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중국의4대미인
<양귀비(楊貴妃)>
양귀비(719~756)
본명은 楊玉環(양옥환)
이야기 1>
중국 당나라의 현종 황제가 어느 날 심향정에 올라 뜰에 가득한 봄기운을 즐기고 있었다.
날씨는 더 없이 화창했다.
“나 혼자서 즐기기 아까운 날씨로구나. 가서 나의 사랑스런 양귀비를 불러 오너라.”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술에 취해 낮잠을 한숨 자려고 누워 있던 양귀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전 날의 과음으로 걷기가 힘들어 결국 그녀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황제 앞에 나아갔다.
황제가 바라보니 양귀비의 술에 취한 모습이 두 볼이 발그레한 게 오히려 더 예뻐보여
“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느냐? ”
양귀비는 얼른 대답하기를,
“海黨未睡覺(해당미수각: '잠을 덜 깬 해당화' 라는 뜻)입니다.”
현종은 양귀비의 재치있는 대답에 껄껄 웃었다.
이 때부터 해당화는 羞花(수화), 즉 잠자는 꽃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양귀비가 한 말이 널리 유행되었다고 한다.
해당화는 예로부터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비들은 이 꽃을 바라보며 시를 읋었고,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유독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만은 해당화를 소재로 해서 한 수의 시도 짓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내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부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지만 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기가 송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
라고 대답했다. 해당화의 꽃말은 ‘미인의 잠결’ 이라네요.
이야기 2 >
따뜻한 초 여름의 어느 날. 당나의 수도 長安(장안)의 太液池(태액지)란 연못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현종과 양귀비의 행렬이 그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이 연못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현종의 눈에는 그 어느것도 옆에 앉아 있는 양귀비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주위의 궁녀를 돌아보면서
“여기 있는 연꽃도 解語花(해어화)보다는 아름답지 않구나“
라고 하였다.
당 현종이 지어낸 解語花(해어화)란 천하절색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
解語花(해어화)란 뜻 그대로 말귀를 알아듣는 꽃으로, 후에는 美人(미인)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
壽王妃(수왕비)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이다.
((수왕 李瑁(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옥환은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가 溫泉宮(온천궁)에 行幸(행행)하며 며느리의 미모를 엿보던 중,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 오도록 하였다.
양옥환은 빼어난 미모일 뿐만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 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霓裳羽衣曲(예상우의곡)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高力士(고력사)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옥환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옥환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옥환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옥환을 설득하였으며, 양옥환도 본래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현종 황제와 양옥환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된다. 현종은 중신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옥환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女道士(여도사)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太眞(태진)이라는 아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이라 개칭하였다.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世人(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되었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貴妃(귀비)로 책립되었다.
한편 현종은 아들인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 양옥환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궁에 들어온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양귀비는 섹스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육촌 오빠 楊國忠(양국충)으로부터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여, 수왕에게서 기초를 닦고, 현종을 만남으로써 기교상에서 결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종과 양태진
이 두 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든지, 땡볕 내려쬐는 한 여름이든지,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든지, 눈보라 휘날리며 흰눈 가득 쌓이든지, 현종은 양귀비의 처소로 가서 낮게 드리운 비단 휘장안에서 양귀비와 밤새워 사랑 나누고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홍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지 6년후 天寶(천보) 4년(745년) 27세 때에 양옥환은 귀비로 책봉된다.
명실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하였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교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하는 친척은 없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6촌 오빠 양소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민첩하고 요령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소이다.
천보 10년(751년)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마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比翼鳥(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連理枝(연리지)가 될 지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 는 중국 건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하지만 간신히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안록산의 난' 그 후 '사사명의 난' '황소의 난' 등으로 당나라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첫댓글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