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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효 대사
원효는 경북 자인땅의 신라 6부족 설(薛)씨의 후손인 담나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새털’(新毛) 혹은 ‘동방의 성스러운 아이’를 뜻하는 ‘서당’(誓幢)이었다. 그는 8~9세 나이를 뜻하는 ‘관채지년’에 출가하였다. 은사와 법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승조의 후신’이라 자임한 혜공(惠空)과 영축산 반고사의 ‘낭지’(朗智) 등과 교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해야 행복해진다 ‘화쟁회통’ 사상으로 중생의 이익 도모 저자거리로 뛰어나가 대중교화에 앞장
분황 원효(617~686)는 법호가 분황(芬皇)이며 법명이 원효(元曉)이다. 오랜 주석으로 법호가 된 ‘분황’은 ‘푼타리카(芬) 중의 푼다리카’(皇), 즉 ‘연꽃 중의 연꽃’을 일컫는다. ‘원효’는 새벽의 영남 방언인 ‘새부’(塞部)와 ‘시단’(始旦)처럼 ‘첫새벽’을 뜻한다.
31세경에 낭지의 권유로 지은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의 감수를 은사 문선(文善)을 시켜 요청했던 기록과 중년 이후 오어사에서 만나 벌인 혜공과의 법력게임 설화로 교유관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34세 때 원효는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나라 현장(602~664) 문중으로 유학을 떠났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던 그들은 고구려 수비군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이듬해인 661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제2차 유학길에 올랐다.
길을 떠난 그들은 어느 땅막(土龕)에서 하루를 보내고, 신라의 관문 수원 화성 남양만(南陽灣)을 향해 갔다. 날이 저물고, 잠자리를 찾지 못한 두 사람은 무덤 속에서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는 꿈속에서 동티(動土, 地神의 노여움)를 만났다.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 인식의 전환을 노래로 표현했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생각하여 또한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무덤 속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겨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막(龕)과 무덤(墳)이 둘이 아님(不二)을/ 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현상이 없는데/ 어디서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이것은<대승기신론>의 핵심 구절을 놀랍게 자리바꿈한 원효의 오도송이었다.
마음이 평화로웠던(心眞如) 어젯밤과 마음이 뒤숭숭했던(心生滅) 오늘밤의 대비를 통해 원효는 일심(一心)을 발견했다. 이미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면 당나라인들의 마음속에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것의 근거이자 인간의 보편성인 일심을 발견하자, 더 이상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저술에 몰입했다. 동시에 자유로운 몸짓으로 불법을 대중화시켰다. 어느 봄날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친(칠) 기둥을 끊(깎)으리”라며 외쳤다. 그 뜻을 간파한 신라왕이 사자를 보내어 요석궁 앞 문천교를 건너는 원효를 물속에 빠뜨리게 했다.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던 원효는 뒷날 일연이 <삼국유사> ‘의해’편 <원효불기>조 찬시에서 “요석궁에 사흘밤 동안 불이 밝더니”라고 했던 것처럼 요석궁에 머물며 요석과 인연을 맺었다.
때마침 신라왕비가 머리에 악성 종양이 걸리고, 왕은 전국의 의사와 무당을 구했다. 병이 낫지 않자 왕은 사신을 중국으로 보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사신이 용왕에게 인도되어 자초지종을 전했다. 용왕은 용궁에서 전해오는 <금강삼매경>을 소개했고, 대안(大安)을 편집자로, 원효를 강론자로 천거했다. 사자는 장딴지 속에 비밀장(秘密藏)을 감춰와 왕에게 전하고, 왕은 대안에게 편집을, 원효에게 주석서와 강론을 맡겼다.
이후 원효는 분황사 서실에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가득한 골방에 앉아 <화엄경> ‘십회향품’ 주석에 임하였다. 이때 그는 ‘보살의 회향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인식의 전환을 얻고 붓을 꺾으며 거리로 뛰쳐나가 대중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덤 속에서 이루어진 ‘개인적 깨달음’과 달리 골방 속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깨달음’이었다.
원효의 87종 180여권의 저서 가운데에서 20여종 내외만이 남아있지만 치밀한 사고력(一心)과 활달한 문장력(和會) 및 넘치는 인간미(無碍)로 보여준 그의 면모는 남은 저술 속에서 확인되고 있다.
저서 87종180여권 가운데 20여종 남아 탁월한 사고력과 문장력.인간미 넘쳐나
# 사상
흔히 원효의 사상적 역정은 일심(一心)-화회(和會)-무애(無碍)의 구조로 표현된다. 그리고 사상적 구조는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 혹은 이문일심(二門一心) 사상으로 일컬어진다.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을 통섭하는 일심의 구조는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화회의 논리는 단간본인 <십문화쟁론>과 만년작인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여지고 있다. 무애의 행화는 결락본인 <화엄경소>에서 드러나고 있다. 원효는 이들 세 기호 중 특히 논리적 매개항인 ‘화쟁회통’을 통하여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게 함으로써’(歸一心源)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고자’(饒益衆生)했다.
원효는 <기신론>의 일심이문의 구조에 의지하여 자기 사상의 체계를 입론하고 있다. 그는 <기신론> 주석서를 7종 내지 9종을 지을 정도로 이 저술에 집중했다. 원효는 <기신론>의 성격을 ‘부정하기만 하고 긍정하지 못하는’(破而不立, 往而不遍論) 중관사상과 ‘긍정하기만 하고 부정하지 못하는’(立而不破, 與而不奪論) 유식사상의 지양(無不破而自遣, 無不立而還許) 종합(開合自在, 立破無碍)이자 각(覺)과 불각(不覺) 두 뜻(二義)의 불상리성(不相離性)과 화합(和合)으로서의 아려야식의 존재를 규명하는 저술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원효는 <기신론>을 “<능가경>에 의하여 진제와 속제가 별체(別體)라는 집착을 다스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았다. 이는 <유가론>에 설해있는 아려야식은 ‘한결같이 생멸의 이숙식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지만 <기신론>은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동일하지도 아니하고(非一) 차이나지도 아니함(非二)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지점에서 확인된다. 그리하여 그는 <기신론>의 구조에 의지하여 각과 불각 두 뜻(二義)의 불상리성(不相離性) 내지 화합(和合)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모색하였다.
여기서 아려야식의 각의는 여래장의 불생멸심이며, 불각의는 여래장의 불생멸심인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훈습에 의해 흔들려(動) 일어난 생멸심이다. 즉 아려야식이 불생멸과 생멸, 즉 각과 불각의 화합식이기 때문에 이 아려야식을 기점으로 염정(染淨)의 연기가 가능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려야식이 현실적 인간(범부)이 미오(迷汚)한 현실 생활 가운데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수행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을 이룰 수 있는 근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려야식이 지니고 있는 이의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마음의 때묻음(染)과 깨끗함(淨) 양면성 중 그 일면만을 고집하여 각기 진(眞)과 속(俗)을 별체로 보려는 유식학통과 중관학통의 치우친 집착(偏執)을 극복하려는 <기신론>의 본의를 충분히 의식하여 아려야식의 이의성을 분명하게 밝혀내었다. 이 과정에서 ‘아려야식위(位)에서 파악한 무명업상(業相)과 능견상(轉相)과 경계상(現相)’의 ‘삼세 아려야식’설이 탄생되었다. 이것은 업상과 전상과 현상의 삼세상이 아려야식 위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며 <기신론>의 의도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밝혀낸 것이었다.
때문에 윤회의 주체인 이숙식(異熟識)으로 파악하는 유식가의 아려야식은 깨달음의 청정성(淨法)을 낼 수 없는 생멸식임에 견주어 <기신론>의 아려야식은 삼세의 화합식 중 생멸분을 없애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무분별지와 후득지에 의하여 불생불멸의 자성청정한 각(覺)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기신론>이 제시하는 환멸의 단계를 또렷이 드러낸 것이며, 일심인 깨달음의 세계로 환멸해 가는 수행면에서 보다 실천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과 해결방법은 <십문화쟁론>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가 세상에 있었을 때는 부처의 원음에 힘입어 중생들이 한결같이 이해했으나 (…) 쓸데없는 이론들이 구름 일어나듯 하여 혹은 말하기를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하며, 혹은 ‘나는 그러하나 남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하천과 강을 이룬다 (…)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다다름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남(藍)이 같은 바탕이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를 다 용납함과 같다”고 하였다. 즉 원효는 바로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인식이 빚어내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적 논리 위에서 다양한 화쟁회통 논리를 전개했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자주 나오는 일심이 지니고 있는 ‘신해’(神解)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일심’(8식)과 ‘일심의 근원’(9식)을 아우르고 있다. 이는 원효가 이 논서를 무소불파의 섭대승경(攝大乘經)과 무소불립의 금강삼매(金剛三昧) 및 무출시이(無出是二)의 무량의종(無量義宗)으로 파악하고 진망화합식으로서의 제8 아려야식뿐만 아니라 옴마라식 즉 제9 아마라식의 존재를 수용하는 대목에서도 보여진다. 나아가 원효는 순불순(順不順), 허불허(許不許),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 불일불이(不一不二) 등의 다양한 화쟁회통 논법의 설정도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것은 또<열반종요>의 화회게에서 “불교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統衆典之部分)/ 온갖 흐름의 한 맛으로 돌아가게 하고(歸萬流之一味)/ 부처의 뜻의 지극히 공정함을 전개하여(開佛意之至公)/ 백가의 뭇 주장을 화회시킨다(和百家之異諍)”고 하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보법(普法)인 <화엄경>의 주석을 쓰다 붓을 꺾고 대중교화로 나선 모습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일심-화회-무애의 기호를 통해 원효가 보여준 치밀한 사고력과 활달한 문장력 및 넘치는 인간미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결국 원효가 몸소 보여주려고 했던 삶의 모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대화하고 소통하여야 행복(건강)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불교신문 2352호/ 8월18일자]
2. 의상
# 의상의 생애
의상(義相, 625~702)은 삼국간의 쟁패전이 열기를 더해 가던 진평왕 말년에 진골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스무살 전후에 경주 낭산 기슭에 있던 황복사로 출가하여 당시 신라에 소개되었던 섭론 지론 등의 교학 탐구에 열중하던 의상은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고자 선배인 원효와 함께 650년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육로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고자 하던 이들의 일차 행로는 고구려 국경에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37세인 661년에 다시 중국 유학길에 나선 의상은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에 건너갔다.
당나라에 들어간 의상은 그동안 신라에서 익혔던 지론을 더욱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장안 남방의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당대의 교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이 화엄사상을 정립해가던 지엄의 문하에 나아가 화엄을 배웠다.
지엄선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일승법계도〉를 저술한 의상스님은 신라 화엄사상의 주류를 이뤘다. 사진제공=부석사
의상은 지엄 화엄의 정수를 체득하고 668년에 이를 체계화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화엄일승 법계연기의 핵심을 언어의 절제 하에 210자의 법계도시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법계도인(法界圖印)을 만들어 그 내용을 <일승법계도>로 정리함으로써 화엄일승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형식에서 의상은 구불구불 돌아가는 반시 형태의 법계도에 화엄사상의 핵심을 집약하여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상징적인 효과를 의도하였고, 최신 기술이던 목판 인쇄에 다라니를 강조하여 담아내었다. 다라니는 모든 법을 갖춘 상징이면서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중국 종남산 지엄 문하서 화엄 정수 체득
평등 조화 추구…신분 낮은 제자도 포용
10년 남짓한 중국 수학을 마치고 670년에 의상은 귀국하였다. 신라에서 새로운 전법도량을 물색하던 의상은 동해변 낙산(洛山)을 찾아 관음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믿음을 정착시키고 관음도량을 열었다. 674년에 황복사에서 화엄을 강의하기도 하였던 의상은 676년에 태백산의 품에 안겨 끝없이 펼쳐지는 전망을 자랑하는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도량을 이루었다. 이 해는 신라가 당군을 격파하고 통일 전쟁을 마무리 지은 해이다.
통일 이후 신라 사회는 새롭게 확보한 국토와 국민을 새로운 토대에서 하나로 이끌어갈 화합과 안정이 절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상은 축성과 같은 외형의 정치보다 백성들의 진정한 평안을 기원하는 시대 의식을 선도하였다. 의상은 또한 청정한 수도자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여 삼의일발(三衣一鉢)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갖지 않았다.
의상이 부석사를 중심으로 이끌었던 화엄종단의 이념은 평등과 조화의 화엄사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신분의 장벽이 굳건한 골품제 사회였다. 의상은 화엄종단 내에서 모든 문도들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진정과 지통과 같은 낮은 신분의 제자들을 포용하여 중심인물로 키워냈다. 돈독한 수행으로 교단을 이끌던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로 입적하였다. 넉 달 뒤에 성덕왕이 즉위하여 바야흐로 중대의 황금기를 시작해 나갈 시기였다.
# 의상의 사상
의상의 화엄사상은 <일승법계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의상은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으로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말하는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과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상입상즉의 연기법을 역설한다.
화엄(華嚴)은 종래의 여러 사상을 종합하여 화엄이 최고의 원만한 가르침[圓敎]임을 강조한다. 화엄의 교리적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있다는 연기(緣起)설에 있다. 그 연기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相卽相入] 서로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重重無盡] 것이다.
<일승법계도>는 법계연기의 범주를 하나와 전체의 상입상즉, 조그만 티끌과 광대한 시방세계, 한 순간과 무한한 시간, 처음 마음을 내는 것[初發心]과 궁극의 깨달음, 그리고 생사와 열반으로 이루어진 다라니의 이용(理用).사(事).세시(世時).위(位)의 4가지로 구성한다. 의상은 이를 자리행으로 조직하고, 여기에 이타행과 수행문을 추가하여 강한 실천적 성격의 저술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전 열 개를 동시에 또는 다르게 세는 수십전(數十錢)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사진설명 : 의상스님은 화엄일승 사상을 형상화 한 법계도인을 만들었다.
의상이 중(中)과 즉(卽)의 이론으로 파악한 법계연기론은 다양한 현상세계와 동일한 이치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일과 다가 서로 똑같은 자격으로 서로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할 수 있다는 법계연기의 논리는 개체간의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 상입상즉의 연기설은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지향한다.
연기설은 연(緣)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제법은 연을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어느 하나도 일정한 자성이 없음을 기본으로 한다.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진 법의 도리인 공(空)은 곧 중도의이다. 중도의는 분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법성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법은 중도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 제법은 본래 중도에 있는 것이다.
“각자 위치서 그대로 성불할 수 있는 중생”
의상의 중도…양변 모두 인정하고 융합
의상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과 깨달은 부처처럼 전혀 다른 두 입장을 융합한 상태의 중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두 입장으로 대표되는 모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말한다. 의상이 말하는 중도는 양변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융합으로서의 중도도 인정한다. 이를 통해 중생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본래성불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선다.
의상이 <일승법계도>에서 중시하는 법성의 원융은 곧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인 해인삼매에서만 체득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성기(性起)이다. 이 깨달음의 경지 즉 드러난 존재 그 자체로부터 일체 사물이 유출되어 나오는 것이 연기이다. 지엄은 법계연기의 순정한 면이 성기임을 말하고 있다. 연기와 성기는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포괄 개념인 것이다. 성기설을 포괄하는 법계연기설이 의상이 전개한 연기관인 것이다.
의상의 십현설과 연기론은 지엄의 학설을 계승하였으나 수십전설과 육상설에서는 독자적인 관점을 심화시켰다. 일반 화엄학에서는 무분제로 보는 이이상즉을 이의 차별을 인정하는 견해 위에서 이이상즉설(理理相卽說)로 전개한 것도 의상 화엄의 특징이다.
의상은 <일승법계도> 외에 화엄이나 미타 관계 저술을 짓기도 했지만 많은 저술은 하지 않았다. 의상의 더 큰 관심은 화엄교단에서 문도들과 지속적으로 화엄교학과 정토신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 의상의 영향
의상은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여러 제자들에게 화엄사상을 강의하여 신라 화엄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십대제자라 불리는 문도들이 화엄십찰을 차례차례 열어나간 것이다. 십성은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범체 도신 등 모두 쟁쟁한 인사들이다. 이들은 법계도를 강의하며 교학의 전통을 형성하였고 이후 신림(神琳)과 법융(法融) 등에 의해 의상의 화엄사상이 신라 교학을 주도하였다. 십찰은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옥천사 비마라사 보광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 한결같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대찰들이다.
신라 후반기에 화엄 사찰들은 다소 다른 교학을 수용하며 다양한 변화를 통해 화엄종단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의상 화엄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이은 부석사계와 표훈계가 있는가 하면 화엄사계와 해인사계는 약간 다른 경향을 보였다. 더 나아가 원효나 법장의 사상을 수용하여 융합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여러 갈래의 화엄사상의 중심에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변함없이 서 있다. 고려 초에는 균여(均如)가 의상 화엄의 전통을 재확인하며 화엄종을 선도하여 고려불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학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선 위주의 조선 불교계에서도 화엄경의 강학은 지속될 만큼 화엄사상은 한국불교 교학의 굳건한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신라 화엄의 정초자 의상이 있다. 정 병 삼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3. 대각국사 - 스님의 학식.수행자 면모 ‘한눈에’
고려시대 천태종의 개조(開祖)이며 선과 교의 수행을 함께 추구한 대각국사 의천스님(義天, 1055∼1101). 고려시대 대표적인 고승이자 불교학자였던 의천스님은 왕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11살에 출가해 47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 까지 오직 구법(求法)과 전등(傳燈)을 발원하며 수행과 학문을 닦았다. 불교교학의 연구서만을 집대성한 교장(敎藏)의 간행, 활발한 국제교류 등 스님의 활동과 업적은 당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문화관광부는 스님의 이러한 업적을 널리 기리기 위해 스님을 2001년 11월 문화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좌우에 얼룩 있지만 보존 양호 선만으로 윤곽 표현…단조로워
<사진> 순천 선암사에 소장돼 있는 대각국사 의천스님의 진영.
1055년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스님의 휘(諱)는 후(煦)이고, 자(字)는 의천,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다. 스님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천태종의 개창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천태종 개창의 뜻은 일찍부터 갖고 있던 스님은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국청사를 짓기 시작한 선종 6년(1098)부터 본격화 된다. 이후 국청사가 완공되고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천태교관을 강설하는 등 선교 통합을 위해 헌신했다.
이처럼 한국불교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의천스님의 진영은 순천 선암사성보박물관에 잘 봉안돼 있다. 가로 110.2㎝, 세로 144㎝ 크기의 비단에 채색된 스님의 진영은 지난 1990년 9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044호로 지정되는 등 문화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후기인 1805년(순조 5년) 7월 도일스님에 의해 수정.보완된 이 진영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 가장자리에 습기로 인한 얼룩이 있어 일부 굴곡진 부분의 훼손이 있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원본의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앞 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수작이다. 진영은 흑갈색 골격의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는 긴 주장자의 중간을 잡고 오른손은 팔목에 염주를 낀 채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사색에 잠긴 신비스러운 눈빛과 넓은 이마, 큰 귀, 다문 입에서 스님의 학식과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굵은 목과 가슴, 듬직한 체구에 녹색 장삼을 입고 홍색가사를 걸치고 있고 금빛의 둥근 가사고리로 매듭을 대신했다. 가사와 장삼은 농담의 변화가 없는 짙은 채색과 선만으로 윤곽과 흐름을 묘사하고 있어 천의 질감을 느낄 수 없고 단조로운 모습이다.
또 이 진영에는 고려 말 고승 나옹 혜근스님이 의천스님을 업적을 기리는 찬문이 기록돼 있어 가치를 더 해주고 있다. 혜근스님은 찬문에서 “임진년 늦봄 전단 혜근 고개 숙여 절하고 공경히 찬하다. 고려 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시다. 송 철종황제가 국사로 삼다. 진수 정원 법사의 법을 잇다”라고 의천스님의 행장을 소개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 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 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 (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 (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 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 000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 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 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 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 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 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 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 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 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 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 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 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 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4. 달마의 생애와 사상
선종이 전개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 ‘선종의 진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오래 전에 상영된 영화의 제목이다. 구도의 열정과 시적인 상징으로 가득 찬 이곳에선 숲 속을 헤매는 소, 저녁노을의 나뭇가지, 바위에 고인 맑은 물속에 비친 새까지도 말을 하고 연기를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서쪽에 위치하고, 반대로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동쪽에 사는 사람이다. 방위는 절대적으로 거기에 놓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장소도 동쪽이 되기도 하고 서쪽이 되기도 한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달마는 인도사람이기 때문에 서쪽에서 왔다고 말하고 그 뜻이 무엇일까를 질문하곤 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은 대답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동문서답한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시각차가 보인다. 질문자는 달마의 도래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하여 묻지만, 조주스님은 단순한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달마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조주스님은 이런 것들과는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본다. 달마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선종의 사상적인 표상으로 다룬다. 그는 지금 여기의 현존, 진리로서 바로 우리들 자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은 것이다.
선종의 역사와 더불어서 ‘조주의 잣나무’는 깊은 침묵 안에서 우뚝 우리의 코끝에 서 있다. 문답은 과거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있고, 잣나무는 서쪽이니 동쪽이니 하는 온갖 방위를 끊어내고, 우주의 배꼽으로부터 우뚝 걸어 나온다. 이것은 단순한 잣나무가 아니다. 세계를 움켜쥔 폭풍의 설법이며 번쩍이는 칼날이다. 살아 움직이는 현재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셨고 미륵은 앞으로 오실 것이라 한다. 그러나 잣나무 이전에 석가는 없고, 잣나무 이후에 미륵은 없다. 잣나무는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바로 눈앞에 서 있다. 과거와 미래의 인식을 싹뚝 끊어버린 그것은, 우리들 가슴에 숨 쉬고 있는 달빛이다. 이것이 눈을 부릅뜬 달마이다.
사찰의 벽이나 선화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달마(達磨, Bodhidharma, ?~528?)이다. 인도나 태국에서 우리는 달마를 찾을 수가 없다. 선종이 발달되고 전개된 중국, 한국, 일본의 동북아시아 주요 3국에서 중요시한 상징이다. 그는 선종의 초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종의 선사상을 상징하는 달마는 우리들 각자가 참구해야 할 화두, 과제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달마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선종사서를 통해서 조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시점에서 달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경전과 실천 균등하게 강조한 ‘선종의 초조’ …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서 중요시
‘역사적 사건’ ‘종교적 상징’ 따라 시각 달라 … 돈황굴 문헌 발견 후 재구성 움직임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달마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속고승전〉(645년)이나 〈경덕전등록〉(1004년) 등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는 것, 양무제를 만나서 문답을 주고 받았고, 혜가는 눈 속에서 팔뚝을 잘라서 달마에게 보여주었다는 것, 달마는 죽었지만 예수처럼 부활하여 서쪽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 등등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도 그린다. 이런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보다 인간적인 달마의 모습은 없는 것일까.
선종사서가 전하는 달마의 모습은 문헌에 따라서 서로 매우 다른 모습의 달마를 전하고 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547년에 제작된 〈남양가람기〉에서 나오는 달마는 유명한 가람을 유행하면서 아미타불을 염하는 기도승으로 묘사된다. 645년에 만들어진 속고승전의 〈이입사행론〉에서 달마는 벽관을 수행하는 선종의 인물이다. 여기서 그는 진리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경전에 기초한 이치의 길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한다. 이런 달마는 경전과 실천을 균등하게 강조하는 매우 인도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송대에 제작된 〈경덕전등록〉에서는 달마를 이전의 시대에서 기술한 모습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입사행론이나 벽관의 수행법을, 세속적인 말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한다. 이것은 송대에 확립된 교외별전의 입장에서 당대의 선교일치적인 관점을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달마는 선사상의 변천과 더불어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술되고 평가되어 왔다. 이 점은 후학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 사상도 그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 때문에 20세기 초에 돈황굴에서 엄청난 선종관계 문헌이 발견되면서부터, 달마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돈황에서 출토된 〈능가사자기〉(708년), 〈전법보기〉, 〈역대법보기〉(744년)), 〈보림전〉(801년), 그리고 해인사에서 발견된 〈조당집〉(952년)과 같은 선종의 문헌들은 속고승전과 경덕전등록 사이의 350년의 공백을 메꿈으로써 선종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어떻게 변천하였는지 그 전체적인 조망을 어느 정도는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문헌 비판적인 관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는 실제 하는 인물이 아니라, 선종을 상징하는 가상의 인물이고, 달마에 의해서 선종은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발전된 후대의 선종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라는 인물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달마라는 인물의 역사적인 기록이 시대와 그 기록자에 따라서 특히 선종의 사상적인 전개와 더불어서 변천을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은 후대의 송대 선종사관에 익숙한 독자들은 구전되어 믿어왔던 달마와 선종사가 너무 달라서 새롭게 다시 보야 하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어떤 측면은 너무 달라진 선종사인 까닭에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아마도 달마를 이해하는 것도 그 중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테면 송대의 선종사관을 가졌다면 〈낙양가람기〉나 〈속고승전〉의 기록을 믿기가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역사적인 근거를 중시하는 이들은 오히려 송대의 달마에 관한 기록을 과장된 허구라고 극단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거하는 문헌에 따라서, 혹은 독자가 어떤 선종사관을 가지고 있는냐에 따라서, 달마의 모습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달마의 문제도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일체유심조의 진실이 적용될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저기에 존재한 달마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달마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다시 검토해야할 시점, 말하자면 해석학적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달마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이런 문제는 결국은 역사적인 근거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선사상의 상징성을 강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들의 과제는 서로 갈등적인 요소로서 양립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선학자들 사이에도 이런 문제는 심각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중국 정저우시 소림사. 달마스님은 이곳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 수행을 했다.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객관적인 전거를 바탕으로 이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체도 관념화에 떨어진다고 경고를 한다. 반대로 선사상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역사성에 치우치면 종교적인 가슴이 매말라버림을 지적한다. 이런 갈등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등장하는 해묵은 논쟁이기도 하지만, 정리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들의 갈등은 영역의 과제로서 서로 모순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선종의 달마는 또 그 자체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적인 근거를 중시하되, 나의 실존과 사상은 그 자체로 인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선종의 종지는 언어나 논리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배경을 떠난 별도의 것, 언어와 논리를 초극해 가는 활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의 중심에 위치한 조사의 언행과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조사의 언행도 사실은 역사적인 기반에서 비롯된 측면을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언행도 멀리서 보면 역사의 큰 틀, 인연에 의해서 자라난 거목이기 때문이다.
달마 역시 역사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후학의 몫이다. 그렇다면 달마가 서쪽에서 온 역사적인 사건을 중시할 것인가. 달마로 상징하는 종교적인 내적인 상징을 중시할 것인가. 필자는 현시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면서 그 내적인 상징에 귀를 내밀고 싶다. 선종의 문헌비판적인 접근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신앙만을 강조하는 송대 선종의 자기 독단의 위험을 극복하는 약으로 삼고 싶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인 측면을 뛰어넘어서 달마를 새롭게 해석하는 그 철학적인 고유성과 선사상의 자율성을 찬탄하고 싶다. 실로 달마는 선종의 전개와 더불어서 그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선종의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을 넘어서, 달마를 기꺼이 나의 실존적인 절박한 과제, 화두로서 환원하여 이해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그것은 무엇인가.
봄날 허공의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는 새 둥지를 튼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불교신문 2318호/ 4월14일자]
5. 휴정스님 - 용맹함과 인자함이 ‘공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나라를 구한 조선 중기 대표적인 고승 청허당 휴정스님(休靜, 1520∼1604). 서산대사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스님은 간화선을 지침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을 천명한 한국불교 최고의 선서인 <선가귀감>을 저술하는 등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대선사이기도 하다.
임란 때 승병모아 구국에 앞장 불화 속 모습은 푸근한 노스님
<사진> 양산 통도사에 봉안돼 있는 휴정스님 진영.
1520년(조선 중종 15)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난 휴정스님의 속성은 최 씨다. 12세에 양부인 안주 목사(牧使) 이사증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이후 스님은 15세 친구들과 지리산의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다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30세 되던 해에 승과에 급제,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7년 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다”라며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돌며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묘향산에 주석하고 있던 스님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세수 70이 넘었던 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왕에게 달려갔고, 자신이 직접 승병을 통솔해 전쟁터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스님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 1500여명을 모아 중국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평양탈환에 성공하게 됐다. 이에 선조는 스님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지만, 제자인 유정스님에게 물려주고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법랍 67세, 세수 85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이러한 휴정스님의 진영은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 공주 갑사, 영천 은해사, 밀양 표충사 등에 모셔져 있다. 전국 각 사찰에 봉안돼 있는 스님의 진영만 20여점에 이르지만, 당대에 그려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통도사에 있는 스님의 진영은 얼굴이 매우 부드럽게 표현돼 있어 인자한 분위기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 진영은 화기는 없으나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의현(1690~1752)의 찬문이 쓰여져 있어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돗자리로 배경이 구분된 2단 구도로 되어 있는 진영은 몸은 왼쪽 부분을 보이고 있으나 얼굴은 인자한 표정으로 정면을 하고 있는 의자상이다.
청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으며, 왼손은 불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 술을 가볍게 만지고 있다. 마곡사, 대흥사, 표충사, 갑사 등지에 모셔져 있는 스님의 진영도 승병 지도자로서의 용맹스러움보다는 인자하고 덕망 높은 고승의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27호/ 5월17일자]
6. 사명대사의 생애와 사상
호국불교사상 통한 평화외교로 중생제도 큰 족적
신묵화상 문하서 수학…18세 승과 합격
임란 터지자 건봉사서 문도와 함께 거병
전후 일본 전격 방문…화해의 기틀 다져
# 출생과 출가
사명대사는 중종 39년(1544) 밀양군 무안면 괴나리 풍천임씨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문이나 출가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석장비명’ 등 초기자료에는 대사의 조부 종원을 유학(幼學)이라 하였으며, 또한 대사가 왜란이 끝나자 고향에 백하난야를 지어 생가의 창두로 하여금 조부모의 명복을 빌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씨족보에서는 조부가 괴과(魁科)를 거쳐 강계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대사의 형에 진사 응기가 있고 장조카에 재존이 있었다고 달리 기술하고 있다.
표충사에 봉안된 사명스님의 영정
부사 출신의 조부가 밀양으로 낙향한 까닭도 묘연하지만, 형이 있었다면 대사가 봉사하였을 리 없다. 또한 대사의 증조부 효곤은 성종 이후의 관직인 장악원정을 역임하였음에도 족보에는 그가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낸 임향(任珦)의 아들이라 하여 의문을 낳게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대사의 가정문제에 관한한 족보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러한 의문의 베일들도 서서히 벗겨질 것으로 기대된다.
대사의 출가 동기 역시 그렇다. ‘석장비명’에서는 그가 13세 때 황악산 황유촌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가 ‘세속의 학문은 저속하다’고 탄식하면서 불가로 귀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지은 시나 상소문에서 ‘문호의 영락과 부모의 서세 때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그가 신묵화상에게로 정식 출가한 것은 부모가 서세한 16세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봉은사의 청년 시절
대사는 신묵화상 문하에서 공부하여 18세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봉은사에 머물면서 청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시인 묵객이나 조정의 사대부 관료들과도 시문을 창화하고 유서와 제자백가서까지 읽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맞아 출중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던 저력에는 이 때 읽었던 병서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사의 봉은사 시절에는 사인관료들과의 교유를 빈번히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승려로서의 생활을 충실히 다졌다. 내전(內典) 육천함을 섭렵하는 한편 갑계(甲契)를 조직하여 동연배 승려들의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지도적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이 산문에 구름같이 모여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30세 무렵에는 직지사 주지로 있었다. 8년 전에 유생에 의해 장살된 허응당 보우대사의 문집에 발문을 쓰면서 고인에 대하여 ‘천고에 홀로 왔다 가신 분’이라 추앙하였다. 일찍이 출가할 때 신묵화상으로부터 법명을 유정, 이환이라는 자를 얻었다. 직지사 주지시에 처음으로 호를 한산자라 하였으며, 신묵 주지가 썼던 중덕이라는 법계를 쓸 만큼 중진이 되어 있었다. 이 무렵 그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는 일도 잊지 않았다.
# 두 차례의 깨달음
당시 불교계는 지방에 머물던 대사를 선종의 수찰 봉은사 주지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서산대사 문하로 들어가 서산의 ‘일언하’에 즉시로 크게 깨달은 후 3년을 고행하여 그 정법을 얻었다. 때마침 상재된 스승의 대표적인 저서 <선가구감>에 발문을 써서 ‘요지를 가려낸 공로와 미몽을 깨쳐준 스승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다음 3년간 그는 금강산 보덕암을 수행처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 전후 3년씩의 수행은 운수행각의 연속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단계에 와서는 봉은사 시절의 유가적 견지를 벗어나 선의 세계에 자유롭게 노닌 것이다. 금강산에서 지은 ‘동해사’를 보면 아마도 이 때 사명(四溟, 즉 四海)이라고 자호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두 번째 깨달음은 이러한 구도행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1586년 43세의 나이로 옥천 상동암에 머물고 있을 때 하룻밤 소나기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두 번째 깨달음(돈오)을 얻었다. 이에 “부처는 내 속에 있는데 어찌 밖으로 구하여 치닫는가?” 선언하고 10일 간을 선정에 들었다. 이 ‘상동암의 돈오’는 중국 왕양명(王陽明)의 ‘용장(龍場)의 돈오’에 비견될 사건으로서 그들 양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공사상(事功思想)적 특징은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이후 퇴락한 오대산 월정사 중수를 위한 5년간은 그에게는 간고를 극한 세월이었다. 중창의 어려움은 자청한 일이지마는 엉뚱하게 정여립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가 하면 친한 친구 허봉의 죽음도 겹쳐서 당하였다.
# 호국전쟁의 영웅
사명당은 임진 6월 금강산에서 왜장 청정 휘하의 문화재 약탈군을 만나 그들을 두 차례나 불법으로 설득하여 영동지방의 9개 군을 재난에서 구제하였다. 그러나 침략의 마수는 날이 갈수록 심하여 조정과 서산의 격문이 이르자 건봉사에서 문도들을 모아 ‘불법의 중생제도’의 기치 아래 창의하였다.
사명스님은 왜군의 재침을 막기 위하여 영정사(지금의 밀양 표충사)에 의승병 훈련소를 설치하고 사자평에서 의승병을 훈련시켰다. 당시 선조의 행재소는 평양성을 점거한 왜장 소서행장에 쫓겨 의주에 있었다. 대사는 처음 승병 수백으로서 10월에 팔도도총섭 서산대사의 휘하로 들어가 의승병도대장이 되어 수천의 승군을 통솔하였다. 먼저 게릴라전으로 평양과 중화 사이의 왜군의 후방 연락과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다음 해 원군이 도착하자 그들과 함께 모란봉에서 싸워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왜군이 패퇴하여 서울로 후퇴하자 중도에서 패한 이여송군이 전의를 상실하였으나 관군들이 점차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간 의승군의 혁혁한 전공들이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기 때문이다. 한강을 배수진으로 한 왜군은 군량을 얻기 위하여 고양과 양주로 진출하였으나 처영은 행주산성에서, 그리고 사명은 수락산전투에서 크게 이겨 서울탈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사명당은 거듭된 군공으로 선교종판사에 제수되는가 하면 당상관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조치가 있었다. 서산대사는 연로하여 사명당이 평양에 도착할 당시부터 사실상 도총섭의 전권을 위임한 처지였다. 한편 왜군이 남방으로 후퇴하여 전쟁이 장기화하자 승군도 축성과 군량미 그리고 병기제조 등으로 역할변화가 있었다.
# 평화의 사자
전쟁에는 막후교섭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명당은 1594년 4월부터 몇 차례 서생포왜성으로 가등청정을 찾아 회담하고 영중을 정탐하였다. 이에 기초한 상소를 통하여 조선사회의 제반 모순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명(明)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일본과의 강화사 심유경이 조선에 파견되어 소서행장과의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가등청정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임해군 일행이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일 회담에서는 조선영토의 할양과 왕자의 입질 등이 논의되고 있는데도 조선에서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때 마침 명의 독부 유정(劉綎)이 야심찬 가등청정과 풍신수길을 이간질 시키는 계략을 세워 이를 위해 사명대사를 외교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일은 성공시키지 못했으나 서로 반목하던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써 전쟁국면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한 몫을 해내었다.
대사는 처음 강화사로서의 이미지 쇄신을 위하여 사명이라는 호 대신에 ‘북해 송운’이라 칭하였으며, ‘대선사’라 하여 그 위엄으로 기세등등한 가등청정을 상대하였다. 청정이 휘호를 청하자 “자기 물건이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취하지 말라”고 써주었으며,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대 목이 우리의 보배다”고 답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명당은 산사로 돌아가 쉴 틈이 없었다. 전후처리를 위하여 1604년 가을 대마를 거쳐 일본본토로 들어갔다. 그사이 일본에는 덕천가강이 새 집권자가 되어 풍신수길이 실패한 국제질서의 새로운 판을 짜자는 자리로 대사를 정중히 맞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 회담을 통하여 대사는 피로인 3000여명을 쇄환하는데 성공하고, 조선통신사의 길을 열어 이후 260년 동안 양국간의 평화를 다졌다.
# 불제자로 살다간 위인
대사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특히 왜란을 당하여 호국투쟁과 평화외교에서 보인 위용에 자타의 찬가가 잇따랐다. 왜장 청정은 독실한 일련종 신자로서 항시 종군승들을 거느렸는데, 대사는 법화의 오의(奧義)로서 그들의 동류의식을 유발하여 제자처럼 믿고 따랐다. 지금도 구주 웅본 본묘사에는 주지 일진(日眞)에게 준 법어 족자가 4매가 소중하게 전시되어 있다. 본토의 덕천과의 회담 직전에는 경도 오산(五山)의 장로승들과 성대한 선회(禪會)를 열어 임제의 종지를 밝혀 불제자로서의 동류의식을 다졌다. 특히 흑의의 재상이란 별명을 가진 상국사 주지 서소승태(西笑承台)는 대사의 자비심에 경의를 표하면서 피로인 쇄환노력에 조력하였다. 귀국 2년 후 쇄환사 여우길 일행이 도일할 때는 그들 오산 장로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서 ‘장군(덕천가강)’이 전 피로인 송환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가 도일하던 해 서산대사가 입적하여 귀국 후 치상하였으며, 믿고 지지해 주었던 선조와 서애 대감도 잇달아 서세하였다. 이들에 뒤이어 1610년 대사 또한 해인사 홍제암에서 67세를 1기로 열반에 들었다. 중생의 안녕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남긴 큰 족적은 여러 형태로 오늘조 영 록 동국대 명예교수 [불교신문 2379호/ 11월24일자]
7. 일연 스님
고려 정부가 몽고에 항복하여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에 주로 활동하면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희종 2년(1206)에 태어났다. 이름은 견명(見明)이고, 자는 회연(晦然)인데 뒤에 일연으로 바꾸었다. 9살 때에 해양((海陽)의 무량사로 가서 공부하였지만, 일연은 고종 6년(1219년)에 진전사의 대웅장로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여러 선문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참선하였으며, 그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 승과에 합격하고 포산(包山) 지역의 보당암이나 묘문암(뒤에 무주암)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불교신앙의 전통을 흡수하였다. 포산 지역에서 행해진 만일 미타도량의 결사운동은 정토신앙이나 화엄 등 교학불교는 물론 선관(禪觀)을 익히고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
“一門으로 교리 회통…구산선문 통합 노력” 고종6년 양양 진전사서 구족계 수지 왕실 비호 받아 ‘대장 낙성법회’주도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에 주석하면서 일연은 남해분사도감에서 간행되는 대장경을 접했다. 사재를 희사해서 정림사를 창건한 정안은 당시 강화도 정부의 집정(執政)이던 최이의 처남이며, 그의 외손을 양자로 삼는 등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정림사에 거주할 당시에 최이가 죽고 서자인 항(沆)이 대권을 이어 받았다. 최항은 정실 소생이 아니어서 정안과 숙질이지만, 둘 사이에 오히려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정안이 거세됨으로 인해 남해분사도감이 폐기될 운명에 처하면서 정림사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 :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군위 인각사.
일연은 길상암으로 옮겨 고종 43년(1256년)에 <조동오위>를 중편하였다. 그 사이 고려 정계는 급변하게 소용돌이쳤다. 고종 44년에 최항이 죽고 최의가 대권을 계승하였는데, 이듬해에 유경 등이 최의를 죽이고 왕정을 복고하였고 1259년에는 고종이 죽고 태자가 등극하여 원종이 되었다. 왕정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임연이나 김준 등의 무신세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고려 정부는 무신정권과 밀착하여 일어난 선종 곧 수선사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몽고에 항복한 이후 최씨정권과 밀착되었던 관계로 수선사의 세력을 대체하고자 할 때, 자연 고려 왕실은 수선사의 법맥과 연결이 가능하면서도 다소 이질적 사상경향을 가진 일연을 등장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종 2년(1261년)에 왕의 부름을 받은 일연은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였고, 이때부터 지눌을 계승하였다고 자처하였다.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원종 5년에 영일의 운제산 오어사의 주지가 되었다. 오어사는 혜공과 원효 교학의 전통이 깃들어 있던 곳이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연은 만회가 주석을 넘겨준 인홍사에 주지하였다. 주석한 지 11년 만에 인홍사를 중수.확장하고는, 조정으로부터 인흥사로 사액을 받았다. 이때에 가지산문도를 동원하여 <역대년표>를 간행하였다. 원종 9년에 조정의 명을 받아 그는 운해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이름난 스님 100여 명을 초청하여 대장낙성법회를 개설하여 주맹을 맡았다. 충렬왕 3년(1277)에 왕명으로 운문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충렬왕 5년에는 <인천보감>의 후식(後識)을 썼다. 이후 충렬왕과 일연의 관계는 보다 돈독해졌다. 왕은 직접 그를 위한 찬시를 지어 보냈다. 충렬왕 7년에는 일본 정벌군이 폭풍을 만나 곤경에 처하자, 왕이 격려차 경주에 들렸을 때에 그를 청하여 법문을 들었다.
다음 해에 왕은 근시를 보내 일연을 내전으로 맞아들여 선사상을 청해 듣고 광명사에 거주하게 하였다. 또한 충렬왕 9년(1283) 봄에 왕은 군신과 더불어 국사(國尊)로 추대하였다. 충렬왕 10년에 어머니가 96세로 별세하자, 조정은 인각사로써 일연의 하산소로 삼았다. 왕은 인각사를 수리하게 하여 토지 100여 경(頃)을 내렸다. 이후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하기까지 그는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입적하자 인각사의 동쪽에 탑을 세우고 이름을 정조라고 했으며, 충렬왕 21년에 문인인 운문사 주지 청분이 엮은 행장을 참고하여 민지가 탑비를 찬술하였다.
‘중편조동오위’ 등 100여권 저술 천태사상에 깊은 조예도 알려져
일연의 집안은 경주 지역의 세력가이지만 문벌을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일연비나 음기에는 그와 연결된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었다. 이들 중에는 충렬왕의 근시나 폐행이 많았다. 또한 경주 행재소에 동행하였거나 일본 원정에 참가한 장군 및 당시 그 지역의 지방관으로서 일연과 연결된 자들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 유학이나 불경에 밝아 불교에 관한 저술이나 역사서를 편찬한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특히 일연과 연결되었다.
일연은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가 현재 전하며, 그 외에 <어록> <게송잡저> <조파도> <대장수지록> <제승법수> <조정사울> <선문염송사울> 등이 알려져 있다. <중편조동오위>는 <조동오위>를 다시 편찬한 것인데, 본래의 내용에서 혼란된 부분을 개정하거나 보충하였다. <어록>이나 <조정사원> <선문염송사원> <게송잡저> <조파도> 등은 선종 관계의 저술인데, 그 중 <선문염송사원>은 혜심의 <선문염송집>에서 영향을 받아 저술되었고 <조파도>는 가지산문의 입장에서 편찬된 선승들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그 외 <대장수지록>이나 <제승법수>는 교학 관계의 저술이다.
처음 불문에 들면서 일연은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었지만, 스스로 지눌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표방하였다. 보당암에 거주하면서 <심존선관>을 닦았고, 문수의 오자주(五字呪)를 염송하였다. 수선사의 교관겸수 사상은 선관을 중심으로 교학사상 중 특히 화엄사상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선종사상의 입장에서 화엄사상을 중시하는 사상경향은 이미 일연의 사상 속에 분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문수보살은 화엄사상에서 중시되었지만 오자문수보살은 유식 곧 법상종에서 받들어졌다. 만년에는 오어사나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일연은 유식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 심화하였다. 오어사는 승조의 후신으로 자처한 혜공의 사상 전통과 연결되었고, 운문사는 원광의 유식사상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절이다.
경전을 중시한 외에도 일연은 법화의 천태사상에 대한 조예를 가졌고 유학사상에도 밝았다. 아울러 중국의 위앙종이나 운문종.조동종 등의 사상경향을 흡수하였다. 그가 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사상 형성과정에서 이해된다. 일연은 기본적으로 선승이며 화엄사상을 보다 중요시하지만 유식사상에 대해서도 대단한 소양을 가졌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심존선관>으로 표현되었다. 일연은 생계(生界)와 불계(佛界)를 구별하지 않고 삼계를 환몽으로 보아 몽환불사(夢幻佛事)를 행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지 않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몸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깨어있을 때와 꿈꿀 때의 허와 실은 오직 마음 작용(心識)에 의한 것이지만, 법상의 체()는 금강과 같아서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실체인 ‘공’에 대한 깨달음과 심식에 대한 이해가 일연의 사상을 정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사상은 수선사의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곧 화엄사상을 중시하는 <교관겸수>사상에서 유식사상은 물론 법화나 유학사상에 대한 인식까지도 포함하는 경향을 지녔다. 일연의 사상은 고려 불교의 교선융합 사상경향에서 이해되어야 하겠지만, 불교 교파의 어떤 교리와도 근접될 수 있다. 당시 고려 불교계는 담선법회와 장경도량을 자주 열었다. 일연은 교리와 선풍을 함께 논하였고. 구산선문도회를 개최하면서 여러 선종사상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다만 일연이 9산문의 선종사상을 융섭하려 한 것은 아니다. 선관의 근원은 원래 하나였는데, 9갈래의 선종산문으로 나누어져서, 각자가 달리 생각하게 되어 미혹해졌다. 나누어진 9산선문 자체가 미혹하기 때문에, 선관의 근원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선종사상의 통합이다. 일연은 9산선문을 통합하기 위해 중국 선종의 사상경향에 대해 정통하였다. 또한 주장을 책상 위에 세 번 내려치는 조동종의 접화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불공’ 또는 ‘정’과 ‘편’을 통합하려는 ‘중도’를 제시함으로써 융섭적인 사상을 모색하였다.
일연 사상의 이런 면은 9산선문을 통합하기 위해 선관의 근원인 일문(一門)을 강조하여 공이면서도 공이 아닌 진공(眞空)을 내세우고, 화엄이나 유식 등의 여러 교리를 회통하려는 <심존선관>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일연의 <심존선관>사상은 고려 불교의 교선융합 사상경향과 연관해서 파악해야 한다. 고려 초에는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 특히 화엄사상을 융섭하려는 경향과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섭하려는 경향이 모두 존재했지만, 고려 중기에 의천에 의해 성립된 천태사상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섭한 것이다.
본래 의천은 화엄종 스님이었고, 그의 교학은 고려 문벌귀족의 등장에 편승하여 성행하였다. 그러다가 예종 때에는 혜소국사가 활동하면서 선종을 중시하는 사상경향이 태동하였고, 무신란 이후 무인 집정들의 후원을 받아 수선사가 크게 일어났다. 수선사는 혜소와 그 문하인 탄연으로 이어지는 굴산문의 법맥을 표방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학일은 가지산문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일연은 학일의 법맥을 이었지만, 수선사의 사상 전통과도 친밀하였고 특히 2세주인 혜심의 사상을 중시하였다.
일연이 9산 선문을 통합하려는 사상경향은 고려 말 태고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태고는 실제로 9산 선문을 통합하려 했으며, 뒷날 그의 문하에서 서산대사가 나오면서 조선중기 이후의 불교계를 장악하였다. 다만 태고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그와 대조적으로 파악되는 나옹의 사상도 일연의 사상경향과는 이질적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법맥을 이은 무학 자초나 함허 기화 등은 조선 초기에 현정론을 내세우면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나옹과 태고의 문도들이 조선 초기에 활동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김 두 진 국민대 교수 [불교신문 2365호/ 10월6일자]
8. 자장율사 - 스님의 ‘꼿꼿한 기개’ 물씬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경주 황룡사 9층 목탁을 세우고 영축총림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시대 고승 자장스님(慈藏, 590~658). 특히 스님은 통도사에 한국불교의 계율을 상징하는 ‘금강계단(金剛寶戒)’을 세워 교단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헌신함으로써 불교계 안팎에는 자장율사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녹색 붉은색의 조화 ‘화려’ 전체적 단아한 풍모 엿보여
<사진> 양산 통도사 개산조당에 봉안돼 있는 자장율사 진영.
신라시대 진덕여왕 당시 활약한 자장스님의 속성은 김, 이름은 선종으로 진골 출신인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몸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4월8일 부처님의 탄신일에 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출가, 계율을 지키는 것을 기본 종지(宗旨)로 삼는 신라 남산종(南山宗)의 개조(開祖)로 전국 각처에 통도사, 월정사 등 사찰 10곳을 창건했다. 또한 진덕여왕 4년(650년)에는 중국 당나라의 연호를 도입하고 신라에 처음으로 관복을 입도록 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강릉에 수다사를 창건하고 태백산 석남원(현재의 태백 정암사)에서 여생을 마칠 때 까지 중생제도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자장스님이 입적한 후 제자들은 스님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진영을 조성했다. 스님의 진영을 모신 사찰은 양산 통도사가 대표적이다. 자장율사는 636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를 받아와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시고 스님이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출가사문의 길로 인도했다.
통도사가 불보 종찰로 불리는 까닭도 이곳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 산이 인도의 영취산과 닮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영취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율원(律院).선원(禪院).강원(講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인 ‘영축총림’으로 불리며 종단 주요 교구본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통도사의 진영은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도사 개산조당에 봉안돼 있는 자장스님의 진영은 지난 1990년 12월20일 경남유형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조선후기인 순조 4년(1804년)에 풍오(豊悟)스님의 증명과 양공계한(良工戒閑), 화원성인(畵員成仁) 등에 의해 조성된 스님의 진영은 가로 96㎝, 세로 146㎝ 크기의 비단에 채색됐다.
이 진영은 얼굴과 몸이 약간 오른쪽을 향한 상태에서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전신좌상이다. 긴 술이 달린 불자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긴 술의 끝 부분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의자 앞 받침대에 벗어놓은 신발의 색깔과 문양이 화려하다. 배경을 어두운 녹색으로 처리했는데, 붉은색의 의자가 잘 조화된 색의 대비를 보이고 있고, 녹색의 장삼과 붉은색의 가사가 뛰어난 색의 대비를 보인다.
이처럼 녹색과 붉은색을 기본색상으로 하여 화려한 듯 단조로운 구도를 보여줘 조선시대 진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00호/ 2월9일자]
9. 진묵대사 (전생과 현생)
불교에서는윤회라고 하고 심령학에서는 새롭게 태어난 영이 완전해 지려면 몇 번의 생을 거듭 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원리에서인지 사람들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가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주위를 놀라게 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철학에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소위 망각의 강인레테를 건넘으로서 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고 한다. 전생이라 하면 모두들 지금의 삶 이전, 그러니까 전에 살았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시대가 급변하면서 시간의 개념과 범위가 갈수록 축소, 압축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불을 발견하기까지의 시간과 그 후 전기를 발견하고 이를 기초로 해서 다른 기계 문명을 이끌어내는 데까지의 시간 폭은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사실을 이해 할 수 있다면 전생의 의미를 다시 설명해 보겠다.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의 시간차가 적어지고 있는데 꼭 태어나기 전만이 전생은 아닐게다.지금을 잘사는 것이 전생을 잘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돌이키게 한다.
효도의 대성인(大聖人) 진묵대사는 조선조 명종(1562-1633)때의 스님으로서 선(禪)과 교(敎)에 밝은 비구 스님으로서 수행을 철저히 하면서도 효도 또한 극진했다. 그의 일생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많았고 신통력이 뛰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출생은 이렇다.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 40이 넘도록 아이가 없는 불심이 돈독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이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생남(生男)기도를 올리던 어느 날이었다.부인의 꿈에 영롱한 구슬이 떨어지던이 차차 변하여 부처의 모습이 되었다. 부인은 그 부처에게 절을 하다가 잠이 껬는데 그때부터 태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일옥(一玉;진묵대사 아명)은 생김도 꼭 부처를 닮았다. 일옥은 스스로를부처라 했고 불법을 배운바 없지만 훤히 알고 있었다. 7세때 어머니를 졸라 봉서사에 들어가 혜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미가 되었다.그가 이리저리 떠돌며 수행하던중 창원 마산포에서 머물던 때 그를 사모하던 규수가 견디지 못하고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대사가 전주의 대원사 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마산포의 규수가 자기는 남자의 몸으로 환생했으니 시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징조를 보게 되었다. 그 이튼 날 마산포에서 온 기춘(奇春) 이라는 소년이 시봉코자 찾아왔는데 그 생김새가 상사병으로 죽은 규수와 똑같았다. 진묵대사는 설사 백겁이 지나더라도 인연을 만날때는 자신이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아서 그 과보를 스스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시자(侍者)로 삼았다.
이런 이야기를 살펴보면 진묵대사와 기춘에게서 전생이 얼마나 정확하게 현재와 연결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사후의 육체는 소멸되나 영혼은 우주 공간을 떠돌며 환생할 대상을 찾는다. 또한카르마,업(業)의 법칙 이 적용되어 영혼은 생전의 행실에 적합한 곳에 환생하게 된다.
여러분의 가족 구성원들은 과연 어떤 인연에서 한데 모여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는 동안 항시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니 원수가 한 집안에 재생하게 되면 삶의 형태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 질까? 부부 인연이란 무었일까? 평생을 마주 보며 미운정 고운정 다 나누고 살기에 보통 인연은 아닐께다.
물론 인연은 지나온 날들과 환경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지기도 하고 뭔지 모를 작용으로 맺어지기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어쩌면 인연 또한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듯 싶다.
태어날 때 부터 불구인 둘째 딸 아이를 볼 때 마다 A부인은 마음이 아픈데 그 핑게를 데고 남편은 어느 날 부턴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적반하장이라고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나와 그녀는 일방적인 남편의 학대를 당하고만 있었다. 이미 남편의 마음은 6살이나 연상의 여자에게로 가 있었고 집안 사정은 거의 등을 돌려 버린지 오래였다. 자기가 가정에 소흘 했던것도 아닌데 이런 악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던 그녀는 일종의 한풀이로서 구명시식에 참석했다. 자기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다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거라며 말이다. 그들은 전생에 부부였다. 부부는 부부였는데 남녀가 뒤바퀸 부부였다.
전생의 그녀는 남자였고, 자신의 부인에게 늘상 심한 매질과 구박을 했기에 부인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렇게 지은 업을 현생에서 그대로 되돌려 받고 있었다. 얼마나 확실하게 나타난 인과응보인가. 눈앞에 펼처지는 전생과 현생의 교차되는 영상에 심장 쪽으로 몰려드는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삶은 앞으로 살아나갈 날들의 밑거름이다. 운명과 풀어가야 할 업도 중요하지만 반데로 그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살아보겠다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본다. -차길진 영혼탐방기 P123-129-
10. 무학대사 - 억불에 맞선 스님의 기개 ‘꼿꼿’
“(무학대사는) 본질을 숭상하고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스스로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희사하였다. 또 그가 사람을 접하는데 겸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체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서 불교를 근간으로 조선조 건국에 크게 기여한 마지막 왕사 무학 자초스님(無學 自超, 1327~1405).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입적한 자초스님의 비문을 쓴 문신 변계량은 자애로웠던 스님의 성품을 이 같이 찬탄했다.
대개 지공ㆍ나옹선사와 함께 봉안 은해사 백흥암엔 따로 있어 ‘눈길’
<사진> 영천 은해사 백흥암에 봉안돼 있는 무학대사 진영.
사부대중에게는 무학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스님은 고려 말인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대사의 속성은 박 씨,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간(溪月幹)이다. 18세가 되던 해인 1344년(충혜왕 5년) 출가해 소지선사에게서 계를 받은 뒤 다시 용문산 혜명국사에게서 불법(佛法)을 배웠다.
이어 20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년) <능엄경>을 보다가 홀연히 깨우친 바가 있어 그때부터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 머물면서 수행정진하다 27세가 되던 해 1353년(공민왕 2) 원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인도출신의 고승 지공선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고, 다음해 평생 스승으로 모신 나옹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1356년 고려로 돌아온 무학대사는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산천을 주유하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고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조선 태조는 스님을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왕을 교화하고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위상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스님은 1405년 78세, 법랍 62세를 일기로 금강산 금강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이처럼 한국불교사의 큰 족적을 남긴 무학대사의 진영은 양산 통도사, 여주 신륵사, 순천 선암사, 상주 남장사, 남양주 불암사, 양주 회암사 등에 봉안돼 있다. 이들 대부분 사찰의 진영은 무학대사 이외에도 지공선사, 나옹선사와 함께 그려진 ‘삼화상’ 형식으로 봉안돼 있다.
이에 반해 영천 은해사 백흥암에는 무학대사의 진영만 따로 봉안돼 있어 눈길을 끈다. 홍진국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고승 17점과 함께 봉안돼 있는 백흥암 내 무학대사의 진영은 좌향7분면 형식을 띠고 있다. 적색과 짙은 녹색의 두터운 색조의 사용, 필선, 돗자리 배경 등은 ‘백흥암 극락전 감로도’(1972년 제작)와 같은 채색과 기법으로 되어 있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15호/ 4월5일자]
11. 범일국사
- 눈매ㆍ수염등 사실적 묘사 “놀라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私掘山門)을 개창해 남종선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신라시대 고승 범일스님(梵日, 810~889). 범일국사로도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은 침체된 신라불교를 쇄신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선지식이다.
범일스님은 810년(신라 현덕왕 2)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시호는 통효(通曉), 탑호는 연휘(延徽)인 스님은 15세 때 출가해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어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가 마조대사(馬祖大師)의 제자 제안스님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했다. 또 약산에 있는 유업선사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은 후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이후 스님은 847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고 동해안 일대에 사찰을 건립하는 등 선풍을 드높였다.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 화기 표기 문화재 가치 높아
<사진설명> 평창 월정사성보박물관에 봉안돼 있는 범일국사 진영.
명주 도독인 김공의 청으로 40여년을 굴산사에 지낸 스님은 당시에도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고 했지만 “선풍이 일고 있는 이 지역을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평소의 마음이 곧 도(道)”을 항상 강조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던 스님은 889년 세수 80세, 법랍 60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이후 백성들은 스님의 높은 공덕을 기리기 위해 대관령 정상에 서낭사(城隍詞)를 짖고 매년 음력 4월15일에 성황제를 올리고 있는데, 이는 지역 전통문화행사로 계승돼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범일스님의 진영은 스님이 창건한 삼척 영은사 칠성각에 봉안돼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평창 월정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와 모시고 있는 이 진영은 조선시대인 1788년(정조 12) 신겸 등에 의해 조성됐다. 불화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 12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된 이 진영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 비스듬히 앉은 좌안칠분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바닥에는 자리를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 그렸고 화면 가득히 인물을 채운 구도, 청회색의 법복과 붉은 가사, 바닥의 화문석 묘사 등은 조선 후기 진영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발에는 족좌대가 있고 오른쪽 손목에는 염주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양손으로 주장자를 비스듬히 들고 있다. 특히 한쪽을 응시하는 예리한 눈매, 꾹 다문 작은 입, 눈썹과 수염 표현 등 매우 사실적인 안면묘사가 돋보인다. 예리하면서도 깊이 있는 대선사로서의 기백이 잘 표현돼 있다.
건장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어 신체의 비례는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왼쪽 팔과 아랫부분이 탈락되었고 배경 부분이 얼룩진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현존하는 진영이 거의 없고 그림 하단 중앙에 정확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21호/ 4월26일자]
12. 벽송 지엄스님 - 스님 공덕 읊은 찬문 ‘눈길’
조선불교의 정통법맥을 이은 조선 전기 대표적인 고승 벽송 지엄스님(碧松 智儼, 1464∼1534). 1464년(조선 세조10) 전북 부안 송 씨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의 호는 ‘야노((野老)’, 당호는 ‘벽송당’, 법명은 ‘지엄’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 칼쓰기를 좋아하고 병법을 즐겨 읽었던 스님은 무과에 합격해 1491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장수로 출전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당시 전쟁의 참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크게 괴로워했고 28살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계룡산 조계대사를 찾아가 출가한 스님은 벽계 정심스님 등에게 수학한 뒤 1508년(중종3) 금강산 묘길상암에서 수행을 하던 중 <대혜어록>을 통해 평소 느끼던 의심을 풀고, 이어 <고봉어록>을 보다 깨달음을 얻었다.
득도한 뒤 지엄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금강산과 능가산을 두루 참방한 뒤 1520년 함양 지리산에 들어가 작은 사찰에 머물며 하루 한 끼만의 먹고 수행에 전념하면서 다른 수행자들의 사표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이 수행하던 지리산의 작은 사찰이 바로 현재의 벽송사다. 1534년 11월1일 제자들을 수국암으로 모은 스님은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법화경>을 강의했다. 이것이 마지막 가르침이었고 스님은 이날 입적에 들었다.
<사진> 함양 벽송사에 봉안돼 있는 지엄스님 진영.
스님의 진영은 벽송사에 봉안돼 있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진영은 구도나 필선도 좋고 찬문도 남아있어 가치가 높다. 특히 현재 전하고 있는 스님의 진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7년 1월 경상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가로 85㎝, 세로 134㎝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채색된 이 진영은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왼손에는 끝에 술을 늘어뜨린 불자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편안하게 의자의 팔걸이에 얹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는 다른 진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다. 얼굴은 다소 긴 편이고 길게 처진 눈썹 아래 적당한 두 눈이 약간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입은 작은 편인데 꽉 다물지 않았어도 약간은 힘을 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진영 윗부분에 기록돼 있는 찬문도 주목할 만하다.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청허 휴정스님이 지은 이 찬문은 4언 율시로 되어 있다. 지엄스님의 제자인 부용 영관스님의 제자인 휴정스님은 찬문에서 “어두운 세상 홀로 밝히는 등불이요(昏衢一燭), 진리의 바다를 건너는 외로운 작은 배(法海孤舟). 아! 스님의 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鳴呼不泯), 천추만세토록 이어지리(萬世千秋)”라며 지엄스님의 높은 공덕을 기렸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19호/ 4월19일자]
서산대사의 제자중에 한 사람인 '청매조사'도 이곳에서 크게 까달았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좋은 글이 있다.
청매조사(靑梅祖師)의 십무익(十無益)
1.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返照 看經無益) 마음을 돌이켜 보지 못하면 성현의보아도 이익이 없다.
2.불신정법 고행무익(不信正法苦行無益) 바른 법을 믿지 않고는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3.경인중과 구도무익(經因重果求道無益)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는 크게 생각하면 도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
4.심비신실 공언무익(心非信實巧言無益) 마음이 진실하지 않고는 아무리 교묘한 말을 잘 해 도 이익이 없다.
5.부달성공 좌선무익(不達性空坐禪無益) 성품이 공한 줄을 체달하지 못하고는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6.불근아만 학법무익(不近我慢 學法無益) 야만심을 꺽지 않고는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7.흠인사덕취중무익(欠人師德聚衆無益) 승의 덕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대중을 모아놓고 살아도 이익이 없다.
8.만복교만 유식무익(滿腹驕慢有識無益) 뱃속에 교만만 꽉 찬 사람은 유식하여도 이익이 없다.
9.일생승각 처중무익(一生乘角處衆無益) 한평생 모나게 사는 사람은 대중 가운데 살아도 이 익이 없다.
10.내무실덕 외의무역(內無實德外儀無益)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는 사람은 밖으로 점거동을 하여도 이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