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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물
황금찬
쌍계사
계곡의 물소리를
청자 매병에 담아
네게 보내노라.
그대 붓을 들어
피아골의
구름을 그려보게나.
섬진강
황금찬
화계 장터에서
고담 책(유충렬전) 한 권을 샀었지
섬진강 가에 가서 책을 풀어
한 장 한 장씩을
강물에 띄웠지.
바다야
너라도 이 책 한번
읽어주려나.
화계 장터에서
도시에 물들지 않은
너의 모습을
나는 보고 있다.
머리채 치렁 치렁하던
내 누님의 뒷모습...
별
최은하
별이 뜬 하늘
어지러운 별 위의 너와
나는 그리움으로 아득하다가
이슥한 꿈결이다가
발광하는 별이다가
별의 그림자이다가
한줄기 바람으로 빛살이 되는가.
안개 마을
최은하
오늘도 자욱하기만 안개 속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무거운 뒷모습이 멀어진다.
말을 걸고 싶지만
주변이 무너질까 봐
숨결을 내리앉힌다.
이 마을엔 여지껏 어떠한 기별도 없고
반가운 손님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아무리 헤쳐보아도
시력의 초점이 입방(立方)으로 흐릴 뿐
오전에도 나무의 그림자는 기다랗고
띄엄띄엄 가는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가가이서 마주치는 이들마다
휘둥그래진 눈알 치켜뜨고
무거운 발길이지만 분주한 기색이다.
누구라도 함부로 내뱉지 못하는 말
말의 무게가 앙금으로 남아
끝나지 않은 시간이 일어나고
어떤 소문도 없이 하루 해는 기운다.
그 누군가 커다랗게 한 번으로 뿌려
역력히 날아오고 있을 전파인 듯
그 기다림으로 나의 유배는 몽롱하다.
손을 흔들면서
황송문
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으로 헤어지는 순간에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시간에
하늘에고 땅에고 온 천지 동산에
이슬이 맺히는 것은
개울가 미루나무나 은사시나무에
슬픈 이파리의 물 그림자
찬란한 슬픔의 물 그림자나
노을이 꽃피면
적혈구들이 모여서 노을이 꽃피면
화톳불 타던 끝에 스러지는 재
황혼의 애상이 잎새로 흔들린다.
김 치
황송문
일상에는 보나마나 하다가도
막상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알다가도 모를 조강지처다.
종갓집에 시집 올 때는
부드러운 배춧잎에 소금을 뿌려
뻣뻣한 교만을 숨죽이게 하더니,
새우젓에 멸치젓에
고추와 마늘과 생강과 청각채
서로 서로 사이좋게 어울리다가,
시나브로 익는 인생 맛이 들면
‘사스’는 물러가고 침묵 사랑만 남는
모르다가도 알 것 같은 조강지처다.
시간 보내기
김년균
어느 화랑에 갔다가
꽃처럼 어여쁜 집이 바람에 시달리며
눈물 훔치는 그림을 보았다.
왜 이리 소란한 것일까.
폭풍의 언덕에 우뚝선 외로운 집 하나,
바람이 에워싸며 시샘하는 걸 보면
그 속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남 몰래 살며시 들어가 본다.
어느 방에선 살을 찢는 비명소리,
어느 방에선 천년의 비가 내리고,
사는 일이란 이런 것인가. 이만큼 아픈
시간을 먹으며 무엇을 기다리는가.
수백 년 묶은 고목이, 팔다리 잃은 채
그림 밖으로 숨어 있다가
찌그러진 얼굴을 불쑥 내밀며,
제 모습을 구경하라고 한다.
변산에서
김년균
해가 지면 갯벌 위로 잔을 들고
다가오는 어둠떼들이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
화가가 못다 그린 그림을 그리고,
양지 바른 곳에만 숨어살던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꿈에 젖는다.
그러나 빗나간 시간처럼 습관에
젖어버린 거친 물결은
하루에도 몇 번씩은 밀려왔다
밀려갔다 또 밀려오고,
제 몸을 부딪치며 무엇을 외치는지
연신 신음소리를 낸다.
새벽마다 빈 배는 바다 끝까지
멀리 떠나고.
안개속에서 별 찾기
―제주도에서
이세연
햇살 찾을 수 없는 한낮
바람을 맞으러 나선 길에
안개가 날갯짓으로 비를 퍼트린다.
아름드리 소철이 버티고 서서
이국의 정경을 그리고
끝없는 돌담
젖은 채 틈새마다 이끼를 키운다.
계절이 없는 숲을 파고 들며
무거운 옷 한 겹씩 벗으니
두 고온 겨울이 아득하다.
야자수에 맺혔던 이슬
목덜미를 타고 흘러
맨살에 젖어든다.
눅눅한 발자국 줄곳 덮어주며
조금씩 앞길 열어주는 안개밭에서
한참 동안 하늘을 더듬어 본다.
간신히 찾아낸 몇 송이 별을 주워
아무도 모르게 품에 안았다.
빛 바랜 아버지의 사진
이세연
아버지의 베개 밑에서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고향 강물에서 올망졸망 아이들과
물장난을 치고 계셨다.
어젯밤도 헛손짓으로 깨어나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이 사진을 쓰다듬으셨나 보다.
손때 묻은 얼굴 하나씩 쓸어 안았다가
제 갈길로 등 떠밀어 보내고
지친 걸음으로 강가를 거니신다.
순식간에 흑백의 물살에 휩쓸려
흠뻑 젖은 나를 닦아 주시며
애써 웃으신다.
아버지는 오늘도 강줄기를 따라
바람 멎을 날에 다가가신다.
산 책
최창일
머무르지 않고 지나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도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웃음 짓게 하고 추억된다.
큰 행복의 씨앗은 작은 땀방울들이 키우는 것.
산을 오르는 힘듬이 정상의 시야를 만끽할 수 있고
지나온 길을 내려볼 수 있다.
길 잃은 들짐승을 만나면 내 험준한 길, 위로가 되어
그대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걸어보지 않는 사람은
착한 이웃이 되지 못한다.
꽃은 낙화의 충격을 보아야 열매 맺고
풀잎은 수 만 번 젖는 비애를 맛보아야
가슴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립다면 바람을 맞으며 밤길을 걸어라.
흐르는 물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라.
바람이 산책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바람이 아니다.
강물은 흐르지 않으면 이 강산의 허브가 될 수 없다.
나를 키운 것은 세상 밖에서 세상 안 들여다보는
생각의 산책이 칠할이다.
호수 깊은 집
최창일
금주리 호수가 아름다운 집
빛나는 영혼의 근원을 지닌 거울이 있다.
그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는 친구가 웃고
향기로운 사람의 음성이 흐르고 있다.
토방 끝 솔 위에 떠있는 조각달
그림자가 그대 깊은 곳 잠들고,
호수 깊은 집 사람들은
사랑의 와인을 나누며 잠들지 못한다.
맑은 모습 하나를 호수에서 건져내고
따뜻한 마음으로 시름을 씻는다.
호수는 햇빛에 항상 윤이 나고
우리가 살아온 나이테보다 더 많은 파문으로
사랑의 무늬만을 부지런히 만들자고
노래하며 오늘도 흐르고 있다.
꽃을 위하여
이오장
바람목에 자리 잡은 메마른 터
꽃 한송이 활짝 피었다.
허물어진 흙 담 아래
돌멩이 나뒹그는 묵정밭은
잡초 한 포기 제대로 크지 않아
모래먼지 자욱한 땅이었다.
멀리 바라다 뵈는 꽃그림자에
무지개다리를 헤매이다가
울안에 옮겨놓고 싶어
담 밖을 맴돌았다.
바람 따라 풍겨오는 향기에
혼자만의 눈 맞춤 바라다가
아침 햇살 눈부신 날
내게로 다가온 한송이 꽃
이젠 굳어버린 땅 곱게 일궈
웃음으로 담장 둘러치고
새싹 돋아날 밭 가꾸련다.
노을녘 바닷가에서
이오장
멀리 떨어진 섬이
눈부시게 보이는 건
그대 때문입니다.
걷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걸음일 뿐
발치에 밀려든 석양빛에 떠오른 그대는
더욱 멀어지고 있네요.
햇덩이는 불길 꺼져도
그 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내일 다시 타오르겠지만
내 불씨는 이대로 꺼뜨려야할지
갈매기 날개 위에 내리는 어둠
바위기슭에 스며들 때라야
찾아온 건 모두 떠나간다는 걸
알아채지나 봅니다.
날마다 노을에 서서
그대 모습 환하게 그려도
보이는 건 내 그림자 뿐이네요.
분리수거
유회숙
일요일 늦은 밤
종이는 종이끼리
깡통은 깡통끼리
분리수거를 하다가
문득 나를 버리기로 했다
결 고운 나무가 만든 종이와
각양각색 플라스틱
한 조각 없는 나
얼마간의 순수도 직인 찍히지 않는다
넘치는 음식물 쓰레기
그 곳에서도 반입불가
곰삭아 서로 엉겨 붙는 것들만
따로 이름을 갖지 않는 것들만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잠시나마 유배시킨 나를
분리수거 한다
날내가 나고
요량 없이 뻣뻣한 무엇으로
나는 집행유예 중이다.
꽃
유회숙
길을 가다 꽃을 보았다
소똥이다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길 끝에 과수원이 있다
사람들 무시로 다니는
밤낮으로 하늘이 내려다보는
풀잎 뒤척이는 길 위에
똥을 보았다.
어디선가 굴러온 돌멩이
딴청 피는 길 위에
철퍼덕철퍼덕 귀쌈을 올리듯
뜨거운 속 꺼내놓고 가는
뒤가 향긋한
꽃을 보았다
만질 수는 없다
소가 사라진 길 끝에
과수원이 있다
보름달 뜬다.
촛 대
정희
어느 초가을
촛대 선물을 한
향수라는 이름을 가진 문우의
환한 얼굴이 보였다
전기가 환한데 왠 이런 선물
별 뜻 없이 받아 구석에 두었다
3년 뒤 가을
이메일을 보내던 중
사방이 캄캄해졌다
더듬더듬 촛대에 향기 나는 촛불을 켰다
향수의 환한 얼굴이 나를 밝혀준다
별 가루가
송송 뿌려지는 오늘밤
너와 나, 촛대이고 싶다고 편지글 보내련다.
저녁 강
정희
바람 부는 저녁
강 언저리엔
오래 전 손님 잃어
삭아내린 나룻배 한 척
부는 바람에 나도 흔들려
내 저녁 강을 저어나가면
등덜미 보이며 멀어지는
그림자 하나
물비늘에
달빛살 뒤척이는 사이로
밤새워 풀어 놓을
더운 가슴 하나
풍 치
박기동
치과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꼼짝없이 눕는다.
푸석푸석 떨어져 나오는 치석과
민망하게 부운 잇몸에서
솟구치는 항변
단단하게 경직된 몸이
꿈틀, 거린다
차일피일 참아온 치통이
헐거워진 몸을 죈다
지난날 헛디딘 시간과
갈무리 하기도 바쁜
생각의 편린들이
하나 둘
나사못을 죄듯
죌 수록 어긋나는
내 안을 들여다 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늦바람에 흔들리기 전에
입안이 얼얼하도록
단단히 고정시킨다.
시계가 멈췄다
박기동
시계가 멈췄다.
내동댕이쳐진 시침과 분침
일순간 멈춘 그 사이로
인간의 욕심은 눈덩이처럼
욕심이 욕심을 부르며
둥굴게 굴러간다.
둥근게 께름칙하다
나와 지구도 둥굴다.
둥근 제 몸을 견디지 못하고
부풀대로 부푼 풍선
빵!
놀이동산에서 아이가 운다.
열매 꼭지 같은 고무조각을 들고
풍선을 찾는다
사라진다는 건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허공 너머 어디엔가 있다고
아이에게 말해버렸다
공룡이 제 발자국에 묻혀 사라지고
로마제국이 거대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 뒤척이는
생각의 보푸라기
시침과 분침이 제자리를 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어른이 된 아이가 말한다.
나무 아래서
최혜숙
바람 부는 날 오후
수척한 모습으로 찾아온 너
안절부절못하고 서성거린다.
새 잎 돋기 시작하는 나무 아래
마주서서 얘기 나누다가
수술한 후에는 제대로 앉지도 못한다며
엉거주춤 등을 기댄다.
며칠 전 겨울 옷 정리하다가
네가 선물한 녹색 모자를 보며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던
너의 낡은 옷장이 생각났다.
언젠가 갑자기 들이닥친 집달리가
살림살이에 붉은딱지 붙이고 갔다고
까맣게 탄 가슴 쥐어뜯으며
막막해 하던 너
한 때는 무성한 잎 매달고
단단한 열매 맺는 나무였는데
지금은 하나, 둘 마른 가지 늘어나고
드러난 뿌리는
행인들 발길에 채여 조금씩 닳아진다.
봄날은 간다
최혜숙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에 서서
바람 불어오는 소리를 듣는다.
웃 자란 줄기 사이에서
서걱 -서걱 - 서걱
긴 수염 나푼거리는 보리이삭
옆으로 돌아눕는다.
잡힐 듯 다가온 구름은
하늘 가장자리를 맴돌고
어디선가 날아온 솔개 한 마리
시간의 그물 속으로 날아들어 바둥거린다.
꽃 그늘에 갇힌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 올라 소용돌이 친다.
까끄라기 이삭을 베고 누워 눈을 감는다.
코끝을 간질이는 풀잎
만개한 자운영 향기
더듬이 긴 나비의 날갯짓 소리
숲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던 오월이
제자리 곧추섰던 꽃을 밟고
비틀비틀 걸어 나간다.
가로등과 달맞이꽃
최연숙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대문 앞 가로등에 이끌리어
달맞이꽃으로 피어나네.
불어오는 미풍에 깜박이더니
어둠 속에서 해매이다
남쪽으로 떠나며 산 넘고 넘었네.
빛을 삼킨 골목길 더듬거리다가
담벼락에 부딪칠 때 마다
시간은 정지된 듯 싶었고
내 발걸음만 비추던 가로등빛
온 동네를 환하게 밝히어
골목마다 무수히 피어나고 있네.
밤이 깊어지고 더 또렸해지는 자태로
향기 피어올려 새벽을 밝히네.
덕유산에서
최연숙
하얀 구름 속으로
곤도라 타고 오르니
어제 내린 비
굽이굽이 흐르는 골에
밤새내 나누던 얘기 펼쳐진다.
파란 바람결 따라 귀 기울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
바위를 붙잡은 순간
벼랑 끝에 서있는 나를 본다.
어두운 기억들 봉우리에 풀어놓고
이정표 앞에서 늘
뿌리 드러낸 나무와 마주쳤다.
비바람에도 버티고 선 구상나무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지워 지지 않을 한 폭의 그림
안개비가 감싸준다.
어느 공원의 한 나절
안중득
출렁이는 도시
공원의 어둑한 모퉁이에
피어난 꽃들이 안개를 쓸어내고
비둘기똥 말라붙은 긴 의자에
노인의 젖은 눈빛이 흐리다.
하릴없이 누워있는 이
무거운 짐 등에 얹힌 듯
습한 몸뚱어리에 곰팡이꽃 슬고
비어있는 소주병 속에
길을 떠도는 가족들
휴지를 줍는 이가 빈 병을 거두어 간다.
발자국 쌓이는 공원
쪼르르 엄마 따르는 세발 자전거가
노인의 지팡이 앞에 멈춰서고
모이 한 웅큼에 모여드는 비둘기 떼
금세 공원은 싱그러운 바람이 인다.
한 나절 지나
공원을 벗어나 미끄러져 나가는 지팡이
뒤를 따르는 세발 자전거에서
떨어진 꽃씨 몇 알, 새싹이 돋는 소리
갑자기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햇살 퍼지면서
꽃 피웠던 나무가 열매를 달고
도시 저켠으로 걸어간다.
찻잔 속의 길
안중득
먼 길 달려 온 시간이
탁자 위 찻잔 속에 고였다.
때론 거친 파도를 넘어
우-우 울음을 참았고
비바람에 찢겨
잉잉 아픔에 소리도 흘렸지.
찻잔 속에 붉은 매화 피었다.
가지에 나비 한 마리
날아 온 곳을 몰라
돌아 갈 엄두 내지 못하고
고요 속에 앉았다.
꽃가지 사이로 길이 보인다.
등짐 지고 넘는 고개길
아득히 먼 길
어디서부터 시작했길래
남은 길만 보이는 걸까
시간은 쉴 줄도 모르고
길은 찻잔 속에서 아물거린다.
명시 감상 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저녁 별 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 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오월의 노래 노천명 보리는 그 윤기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숲 사이 철쭉이 이제 가슴을 열었다. 아름다운 전설을 찾아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불로초 같은 오시(午時)의 생각을 오늘도 달린다. 부르다 목은 쉬어 산에 메아리만 하는 이름······. 더불어 꽃길을 걸을 날은 언제뇨. 하늘은 푸르러서 더 넓고 마지막 장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라. 그리고 폭풍이 불어 다오. 이 오월의 한낮을 그냥 갈 수는 없어라. 남사당(男寺黨)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紛)칠을 하고 삼단 같이 머리를 따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 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노천명(盧天命) 약력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났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을 다닐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8·15광복 뒤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湖林)》을 출간하였다. 1945년 2월에 제2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의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 친일 작품으로는 《싱가폴 함락》 《부인 근로대》 《님의 부르심을 받고》 《군신송》 등의 시와 르포인 《여인연성》 등이 알려져 있다.
■ 다시 찾아 읽는 글 (수필) 소음기행(騷音紀行) 법 정 오늘날 우리들의 나날은 한말로 표현해 소음이다.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현대인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달라고 몹시도 보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입술에서도 언어를 가장한 소음이 지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무책임한 말들이 제멋대로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정한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시장(市場)이나 전장(戰場)에서 통용됨직한, 비리고 살벌한 말뿐이다. 맹목적이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이 없기 때문일까. 이렇게 해서 현대인들은 서로가 닮아간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고 있다. 다스리는 쪽에서 보면 참으로 편리할 것이다. 적당한 물감만 풀어놓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허우적거리는 무리를 보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까 소음에 묻혀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은 접촉의 과소(過少)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다(過多)에서 인간적인 허탈에 빠지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한다. 잿빛 소음에 묻혀 생명의 나뭇가지가 시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지에 가을이 오니 그래도 마른 바람 소리가 수런거렸다. 귓전으로가 아니라 옆구리께로 스치는 그 소리를 들으니 문득 먼길을 떠나고 싶은 묵은 병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날로 털고 나섰다. 서라벌! 그렇다, 신라로 가자. 불국사 복원공사의 현장을 언제부터 보고 싶었다. 동대문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경주행을 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소음의 도시여.” 제3한강교를 벗어나자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그네 길에 가끔 들리는 음악은 정다운 길벗일 수 있다. 마른 바람 소리 같은 구실을 해주니까. 무심히 창밖에 던진 시야에 초점을 맞추어주기도 하니까. 그래서 여독(旅毒)을 씻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울려 퍼질 때 그것은 정다운 길벗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곤욕(困辱)이었다. 그 음악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파리똥이 덕지덕지 붙은 곡조들뿐. 북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도, 왜 남한의 곡조와 가사는 저렇듯 청승맞고 병들어 있는가 싶었다. 가위 자유대한의 그 자유라는 빛깔을 저렇게 각색해야만 하는가 싶었다. 누가 이런 소리를 듣고 눈을 지그시 감을 수 있단 말인가. 견디다 못해 안내양에게 좀 쉬어가면서 듣자 했더니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거듭 요구하자 “다들 좋아하는데 왜 그래요?” 하면서 눈을 흘겼다. 곁자리를 보니 가락에 맞추어 발장단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행자라는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내가 낸 돈으로 차가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내 뜻은 전혀 삽입될 수 없다. 모처럼 소음의 일상에서 벗어나 맑고 조용하게 날개를 펴고자 나그네가 되었는데 소음은 ‘카 스테레오’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줄곧 나를 추적해오고 잇는 것이다. 아, 이런 소음이 문명(文明)이라면 나는 미련없이 정적(靜寂)의 미개(未開)쪽에 서겠다. 연변(沿邊)에 울긋불긋 덮인 슬레이트 지붕들, 산자락이나 개울가하고는 아무래도 조화가 안 되고 있는 그 슬레이트의 어설픈 덮개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의 유행가를 있는 대로 몽땅 내뱉으며 달리고 있는 이 고속버스가 네발 달린 차량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포요 전율이었다. 차를 몰고 가는 운전수와 차장격인 정부는 국민의 식성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락만을 줄기차게 틀어댈 것이다. 자기네의 상식(常識)으로 손님들의 양식(良識)을 잴 것이다. 손님들이 낸 요금(세금)으로 달리고 있으면서, 카 스테레오까지도 그 돈으로 돌리면서 손님들의 의사는 전혀 모른 체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반나체 춤을 보이려고 자기네끼리 곧잘 어울리는 워커힐 같은 데로 데려갈지 모른다. 부질없는 상상일까. 서울에서 경주까지 예의 소음 때문에 나는 나그네의 멋을, 홀가분한 그 날개를 잃고 말았다. 1300원어치의 소음에서 내리니 심신이 더불어 휘청거렸다. 서라벌은 간데없고 관광도시 경주가 차디차게 이마에 부딪쳤다.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비극이다. 설사 행동반경(行動半徑)이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구심(求心)을 잃은 행동은 하나의 충동에 불과한 것. 그런데 문제는 그 소음에 너무 중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청각이 거의 마비상태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음의 궤짝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똑똑한 문명인들. 자기 언어와 사고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들은 도도히 흐르는 소음의 물결에 편승하여 어디론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소음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소음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의 말이 소음이라면, 그로 인해서 빛이 바랜다면 인간이 슬퍼진다. 그럼 인간의 말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그것은 마땅히 침묵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되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그러기 때문에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묵 속에서 오고 간다. 말 많은 이웃들은 피곤을 동반한다. 그런 이웃은 헐벗은 자기 꼴을 입술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소음에서 나와 소음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들린다. 그러니까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깊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정말 피곤한 소음의 시대다. 카뮈의 뫼르소가 오늘에 산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 소음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할지 모르겠다. (現代文學, 197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