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반월성 내에서 바라본 석빙고 |
|
ⓒ2003 이종찬 |
| "아니, 이 선생! 첨성대까지 갔다가 빈 손으로 오면 우짜능교? 더버(더워) 죽겠거마는." "막걸리는 커녕 음료수조차 파는 가게도 없던데요?" "하아! 내 참. 첨성대에서 천마총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모 막걸리 파는 가게가 몇 집이나 있는데, 촌놈이 따로 없다카이." "그러니까 서울 촌놈이라고 하지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그날, 아빠는 계림을 지나 첨성대까지 터덜터덜 걸어가서 필름을 샀어. 그리고 첨성대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렸어. 막걸리를 목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빠의 경주 길라잡이 신 선생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첨성대 주변에는 가게가 보이지 않고 곳곳에 조그만 야산 크기의 무덤들만 여기저기 덩그러니 솟아 있었어.
아빠가 다시 계림을 거쳐 반월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신 선생이 석빙고 옆 소나무 그늘 아래서 손을 번쩍 치켜들었어. 신 선생은 아마도 내가 시원한 막걸리를 사들고 오는 줄 알았겠지. 후후. 순간 아빠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미안한 생각도 들었어.
|
|
▲ 정면에서 바라본 석빙고 |
|
ⓒ2003 이종찬 |
|
굴뚝 같은 구멍이 세 개나 뚫려 있는 석빙고 근처에는 유월의 따가운 햇살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단다. 햇살이 어찌나 부신지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지. 그렇게 아빠가 땀을 찔찔 흘리며 석빙고 근처에 갔을 때 신 선생은 북쪽으로 난 반월성 꼭대기에 마치 다람쥐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더구나.
그때 아빠가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신 선생은 목에 걸린 노오란 수건을 끌어내리고는 몹시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두 손으로 수건을 꼬옥 쥐어 짜시더구나. 노오란 수건에서는 이내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지. 신 선생도 아마 아빠처럼 땀이 많은 체질인가봐.
"바로 옆에 석빙고를 놔두고 이게 웬 고생이람." "자꾸 그런 식으로 비웃고 하모 나도 생각이 있다카이." "무슨 생각요?" "앞으로는 할배집에 가서 아예 막걸리 몇 병을 사 들고 나올끼라. 막걸리 값은 이 선생 앞으로 달아놓을끼고." "그래요? 그래 봤자 이 더운 날씨에 이내 텁텁해져서 마시지도 못할 걸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반월성 북쪽 성벽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단다. 석빙고가 뭐냐고? 석빙고는 일종의 아이스박스라고 할 수 있지. 냉장고가 없었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을 석빙고에 보관한 뒤 여름에 꺼내 먹었어. 석빙고 속에는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일정한 장치를 해 놓고 말이야.
|
|
▲ 석빙고 입구 |
|
ⓒ2003 이종찬 |
|
이런 걸 보면 우리 조상들이 참으로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누구나 이 석빙고 속의 얼음을 꺼내 먹을 수는 없었어. 이 석빙고 속의 얼음은 왕이나 왕족들이 주로 무더운 여름철에 꺼내 먹었대. 그래. 겨울에 얼어붙은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맨처음 누가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지금 반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는 서기 1783년, 조선 영조 14년에 만들었던 것이래. 하지만 분명치는 않아. 이 석빙고는 길이가 18.8m, 홍예(紅霓)의 높이 4.97m, 너비 5.94m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데 홍예가 뭐냐고? 홍예는 석빙고 내부의 돌이 붉은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그런 뜻이야.
석빙고는 반달형으로 남북으로 길게 지어져 있어. 출입구는 남쪽으로 나 있고. 출입구의 높이는 1.78m이며, 너비는 2.01m래. 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석빙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 석빙고의 안은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었어. 그리고 얼음에서 녹아 내린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까지 만들었대.
석빙고의 구조는 홍예처럼 된 석재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석과 홍예석 사이의 천장에는 세 군데에 환기통을 설치했대. 그래서 석빙고 위에 보면 굴뚝 같은 구멍이 세 개 뚫려있는 거야. 또 환기통 위를 덮고 있는 석재는 옛날 그 석재가 아니래. 그 석재는 최근에 석빙고를 수리할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이래. 옥개석은 석탑이나 석등 등을 덮는 돌이야.
하지만 아빠는 석빙고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 석빙고 앞에는 쇠창살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쇠창살 문에는 자물쇠가 굳게 잠겨져 있었거든. 그래서 아빠는 쇠창살 사이로 석빙고 내부를 빼꼼히 내다 봤어. 석빙고 속에는 금새라도 천정에서 차디찬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어.
|
|
▲ 석빙고 이맛돌엔 녹물 같은 얼룩이 |
|
ⓒ2003 이종찬 |
|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석빙고 입구에 간판처럼 생긴 이맛돌에는 녹물 같은 황토빛 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어. 이맛돌에는 무슨 글씨가 씌어져 있었는데, 붉으스럼한 녹때 같은 얼룩이 심하게 져서 아무리 보아도 글씨를 통 알아볼 수가 없었어. 관리를 못해서 그런지 자연적인 현상인지는 아빠도 알 수가 없어.
"신라시대 때도 얼음을 저장해서 사용했다면서요?" "기록에는 그런 사실이 나온다고 하니더. 또 반월성 내에 있었던 신라시대 석빙고를 조선시대 때 이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러면 이 석빙고가 신라시대 것인지 조선시대 것인지 확실치는 않군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단다. <삼국유사>는 또 뭐냐고?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스님이었던 일연(一然)이 쓴 역사책이야. 이 책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사적 및 신화, 전설, 시가(詩歌) 등을 기록한 책이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책이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왕이 '유사'란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라는 그런 기록도 나온단다. 그러므로 지금 아빠가 말하고 있는 이 석빙고가 신라시대에 사용했던 그 석빙고인지도 모르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아.
|
|
|
▲ 석빙고 내부 |
|
ⓒ2003 경상북도 |
어떤 학자들은 반월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서 겨울에 얼음을 쉬이 가져올 수가 있고,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해. 또 이 석빙고의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와 대구 석빙고, 안동 석빙고, 창녕 석빙고 등과 비슷하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1738년, 영조14년에 경주부윤이었던 조명겸이 목조(木造)의 빙고(氷庫)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나무로 만든 석빙고를 돌로 다시 만들었다는 그런 내용이지.
또한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 씌여 있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는 글씨를 보면, 18세기 전반에 처음 만들었던 석빙고를 4년 뒤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다시 만들었다는 거야. 게다가 석빙고를 옮기기 전의 옛 위치가 반월성 서쪽에 웅덩이로 남아 있다는 거야.
신라시대 때 만든 것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는 학자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왜냐하면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책이라고 하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신라시대 때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나온다는 거야. 또 조선 영조 당시만 하더라도 인적마저 없었던 반월성에 굳이 석빙고를 만들 까닭이 없었다는 거야.
"경주는 여전히 가는 곳마다 의문투성이로군요?" "아, 님을 봐야 뽕을 따지 않겠능교. 하여튼 반월성에 있는 이 석빙고가 다른 석빙고보다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캅디더." "그러니까 신라시대 석빙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고, 다른 곳에 있는 석빙고는 보존상태가 나빠 비교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는 그 말 아니오?" "아따! 인자 고마 갑시다. 더버(더워) 죽것 거마는."
|
|
▲ 석빙고 환기통 |
|
ⓒ2003 이종찬 |
|
신 선생이 또 갓난 애기처럼 아빠를 보채기 시작해. 써~ㅇ~한 막걸리 한사발을 꿀꺽꿀꺽 마시고 싶다고. 그래. 우선 신 선생을 모시고 막걸리로 목부터 대충 축인 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으로 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