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는 아이들 소리 저녁 무렵의 교정은
아쉽게 남겨진 햇살에 물들고
메아리로 멀리 퍼져가는
꼬마들의 숨바꼭질 놀이에
내 어린 그 시절 커다란 두 눈의
그 소녀 떠올라
넌 지금 어디 있니 내 생각 가끔 나는지
처음으로 느꼈었던 수줍던 설레임
지금까지 나 헤매는 까닭엔
네가 있기는 하지만
우린 모두 숨겨졌지 가려진 시간 사이로
위의 노래는 가수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의 가사이다. 나는 가끔 그의 음반을 찾아 듣는데,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저문 무렵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숨바꼭질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재잘거리고 깔깔거리는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좁은 골목길 양측으로 늘어선 남의 집 벽에 부딪히며 전해지다 엄마에게도 닿았는지, 엄마는 “밥 안 먹니? 빨리 들어와서 손 씻고 밥 먹어야지.” 하며 고개만 녹슨 철제 대문에 빼죽이 내민 채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곤 했었다. 플라스틱 공기놀이에 빠져 20년, 30년, 50년을 저축하고 있던 우리 계집아이들은 어스름이 번져오는 골목길에 제 그림자가 그늘 속에 숨어든 줄도 모른 채, 엄마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호명할 때야 겨우 더러워진 치마 궁둥이를 더 지저분한 손으로 훔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골목 바닥을 여러 차례 훑은 새끼손가락과 이어지는 손날은 시커멓지만 ‘내일 또 하자’는 눈짓만으로 저녁 인사를 마친 우리는 쏜살같이 각자의 집을 향해 달려갔었다. 가난한 세간살이를 흉금 없이 다 드러내놓고도 쑥스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름날에는 거미줄처럼 가는 실 길들이 모여 제법 너른 공터를 이르는 곳에 평상을 펼쳐놓고 엄마들은 콩나물을 다듬으며 시어머니 흉을 봤다. 어느 집에서인가 방앗간에서 빻아온 콩가루를 꺼내놓으면, 커다란 그릇에 뜨거운 쌀밥을 엎어 설탕과 함께 버무려 콩가루 주먹밥을 만들어 내어놓곤 했다. 밥알덩어리에 엉겨 느껴지는 달달한 그 맛이 싫어 입 안에서 오물거리다 꿀꺽 삼키곤 평상에 누워 더위가 사위기를 기다리다, 까무룩 잠이 들곤 했었다.
골목길은 늘 분주하면서도 한산하다. 컹컹 거리는 옆 집 개, 삐걱삐걱 열리는 앞 집 문, 또박 또박 들려오는 건너 집 대학생 언니의 하이힐 굽 소리,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갈 지(之) 자로 걷던 뒷집 아저씨의 술주정 소리가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난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마감되는 곳이다. 골목길은 아늑하고 가난하고 서민들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삐뚤빼뚤한 감상과 함께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반듯하게 들어선 널따란 통행로가 외길로서 모든 가정의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요즈음의 아파트 촌과는 달리, 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능선을 타고 나지막이 일상성이 퍼져 있는 휴먼 스케일이 유지되는 곳이다.
골목길은 그 골목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양새를 닮는다. 눈이라도 내린 겨울철 아침이면, 가파른 언덕 위에 누가 뿌려놓았는지 알 수 없는 연탄재가 눈 위에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다. 개구쟁이 꼬마 녀석들은 구멍 뚫린 벙어리장갑을 끼고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연탄재 묻지 않은 흰 눈 위가 매끈하게 윤이 나도록 집에서 엄마 몰래 꺼내온 고무다라를 타고 언덕을 지치곤 했다. 따듯한 봄날에는 인근의 운동장에서 학교 운동회를 알리는 노래 소리에 덩달아 들뜬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었다. 번데기와 볶기를 파는 아저씨도 공터에서 운동회가 파하고 짤랑거리는 동전이라도 바지 주머니에 담고 있을 아이들을 기다리며 냄새를 피웠다. 여름날 갑자기 소낙비라도 내리면, 옥상마다 널어둔 빨래들은 비에 흠뻑 젖어 축 늘어지기 일쑤였고, 담 벽 밖으로 삐죽이 나온 처마를 따라 홈통에서 콸콸 물이 쏟아져 비 그친 이후라도 골목은 물바다가 되어 첨벙거리기 일쑤였다. 볕이 좋은 가을날은 또 어떤가? 대문 앞에도 대문 안 쪽에도 무며 호박이며 고추 등이 가을볕에 바짝 바짝 마를 때까지 가뜩이나 좁은 통로를 잔뜩 차지했기에 얄밉기는 해도 , 소꿉놀이 반찬이 그 때 만큼은 더 없이 넉넉했었다.
밖으로 열린 대문과 좁은 실 길로 이어진 골목길, 골목길들이 한데 모여 생긴 작은 공터, 그 한 쪽에 미닫이 유리문을 단 조그만 동네 슈퍼에는 없는 것만 빼고 전부 있었다. 코일처럼 돌돌 말린 모기향도 있었고, 파리 잡는 끈끈이도 있었고, 꺼진 연탄을 살려내는 번개탄도 팔았다.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들고 두 부 한 모 심부름에 커다란 눈알 사탕 하나를 입 안 가득 굴리며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때면 제발 아는 어른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입 안에 가득 고인 사탕과 침이 입 밖으로 흐를까 괜스레 염려스러웠던 어린 시절이다. 엄마가 어디 있을지 모를 때면 한결 같은 배추 머리를 만드는 동네 미장원부터 기웃거리면 십중팔구는 해결되곤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자 동네의 소문이 온실에서처럼 자라다던 곳, 그곳에서 여자들은 순희네 아빠가 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철수네 할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곤 했으니까. 그 뿐이 아니다. 동네의 복덕방 앞을 지날 때면 동네 할아버지 모두와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보다 훈수를 두던 할아버지가 지나는 사람 모두에게 ‘흠흠’하며 가래 끓는 소리를 뱉어내며 쳐다보던 곳. 골목길로 이어진 나의 옛 동네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골목길이 많은 동네는 비밀이 없는 동네이기도 하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영희 언니가 요즈음 데이트를 하는지 아님 애인과 헤어졌는지 전부 알 수 있던 곳, 비밀이 없던 곳이기에 의뭉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하지 않은 곳이 골목길을 따라 단층 혹은 이층집이 늘어서 있는 옛 동네들이다. 그래서인가?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청결한 마을을 만든답시고 동네의 허름한 집들이 허물어졌다. 미로처럼 뻗어있어 숨바꼭질 놀이에 더 없이 좋던 좁은 골목길들이 넓혀졌다. 이제 내가 살던 옛 동네는 고급한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첨단 고층 마을이 되어 버렸다. 지나는 사람도 드물다. 전부 자가용을 타고 잘 닦인 진입로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추억 하나 달랑 들고 내가 살던 이태원동에 가보았다. 무엇하나 예전처럼 그대로이지 않았다. 축대를 따라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끝에는 호떡 파는 할아버지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축대까지도 흔적이 없다. 학용품을 산다고 엄마에게 탄 돈으로 불량식품 ‘쫀드기’를 사먹었던 재래시장 입구의 허름한 문방구도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전부 새것으로 둔갑해 버렸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자취도 없이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화여대 건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 석재 씨는 당신의 책 ??서울, 골목길 풍경??에서 골목이 가장 아름다울 때를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골목길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질녘, 딸내미 피아노의 똥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호박 써는 소리가 통통통 울리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퍼지고, 가끔 개가 멍멍 짖고, 집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기분 좋게 말라가고, 화분 속 꽃도 휴식에 들어가고, 일터로 나간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이 골목어귀까지 뻗는’ 때이다.(??서울, 골목길 풍경??,16쪽, 북하우스)
전문가의 결론에 나는 절대 동감한다. 내 잃어버린 시절의 추억을 몽땅 갖고 있던 이태원의 골목길과 다시금 되돌릴 수 없던 시간을 공유했던 그 골목길의 행복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아 삼청동이라 이름 붙여진 서울 한 복판의 골목길을 다닐 때면,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은근히 질투를 느낀다. 내 유년의 추억이 잠시나마 복원될 듯 유사한 공간적 배경이 되어주는 그 곳의 주민들에게 부리는 시샘이다. 특히 작은 한옥의 네모진 창문으로 얕은 불빛이 새어나올 때면, 대문이라도 똑똑 두들겨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삼청동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아늑하고 아스라한 옛 정취가 느껴지던 그 동네가 수십 년 동안 개발제한에 묶여 있다 최근 풀려나서인지, 이 동네는 온통 공사 중이다. 조용하던 동네, 혼자 사색하던, 혹은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과 팔짱을 끼고 내 유년의 추억을 고백하던 그 동네가 이제는 왁자지껄해졌다. 음식점, 카페, 공예품 가게로 즐비한 그 골목은 이제 어설픈 옛 골목길의 모습과 화려한 불빛의 가게들로 과거와 미래가 특이하게 공존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가을 해 넘어갈 때 좁다란 축대 위 길을 걷다보면, 골목길이 파헤쳐지고 휘황찬란한 상점의 불빛으로 밤도 환해지는 이 동네의 모습에 조금씩 우울해진다. 물론 비단 삼청동에서만 느끼는 우울함은 아니다. 지난 여름 성곡 미술관을 찾아갈 일이 있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부터 시작되는 골목을 따라 성곡 미술관으로 가는 길 위에 세워진 빌딩 숲과 아파트의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모습은 여느 아파트촌과는 다른 모습이다. 성곡 미술관 가는 동네는 다행스럽게도 성냥갑처럼 각을 세워 열거해 놓은 다른 지역의 아파트들과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내 발 소리, 동네 강아지 컹컹 짓는 소리, 솔솔 풍겨오는 된장찌개 냄새를 기대하며 걷던 그 골목길에서 ‘빵빵’하며 비켜 달라 요구하는 승용차의 경적 소리를 들을 때면 부화가 치솟는다. 전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옛 시절을 회상할 추억의 장소가 이제는 서울에서 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의 사직동
바로 성곡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동네가 사직동이다. 이 그림책은 글쓴이는 두 사람이다. 한 성옥 씨와 김 서정씨가 그들인데, 두 사람은 친구지간이다.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여기저기를 옮겨다녀야 했던 김 서정 씨와는 달리, 한 성옥 씨는 서울 토박이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 시절을 사직동 129번지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 동네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녀가, 오롯한 자신만의 추억을 많이 갖고 있을 그녀가 이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 이 그림책 한 권을 들고 새문안교회 옆 골목길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림책 속 모습과 사뭇 다른 오늘의 모습이라 가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 헤맴은 물리적 공간 속에서의 길을 잃은 모습만 상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되짚어 과거의 시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조한 세월에 대한 당황스러운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한 성옥씨 어머님이 어릴 때 이사와 그녀가 열한 살 되던 때 까지 살던 가옥은 칠십 년도 넘었다는 가옥이다. 봄이면 라일락이 향기롭고,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빛나던 마당이 있는 집이다. 세월을 이야기해주듯 무성한 담쟁이 잎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진 벽의 틈새를 가려주었다. 작가는 친구 정미 씨의 할머니를 기억해 낸다. 아흔이 넘었지만 옛 일을 생생히 기억하던 할머니는 동네의 터주 대감이다. 사직동이 가난한 동네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골목 파마 아주머니가 있었다. 파마 약을 사들고 찾아가면 공짜 머리를 해주던 아주머니들은 대문 앞에 까지 나와 앉아 파마약 냄새를 피웠다.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는 가끔 사탕을 그냥 쥐어 주는 착한 사람이었고, 가게를 찾는 꼬마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 팔 뿐인 재활용 아저씨는 한 팔로도 자동차 정비며 정원 일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쉬는 날에는 아줌마를 도와 빈 상자를 거두고 묶는 일을 도와줄 정도로 부지런하다. 그녀는 만화가게도 기억해낸다. 주인 아주머니 곁을 결코 떠나지 않던 캔디란 강아지도 기억해 낸다.
하지만 이 동네에 어느 날 낯선 현수막이 걸렸다. 재개발 인가를 알리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다. 옛 가옥들을 허물고 좁은 골목길을 뜯어 아파트를 짓고 넓은 길로 확장되는 공사를 곧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열한 살 소녀 시절 그녀에게 아파트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파트에 살고 있던 몇몇의 친구들을 시샘했던 그녀의 마음은 이제 곧 아파트에 살 수 있으리란 기대로 두근거렸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진 세사는 사람들의 푸념이 늘어났다. 동네의 살가운 풍경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떡볶이를 팔던 문방구가 문을 닫았고, 꽃집이 부동산 사무소로 새 간판을 내걸었다. 친구들과 함께 오르던 백 계단도 곧 허물어진다고 한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삼십 분이나 넘게 걸려 오르던 계단이지만, 아파트가 생기면 그 곳에는 천 계단 이상도 생길 수 있다. 더는 가위바위보를 하며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닌 것이다.
한동네 이웃들이 이삿짐을 싣고 이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들도 잠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야해야 했다. 새로운 동네에 쉽게 적응을 못한 그녀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중, 무심결에 옆 동네에 들른다. 내친김에 골목길로 계속 걷던 중 눈 앞을 가리던 높은 쇠 담으로 옛 동네가 둘러싸인 것을 목격한다. 한창 공사 중인 그 곳에는 그녀가 살던 집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오른던 백 계단도 없고, 가을날 탐스런 열매를 맺어준 감나무도 없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높다란 타워크레인만이 버티고 있고, 굴착기가 덜덜거리며 쇠갈퀴 손으로 땅을 파내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중학생이 된 그녀가 사직동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주소는 사직동 129번지가 아닌 모닝팰리스 103동 801호이다. 반듯하고 널찍한 단지 안에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작은 공원이 있지만, 그 공원에는 재잘거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 한가로이 소담을 나누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 한 성옥씨는 실망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교복 입은 소녀의 모습 뒤로 베란다 창을 열고 일정 간격으로 불이 켜져있는 건너편 아파트를 내다보는 소녀의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눈물지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듯 다.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여기는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는 없습니다.’ 라고.
옛 동무들과 뛰어놀던 동네를 생각나게 하는 노래
대학을 다니던 시절, 신촌의 굴레방 다리 밑에는 70년대의 자취가 남겨 놓은 통기타 카페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잊었지만 용돈이 생기던 날에는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그 카페에서 라이브 가수들에게 다음 곡을 신청하곤 했었다. 그 때 자주 부르던 곡은 한 때는 금지곡으로 묶여있던 양 희은씨의 ‘금관의 예수’,‘상록수’,‘아침 이슬’ 등이다. 부르고 또 불러도 지치지 않던 그 노래들과 함께 나의 20대 청춘의 나날들은 흘러갔다. 이제 신촌 기차역도 그 때의 모습이 아닌 새롭게 단장된 현대적 건물로 바뀌었고, 곧 허물어질 것처럼 내려앉은 기와지붕을 플라스틱을 덧대어 지탱했던 초라한 단 칸 가옥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현대적인 모습으로 옛 시절의 초라한 행색을 감추었다고 해도, 골목 담벼락에 묻어둔 사람 사는 비린내까지 내 기억 속에서 말끔하게 소각시키지는 못한 듯하다. 삼청동이 되었든, 사직동이 되었든, 북아현동이 되었든 젊음 하나로 막다른 골목길에서도 꺽이지 않고 용기 내어 새로운 골목길을 개척하던 시대를 회상하면 반드시 그녀, 양 희은이 떠오른다. 그녀 역시 종로 가회동 출신이니 골목에 대한 추억이 누구보다도 많은 서울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학창 시절 통기타 하나 둘러매고 시대와 청춘을 이야기했던 노래는 이제는 국민가요가 되어 언제든 목청 높여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곡이 되었다.
그녀 나이 마흔 살이던 1991년에 ‘양희은 1991’이란 타이틀로 나온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에는 치열했던 젊음의 열기를 접고 인생 중반에 들어선 그녀가 그리워하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물씬 배어 흐르고 있다. 그 어느 트랙을 먼저 듣든 상관없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는 그녀가 직접 작사한 노랫말에서도 다음처럼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 할까 말까
눈 비비며 빼꼼이 창밖을 내다보니 삼삼오오 아이들은 재잘대며 학교 가고
산책 갔다 오시는 아버지의 양손에는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가 하나 가득
딸각딸각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엉금엉금 냉수 찾는 그 아들의 게으름이
상큼하고 깨끗한 아침의 향기와 구수하게 밥 뜸 드는 냄새가 어우러진 (가을 아침 중에서)
이런 모습은 높은 아파트 담벼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이 느끼는 아침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지난 시절이나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여유로운 일상 풍경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녀는 분명 가을 아침 한가로이 응석을 실컷 부릴 수 있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이 노랫말을 지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가회동 시절의 옛 동무들이 떠올랐는지,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 편지도 함께 띄우고 있다.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라는 대목에 이르면 나와 함께 좁다란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우정을 간직하며 멋지게 늙어가자며 다짐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전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름이 가고 어느새 바람 속엔 가을 냄새가 짙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가끔은 옛 골목길을 떠올리기나 하는 것인지....
이 앨범에 수록된 음악들은 지금은 영화 음악 작곡가로 너무나 유명해진 기타리스트 이병우씨가 딱 한 곡만을 제외하고 전부를 작곡했다. 잔잔한 어커스틱 기타 반주 위로 낮게 깔리는 양 희은 씨의 노래 소리를 듣다 보면 앞만 보고 질주하던 일상이 문득 덧없게 느껴진다. 한 없이 시시한 일상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놀 권리가 있던 그 시절의 그 골목길에서는 권태롭게도 사실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지나가던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저무는 골목길에 솔솔 풍겨오던 된장찌개 냄새에 배고픔을 느끼거나, 이웃집이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에 귀 따가워 하면서도, 그 모든 시시한 삶을 사랑하던 여유롭던 시절. 그 골목길은 역시 느린 시간이 흐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 허물어지고 빠른 시간만이 더 넓어진 대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옛 동네의 골목길에서 저녁을 맞이하던 동무들도 어느새 그 시시한 시절을 잊고 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 잠시 무료함과 권태를 느껴보는 것이 꼭 어리석은 일일까?
첫댓글 그제 밤을 꼬박 지새고(술 먹는다고) 대학로에서 연건동으로, 창경궁에서 북촌으로 그리고 최종 목적지였던 삼청동에 갔지요. 카메라를 넣어간 줄 알았는데 가방 속에 없더군요. 그래서 아쉬운대로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지요. 요즈음 왜 이렇게 사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늘 바쁘고 밤새우는데(술 말고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지 벌써 1년인데, 일상(밥벌이의 끔찍함)에 묶여 간단히 목표한 것은 늘 뒷전이네요. 좀 둘러가도, 좀 쉬다가도 되겠죠? 제 나이 벌써 마흔인데, 이러면 안된다고요? 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니 또 떠나고 싶네요. 역마살....제 경우 떠나기 위해 밤을 새우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마흔은 불혹이라고, 어쩌면 에고가 뿌리 깊고 단단해져 감을 의미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감성은 무심한 바람결에도 마냥 나풀거립니다. 양희은의 CD를 나이 마흔 즈음에 자축하며 구입했지요. 앞으로 내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지는 지점, 그 언저리에서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