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생이 되어 10개의 별을 달다.
다음 해 2월. 졸업장과 우등상장을 손에 받아들고 졸업을 한 뒤 선생님이 중학교 원서를 써 주셔서 접수를 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자 320명 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영주중학교에 합격을 했다.
어느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시며 무척이나 걱정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반가운 소식이 며칠 후 귓전에 들려왔다. 할머니가 읍내에서 사법서사를 하시는 숙부님을 찾아가 나의 입학금을 허락받아 오신 것이다. 말하자면 아버님이 할머니를 숙부모님 댁에 특사로 보내 성공을 거둔 셈이다.
입학금을 대준 숙부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인인 국방경비대에 선발되어 여수순천반란사건과 6.25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시고 화랑무궁훈장을 받으신 분으로 1955년 전역하셨다. 군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법원공무원으로 특채되어 근무하시다가, 읍내에 사법서사 사무실을 내어 그런 대로 잘 살고 계셨다. 그런 작은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금을 대주신 것이다.
숙부님 덕분에 나는 꿈에 그리던 중학생이 되었다. 비록 시골 중학교이지만 4개면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어 무려 5반이나 되었다.
당시에는 5.16군사혁명 직후라 개혁의 바람이 몰아치고, 마을마다 4H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농촌이 일깨워지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4년이 지난 형.누나들과 함께 어울러 다녔다. 더욱 놀란 것은 목소리가 굵고 턱 밑에는 수염이 몇 개씩 나있는 형님뻘 되는 급우들이 비교적 많았다. 또 가슴이 불록 나오거나 히프가 방석마나 한 누님 같은 여학생도 많았다.
학생은 많고 학급수가 적어 교실이 비좁았지만 형님 되는 급우들과 장난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다닥다닥 붙여놓은 책상위로 다녀야 할 정도로 교실이 너무 비좁아 불편했지만, 중학생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슥했다. 하기야 우리 마을에서 여섯 명이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겨우 두 명만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다니니 만큼 그도 그럴 법하다.
중간고사나 학기말 고사를 치르게 되면 나이 드신 형들이 나에게 커닝을 요청하였고, 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일찍이 답안지를 작성한 후 맨 뒤에 있는 형에게 건너 주고 교실을 빠져나오곤 했다. 만일에 답안지를 돌리다가 들키는 날이면 들키는 사람만 체벌을 받는 것으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형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고, 그 형들을 따라 못된 짓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담배는 기본이고, 술을 자주 마셨으며, 틈만 나면 극장으로 달려가서, 규율부 선생님을 피해 영사기실에 숨어서 영화를 보고 나오기가 부지기수였다.
당시 학생들의 극장출입은 교칙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런데 같이 극장을 출입한 친구가 가끔 규율부 선생님한테 들키기도 하였는데 그런 날이면 다음날 모두 교무실에 불러가 호된 체벌과 함께 또 하나의 별을 달아주곤 하였다.
당시 학생지도를 담당하셨던 배문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는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으로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분이셨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한마디 호령하시는 우렁찬 목소리는 일찍이 ‘사자후(獅子吼)’라는 말이 선생님의 지휘 호령을 두고 생긴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선생님의 얼굴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위엄 또한 호랑이나 사자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근엄하고 무서웠다.
나는 이미 몇 개의 별을 달아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나는 수많은 별을 달고 나서도 시오리 통근 길에 자전거를 타는 애들에게 가방을 실어 학교로 보내고, 어쩌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먼지가 진동을 이루는 비포장 신작로를 아침마다 걸어오면서 삼학소주 한 병으로 나팔을 불며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용의검사를 지도하시던 규율부 선생님이 나를 보시고 호루라기를 불어세운다.
“김형오 너, 아하, 입을 벌려봐.”
내가 입을 벌리면, 술 냄새를 연방 맡으시고 나서 목소리를 높이신다.
“너, 또 술 먹었느냐?”
“네, 아버지가 잡수시다 남긴 반주 한잔 마셨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불호령이다.
“교무실로 따라와.”
교무실 한쪽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고 뒷짐을 지고 한발을 올리는 체벌인 원산폭격을 한참하고 있으면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 첫 시간 수업에 나가시고 넓은 교무실은 다시 정적이 한 동안 흐른다.
잠시 후 규율부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탱자나무 몽둥이로 내 엉덩이를 마구 내려치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나는 맞은 숫자에 더는 기억이 없었고, 한참 후 일어나 교무실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려 보니 팬티에 핏자국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어도 나는 술과 담배를 끊지 않고 계속 이어 갔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될 대로 되라는 막가파식이다. 그렇지만, 나는 문학을 좋아하여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부터 작문을 잘했던 것 같다. 그 작문 실력으로 같은 반 형들의 연애편지를 도맡아 써 주었고, 그 대가로 빵, 술, 담배 등을 받기도하고, 때로는 버스요금도 받아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재미를 붙였다. 연애편지를 잘 쓰는 그런 나를 당시 형들은 ‘연애 조합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S라는 한 여학생을 문화빵집에서 만났는데, 그 청순한 모습에 나는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날 밤 이상하고 묘한 감정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 배앓이는 무척이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당시 당고모 두 분과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용기를 내어 밤새 연애편지를 써 두 명의 고모를 통해 전달토록 했다. 우린 집배원 고모를 통해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여학생 담임 유정규 미술선생님에게 발각되어 결국은 둘이서 유기정학을 맞았다. 나는 벌 받는 것이 숙달되어 괜찮지만, 이 여학생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이 사실이 통보될 것이 두려워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체벌로 수업대신 일주일간을 실습장 옆 부지에서 아침부터 김을 매는 일을 하루 종일 해야만 했다.
둘이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우리를 감독하시는 규율부의 다른 김 모 선생님이 가끔 바라보시며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김형오, 너 기분 좋으냐?”
나는 질세라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네, 기분 좋으습니다.”
이렇게 응대를 하는 내 모습을 보는 선생님이나 이를 바라보던 학생들 모두가 까르르 웃어 제쳤다.
나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문화빵집이 단골집이었다. 서울에서 방위를 받으려 시골에 내려가서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장날 문화빵집에서 소금 두말을 주문하여 가지고 갔더니 소금을 받아 놓고서 무슨 장부를 꺼내더니
“집이가 힝오 어무니요.”
“예, 그런디요.”
“힝오가 외상값이 오백 원이 있응께 이 소금 값하고 어땝시다.”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죠”
이렇게 말하고 쓸쓸히 돌아섰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나는 교내 조폭 서클인 ‘백골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단장이 되었다. 가끔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다 혼을 내 주기도하면서 학생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도 할뿐만 아니라 학교를 향해 장발이나 교복자율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훌륭하신 김태즙 교장선생님 퇴진운동을 벌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선생님들한테는 분명히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가기위해 생활기록부를 발급받아 보니 근신, 유기정학, 무기정학 등으로 어느 듯 별이 십여 개가 붙어 있었다.
마치 새장에서 해방된 새가 창공을 날 듯, 중학생으로서 정도를 넘어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으니 교무회의를 열어 여러 번 퇴학을 논의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일로 다른 백골단 단원 몇몇은 퇴학을 당하여 인근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나는 단장이라 그런지 퇴학만은 면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을 여러 번 호출했으나 단 한 번도 부모님이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다.
나는 비록 문제 학생이었지만 시험만 보면 최상위 클래스에 올라 있었다. 때로는 수학이나 영어에서 최고 점수를 맞기도 하여 선생님들조차 도저히 믿기려들지 않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래도 일류고등학교라도 입학을 하게 되면 모교를 크게 자랑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켜보자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퇴학결행을 못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그때 보잘것없는 나의 싹을 선생님들은 그래도 보셨다는 말인가? 나는 어쨌든 이에 부응하여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고, 가끔 언론, 방송에도 얼굴을 내미니 이만하면 모교에 진 빚을 다소나마 갚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철없던 중학교시절 의 일들을 회상하면 지금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