어디 이렇다 하게 아픈 데도 없이 앓던 아빠 때문에 이곳저곳 물으러 다니다가 몇 번 굿을 하게 되었고, 그래도 효험도 없이 아빠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내림굿을 받곤 무당이 되었습니다. 생활방편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영옥양은 무당 딸이라는 놀림 때문에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S여고 진학하고 나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교회 다니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의 굿에 신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아무리 말려도 영옥양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은 영옥이를 당분간 자신이 맡아 돌보겠다고 어머니를 설득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굿도 잘 되지 않고 자신도 시름시름 아프기도 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영옥이 어머니를 찾아가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딸 때문에 고생하셨지만 이제 장래를 위해 그만 둘 때가 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굿판에 예수쟁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도 굿이 내리지 않았던 사실을 체험했거니와 이제 딸애가 교회 다니게 된 때부터 아예 굿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지 두어 달 지나서야 영옥양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어머니는 굿집 간판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신령이 떠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영어 선생님이셨습니다. 지금은 물러나셨지만 한때 비까 뻔짝 날린 영어 선생님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영어로 무어라 말씀하시려 하면 극구 말리십니다. 한 마디도 못하게 합니다. 아이들 영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순 엉터리 발음으로 잘못 버릇 들면 피해만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시려면 한자나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사촌과 외사촌 두루두루 아이들 이름은 모두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오늘 새벽잠이 깬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에 계셔야 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새벽마다 할아버지께서 교회 기도하러 다니신 걸 우리는 몰랐던 것입니다. 얼마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어머니도 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은 골수 예수쟁이였습니다. 우린 전연 알 수 없었습니다. 근데 할아버지께서 들고 다니시는 가방이 가끔 아버지가 목욕탕 가실 때 들고 다니시는 목욕가방입니다. “할아버지, 목욕 갔다 오세요?” “아니다. 교회 다녀오지” “그럼 그 가방 속에 뭐 들었어요?” “성경책 들었지” “애, 세면 가방에……” “아니야, 이놈아……” 할아버진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세면도구가 들면 세면 가방이고, 똥이 들면 똥 가방이고, 돈이 들면 돈 가방이며, “성경책이 들면 성경책 가방이지. 네 머리에 욕심만 가득 들면 욕심쟁이, 놀 생각만 가득 들면 놈팽이, 나처럼 예수님 생각만 가득 들면 예수쟁이” 머리에 뭐가 들었느냐에 따라 그 그릇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물론 평소에 늘 뭔가 찬송가 같은 걸 흥얼거리시는 걸 보니 진짜 예수쟁이신가 봅니다.
원예사 원 기사의 꿈
청년 원예사 원씨 역시 어릴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가벼운 정신지체 장애인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예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 시키시는 대로 원예학교를 잘 다녔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키우고 만들고 하는 창작 작업보다 보람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드리러 시내 나오는 일보다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매일 화원 온실 방에서 기거하기 때문에 하루 몇 차례 배달하는 일 외는 외출하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은 화훼 이외 분재까지 맡아 배우느라 여간 바쁘기 짝이 없습니다. 원씨는 교회 강단에 놓인 장식 꽃꽂이나 분재를 볼 때마다 지금까지 배워온 만큼 안목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게 창작의식이고 인류 문화를 발전시켜준 하느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원씨의 기본 설계는 일 년 사시 향기 나는 흰 꽃들로 꾸미고 싶습니다. 난, 백합, 치자, 녹차, 호랑이발톱, 등 화훼와 분재를 두루 교체시켜 가며… 예배 시간 내 그 생각, 꿈에만 젖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천여 평 부지에 백여 평짜리 현대씩 설비를 갖춘 유리 온실이 필요한데, 월 100만원도 되지 않는 지금의 월급으로는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술만 잘 익혀두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꼭 마련해주시리라는 어쩐지 믿는 구석이 생깁니다. ‘천 평 부지에 백 평짜리 유리 온실’ 꿈도 만만찮네.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그래도 꿈이 있어 그 청년 아름답지 않습니까,
Ⅱ
산울림의 법칙
우리 서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는 법칙 중의 하나가 메아리의 법칙이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은사가 메아리처럼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수지맞는 장사란 것이다. 그런데 그 메아리라는 놈이 한 번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힘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되돌아오지 않던가. 그 소리가 크면 큰 만큼 여러 차례 오래도록 반복 울려오거니와 아애 그 소리가 작으면 메아리는커녕 사라지고 만다. 얼마나 간절하고 간곡한 진정성이 담긴 기도인가에 따라 그 메아리의 되돌림도 커질 수밖에 없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식구, 아니 내 당대 식솔들만 아니라 두고두고 대를 이어 반복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특히 지도자를 위한 간절한 내 기도가 복이 되는 것이다. 지도자 하나 잘 못 만나면 두고두고 고생덩어리다. 그 교회와 그 나라와 그 직장과, 그 가정의 운명이 한 사람의 지도자에 달려 있지 않던가. 내가 성령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선 우선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좋던 나쁘던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대통령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향해 던진 정죄나 저주란 부메랑은 오히려 나에게 되돌아와 일격을 가하지만 메아리란 기복은 정성을 다 하면 다 한 만큼 거듭거듭 은혜로 나에게 되돌려 주신단 말이야.
클린 선데이
대개의 교회에선 먼 거리 교인들의 출석을 돕기 위해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도 많은 교인들이 승용차로 교회 출석하심으로 온 마당 가득 차들로 꽉 찹니다. 이왕 승용차 말이 나왔으니 말씀인데 주일 대예배 때만이라도 차를 집에 두고 오시면 어떨까요. 가까운 거리에 계신 분은 걸어오시고, 중거리 교인께선 교회 셔틀버스를 이용하시고, 장거리 교인께선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면 1주, 1회만이라도 클린 선데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자동차 배출 가스라는데 이 하나도 실행하기 힘 든다 해서야 ‘그 의의를 구하는’ 기독교인의 태도가 아니지요. 만약 한국의 신, 구교 교인 모두가 실천할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아주 크리라 믿어집니다. ‘뭐야! 교회 말아먹을 일이 없어 되지도 않은 문디 같은 그것도 아이디어라고 지껄여?!’ “죄송합니다. 뭐 할 일도 없고 해서 생각한다는 게 그런 망발 늘어놓아 그저 죄송합니다.” 되게 야단치시네요. 오늘 드릴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제가 무릎이 좀 좋지 않거든요. 무릎을 잘 굽히지 못해요. 그래서 승용차를 타더라도 늘 조수석에 앉아야 해요. 교회 셔틀버스를 타지 못하는 것도 원로 장로님을 재치고 감히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늘 피해서 걸어 다닌 것인데 철없는 아내가 그걸 그대로 차타고 오면서 내뱉어 놓았나 봅니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야 장로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다음 주부터 그 자리를 빼앗아 타고 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해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닙니다. 몇 주 동안 다음 정류소에서 타시던 모 집사님 내외분이 벌써 몇 주째 보이지 않는 게 아닙니까. 자신보다 나이 든 교우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 준 것도 모르고 “오늘 새벽엔 보이시던데 어디 가셨는가?” 가만히 있었으면 반점이라도 딸 텐데 아니 글쎄 뭐 잘 났다고 입을 떼기는! 운전하시던 집사님이 벌써 교회에 와 계시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아버지 하나님, 서로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믿음들을 주셔서 그저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천하의 지성, 이어령씨가
미국으로 유학, 어렵게 공부한 끝에 변호사가 됐고, 한때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로 활약하면서 청소년 마약 문제를 다뤘던 자랑스러운 딸, 교민사회에서도 성공한 한인이자 전도가 양양한 유망주였던 민아씨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선 샘 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다.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나 암이 재발했고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아들이 특수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났다. 약물치료를 요구하는 학교당국과의 싸움과 기도 끝에 변호사 사무실까지 문을 닫고 아이 치료를 위해 무조건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는 미국인 교목 앞에서 통곡했어야 했다. 하와이에서 자신의 망막이 파열돼 시력을 잃었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마저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안보여 설거지를 못하는 딸을 보자 몹시 마음 상했던 아버지, 이어령씨가 미국 사람들은 손이 커서 수술을 잘 못하니 한국으로 가시자해서 결국 한국까지 오게 되었다. 근데 한국 병원에서 진찰을 받는데 망막이 나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혹시 미국 사람이 영어를 빨리 해서 못 알아들은 것 아니냐’고 오히려 되물었단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못 해준 것을 해준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 아니냐”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는 그가 7월에 세례를 받을 예정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윤영찬 기자의 기사 발췌. 딸 민아씨와 손자의 길고 길었던 투병과정과 완치되기까지의 경로를 지켜본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의 석학, 아니 동양을 넘어 세계의 지성, 그 완고하리만큼 얼음장보다 차가운 천하의 지성 이어령씨도 굳고 흔들림 없는 뜨거운 딸의 신앙 앞엔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에 더 확실한 지식이 없듯이 영성 또한 체험을 통한 영성에 비할 아무런 영성도 없다. 영적 체험을 잘못 이해하면 기적을 요구하는 사탄의 욕구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타인)의 삼각관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체험이 성신이 작용하는 은총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상한 기적 같은 특별한 응답을 바란다면 오히려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평소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하고, 용서 받는 현실 생활 속에서 가슴 벅찬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선 미신을 따라가는 샤만 정도의 원시종교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성은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 신이 이미 준비한 섭리에 의한 것이란 뜻도 이런 맥락으로 설명되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영성은 오직 하나, 사랑이란 감동밖에 없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만이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딸 가은이의 기도
아빠 최승옥 경사님은 포도염에 걸려 자외선을 막아주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녀야 하는 난치병 환자이시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 맛사지사로써 일하시던 엄마는 직장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는 유치원에도 다녔습니다만 지금은 하루 종일 동생 가영이를 봐야 합니다. 아빠가 아침에 지어 놓은 밥을 국도 데우고 반찬도 챙겨 동생 가영이와 나눠 먹는 일은 가은이의 몫입니다. 교회 유치원에 갈 수 없는 가은이는 늘 밥 먹을 때면 동생 가영이와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꼭 들어 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유치원 보모 옥 선생님이 그러셨습니다. 손을 꼭꼭 잡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엄마도 퇴원하고 아빠도 색안경을 벗어버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그러셨습니다. 아빠 다니시는 경찰청 아저씨뿐만 아니라 이웃 경찰청 아저씨들도 힘을 모아 얼마씩 내어 엄마 수술비를 마련해 주기로 작정을 하고 모으는 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가은이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일까요. 가은이는 얼마나 기뻤는지 거듭거듭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퇴원하게 되어 다시 교회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마음 고운 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떠들고 야단 법석치지 않기로 예수님과 꼬리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였습니다.
첫눈
1,2월도 다 지난 3월 초순 그도 꼭두새벽에 가랑빈지 진눈개빈지 구분도 되지 않는 궂은 날씨, 가로등과 지나가는 자동차 라이트에도 비쳐 보이지 않는 몇 점 차가운 것이 새벽기도 가시는 할머니 뺨을 적셨습니다. 그저 그렇게 쌓인 것도 없이 지나쳐버린 첫눈. 성령님의 은사는 밀물이나 불길처럼 다가오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그렇게 흔적도 없이 내렸다 사라진 첫눈처럼 늘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체온과도 같은 따뜻한 느낌, 느낌 그것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습니다.
당황, 황당
나이도 나이 같잖은 나이에 당황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글쎄, 주일 교회에서 시간이 일러 계단 입구 자판기 옆, 의자에서 좀 쉬었다 올라갈 요량으로 성경책 가방을 놓은 옆에 누군가가 방금 뽑은 율무 차 한 잔을 놓지 않겠어요. 순간 나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역시 교회는 달라. 그렇게 생각하고 그 잔을 집어 마셨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걸 마시면 어쩝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급히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보니 마침 동전 두 개가 손에 잡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순간 진땀이 흘렀습니다. 동전 두 개가 있었기 망정이지 망신도 망신,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진땀이 납니다. 근데 그분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자기가 뽑아 놓은 차를 아무 말 없이 마셔버렸으니 그것도 율무 아니면 마시지 않겠다고 우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뽑은 것인데 얼마나 황당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참으로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근데 순간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역시 교회는 달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꼭 교회라고 내가 생각한 만큼 별천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제가 둔해서겠죠. 그렇잖으면 대책 없는 순진함이나, 비판 없는 순수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죠. 분별없는 이런 일이 빈발하면 망신살이 뻗히겠지요. 하얀 은행 한 알
“할아버지, 제발 그 은행 줍지 마세요. 꼴란 하나네요. 창피하지 않으세요?!” “아니야, 하나면 어때! 하나가 없으면 둘이 없고, 둘이 없으면 셋이 없는 거야.” 간밤 바람에 몇 알 떨어진 은행 줍는 할아버지께 손자 준호가 볼 메인 소리로 나무라는 소립니다. “동전 하나 모자라 꼭 타야할 버스를 타지 못하는 때도 있고, 과일 한 알 모자라 팔아야 할 과일을 팔 수 없게 될 때도 있는 거야. 예수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셨잖니?! 그만큼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거겠지. 이건 좀 다르긴 하지만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이 타락해 열 사람의 의인만 있으면 살려주겠노라 했는데 나중엔 한 사람의 의인도 없어 멸망하고 말았잖니! 결정적인 순간엔 그 하나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야! 너도 그 중요한 한 사람이 되길 이 할배는 기대하마.” 벌써 오래 전부터 돌아가신 그해 10여년이 넘게 할아버지 김 장로님께선 넉넉히 한 말이나 됨직한 그 이상한 냄새나는 은행 알 하나하나 주서모아, 깨끗이 씻어선 고아원 아이들에게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대구 사람들의 능금 사랑
5,60년대 대구 능금은 아주 달고 맛이 좋았습니다. 기온의 차가 심하고 분지라서 능금 맛을 내는 기후 조건이 그렇다는데 온난화 영향으로 기온이 올라 자연스럽게 위도가 높은 북방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은 안동을 넘어 강원도 영월까지 올라갔지 않습니까. 지구가 더 더워지면 글쎄요 휴전선을 넘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해 제일 먼저 선 보이는 품종이 허벅허벅 파란색의 왜말로 이와이라 불리는 축이고요. 다음이 홍옥과 양광, 가을 사과로 생산량이 가장 많으며 저장하기에 적합한 껍질이 두텁고 질긴 감흥은 겨울에 먹기에 적합한 품종입니다. 겨울 서리를 맞고 나서야 제대로 단맛을 내는 그 놈이 진짜 대구 능금인 것입니다. 낙과는 낙과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되고 제대로 수확한 정품은 돈푼이나 있는 부자들이 먹는 것입니다. 아무튼 대구 사람들은 돈 있는 사람들은 돈 있는 대로,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없는 대로 사과 하나는 싫건 먹거든요, 그래서 대구 사람들 사이엔 미인이 많다고들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선 이렇게 고르고 평등하게 대구 사람들에게 사과를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탈렌트 재능대로 마음껏 발휘하고 누리라고 허락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굴 없는 천사
‘얼굴 없는 천사의 정체에 대해 시청 주변에서는 추측이 난무하다. ‘과거 조직폭력배’나 ‘선미촌 포주설’, ‘일반 사업가’로 모아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 선행 당사자가 이 따위 글을 보았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과거야 뭘 했던 무슨 상관인가? 동전 한 푼 내놓기 어려운 세태에. 그저 고개 숙여 감사만 하면 되지 무슨 말이 많을까! ‘올해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적힌 메모지도 함께 넣어져 있었다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한 천사임에는 틀림이 없군. 내년에도 이분 같은 천사들이 많이 하늘로부터 눈송이처럼 많이 내려와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왜 아이처럼 눈물이 자꾸 나려하지! 눈물난다고? 의연금이라곤 한 번도 내지 않는 이 스쿠루지보다 흉측한 놈이!
사탄의 노래
아직 잠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한 엘레베이트가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다. 문이 열리면 목을 달아 멘 처녀 귀신이 앞으로 확 덮칠 것만 같다. 밖엔 폭우가 아직 쏟아지고 있다. 사탄 자네도 그런 빗속을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로 캄캄한 그것도 새벽길을 가기는 싫을 거야. 자넨 나와 동행하는 그림자가 아닌가. 내 육신의 약점으로 야기되는 틈새, 즉 느슨해진 정신력이 가져오는 영혼의 붕괴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턱도 없는 소리, 한두 번 약점을 보였다고 성공한 걸로 단정하지 말게. 그게 자네 허점이며 한계란 걸 알고 있겠지? 누가 그러데 우리 인간 최고의 약점은 절망이라고. 그렇지, 절망 없이는 성공도 없다는 걸 우리는 알거든. 절망해 보지 않은 성공은 참다운 성공의 맛을 알 수 없기 때문이지. 몇 번 실패했다고 자포자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끝내 이루고 마는 강한 정신력, 의지, 신념, 믿음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하나님의 섭리임을 자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일세. 어때. 겁나지?! 게으름도 우리들 약점 중 하나지. 자만, 겸손한 체하는 사악한 오만함 그런 것들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은 자존심이지. 이 자존심을 잘만 건드리면 펄펄 뛰면서 난리 야단 법석 뜨는 꼴이란 볼만하지. 자넨 하나님보다 단 한 가지 부족할 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생명만은 어찌 할 수 없으니 자네 위협은 단지 공갈협박에 지나지 않지. 제발 그 자존심만은 건드리지 말아주게. 부탁이네.
화살의 길
반도 가지 못한 어그적어그적 기어가던 화살이 종일 내린 눈과 혹한으로 얼어붙은 산등성이 어디 메쯤 머물러 선다. 더 일어서기도 힘든 고통, 화살은 다시 불을 일으킨다. -졸시 「화살」의 일부 한국 KBS를 포함한 동양 3국 국영 방송국이 합동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서 보여준 이들 순례자들의 고행은 <운남, 사천에서 티벳 라싸까지 오체투지, 즉 온 몸을 땅 바닥에 던지며 매일 6㎞ 정도를 이동하여 7개월 정도 소요되는 2,100여㎞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순례자들 중에 수레를 끌고 가는 64세를 넘긴 고령자도 있다. 그는 순례 도중 자신의 목숨마저 던질 각오다. 순례 도중 죽는 것이 장족들에게는 가장 상서로운, 축복받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는 자신을 위해 고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중생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 진정한 선善을 행하는 것이며 윤회의 업에서 해탈,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순례는 고통에 맞서는 인내의 과정이다. 12월 말, 티벳 고원의 온도가 영하 2~30도 밑으로 내려갈 때 방다의 랑나산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가장 큰 고통과 마주한다. 설원의 산을 오르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평원을 지날 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신에게 의탁한다. 땅에 부딪혀 생긴 이마의 멍이 굳은살로 변할 때쯤 그들의 오체투지도 속도를 더한다. 이런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이들은 왜 순례를 하는 것일까? 이들은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모든 순례자들이 향하는 곳이자 티벳인들이 일평생 한 번이라도 순례하길 소망하는 곳이 티벳 라싸에 있는 조캉 사원이다. 그들은 조캉 사원에 모셔진 불상을 만나기 위해 먼 순례의 길을 떠난다. 최종 목적지인 티벳 라싸 조캉 사원에 도착해 10만 배를 올린다. 절을 하는 데만 2개월이 걸린다.> - KBS1 「차마고도」에서 발췌 7개월에 2개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기까지 모두 1년 여의 세월을 보낸다. 그들은 크고 넓은 마음과 윤회의 업에서 해탈, 극락왕생하기 위해서 고행을 감수한다. 이러고 보면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자체가 수행이다. 나는 이들 고통스러운 수행 과정을 보며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고행에 비해, 아무 한 일도 없이 그저 ‘예수의 십자가 죽음’ 그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 받았다는 기적 같은 은혜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부족한 것만 같아 내 믿음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승처럼 득도하거나 고행 혹은 돈이 많아 넉넉한 보시를 통해서만 극락왕생할 수 있다면 나 같은 미련한 인간에 있어 구원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위에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거니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 속에서의 실천신앙을 강조하셨다. 생활을 통한 실천하는 신앙이 ‘그 나라와 그 의의’ <십자가의 도>를 이룩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크고도 작은 모든 이웃의 개념을 포함한다. 끝없는 평소생활 속에서 늘 깨어 기도하고 긴장하는 생활 자체가 수행이 아니겠는가. 독일 호프집에서 만난 소년들 시우 B씨가 건너 준 천주교 부산교구 교정 사목회가 주최한 재소자를 돕기 위한 초대장 2매를 들고 Y동 소재 독일 호프집을 찾았습니다. 식사가 된다기에 갔더니 식사는 되지 않고 호프와 각종 안주 그리고 김밥밖에 제공되지 않아 김밥 두 줄과 얼음솜사탕(빙수)을 시켰습니다. 근데 10여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내려 왔습니다. 선생님 같은 부인 한 분이 아이들 의견을 들어 주스를 시키기로 뜻을 모은 듯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 먹기에도 많아 좀 어리게 보이는 아이 둘을 불렀습니다. 처음엔 꼬리를 빼는 채하더니 다가왔습니다. 셋이서 차례로 한 숟갈씩 돌아가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아주 재밌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말 저런 말 즐겁게 이야길 나누다 보니 내가 어린애가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느새 바닥을 비우고 말았습니다. 두 놈 다 저들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자리를 떴습니다, 나는 모처럼 느껴본 아이가 된 마음이어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분들도 ‘어린 아이 같이 않고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아시죠? 한 번 아이들과 어울려 이야길 나누어 보십시오. 아주 즐거워질 것입니다.
- "백향목 십자가" 중에서
첫댓글 교회의 진솔한 이야기가 시적으로 잘 담겨 있으며, 신앙과 문학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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