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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의 그리움 - 삼척 덕항산 산행기
일시 : 2014. 5. 13 코스 : 하사미 - 예수원 - 구부시령 - 덕항산 정상 - 환선봉 - 자암재 - 환선굴 - 대이리주차장 산행시간 : 4시간 30분
그리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으로 나부끼고
지난주 화요일에는 남도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장흥 사자산, 보성 일림산을 걸었다. 이번 주는 다시 방향을 북으로 틀어 삼척 덕항산(1,071m)을 향한다. 전주에서 쉽게 갈 수 없는 백두대간 오지이기에 더욱 기대가 된다. 특히 대천덕(戴天德) 신부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예수원’을 잠시나마 들를 수 있어 뜻 깊은 여행이 될 듯하다.
오늘도 나는 배낭을 메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떠나는가?’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내 안에 나부끼는 그리움의 깃발을 본다. 청마 유치환이 노래한 바와 같이,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같은 그리움이 나를 저곳으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생명과 인생, 즉 살아있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했던 청마 시인은 인간을 꿈꾸는 존재로 규정하고, 현실 너머를 꿈꾸는 행위가 인간의 숙명이요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설령 이상향(해원)에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나부끼는, 나부껴야 하는 깃발처럼, 저 먼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만이 진정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시지프스가 그러했듯이, 설령 꿈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현실이 되고, 언제나 이상은 저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먼 곳에의 그리움’은 생명이 있는 한 지속되는 것이다.
자연지리보다 인문지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산과 길보다는 그곳에 얽혀있고 배어 있는 인간들의 삶의 자취를 느껴보고자 한다. 그래서 산길을 걸으면서 하늘과 자연, 신, 인간, 역사를 생각하고 ‘나’와 대화를 나눈다.
Fern Weh! (먼 곳에의 그리움) 일상의 시공간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길 위에서 낯선 세상을 만나고,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며,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떠남, 여행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재인식하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으로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행위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는 집을 나선다.
예수원에서 만난 대천덕 신부의 삶
오송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한 알프스산우회 일행은 태백시를 거처 삼수령과 검룡소를 지나 하장면을 향한다. 삼수령(三水嶺).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곳. 삼수령 북쪽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은 남한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영남평야를 적시며, 삼수령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죽서루(竹西樓) 아래를 지나는 오십천(五十川)이 되어 삼척 앞 동해와 합수한다.
09시 38분 태백시 방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북진하여 하장면 하사미동 하사미교에 도착했다. 버스가 전주 서도프라자에서 04:00에 출발했으니 약 5시간 40분이 소요된 셈이다. 하사미교에 ‘예수원 Jesus Abbey 1km→' 이정표가 보인다. 길 왼편에 잣나무가 줄지어 우리를 반기고, 오른 쪽 길섶에 애기똥풀꽃이 샛노랗게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외나무골을 오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예수원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몇 번이나 예수원에 와서 노동과 기도, 묵상과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삶의 매무새를 바로잡고 싶었다. 1980년대에 나는 월간지 ‘신앙계’에 연재되는 대천덕(토레이) 신부님의 글 ‘산골짜기에서 보낸 편지’를 즐겨 읽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대천덕 신부님을 뵙고 태백 예수원에서 2박 3일 영성훈련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실천에 옮기지도 못한 채 젊은 날들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예수원임을 알리는 수직 간판, ‘고 대천덕 신부님 추모비’, 스위스풍 수도원 건물이 등이 우리를 반긴다. 일행과 헤어져 왼쪽에 있는 예수원으로 들어간다. 대천덕 신부님이 설계하고 지었다는 이국적 수도원을 잠시 둘러본다. (대천덕 신부의 부인 현재인 여사는 미국에서 60여회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촉망받던 화가였기 때문에, 현재인 사모의 감각이 더 반영된 듯하다.) 지금은 숙소로 사용하는 ‘베들레헴관’은 가축 먹이를 저장하는 사일로가 있어 독특하다. 수도원 초기에 이곳 베들레헴관은 젖소를 사육하던 축사였는데, 현재는 개조하여 형제(‘예수원’이라는 평등의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른다)들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 탄생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인기가 많다. 대천덕 신부(R. A. 토레이 3세)가 기도하고 일하던 지하실에는 토레이 신부의 할아버지인 R. A. 토레이 1세의 유품들이 있다. R. A. 토레이 1세는 신학자이자 복음전도자로서 D. L. 무디 목사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무디성경연구소를 설립하고,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 Work of the Holy Spirit)’을 비롯한 기독교 신앙고전을 24권이나 집필했다. 대천덕 신부의 아버지 R. A. 토레이 2세 또한 40년 간이나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분이다.
1965년에 태백 하사미동 골짜기에 예수원이라는 수도원공동체를 세운 대천덕(R. A. 토레이 3세, 1918~2002)은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나, 북중국 미국인학교, 한국 평양 외국인학교, 중국 연경대학(Yenching University), 데이비슨 대학(Davidson College; 남침례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y Seminary)에서 수학했다. 그는 철강회사, 선원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남부 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성공회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46년 사제서품(조지아 교구)을 받은 후 목회를 하게 된다. 그는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 연세대 한국어학당, 영국 聖어거스틴 대학(St. Augustine's College)에서 수학한 후 한국에서 聖미가엘 신학원을 재건립하고, 1965년에 강원도 태백 하사미에 ‘예수원(Jesus Abbey)’을 설립하여 한국 기독교의 영성 회복과 사회 정의 실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천덕 신부의 삶은 ‘대천덕 자서전 : 개척자의 길’에 오롯이 담겨 있으며, 신앙의 멘토로서 친근하게 들려주는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1~5)’, 기독교적(성경적) 관점에서 토지와 경제정의를 논한 ‘토지와 자유’, 복음주의 신학의 바탕 위에서 한국의 영적 문제와 사회문제를 다룬 ‘성령론Ⅱ :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등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백양사 만암대종사가 선농일여(禪農一如)를 강조한 것처럼, 대천덕 신부도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스가랴 4장 6절)고 늘 말하셨다 한다. 중세 이탈리아의 수도사 베네딕트(Benedict)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 자본주의 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토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 토지의 소유를 통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로 인해 영성이 고갈된다. 그래서 대천덕 신부는 레위기 25장 23절 말씀을 인용하여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니 절대로 팔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을 통해 토지공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알프스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일반 방문객은 ‘예수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지만, 아쉬운 마음에 몇 컷 셔터를 눌렀다. 구부시령을 향하면서도 대천덕 신부의 인자한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예수님의 형상을 상상하게 하는.
집에 돌아와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조현이 ‘울림-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시작, 2008)에서 대천덕 신부에 대해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평등의 공동체를 이룬 벽안의 수도사’ 일부다.
기도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점에서 대 신부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근본주의 신앙관으로 담을 친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인들의 고유한 문화와 신앙, 영성을 존중했다. 마을사람들의 장례식엔 유교식으로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참석할 정도였다. 또 예수원에 온 청년들이 주변 마을을 지나다 성황당을 보고 훼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청년들을 꾸짖은 다음 자신이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고 한다. 그는 노후에도 한복을 입고 지낼 만큼 한국적인 것을 사랑하는 한국적 사람이었다. 대 신부의 딸은 외모는 서양인이었지만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해 주변의 풀이름 나무이름을 훤히 꿰고 있어서 서울내기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서양에서 온 선교사라기보다는 우리 마을의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울림’, 302쪽)
구부시령, 삶의 힘겨움과 성스러움
외나무골, 새매기골을 따라 올라 구부시령에 도달했다. 이제부터 백두대간 제21구간 주능선을 따라 산행을 하게 된다. 작년 2013년 8월 12~13일에 뉴전주알프스 산우회는 백두대간 제22구간이 시작되는 댓재에서 두타산, 청옥산을 산행한 바 있기에 제21구간 산행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구부시령은 백두대간 제21구간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건의령에서 댓재에 이르는 백두대간 제21구간은 19.7km로서, 구부시령을 경계로 하여 38소구간, 39소구간으로 나뉜다. 제21-1구간 (38소구간) : 피재-건의령-푯대봉-구부시령 (소요시간 6:50) 제21-2구간 (39소구간) : 구부시령-덕항산-큰재-황장산-댓재 (소요시간 7:50).
구부시령(九夫侍嶺)에서 회원들이 잠시 숨을 고르며 기념 촬영을 한다. 산악대장이 차 속에서 구부시령 전설을 들려주었지만, 회원들은 안내판에 적힌 구부시령 전설을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이 고개에 살았던 어느 여인이 팔자가 드세서 남편이 계속 죽게 되어, 이 아낙은 결국 지아비를 아홉이나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안타깝고, 씁쓸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전설 때문인지 서둘러 새매기고개(1,007m)를 향한다.
구부시령을 뒤로 했지만, 여러 상념이 이어진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을 지나는데, 한 여인이 무덤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가 여인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이 산속 마을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는데,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 한다. ‘그런데도 이 산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오’하고 공자가 다시 물으니 ‘이 산속에는 관리(세금)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다.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오호라, 가정은 맹어호로구나(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사납구나!)’고 탄식한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실학자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도 나오며, 조선 숙종 때 김창협이 지은 ‘山民(산민)’이라는 한시에도 등장한다. 중국 춘추시대처럼 조선 후기에도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에 민중의 삶은 곤궁했던 듯.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 아낙네 문간에 나와 맞이하네 띠집 처마 아래 나그네를 앉게 하고 /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오네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 비를 메고 산에 올라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슬프다 외딴 살이 어찌 좋으리 /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
구부시령 아낙의 비극도 탐관오리의 횡포로 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관리들의 수탈이 미치지 않는 후미진 산속에서 살아가다 연속해서 남편을 잃어야만 했던 불행한 여인. 반민중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의 폭력과 모순은 감추어지고, 본질적·심층적인 구조적 모순보다 한 여인의 거친 운명과 팔자만 강조되어 설화로 전하고 있다고 해석해 본다.
구부시령 여인을 위한 변론을 생각하다 보니, 그 아낙이 ‘올렌까’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는 여인, 올렌까.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중3 때 나는 A. 체홉의 단편 ‘귀여운 여인’을 읽었다. 올렌까는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으로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구원(久遠)의 여인상이다. 고운 피부, 길고 흰 목덜미에 점 하나를 지닌 여인, 호기심어린 맑은 눈망울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귀여운 여인. 올렌까에 대한 체홉의 인물묘사는 나의 심장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올렌까의 운명은 내가 기대했던 바와 달랐다. 그녀는 연극인 남편을 만났지만 이내 사별하고, 첫 남편과 전혀 다른 유형으로서 목재상을 하는 남자와 재혼했지만 또다시 파탄을 맞게 되고, 이어 아내와 별거 중인 세 번째 사랑을 만났지만 그 남자는 결국 본래의 가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봄날에 햇볕을 쬐며 무료하게 졸고 있는 고양이처럼 올렌까가 외로움, 권태로움에 빠져 있을 때, 세 번째 연인이 초라한 모습으로 처자식을 데리고 그녀를 찾아온다. 올렌까는 반가이 그들을 맞아주며 함께 살자고 하면서 생기를 되찾는다. 현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올렌까는 부정적인 여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올렌까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여인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의 사랑, 관계맺음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는 안타까운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 흐르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결은 여전히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모파상이 지은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 쟌느처럼, 올렌까와 구부시령 여인도 굴곡진 삶을 산다. 올렌까와 구부시령 여인에게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녀들은 거칠고 굴곡진 인생의 숲속에서 누구보다 성스럽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냈기 때문이다.
삶이 그러하듯이, 인생 또한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지 않은가? 국가폭력과 남성폭력의 이중 구조 속에서 구부시령 여인은 ‘서방을 아홉이나 잡아먹은 년’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리라. 이 후미진 산골의 어둠보다 더 절망적이고 저 백두대간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을 삶을 짐지고 ‘구부시령’ 여인은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상의 삶을 살아냈을까 생각하며 덕항산을 향한다.
우화등선(羽化登仙), 신선을 꿈꾸다
구부시령(900m) - 덕항산(1,071m) - 지각산(환선봉, 1,079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태백과 삼척의 경계가 되는데, 덕항산은 전형적인 경동지괴(傾動地塊)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판과 해양판이 만나는 경계면의 안쪽에 위치하여 지반이 비교적 견고한 편이었고, 오랜 침식으로 평평한 곳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생대 제 3기에 비대칭적 융기가 일어나 동해안 쪽은 급경사, 서해안 쪽은 완경사를 이루었다고 한다. 태평양 해양판이 밀고 오면서 한반도에는 동쪽에서 횡압력이 가해졌는데, 압력이 직접 가해지는 동해 쪽은 융기량이 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경동지형(傾動地形)이 만들어졌으며, 태백산맥은 경동지형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백산맥의 대부분 지역은 동서가 비대칭을 이룰 뿐, 동쪽 사면이 단층애가 아니므로 경동지형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덕항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경우 동쪽 경사면이 깎아지른 석회암 단층애를 이루고 있고, 서쪽 경사면은 1,000m 전후의 높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경동지괴라고 구별해 부르게 된다. (덕항산 능선 오른쪽은 낭떠러지기 때문에 밧줄을 이은 기둥이 연달에 설치되어 있다.) 덕항산 동쪽에 해당하는 장암골, 물골 등 삼척시 도계읍 석회암 단애에는 환선굴, 대금굴, 바람굴, 관음굴 등 석회암 동굴이 산재해 있고, 촛대봉, 사다리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등 기암괴석이 많다.
너와집, 굴피집을 짓고, 경동지괴 동쪽에 사는 삼척 사람들에게 화전을 할 수 있는 편편한 땅이 많은 덕항산 서쪽 산자락, 즉 태백 지역 서쪽 산자락은 그리운 곳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덕항산을 중심으로 한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며 ‘산 너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高原)가 있는 뫼’라는 뜻을 담아 이 산을 ‘덕메기(산)’이라 불렀고, 덕메기가 ‘덕목이’, 이를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목항(項)자를 사용하여 ‘덕항산(德項山)’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하장면 귀네미골에는 광동댐 수몰민들의 고랭지 채소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능선 위에 풍력발전기 프로펠러가 한가로이 돌고 있다. 백두대간 능선을 사이에 두고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와 태백 하장면 고랭지 채소재배단지는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헤맴 없는 인생이 없듯이, 산행 도중 선두 그룹이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이나 가파른 산을 되짚어 올라오게 되었다. 선두와 후미가 만나서 연산홍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백두대간 능선을 걸었다. 올 봄엔 철쭉이 만개하기 전에 시들어서 아쉬웠는데, 덕항산에서 연산홍 철쭉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 연봉이 이어지는 산길에 연산홍이 피고 지고 있다. 잠시 속세를 잊은 듯, 산행의 피로도 잊은 채 떡갈나무 숲길을 걷는다.
환선봉(幻仙峯)에 이르니 옆구리가 근질근질하다. 우화등선, 신선이 되어 훨훨 날개짓하며 하늘에 오르고 싶은…….
동굴에서 시간을 잊다
덕항산, 지각산(智覺山, 환선봉)을 거쳐 자암재에 이른다. 구부시령부터 자암재까지 백두대간 주능선을 걸었는데, 이제 백두대간과 헤어져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큰재, 댓재를 지나 두타산 청옥산으로 향하고 싶지만, 장암골 따라 골말로 하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하산길은 설패바위, 촛대봉, 금강문 등 기암이 빚어내는 풍광이 이름답고 환선굴, 대금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아쉬움을 달래 준다. 대이리 동굴지대에는 환선굴(幻仙窟, 천연기념물 제178호)을 중심으로 8개의 동굴이 발견되었으나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한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환선굴은 총길이 6.5km, 주굴의 길이가 3.2km에 달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환선굴을 둘러본다. 5억 4천만년 전 고생대 캠브리아기(5.8억~2.45억)의 시공간을 보며,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선캠브리아기(38억~5.8억)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해 본다. 118억년 전 빅뱅이 일어나고, 46억 혹은 38억년 전에 원시지구가 형성되었을 때의 모습, 환선굴 대금굴 석회암들이 적도 열대지방의 얕은 바다에서 퇴적되어 생성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암석 전문가이신 너구리님의 설명을 들으며 환선굴을 내려온다.
영겁의 시간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순간인가? 원화위인(願化爲人),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던 호랑이와 곰처럼, 나는 동굴에서 다시 태어났는가를 자문한다. 달마와 원효가 그러했듯이, 자궁을 닮은 동굴은 재생,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하는 공간이다. 동굴의 무시간성은 우리에게 찰나의 시간이 영원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말하고 있었다.
저기 저 중년의 사내, 너와 집 한 채
대이리 대금굴을 향하다 너와집을 만났다. 백작약이 벙글어 있는 길 왼편 안쪽에 숨어 있어, 안내판이 없었더라면 자칫 지나칠 수도 있었으리라. 최근에 새로 지은, 그래서 흉내만 낸 집들과 구별되는 오리지널 너와집이다. 김명인 교수의 시 ‘너와집 한 채’를 생각하며 혼자 들렀다가, 4시 탑승 대금굴 모노레일을 기다리는 알프스 여성 회원 3분을 모시고 되돌아와 너와집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가족들은 출타했는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반기고 낯선 나그네의 방문에 발바리 개들이 캉캉 짖어댄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어두운 부엌이며 뒤뜰까지 둘러보았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를 찾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너와 지붕 너머 환선봉의 신록이 눈부시게 빛난다.
이슬을 머금은 푸르른 빛이 더욱 곱다.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진다. 저 아랫마을 ‘사무친 세간의 슬픔’ 채 떨치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리고,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저 중년의 사내, 너와집 한 채.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어루만지기 위해, 나는 이 먼 곳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산을 내려가면, 현실의 삶이 나를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덕항산 산마루와 예수원, 그리고 대이리 너와집 저편에 있는 나의 집 또한 ‘그리운 먼 곳’임을 안다. 그곳에서의 삶이 지치고 힘들수록 나는 이곳을 그리워하며 견디게 될 것이다. 언젠가 흰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 아침, 예수원 산길을 묵상하며 걷다가 어느 바위 앞에 덜컥 무릎 꿇고 그분의 음성과 손길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덕항산, 환선봉 단풍나무와 떡갈나무가 붉게 물드는 가을날 너와집에 깃들어 하루쯤 묵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며…….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 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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