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서천소가 웃을 일이라는 거다
호남정맥 종주중 정읍지역(특히 칠보 고당산)을 통과할 때처럼
삼남대로의 이 지역을 걸을 때도 선영 참배가 우선이었다.
마침 추석 직전이라 더욱 그래야 했다.
신태인역에서 태인과 칠보를 거쳐 옹동의 선영까지 걷기 위해서
정맥때 그랬듯이 가족보다 먼저 떠났다.
해방 이후 6. 25동란 이전까지 나는 고향(칠보면 백암리)의 집과
신태인역 간의 8km남짓한 거리를 늘 걸어야 했다.
두 다리로 걷는 것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이었으나 하체에
문제있는 내겐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렇듯이 매사에 무리수를 두어 훗날 일어서지도 못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울의 학업을 계속하려면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삼남대로 걸을 때 이 길도 걷겠다고 진즉 맘 굳힌대로 시작했다.
뿌연 먼지 뒤집어 쓰지 않고 강물따라 걷는 뚝방길이 참 좋았다.
이것은 걸어야 하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던 때의 일이다.
아무도 걸으려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지금의 뚝방은 장정
키를 상회하는 잡초로 뒤덮여버렸다.
자기네 영역이라고 사람은 아예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가.
더구나 반팔, 반바지로 덤비는 것은 오만이라며 생채기를 마구
내려 덤벼드는 듯 했다.
그래도 헤치고 가는 동안 아슴푸레한 옛일이 조금씩 명멸했다.
흘러간 세월이 60여년인데 또렷이 남아 있으랴마는 고향길은 늘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가족을 등지는 상행길은 언제나 심란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짐이 어깨를 눌러도 모정이 빼곡히 담겨서인지
무거운 줄 모르고 걷던 길이기도 했다.
동진강뚝 / 마구 할퀴려는 숲으로 뒤덮혔지만 (상) 대각교-멀리
보이는 다리 - 이후의 뚝은 이처럼 말쑥하다(하)
대각교 이후로는 잘 정비된 동진강이 반가웠고 시멘트 포장길로
승격한 뚝위로 차량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동진강 뚝에서 나의 외가가 있던 태인면 분동(태서리)과 지금의
옹동면 비봉리로 이장하기 전에 선영이 있던 북면 학동(한교리)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런 연유로 유소년시절부터 이 지역을 많이 돌아다녔다.
기계영농에 알맞도록 정지작업할 때 농로들을 바둑판처럼 반듯
반듯하게 직선화해서 거리가 짧아졌고 차량들이 주저없이 달릴
수 있도록 확포장까지 해놓아 이즈음엔 참 편하겠다.
그러나 예전에는 농로가 다 그러했듯이 논둑 밭둑을 요리 조리
돌아서 한참 가도 바로 코앞이었고 동진강 다리도 대각교 외엔
칠보 한하고 없었다.
태서리 진입 농로앞 정자에서는 고소를 지어야만 했다.
이 새로 난 농로를 걷고 새로 놓인 다리를 걸어 피향정에 다달
아서 옛길을 답사했다니 어처구니없을 때 쓰는 속담을 빌리면
"서천소가 웃을 일이다"
고향자랑도 팔불출인가
태인의 자랑은 단연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현판)이라는 보물
제289호 피향정(披香亭)이다.
이 정자는 신라 50대 정강왕(定康) 1년 (887년) 당대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태산군수(太山:현泰仁面) 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재임
중에 풍월읊고 소요하던 연못가에 세워졌는데 현존 건물은 이조
숙종 42년(1715년) 현감 유근이 중수하였단다.
피향정(전재)
당시에는 태산군(太山)에 속했으나 분리된 인접 칠보면(七寶)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호남정맥 종주중 639.4m고당산을 통과할 때도 언급하였거니와
(백두대간77회글 참조) 지금은 바로 그 호남정맥을 우측에 두고
삼남대로 따라 북상하는 중이다.
한데, 이 대로에서 살짝 비켜 있다 해서 고향을 모른체 하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칠보면은 칠보산 이름을 땄다고는 하나 실존의 7보를 자랑한다.
1. 고현향약(古縣鄕約) (보물 제1181호)
2. 분충거의(奮忠擧義)
3. 무성서원(武城書院)
4. 공신록권(功臣錄券) (보물 제437호)
5. 상춘가곡(賞春歌曲)
6. 왕비유지(王妃遺址)
7. 화경폭포(火鏡瀑布)
(백두대간77회글 참조)
상 / 고현향약
중 / 공신록권
하 / 이태조 왕지(위 사진들 전재)
칠보에는 위 일곱점의 보물 외에도 이조 태조 4년과 6년에 도강
김공(道康金公) 회련(懷鍊)에게 내려진 직첩왕지(王旨 :보물 제
438호)가 있다.
정읍시에 있는 전체 국가지정보물 8점중 3점이 칠보면에 있으며
이중 2점이 회련공의 공신록권과 왕지다
(忠敏公 懷鍊은 나의 19대조다)
시골 작은 면에 불과하나 자랑할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나 하는 짓이라지만 자랑할 만한 것
자랑하는 고향 자랑을 팔불출이라 할 수는 없겠지.
다시 살아나는 듯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
태인 피향정에서 옛길을 흡수한 1번도로 따라 오성교를 넘어야
함에도 나는 그 길을 버렸다.
칠보에서 30번 도로를 따르다가 태인 직전에 옹동으로 틀었다.
이 길 따라서 오성교로 가려고 한 것은 거리도 비슷하겠거니와
유소년 때의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서 였다.
일제의 소학교 학생때 일이다.
내 담임선생은 일본군 고조(伍長:하사) 출신 구로다(黑田)였다.
걸핏하면 대동아전쟁에 나가 세웠다는 무공 자랑에 열을 올렸다.
국가적 행사가 있는 날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와 설쳐댔다.
금테안경에 얼음장같은 인상인 그는 패전의 날이 임박할 때까지
유소년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면서 채찍을 들었다.
소학교 초급반 아이들에게까지 군인처럼 각반(脚絆)차고 금산사
(金山寺:김제시 금산면)까지 왕복 60리 원족을 강행시켰다.
(TV 화면에 종종 등장하는 이북의 소년소녀대와 흡사하게)
그 때 좁고 꼬불꼬불하고 고개가 많은 비포장길을 마치 끌려가듯
걸었는데 말쑥한 포장차도로 변한 이 길이라 짐작되어서 였다.
통행 차량이 거의 없어서 옛일들을 맘껏 더듬으며 걸었다.
구로다는 학생이 조금만 지각해도 양콧구멍에 분필을 쑤셔넣고
입을 벌리게 한 후 위아래 이 사이에도 긴 분필을 끼어놓던 아주
잔혹한 사람이다.
나의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은 이 때부터 깊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잠잠하던 그 적개심이 다시 살아나려 하는 듯 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1번국도가 반듯하게 넓어지려고 몸살을 앓고 있다.
어지러운 공사현장을 비켜갈 요량으로 택했다가 태인CC 앞까지
가서 시간, 체력 낭비와 함께 장탄식만 남기고 되돌아 내려왔다.
이전의 몸이라면 그까짓 산이 대수였겠는가.
높지도 않은데 길 만들며 넘어가면 도로가 나올 건데.
대간과 정맥, 산들을 누빌 때 매번 잘 다듬어진 길들만 다녔더냐.
길을 만들며 가는 것이 선등자의 사명이라고 중얼거릴 때가 부지
기수였었건만.
옹동면을 뒤로 하고 구도로로 남게 된, 감곡면(정읍시)과 금산면
(김제시)의 경계 솟튼재로 올라갔다.
전주의 산, 모악산(母岳)에서 남서로 가지쳐 내려온 198m천애산
(天涯山) 자락을 뚫은 터널 때문에 1번국도상이었던 이 재마루의
영화도 끝났는지 차도 사람도 없는 고도(孤道)가 돼버렸다.
한 때 번성했을 가든의 건물과 간판이 외로움을 타는 듯 했다.
높이 80m에 불과한 직선고개인데 옆에 터널을 뚫으리라고 상상
이나 했겠는가.
상 / 정읍시 감곡면과 김제시 금산면을 연결하는 솟튼터널
중 / 터널개통으로 한대가 된 구1번국도상의 솟튼재와 대형식당
하 / 금산면 삼봉리 봉은마을 이장 김헌영
9월인데도 무더위는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메로나와 우유의 효과가 한계에 이른 듯 해서 원평정육점식당의
육회비빔밥을 택했으나 이번에는 실패였다.
호남정맥 종주때 전남 화순에서 먹은 비빔밥과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지 않는 한 육회비빔밥은 정녕 외면해야 하나.
겨우 공복만 달래고 구도로 따라 얼마쯤 갔을까.
신1번도로에서 제외된 구도로는 금구 한하고 옛길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당초에 삼남대로를 흡수해서 생성된 도로였으니까.
원평 떠난지 얼마 되잖아 동쪽의 모악산 중계탑이 한 눈에 들어
오는 삼봉리 봉은마을 버스정류장 앞을 지날 때 였다.
일하다가 한낮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서 휴식중인 듯한 작업복
차림의 한 중년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더운데 냉커피 한 잔 마시고 가랬다.
냉수였다면 고마웠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커피밖에 없단다.
이곳 영원목장 주인이며 봉은마을 이장인 김헌영(51세)은 누군가
에게 하소하고 싶은 사연이 그간 쌓이고 쌓였던가 보다.
이 늙은 길손이 바로 그 누군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나.
신라 48대 경문왕(景文)의 귀가 당나귀귀처럼 크고 긴 것을 아는
이는 복두장(왕의 관을 만드는 사람)뿐이었다.
왕의 엄명에 장인(匠人)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못해 죽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도림사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 대고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吾君耳如驢耳)라고 소리쳤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숲에서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라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권제이(三國遺事卷第二)
경문대왕편에 있다.
이처럼 말을 참으면 생병이 나는데 김헌영도 그 지경이 됐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