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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관세음보살 염불의 현대 영험실화 모음
1. 출처 : 인광대사 가언록중에서 (인광대사 말씀, 보적 김지수님 번역)
척칙주의 딸이 나이 열아홉에 두 눈을 실명하여 눈앞에 손을 갖다 들이대도 보지 못한다고 편지로 알려온 일이 있었네.
그 때 그는 산중의 삼성당에 있었는데 답신을 받으면 곧 귀가하여 자기 딸을 향주의 비구니 암자에 보낼 생각이었지.
내가 편지를 보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도록 분부했는데 역시 한 달이 채 못되어 자신이 직접 편지를 써서 다 나았다고 알려 왔다네.
또 한 여인은 열여섯 살때 기관지 통증을 얻어 매일 반드시 두 세 차례 발작하였는데 통증이 죽을 정도로 극심하였다네.
올해 56세로 나에게 와서 귀의하기에 내가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도록 분부하고 아울러 한약 처방을 알려 주었네.
곧 문초안에 있는 담배 끊는 처방인데 연기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물에 끓여 처음 한차례 복용하자 기관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걸세. 41년간 수 많은 의사들도 어찌할 수 없었던 고질병이 한 차례 약처방을 쓰고 나서 완전히 나았다니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였기 때문에 이런 처방의 속효를 본 것 이 아니겠는가.
절강성 진해현에 방문년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아들 자중이 3년전 19살 때에 창자에 종양이 생겼다네. 한의사는 치료할 방법조차 없고 양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그 부모가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아 그만 치료를 하지 못했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문리가 트인 사람이라 내 글을 보고 채식하며 염불하면서 집안의 어른과 아이는 물론 고용인까지 모두 완전히 채식하도록 이끌었다네.
오직 아버지 문년만 아직 완전 채식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육식을 절제하며 크게 줄였지네. 그런 그 어머니와 할머니, 가정부가 목숨을 비칠 듯이 나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염송하고 또한 금강경도 함께 독송하였다네. 그 결과 사흘만에 창자안에서 종기가 저절로 터져 피고름이 대변을 통해 쏟아지고 닷새만에 완전히 나았다네.
염불과 독경을 지성으로 하면 이와같이 숙세의 업장 해소되곤 하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업장을 쌓을 줄만 알고 해소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으니 정말 가련하네.
또 절강성의 해염현 출신인 서울여는 줄곧 북에 거처하였는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속이 다 상하고 탈장병까지 얻은지 2년이나 되었다네. 매번 대변을 보고 나면 반드시 한 차례 잠을 자면서 창자가 스스로 들어가길 기다린 다음에야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낼 정도였네.
그런데 1919년 정월 대변을 본 후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어 곧장 차를 타고 외출했다가 그만탈장이 되어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네 . 그리하여 이레 밤낮을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마치 바늘로 쑤시는 듯한 고통 속에서 나뒹굴며 눈도 전혀 붙일 수 없을 정도였네.
비록 처음부터 염불은 계속 하였지만 고통이 줄어들지 않자 마침내 대보리심을 내어 이토록 극심한 질병의 고통을 차라리 내가 좀 더 받기 원하옵나니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이병에 걸리지 않기를 끝끝내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했다네. 그리고 지성으로 염불하다가 곧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병이 저절로 나아 있었고 그 후로는 병이 뿌리째 뽑혀 재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일 세. 그 사람 본인이 서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알렸기에 내가 답장에다 이병은 숙세의 업장때문에 생겼는데 귀하께서 이처럼 큰 보리심으로 발원하여 그 숙세의 업장이 완전히 해소되고 병이 완치되어 뿌리 뽑힌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네.
출전: 雨龍 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도서출판 효림)
이상으로 法華經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 곧 관음경에 대한 강의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나의 관음신앙 체험담을 들려드리면서 마무리 짓고자합니다.
(1)
8.15 해방 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해인사로 출가한 나는 고봉(高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강원(講院)에 들어가 경전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의 어른스님들은 불교의 여러가지 공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화두공부는 어떻게 하는건지, 주력공부는 어떤건지, 염불정진은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 것인지를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옛날 스님들은 이렇게 공부하셨다, 저렇게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입니다.
나는 스스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願)을 세웠습니다.
'중노릇 잘 하게 해주십시오. 지혜 총명을 주시어 장애없이 경전공부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때 나는 치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책 읽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관세음보살 염불에 몰두하였습니다. 밥 먹을 때도 '관세음보살', 화장실에서도 '관세음보살', 걸어다닐 때도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당시의 강원에서 공부를 배우는 학인은 여러가지 사중(寺中)업무를 한가지씩 맡아 돕는 급사노릇도 하였는데, 나는 해인사 산중 암자들을 돌며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공문서를 가지고 한 암자의 원주스님께 전하면 읽은 다음 사인을 해주었으며, 다시 다른 암자로 가서 원주스님의 사인을 맡았습니다.
2~3일에 한번씩 공문서를 들고 산내암자를 다닐 때에도 나는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찾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관세음보살이 끊어지지 않는 차원에 이르렀습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되고, 내 가슴 속에 분명히 관세음보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염불을 시작한 지 1년 가량 지났을 무렵, 한밤중에 해인사 밑쪽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대중이 진화작업에 나섰습니다. 특별한 소방장비가 없었으므로, 제1진이 불난 곳 가까이의 아직 불 붙지않은 풀을 낫으로 베면 제 2진이 벤 풀을 갈퀴로 끌어내고, 제3진이 괭이로 땅을 파면 제4진이 맞불을 지펴 불이 스스로 꺼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산불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진화작업에 참여하였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쪽에서만 불이 못 올라오도록 맞불을 놓을 것이 아니라 불이 올라오는 뒤쪽으로 가서 진화작업을 하게되면 훨씬 빨리 끌 수 있겠다.'
그 생각과 함께 나는 큰 바위를 타고 불길 저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바위 밑쪽에서 불이 치솟아 올랐고,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엉겁결에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린 나는 불 속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썩은 나무에 불이 붙은 그곳은 완전히 벌겋게 탄 숯구덩이였습니다.
산불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나마저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대중들은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어른 스님들의 다급한 음성도 들려 왔습니다.
"저 아이가 죽다니! 불보다도 아이의 시신부터 건져야 한다."
하지만 불구덩이 속을 구르다가 일어선 나는 소리쳤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불 끄세요. 저는 여기서 불을 끌게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중스님들은 그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죽었거나 큰 화상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 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팔의 살결이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대중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기적이다. 불보살님의 가피야."
그 때 나는 확신을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어떤 액난도 고난도 사라지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할 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2).
그리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 해인사에 빨치산이 들어왔습니다. 빨치산 사령관 유 성균이 4백여명의 대원을 이끌고와서 꼭 한달동안 해인사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는 학인스님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은 해인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상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자네는 집에 간다지? 오늘밤 우리 짐을 옮기는데 도와줘야겠어."
그들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붙들어 갔습니다. 그 때 나는 지금의 관음전 큰 방에 동료들 7~8명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빨치산이 그들을 다 붙잡아 갔지만 나에게는 가자는 말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잡혀간 큰 방에 홀로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빨치산들이 여러차례 문을 열고 기웃기웃하였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당시에 잡혀간 사람들은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하며 모진 고생을 하였으며, 그 중 반이상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빨치산의 눈에 보이지조차 않아 잡혀가지 않았을 뿐더러, 꾸준히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으니.....
어찌 이것이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곧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아니겠습니까?
내 나이 20세 이전에 체험한 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念하면 모든 두려움.재난.불행에서 벗어나 願과 같이 살 수있게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이 觀音經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불자님들께 진정으로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겠다고 작정하였으면 한 경지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해 나가십시오.
그 한 경지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나의 가슴 속에서 관세음보살 염불이 계속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 되고 관세음보살 염불이 쉬임없이 또렷하게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재난이 스스로 피해가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뜻하는 바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독히하면 백일, 길어도 3년을 작정하면 이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으니 부디 부지런히 염불해 보십시오. 대자비의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는 우리또한 대자비의 무궁한 힘을 지닐 수 있게되며, 주위를 평화롭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게됩니다.
그 날까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생각하고 함께하여 크나큰 행복을 이루시기를 축원드립니다.
3.
80년대 초반으로 생각이 된다.
어머니께서는 자식인 본인(카페필명 사천왕)의 하는 일이 잘 되라고 멀리 수안보의 덕주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시곤 하였다.
어느날 어머니는 주지스님을 모시고 충주에 사는 사촌 여동생과 함께 덕주사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왔는데, 동문(東門)옆의 개울을 건너려고하자 물이 불어서 허벅지 이상 차고, 물살이 매우 거세었다.
스님과 어머니는 겨우 개울을 건넜는데, 이모는 개울에서 넘어져 그만 물에 쓸려 떠내려가게 되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기막힌 일이라, 어머니는 울면서 스님과 함께 냇물을 따라 내려갔다.
오직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1km 이상 내려가서 입구 화장실이 있는 곳 부근에 다다랐을 때, 천만 다행으로 이모는 얼굴만 약간 긁혔을 뿐, 다치지않고 나무뿌리를 잡은 채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머니와 스님은 이모를 구하여 무사히 절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모는 빠른 물살에 발을 헛디뎌서 떠내려가게 된 것이다. 골짜기 물은 경사도 심하고 물살이 몹시 빠르며 바닥에 바윗덩어리가 수없이 돌출되어 있어서, 이같이 떠내려가게 되면 흔히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부서져서 살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모님이 물에 떠내려 갈 때 누군가 떠내려가는 이모님을 꽉 붙들어서 껴안더라는 것이다. 이 껴안은 분은 계속 껴안은 채 떠내려가다가 갑자기 이모님을 물의 갓 쪽으로 밀쳐 내었다. 갑자기 갓 쪽으로 밀쳐내자 이모는 개울가에 있는 나무뿌리를 웅켜 쥐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 아마도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에 큰 물에 떠내려가도 보살님을 염하면 보살님이 얕은 곳을 얻게 한다는 경전 말씀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출처: 산림불교(cafe.naver.com/buddhistforest)카페
4.
나는 청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 형편이 어려워, 수동 용화사에 1년간 학생법회를 보아주면서 지낸 일이 있다.
당시 함께 계시던 대원스님이 자신이 겪은 영험담을 말해 주었다.
이 스님은 6.25 당시 청주 사직동에 있는 구 용화사에 계셨는데, 미군기가 이 구용화사를 폭격하여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고, 자신은 폭탄의 바람에 날려 뚝을 넘어 무심천 물위로 날아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이 별로 많지 않은 곳에 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은 기적적으로 다친 데가 없었다.
자기는 늘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는데, 그 영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내 추측으로는 최소한 50-150m 정도는 날아갔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는 관음경에 있는 대로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한 경우로 생각되었다.
『현장삼장전』에는 현장법사가 엄빈국이라는 곳에서 노승의 병환을 치료해 주고 노승으로부터 반야심경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많은 가피력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양사람들 중에도 위급한 경우 Avalokitesvara(아발로키테스바라: 관세음보살)를 염하여 많은 사람들이 위급에서 벗어난 영험을 얻었다고 한다. 이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늘‘관세음보살(아발로키테스바라)를 외웠는데,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면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을 받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필자가 이 회보를 지금까지 계속 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관세음보살님을 염불한 가피가 아닐까하고 늘 생각하고 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천태종의 교세가 급격이 확대되는 이유 중 하나는 관세음보살 신앙을 존중함에 있다고 보여진다.
출처: 산림불교(cafe.naver.com/buddhistforest) 제25호 사천왕님글 중에서 옮김
5.
2000년 여름, 인천 앞바다에 큰 태풍이 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경기도 화성 신흥사에 다니는 한 거사님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거사님은 풍랑이 너무 심해 자기 배가 떠내려 갈 것 같아 밧줄을 잡아매는 도중에 밧줄을 파도에 놓쳐버렸다고 합니다. 밧줄을 놓쳐버리고 나자 거사님의 몸이 큰 파도에 휩쓸려 가는데, 그 위급한 순간에 관세음보살님을 정신없이 불렀다고 합니다.
그 거사님의 어머니께서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늘 입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불을 했었는데, 그 거사님도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하시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배웠던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거사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불렀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파도에 떠밀리면서 물에 휩쓸려 들어가기 직전 그 절 부처님이 그 거사님 곁을 휙 스쳐지나가더랍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밧줄이 파도에 떠밀려 자기 앞으로 오게 되었는데, 거사님은 순간적으로 그 밧줄을 다시 잡게 되었고 그 거사님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 거사님이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사례와 비슷한 내용이 법화경 제25품인 관세음보살 보문품(관음경)에 있습니다.
"가령 폭풍이 일어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들어갔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위급한 상황을 나찰로 이해한 것입니다.
출처: 대흥사 홈페이지 http://www.daeheungsa.com 한북님글
6.
옛날에 통도사에서 나오는 사보로 '등불’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오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그 잡지에는 신도들의 영험록을 정기적으로 싣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18살 된, 한 신도의 딸이 무단히 시름시름 아픈 것이었습니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없이 식욕을 잃고 삐쩍 마르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이 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으나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라면 양의·한의를 불문하고 다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병의 차도는 보이지 않고 점차 건강이 더 나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어가고 있던 중 기왕 죽을 거면 기도나 한 번 해보고 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100일 관음기도였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직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자면서도 관세음보살, 깨어서도 관세음보살, 걸어가며 관세음보살, 절을 하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모진 게 사람의 목숨이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삐쩍 말라 있었지만 용케 100일을 견뎌냈습니다.
100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던 처녀가 잠시 졸았던지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한 분 나타났습니다. 그 부인은 옷을 아주 잘 차려입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천녀들이 입는 하늘거리는 의상이나 한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양장이나 정장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 귀부인은 약병 하나를 손에 쥐어주며 이 약을 먹으면 나을 거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 병에는 영어로 뭔가가 써져 있었는데, 몸이 아픈 그 처녀는 약병에 붙어있는 그 이름을 읽어 기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가족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그 약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약을 구할 수 없어 깊이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꿈꾼 지 일주일 쯤 지난 날, 몸이 아픈 처녀는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오빠의 소포를 받습니다. 그 소포를 열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처녀가 꿈속에서 받은 그 약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포에는 오빠의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오빠도 일주일 쯤 전 어느 날 밤늦게 공부하다가 잠이 와서 책상에 앉아 잠시 졸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하얀 옷을 입은 한 부인이 나타나 말을 하는데, 어느 병원에 가면 이러이러한 이름의 약이 있는데, 그 약을 빨리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주라는 내용이었답니다. 정신을 차렸으나 여느 꿈과 달리 마치 생시를 본 것처럼 선명하였답니다.
다음날 아침, 꿈에서 가르쳐준 병원으로 가서는 이러이러한 약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깜짝 놀라며 그 약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처녀의 오빠는 꿈 이야기를 하고,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이러이러한 증상으로 시름시름 앓아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지금 100일 기도를 하는 중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인 의사가 말하기를, 이 약이 막 개발되어 아직 시중에는 유통이 되지 않고 있고, 이제 처음으로 이 약을 내놓는 것인데 이 약을 찾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더구나 이 약은 여동생이 앓는 것과 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녀의 오빠는 그 의사의 도움으로 약을 구해서 서둘러 사연을 적어 한국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약을 먹은 처녀는 하루하루 병세가 호전되더니 마침내 병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20년 쯤 전에 본 내용이라 세세한 표현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강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워낙 충격적인 글이어서 오랜시간 제 기억의 바다에 그렇게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대흥사 홈페이지(www.daeheungsa.com)
7.
내가 학창시절 영주 관음사에서 한 철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때 창건주 노보살님 한 분이 당신의 관세음보살 영험담을 자주 들려주셨다.
한 때 당신의 외아들이 노름에 빠져 제 정신이 아닌 적이 있었다. 초저녁에 십만원을 가지고 가서 몽땅 잃고, 두 번째도 만회를 실패하고, 세 번째 찾아왔길래 노보살님이 아들한테
“ 이제는 나를 죽여도 더 이상 돈을 못 주니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워낙 분하고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관음주력을 약 한 시간 반이나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잠에 빠져 들었다고 했다.
이때 꿈에서 고깔 쓴 할머니가 나타나더니 돼지새끼 세 마리를 “옛다!” 하면서 던지는데 한 마리는 치마폭에 싸이고, 한 마리는 무릎에 떨어졌다 방바닥으로 구르고, 마지막 한 마리는 방바닥에 바로 떨어졌다.
이 보살님이 약 두세 시간 잠을 자고 깨어보니 어느덧 새벽인데 조금 있으니까 아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여기 있소”하면서 십만 원짜리 세 뭉치를 던지는데, 한 뭉치는 치마폭에 떨어지고, 또 한 뭉치는 무릎을 맞고 방바닥에 떨어지고, 마지막 한 뭉치는 바로 방바닥에 떨어지더란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 아들은 노름하는 버릇을 완전히 끊었다고 했다.
오늘도 살아계신 관세음보살님은 지척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출처: www.amita.net 영락님글
8.
경상남도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 담력도 크고 가끔씩 괴이한 행동을 하는 오관수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6.25사변말기에 포탄이 떨어지는 일선쪽으로 가서 군인들을 돕는 노무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 속에서 동사섭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같은 노무자가 되어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모두 함께 장단을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일합시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틀림없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
총알과 지뢰와 포탄 속에서 벌벌 떨고 있던 노무자들은 범상치않은 오관수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삽질을 하면서도 '관세음보살' 포탄을 나르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하다보니, 얼마 지나지않아 불안감이 사라졌고 두려움없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의 능률이 올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포탄이나 지뢰의 피해를 한 차례도 입지않았다고 합니다.
6.25사변후 오관수 스님을 진주 의곡사에서 뵙게 되었을 때,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체험을 했지. 그 많은 노무자들에게 어떠한 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일세. 참으로 함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이야."
출전: 우룡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 (도서출판 효림)
9.
신 상 용 (부산 ㅇㅇ사 신도)
제가 배를 20년 이상 탔어도 풍파를 심하게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동지나해를 비롯하여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해역을 전전하며 어로작업을 하면서 몇번의 폭풍우와 풍랑을 당해보았으나 그때마다 100톤급의 배여서 다소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0년 8월 14일 오후 3시경 동경 33°43′30″ 서경 126°45′50″ 해상에서 갑작스레 맞이한 돌풍은 마치 태풍과도 같아 우리 쌍용선단은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단 구성은 30톤 미만이 3척, 90톤이 2척이었습니다. 선단 중 한 척은 침수되어 한쪽으로 기울며 배가 넘어가기 시작하여 선원들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제가 타고 있던 31쌍용호도 선상으로 바닷물이 얼마나 올라오는지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의 참 불제자가 되길 맹세합니다. 쌍용선단과 선원 44명 모두 무사하게 하여주십시요’ 하고 계속 관음정진을 하였습니다.
산더미같은 파도가 정말 삽시간에 성난 맹수처럼 우리들을 집어삼킬듯 요동쳤습니다. 기관실까지 물이 들어와 배는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기관실에서는 물퍼내는 기계(동키)를 계속 돌려 물을 퍼내면서 항해를 했습니다.
선장은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선원들은 모두가 ‘풍파가 너무나 심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각자 침실에서 나와 선상 위 높은 곳이란 높은 곳은 다 찾아 저마다 올라갔습니다.
‘악마같은 저 폭풍우가 언제나 멎을까.’
금방이라도 삼킬듯이 날뛰는 성난 맹수같은 파도를 정신없이 바라보며 비를 홀딱 맞고 앉아 있는 것이 비오는 날 전신주에 제비가 비를 맞고 앉아 뭐라고 재잘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원들도 비를 홀딱 맞으며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은 모두 꼭 잡고 앉아 풍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 있었습니다.
악마같은 파도, 배를 타보지 않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악마같은 풍파. 그 순간 모두가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가정,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겠지요. 이번에 무사히 육지에 도착하면 다시는 배를 탈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벼르며 ‘직업을 바꾸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천번, 만번 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순간만은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악마같은 파도, 말로써나 글로써는 그 고통받던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조타실에서 그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계속 관음정진을 하며 ‘우리 쌍용선단이 무사히 육지에 도달하게 하여주십시요’ 하고 기원했습니다. 또 ‘부처님, 부처님의 참다운 불제자가 되겠습니다. 우리 선원들이 무사하게만 하여주십시요’ 하고 기도하며 입에 침이 마르고 목이 메이도록 계속 관음정진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 시간,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풍랑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다가갈 수 있었고 그러자 파도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가까스로 육지에 도달하는가’ 생각하니 관세음보살님의 고마움은 어머님의 따뜻한 마음에나 비할까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배를 타고 20년 이상 책임자로 다녔지만, 그렇게 험난한 풍파를 만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였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습니다.
육지에 다달아 선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로장으로서도 아니고 책임자로서도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정말 얼마나 기쁜지 저는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저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심한 풍랑을 만났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풍랑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가슴 속에 되새겨보았습니다.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우리 모두는 육지 가까이 인도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관세음보살님의 고마움에 감동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없었더라면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고기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원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지 가까이 와서 닻을 내리고 모두 환희의 기쁨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습니다. 악몽같았던 그 순간을 잊어버린듯 선원들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파도에 휩쓸린 어구들을 손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젖었던 손을 문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바라보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그 얼마나 큰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잔한 바다는 관세음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는 것같이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 가피의 고마움을 천번, 만번 되새기며 다시는 그런 악몽같은 풍랑을 만나지 않기를 관세음보살님께 계속 빌며 정진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정말 감사합니다.’
출처: 인드라망 카페
10.
강화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관음기도 도량이다.
이 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거센 풍랑을 만났으나 관음기도 공덕으로 간신히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일제시대 때의 일이다. 근대 우리나라 불교계의 석학 중에 유명한 권상로 박사가 있다.
이 분은 스님으로서 훗날 동국대학교 초대총장까지 지냈던 분인데 이 분의 친척으로 경북 선산군 해평에서 면장을 지낸 우용택이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이 어느 해 가을, 친구 몇 사람과 더불어 강화도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강화도의 명소인 마이산과 전등사 등을 구경한 뒤 마지막으로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유명한 강화도 보문사를 구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삼산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보문사에 도착하여 "굴법당 마애관음" 등을 구경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인천으로 가던 중에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뭉치더니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배는 거센 풍랑에 흔들리면서 기우뚱 기우뚱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산더미같은 파도가 계속 배를 때리자 배는 곧 부서질 듯 "우지직 우지직.." 하였으며 갑판 위로 바닷물이 쉴 새없이 넘쳐 들어왔다. 우용택의 일행을 비롯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 그 중에는 살아보려고 배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마냥 정신없이 엉엉우는 사람 등 갖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어디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객 중 한 사람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른 상태로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칭념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풍랑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모두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십시오."
그리고는 또다시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이 곳 강화에는 낙가산 보문사가 있습니다. 이 곳에는 영험있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니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모두 함께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면 반드시 그 묘지력(妙智力)에 의하여 살아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불교를 믿지않는 사람도 모두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것 저것 가릴 사항이 아니었다.
배 안은 갑자기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염불소리로 가득하였다.
사실 우용택과 그 일행은 유생이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니 선뜻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라고 했던 그 사람이 우용택을 향하여 말하였다.
"노형,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십시오. 그러면, 필히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 어서 속히 부르십시오."
워낙 위기일발의 상황인지라 우용택 역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풍랑은 심하게 몰아쳤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 더욱 더 기우뚱 기우뚱하였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들면 모두들 그 승객을 따라 더욱 더 소리높여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이 때 기적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높은 곳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선창하고 있던 그 승객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용택을 향하여 하늘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우용택이 그의 손짓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오색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비치면서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현신한 것이었다.
배안의 모든 사람들은 '이젠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순간에 또다시 산더미같은 파도가 배를 때려 돛대를 부러뜨렸다. 모두들 또 한번 '악'하고 절규의 소리를 질렀다.
'아, 이젠 정말 죽었구나. 관세음보살의 신통력도 별 수 없구나.'
우용택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너도 나도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돛대가 부러진 뒤로는 그렇게 거세던 풍랑도 점점 약해지고 빗줄기도 가늘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듯이 해가 나고 바다는 거의 평소처럼 정상이 되었다.
배는 폭풍을 만나 몇군데 부서진 곳이 있었으나 운행에는 큰 지장이 없었고 여러 사람들이 물을 퍼내고 힘을 합하여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야말로 몇 시간 사이에 생사의 갈림길을 왕래하다가 간신히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었다.
그 후 관세음보살의 가피에 감탄한 우용택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산 도리사의 신도가 되었으며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모두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보문사에 와서 자주 관음기도를 하였으며, 우용택과 친척간이었던 권상로 박사가 김대은 스님께 이야기하여 김 대은 스님이 그의 저서 '관음신앙'에 수록하였던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11.
탄성큰스님 (전 법주사 주지,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전 조계종 원로위원) 법문 중
삶이 힘들고 허망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 무궁한 법이 있고 그 법을 알
면 최상의 열락이 있으니 열심히 참선하여 마음자리를 흐트리지 않도록 하십
시오. 그런 가운데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까 인연 얘기를 했지만 기도는 선한 인연을 만드는 불가해한 힘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자리에 좋은 인연의 씨가 싹트는 것입니다.
밥을 얻어 먹으며 안면도로 가다가 전쟁을 만나 다시 계룡산으로 돌아 왔는
데 나는 그 난리통에 기도의 인연으로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걸 체험했습니
다.
하나는 나의 얘긴데 인민군에게 잡혀 계룡면 면소재지의 좁은 방에 갇혔
습니다. 다른 곳에서 잡혀온 사람들 30여명이 그 좁은 방에 쪼그린채 닷새를
지냈는데 나는 관음주력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저 관음주력만 하며 닷새를 보내고 나니 해거름에 소장(지서장)이 나를 불러
절로 돌아가라더군요. 뒤 돌아볼 겨를 없이 절로 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어느
스님이 지서로 와서 사정사정한 덕에 내가 방면이 되었더군요.
나는 관음주력의 영험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머지 사람들은 공주로
끌고가 길에 죽 세워 놓고 따발총을 난사해 다 사살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리더군요.
그런데 그 무자비한 사살에서 딱 한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는 갑사 위에 사는
스님(대처승)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끌려간 후 아버지는 스님된 입장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겠습니까.
닷새밤을 지새운 아버지의 기도가 그 아들을 살렸는데 더 놀라운 것은 아들이
총알을 여섯군데나 맞았는데 모두 살갗을 스치기만 했더라는 것입니다.
전쟁통에는 그런 기적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 아버지의 기도가 아니었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잡혀온 30여명 가운데 한사람은 잡혀 오자마자 어머니의 부음을 듣
고 풀려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신원사
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러 와 절에 있다가 인민군에게 잡
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잡혀가고 바로 타계를 했으니 어미의 목숨을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격이 아닙니까. 실로 눈물겨운 일이어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 대학생의 형은 인민군에 잡혀 대전교도소에 있었는데 어느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내일 밖에 나갈일이 생기는데 나가는 즉시 뒤돌아 보지말고 도망가라”고
했답니다.
정말 아침이 되니 모두 마당으로 집합하라고 난리를 치는데 그 틈에 도망을 쳐서
살아났다는 얘기도 뒷날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지성으로 기도를 하고 몸을 버려
아들을 구했고 또 다른아들은 영혼이 되어서 구했던 셈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불가해한 인연의 힘인 것입니다.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내 마음자리를 편케 하는 것이 참선
이고 내 몸을 안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둘다 중요한 불자들의 실천 사항입
니다. 누구에게나 성불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마음자리를 잘 조절하여 편케하고 몸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여 좋은 인연의
실체를 영위하는 지혜를 가꿔야 합니다.
출처: 현대불교신문(www.budhdapia.com)
12.
내가 부른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카페 靑松님 (2007.12.11) 글
한적한 시골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친구가 애써 정비해준 나의 애마를 몰고 시운전을
나왔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한 감정들을 뒤로하고 시속 90km가 넘은 찰나 갑자기 운전석이 주저앉더니
타이어가 빠져 나온 채, 차는 중앙선을 따라 방향을 잃은 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순간 관세음보살을 세 번 크게부르자, 제멋대로 미끄러지던 차는 멈춰섰습니다.
차의 방향이 도로 난간의 전주(전봇대)를 1m 앞에 두고말입니다.
전주 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낭떠러지였습니다.
1m만 더 나아갔으면 아무도 없던 한적한 도로에서 죽어갔을지 모를 일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말 믿을 수 없는 순간앞에서 또 한 번
관세음보살을 부릅니다.
워낙에 글솜씨가 없어서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정말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마음속으로 버릇처럼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작은 습관들이 고통의 순간들에서
한없이 약한 나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13.
관음보살 원력으로 남편을 살린 박부형 보살
서울 강남구 반포동 반포 아파트 49동 102호에 사는 보살은
봉원사 관음회 신도로, 학창시절부터 친구를 따라 성당엘 다
니며 영세, 견진까지 받은 천주교 신도였었다.
마곡사에 소풍을 가도 단청 색깔이나 사천왕상 등이 무서워
서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다니다가 시집을 오니 시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어머니께서 손주를 기원하는 기도를 10개월 째 하시는 정성
을 보면서, 처음 시집와서 겪던 종교적 갈등을 한 겹 접고
‘불교도 무언가 있을 게 아닌가.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저토
록 집착하시지.’하는 생각이 들어 큰 마음 먹고 가까운 봉
원사에를 한번 가 보았다.
거기서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일대기이며 불교의 사상, 철
학,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인연 등에 대해 듣다가 그만
매료되어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히려 자기가 포교사가 되어 종교적 문제
에 별 관심이 없는 남편을 위해 밥상머리 설법을 매일 하였
는데 그 중에도 관세음 보살의 영험과 어떤 위험에서도 관음
보살만 지성으로 찾으면 다 해결된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던 중 1972년 어느 날 남편이 공적인 임무를 띠고 도서
지방 순시를 하다가 그만 폭풍우를 만나 배에 물이 들어오면
서 아주 위중 지경을 맞게 되었다.
전부 이젠 죽었다고 체념할 때 갑자기 아내의 밥상머리 법
문이 생각 나 두 눈을 꾹 감고 오로지 지성 일념으로 관세
음보살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흘렀을까? 배가 어느 섬에 간신히 도착하
여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날 밤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셔서 “집안에 부처님을 모셔라” 하는 것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하며 본인도 독실한
신도가 되어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전파하고 봉사
활동을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출처: 화계산 송화사 카페(cafe.daum.net/6534800) 범각님 글 옮김
14.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울산 동광병원의 이사장으로 있던 박영철 선생을 아들로 둔
김보운화라는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였던 보운화 보살은 절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올 때에도,
아들 곁에 있기보다는 절에 가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들은 싫었습니다. 어머니를 부처님께 빼앗긴 듯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어머니를 미워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절을 싫어하고 불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6·25사변이 일어나자 아들 박영철은 군의관이 되어 7년을 복무했습니다.
그 7년동안 보운화보살은 옆구리를 방바닥에 댄 적이 없었습니다.
낮이건 밤이건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극히 피곤하면 벽에 기댄 채 잠깐씩 눈을 붙였습니다.
그야말로 무섭도록 관음정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염불 정진한 덕은 그대로 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들이 위급한 고비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의 외침이 들려와 위기를 면하였던 것입니다.
하루는 박영철 군의관이 막사에서 쉬고 있는데,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비몽사몽간에 들려왔습니다.
"영철아! 어서 막사에서 나와 달려가거라. 어서!"
박영철은 얼떨결에 일어나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고,
간발의 차로 적의 포탄이 막사 위에 떨어졌습니다.
또 하루는 구급차를 타고 가는데,
바로 옆에서 외치는 듯 한 어머니의 큰 소리가 차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영철아, 네가 왜 그 차를 타고 가느냐? 빨리 뛰어내려라. 빨리!"
박영철은 달리는 구굽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고,
차는 조금 더 나아가다 지뢰를 밟아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들려왔던 어머니의 외침!
7년만에 제대를 한 박영철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면서 사죄하였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께서는 제 곁에 있는 것보다
절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미워하고 절도 불교도 부처님도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의관 생활 7년동안, 꼭 죽을 고비를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여러 차례 무사히 넘겼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어머니의 지극한 정진력 덕분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미워하고 불교를 싫어했던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보운화 보살처럼 일심으로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즉시에
그 음성을 들으시고 해탈을 얻게 해주십니다.
이렇듯 상상도 할 수 없고 추측도 할 수 없는 것.
이것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요, 부처님의 가피력이며,
법계의 가피력이요 기적입니다.
분명히 믿으십시오. 일심칭명을 하면, 상식을 초월한 기적과 가피력이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그것도 즉시에 가장 적절한 그때, 그 장소에서,
실제로 이루어 집니다."
출처: 우룡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 (도서출판 효림)
15.
순수한 믿음이 마음밭에 심어지면 불심의 싹이 돋아나게 되는가
부산에 3년 살고 서울로 와서 명동에 의상실을 하게되고
어느날부터 절에나가 차츰차츰 불교공부에 맛을 알게될 무렵
혜력화보살님이 음악 발표회의 무대에 입고나갈 부라우스에
반짝이는 스팡크를 달아 달라해서 새벽4시까지 날을새며 정성것
스팡크를 달아서 드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혜력화보살님이 어느날 보답으로
경기도 벽제에 술마시러 가자고...
안간다해도 가야한다고 실랑이끝에 따라 나섰다
대여섯명이 함께 혜력화보살님 도반이 하는 대학주점 동동주집
을하는 벽제의어느 동동주집에서 동동주를 첨으로 마셔보았는데
틉틉하면서 달달하고 소주처럼 독한느낌이 없고 맛이있어 모두
한잔씩 돌리고 조금 남은것을 마져 내가 마셔버렸다
사실은 몸에서 술이 체질적으로 받지를 못해 좀 마시면 토하기
일수인데 생각없이 마신후에 취해서 온통 세상이 거꾸로 돌아
버리고 주정을 부리다.
결국은 화장실에서 위경련으로 토해도 토해도 멈추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기만하면 위에 경련이 일어나 죽을지경에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와 주점의 긴의자에 누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떴을때 모두서서 내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추스려 일어나 동행들과 서울가는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은
겨우갔는데 다음정거장에서 버스가 멈추어 위경련이 다시 시작
되어 구토증세로 몸이 견딜 수가 없어서 막움직이려는 버스를
일행은 두고 혼자서 뛰어내려 캄캄한 밤에 혼자서 거기가 어디쯤
인지도 모른체 쭈구리고 앉아 이젠 헛구역질만 계속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조그만 약국이 불빛이 보였다.
무슨 안정제 드링크를 마셨지만 위는 가라않지안고 몸을 움직일
수도없고 그드링크 마신것 마져 거부를해 한참을 약국입구 옆쪽에
웅크리고 있으려니 약사가 걷거나 움직여서 취기를 없애야한다고
걸으라한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지만 사방은 시골길이라 칠흙같이
어두울 뿐이다.
혼자서 걷자니 무서움을 달래기 위해서 관세음보살 염불이 저절로
나왔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그런데 처음 걷는 길이 양쪽은 논두렁인데 얼마전 꿈속에서 본것
같고 낮설지 않는 느낌을 주었는데 아마 염불을 하고부터 마음이
안정이 되고 그렇게 느낀것 인가싶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가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주위를 배회하다
사라지고 한참더 걸어가고 이제는 산을 양쪽을 깍아세워 길이
난곳에서 갑자기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뭉치는가 싶은데 앞에서
약5 미터 전방에 무엇인가 나타났는데
느낌으로 7살에서 10살 정도의 두동자가 사쁜사쁜 뛰어간다
이상하다 양쪽은 분명 산을 반듯하게 깍아서 낭떨어진데 어디서
나타났지?
사람이 맞는건가?
계속 의심이들어 확인할려면 캄캄한 길이라 차가 지나갈때 해트
라이트로 비추면 알수있을텐데 그때까지 앞에가는 그들을 지켜
보면서 걷는다 옳지! 먼데서 뻐스가 나타나더니 지나갔다.
불빛에 분명히 아이들인데 그림에 나오는 두 동자의 모습이었다.
한 동자는는 더벅머리고 또한 동자는 양쪽으로 토끼귀처럼 짧게
위로 묶었다.
24년전이지만 남자아이 머리를 그렇게 묶지 않는다.
한참을 걸었고 아스라이 마을이 나오자 동자들은 마을쪽을 향해
사라져서 내가 마을어귀에 도착했을때는 동자들이 없어졌을꺼란
추측을 뒤엎고 그들은 골목에서 여전히 사뿐사뿐 뛰어가고 있었
지만 난 서을을 향헤 계속 걸어갔다.
이제는 정신이 나서 위경련도 멈추었고 밤새도록 걷더라도 서울은
멀다 서을가는 차를 세워야하는데 손을 흔들어도 몇대의 차들이
그냥 스친다.
걱정이 시작되어 조바심이 날무렵 한대의 버스가 불빛이 없고
해드라잇만 켜진 상태로 나타나서 무조건 손을 흔들었는데 멈추
드니 태워 주었다.
그 버스는 효도 관광 갔다 모두 내려드리고 돌아가는 빈 버스였다.
기사님 말씀이 수색까지만 가니까 그곳에서 다른차로 갈아타라
하셨다
물론 그곳에서는 택시를 타고 그때 다니던 절이 서대문에 있어서
집은 더멀리 있었으니까 절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2시 쯤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벽제는 화장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한 공덕으로 두동자를 보내주시어 앞장
서서 길을 인도하고 무탈하게 지켜 주셨던것같다.
나중에 또한가지 알게 된것은 논두렁을 지날때의 길은 경기도
고양군 나의 아버님과 조상이 대대로 묻힌 큰선산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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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관세음보살 염불의 과거 영험실화 모음
1.
옛날 중국 양나라에 석혜간(釋慧簡)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엄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진실하게 공부를 하는 훌륭한 스님이었다.
어느 날, 형주 태수의 초청을 받고 그 지방의 관방에 갔는데, 청사 동쪽에는 외딴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귀신이 있어서 보통 사람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흉가였다.
그 말을 들은 혜간 대사는 자청해서 그 집에 들어가 보겠다고 하고 방 한켠을 치우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다음 혜간 대사는 방안에 향과 촛불을 켜고
조용히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넘자 갑자기 눈이 없는 괴상한 사람 하나가 검은 옷을 입고
벽 가운데로부터 불쑥 나오더니 대사가 앉아 있는 문 앞에 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이를 본 대사는 겁을 내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상시와 똑같이 관세음 보살의 이름만 지성껏 생각하고 외웠다.
그랬더니 그 귀신은 다시 슬그머니 벽 가운데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사는 조용히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고
더욱 열심히 관세음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서 앉아 있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그 귀신이 다시 나타나서 대사에게 말했다.
"나는 한나라 말엽부터 이곳에서 이미 수백년을 살아왔다.
내 성품이 괴악하여 누구든지 사람을 만나면 그냥 두지 않고 몹시 괴롭히거나 죽였는데,
대사는 관세음 보살을 일념으로 찾으며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냥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태수는 매우 기뻐하였고
그때부터 모든 관원들도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cafe.daum.net/smdrhf86 제석천의 금강저카페 행성님글
중국 서진(西晉) 때 축장서라는 인도사람이 원강(元康; 291-299)년에 낙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불법을 신봉하여 항상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성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이웃집에 불이났는데, 그의 집은 초가였으며 바람 마저 그의 집쪽으로 불고 있어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왔다.
너무 갑자기 당하는 일인데다가 워낙 불길이 빨리 접근해 오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불이 자기집 지붕에 붙으려는 위급한 순간에도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일념으로 불렀다.
어느새 이웃집마저 모두 타고 이제 그의 집에 불길이 번지려는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반대쪽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불길을 돌려 버렸다. 처마 밑에 붙으려던 불길은 역풍을 만나 모두 꺼져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관세음 보살의 영험이라고 하였는데, 악동들은 그것을 비웃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 집에 몰래 다가가서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서 그 집 지붕 위로 던졌다.
건조한 지붕은 불이 붙기에 안성마춤인데, 이상하게도 불은 곧 꺼지고 말았다.
악동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불을 던져 보았으나 역시 불은 꺼지고 말았다. 세번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불은 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악동들은 겁을 집어먹고 모두 도망갔다.
다음날 그들은 모두 함께 모여 축장서의 집으로 찾아가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였다.
축장서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무런 신통력이 없소.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송념(誦念)하였을 따름입니다. 참으로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이란 위력이 있는 것이니 자네들도 마음을 깨끗이 하여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송념하시오."
그 소문을 듣고 이웃 마을 사람들가지도 모두 관세음보살을 공경하게 되었다.
cafe.daum.net/ibulkyo 玄性님 글 다시 옮김
첫댓글 관음묘지력 능구세간고 라는 법화경 보문품의 말씀대로 일체중생의 고액을 두루 살피시고 건저주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드리며 귀명하나이다.글 올려 주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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