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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선교 스크랩 도시선교의 성경적 기초
하늘사랑 추천 0 조회 122 09.02.01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시선교의 성경적 기초

 

 

김세배/ IMPAC 연구원

 

I. 들어가는 말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무질서와 혼돈의 상징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시골을 만드셨는데 마귀는 도시를 만들었다고 풍자하면서 도시를 사단의 주 활동 무대라고 비난했다. 도시선교에 대한 잘못된 신학의 영향으로 그 동안 오지와 밀림의 선교는 강조되었지만 도시선교는 상대적으로 등한히 여기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선교를 평가하는 가운데서도 자녀교육이나 생활환경 문제 등으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대도시와 수도에 거하면서 중복투자와 경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지적되고 있다. 그 결과로 도시선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도시에 거주하는 선교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도시나 시골이나 혹 밀림이든지 사막이든이 이러한 것은 인간의 삶의 환경이다. 인간과 그들의 삶을 Text라고 가정할 때 삶의 환경은 Context인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사는 물과 같은 것이다.

 

창조시 하나님은 인간을 우주가운데 한 행성인 이 지구위에 두셨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준비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 그 동산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역시 하늘에서 추방된 사단은 공중권세를 잡고 타락한 인간을 지배하려 했다. 이러한 인류 역사가운데서 도시도 생겨났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계획을 완성할 때에 당신의 백성이 거할 환경까지 새롭게 회복시키셨는데 그 때의 환경은 동산이 아닌 도시인 새 예루살렘이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도시화 현상은 더욱 가속되고 있다. 1900년도에는 전 세계 인구의 9%만이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1920년대는 14%, 1950년대에는 29%로 증가하더니 1990년에는 45%에 도달했고 2000년에는 50%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이며 2025년에는 65%이상이 도시에 거주할 것으로 전망된다.

 

도시의 규모도 1950년까지만 해도 지구상에서 1000만 이상되는 도시는 뉴욕과 런던 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서는 인구1000만 이상의 도시가 10개에 달하고 있다. 2000년을 넘기지 않아서 이제는 500만 이상의 도시가 60개, 1000만이 넘는 도시가 25개, 2000만이 넘는 도시도 5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이 지구상의 인류는 도시를 이루며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교의 마지막 세기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 2/3세계는 사회변동과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도시선교를 생각하고 사역모델을 정립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필자의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도시문제를 다루는 연구와 사역이 더욱 확산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부분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Ⅱ.성경에서의 도시와 신학적 이해

 

1. 도시의 용어와 형성

히브리어의 이르(࠘ࠉࠒ), 키르야(ࠄࠉ࠘ࠗ), 그리고 헬라어의 폴리스(ՐקՋՉՒ) 등의 단어들이 도시, 성, 성읍, 고을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성경의 배경은 고대 근동, 그리이스, 로마 문화권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해석 하는데는 무리가 있고 기록된 당시 사회의 상황과 문화이해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구약 성경의 초기 환경은 도시(성읍)나 마을을 연결하는 교통 시설이 아주 열악했기 때문에 각 성읍과 마을들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했다. 그래서 지역사정에 따라 방어능력, 급수, 식량 때문에 안전, 우물, 경작지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건설되었다. 안전의 필요에 따라 성벽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고을들이 건설되었다.

 

구약에서 도시형성의 과정을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아래와 같다.

 

1) 구약의 도시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는 것으로 여기에는 라기스, 여리고, 므깃도, 예루살렘 등을 열거한다.

 

2) 음료수의 공급이 용이하고 외부의 침입에서 장애물로 활용될 수 있는 수원 (강) 근교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3) 경제적인 요인으로서 실크로드 등 통상경로 근교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 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헤브론, 기브온, 베델, 세겜, 사마리아 등을 열거 할 수 있다.

 

4) 생산 원자재 등 기본생산물을 획득하기 용이한 근교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바벨론, 우르, 갈그미스, 바블로스 등 고대 팔레스틴 성읍들과 신약성경에 언급된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성읍들은 궁전, 성전, 목욕탕, 극장 등의 형태를 갖춘 발전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술성도 뛰어난 것으로 발굴 보고된다.

 

성읍과 고을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르(࠘ࠉࠒ), 키르야 (ࠄࠉ࠘ࠗ), 케렛(ࠛ࠘ࠗ) 이라는 단어의 차이를 사용하는 구분은 없다. 성벽을 두른 성읍(때로는 견고한 성읍)과 성벽이 없는 고을로 구분되어 기록되기도 한다(삼상 6:18; 에9:19; 겔38:11). 성읍과 산성이 견고한 고지라면 고을은 평지에 있는 보다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성읍의 여러 가지 형태가 기록되고 있는데, 국고성, 병거성, 마병의 성 등의 분업화된 형태가 언급되기도 하고 왕도(수10:2 삼상 27:5), 지방성읍(삼상 27:5)이 대비되어 기록되기도 한다.

 

2.도시의 신학적 이해

도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관점과 출발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김성태 교수는 다음의 네 견해를 이야기 했다.

 

첫째는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이다.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인간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의 정죄 가운데 있으며, 도시의 기원 자체도 이러한 죄의 결과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있는 학자들은 가인으로 말미암은 도시건설과(창4:17) 그의 후손인 라멕, 야발, 유발, 두발가인 등이 상징적으로 예표하는 도시문화 형성자체가(창4:19-24) 도시의 죄성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도시의 형성 자체를 하나님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표상으로 보고 바벨론이나 예루살렘까지도 이러한 범주하에 집어넣으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가운데 도래할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도시는 이미 정죄를 받았고 도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할은 도시를 변화시키기보다 도시와는 상관없는 새 예루살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도시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견해이다. 이 입장에 속한 학자들은 도시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보며 인간의 창조적인 노력의 결실과 인간 능력의 절정으로서 도시문화에 이상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로 알려진 오리겐은 우주론적 기독론으로서 로고스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인간이성의 합리성과 철학적 탐구가 로고스의 영역 안에 속해 있고 도시문화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의 도시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다.

 

근대에 와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19세기말에 일어났던 사회복음주의 운동에서 이러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회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초자연적 특징을 부인하고 현재적인 측면에 윤리성만 강조하여 하나님의 의와 평화가 구현되는 지상의 왕국으로서의 도시건설을 중요시 여겼다. 이것은 이상적인 도시문화 형성에 대한 인간의 가능성을 낙관하는 사상이다. 결국 인간의 힘에 의한 이상적인 신국(도시건설)을 지상에서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입장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죄를 사회적인 문제로 보며, 구원을 윤리적인 인간성의 실현으로 믿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도시에 대한 절충적, 역설적 견해이다.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도시건설은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나 또한 인간은 도시의 삶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역설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입장은 도시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돌파구를 성례신학의 정교화 작업으로 해결하려 한다. 즉 도시 안에서의 인간의 삶은 죄와 더불어 사는 것이지만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소극적인 대안으로 교회 예배의식에 적극 참여하거나 성례의 효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견해는 도시변혁에 대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교회의 성례의식에 의존한 소극적인 변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런 바탕 위에서 독일의 루터교회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저지하지 못한 상황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는 도시에 대한 변혁모델이다. 도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Creative Ordinances)에 속한 은총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이후에, 도시는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도시문화 형성에는 바벨론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죄의 실상이고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이다. 그러나 도시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루살렘적 계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은총으로 정화시키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도시이며, 하나님이 친히 통치 주가 되시는 도시이다. 바벨론적 도시는 따라서 예루살렘적인 하나님의 도시로 변혁이 요청된다. 지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변혁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새 예루살렘 도성의 역사에 흡수되어져서 완전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균형 있게 왕국적 긴장가운데 도시안에서 구현되어지는 모델이다.

 

Ⅲ성경속에서의 도시와 하나님의 계획

 

1. 가인과 도시의 시작

성경의 에덴동산에서 우리는 성읍과 도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었고 땀흘리는 수고도 없었고, 경제활동과 안전을 위한 도시의 필요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판단에 따라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모든 피조물 세계에 죄가 들어왔고 심판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권능으로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의 찬연한 목적을 상실하고 부패와 오염가운데 빠져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삶의 방식과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성읍의 시작은 죄가 이땅에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후손들에 의해 도시 문명이 형성되어 갔다(창4:장). 가인은 놋땅에 정착하여 성을 세웠는데, 그 성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안전을 추구하는 행위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노아의 불순하고 저주받은 아들 함의 후손들이 세운 성읍이 언급된다(창10:10-12). 이러한 성읍은 도시와 시골의 개념보다는 그들의 자치권과 안전을 추구하는 상징으로의 개념으로 더 생각해야 한다. 영걸이며 탁월한 사냥군인 니므롯은 그의 세력을 넓히며 그 안전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레센(큰성)을 쌓았던 것이다.

 

 

2. 아브라함과 소돔, 고모라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에 대한 기사는 도시와 성읍에 대한 이해의 예증이 된다. 타락한 자들이 이러한 일을 행한 동기는 "자 우리를 위하여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창11:4)" 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의 자만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나는 인간의 불순종의 모습이 표현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두지 않으시고 개입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서 성을 쌓는 것을 그치게 하셨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의 백성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창대케 하시며 복의 통로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는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선포하여 전하는 대리인과 사신의 사명(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목의 거류민으로 도시에 거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마음에 생각하며 롯이 거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했다. 성안에 의인이 남아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들어서 하나님께 타락한 두 성을 보존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45, 40, 30, 20, 10명까지 내려가면서 의인의 수를 근거로 소돔과 고모라를 건지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시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나 단 열 사람의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이 땅에서 불의 심판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심판과 멸망이 선포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하며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구출 하고자 했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분쟁과 마음 상한 일도 많아서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요나와는 다르게 도시를 향한 긍휼의 마음과 그의 언약 백성으로서 사명을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예레미야와 바벨론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렘 9:11 13:17) 또는 고독의 선지자라고 불려진다. 그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부르심을 입었다. 젊은 제사장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유다의 마지막 왕 요시아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고 유다의 파멸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유다와 예루살렘, 바벨론 그리고 각 족속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은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로 일관되고 있다. 특별히 바벨론에 대하여는 164회나 언급하면서 죄에 대한 경고와 멸망을 예언했다.

 

1)도시 속에서의 하나님 백성

암흑과 같은 바벨론 포로시절의 삶을 시편 137:1-4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선민 이스라엘이 사악한 우상숭배의 도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황가운데 어찌 찬양이 있고 기쁨이 있겠는가? 그러나 상황이 어떻든지 여호와의 노래는 불려져야만 했다. 마치 빌립보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 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벨론에 포로된 히브리인들에게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사명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며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신 것은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 때문이다. 그들은 멸망할 도시 바벨론을 위한 사도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29장 4-7절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에 잡혀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들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비록 포로이긴 하지만 바벨론으로 이주시킨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강조하면서 번성과 평안의 삶을 영위하며 그 성읍(도시)을 위해 평안을 선포하며(샬롬)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순종으로 인하여 니느웨처럼 회개하여 구원받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4. 느헤미야 도시의 영적부흥

페르시아 왕실의 영화를 누리고 있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거룩한 섭리를 깊이 통찰하고 안락한 지위를 버리고 백성들과 함께 거룩한 성의 재건을 위해 동고동락했다.

 

느헤미야 8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수문에 모인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민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7월의 첫날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초막절을 경축하고 있었다. 그날은 준엄한 안식일이요 나팔들을 불어 선포되는 기념일이요 성스러운 집회였다. 예루살렘 도시의 새로운 건설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이날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성벽을 세우고 새로운 집을 짓는 것과 함께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도덕적 영적인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한 긍휼과 애통의 마음을 갖고 돌아왔다.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하는 마음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 황폐한 도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시키는 동기가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백성을 보존하는 길은 말씀이 알려지고 이해되며 순종될 때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7년마다 공중에게 성경을 낭독해 주는 것은 율법에 의해 요구되어진 것이었다(신31:9-13).

 

그러나 바벨론 포로동안에는 많은 다른 관행들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백성들의 종교적 감수성도 점차 저하되어갔다. 그러나 이제 유민이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왔고 징벌을 받은 백성은 청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제사장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을 가져다가 그것을 예루살렘의 회중 앞에서 낭독하도록 요청받게 된 것이다. 느헤미야를 통해 일어나는 예루살렘의 각성에서 다음의 교훈과 도시선교의 원리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적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삶과 사역 가운데 적용되는 것이다. 당시의 모세 율법은 이미 옛 문서였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낭독될 때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았고 회개와 결단 그리고 헌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말씀이 낭독될 때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영적 부흥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모든 민족, 백성, 방언에게 그들의 문화와 언어로 다가갈 수 있다. 학사 에스라에 의해 낭독되어진 말씀이 일부 다른 문화권의 백성에게는 전달이 용이하지 못했고 이해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그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하여 깨닫게 했다.

 

셋째, 하나님은 준비되고 헌신된 자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신다. 학사 에스라는 어떤 자인가? 제사장이면서 말씀을 연구하는 자였다. 에스라 7장은 그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10절에서 보여 준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연구하며 준행하고 가르침의 헌신은 모든 사역자 특별히 선교사에게 요청된다.

 

넷째, 충만한 기쁨을 나누는 축제이다.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친 레위인들은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너희는 가서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라고 말했다. 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백성은 먹고 마셨으며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기쁨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그들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도시선교의 영적부흥과 생활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에 전달될 때 일어나며 이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과 평강이 있게 된다.

 

 

5. 요나와 니느웨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선교는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인 마음과 계획을 잘 나타내 준다.

 

1) 니느웨와 죄

멸망할 위기에 있는 니느웨에 대한 소망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요나의 사명이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니느웨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고 표적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그 도시의 사악함 때문에 슬퍼하셨다. "일어나 그 큰도성 니느웨로 가라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외치라 이는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까지 상달했기 때문이다."

 

니느웨는 그 미려함으로 유명했으며 아름다운 도시로 여겨졌다. 군사적으로도 니느웨는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외성벽은 96㎞나 되었으며 내성벽은 높이가 30.5 미터였다. 그 흉벽위에서는 말이 끄는 전차 3대가 나란히 갈 수 있었으며 왕궁을 짓는데 1만명의 노예로 12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공원과 공공건물들은 전세계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니느웨의 부와 풍요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이는 죄를 불러들였다. 압제와 전쟁, 약탈에 의해 세워졌고 그 도시의 정치, 군사, 경제력은 약한 국가들을 착취함에 이용되었다. 선지자 나훔은 이 음행의 도시를 언급함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도다. .... 살육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나3:1-4)." 그들의 죄는 개인적인 요소뿐 아니라 생활 문화 등의 집합적인 요소도 포함되었다. 사악함이라는 말 이면에는 니느웨 생활의 구석구석이 모두 부패하였고 오직 유일한 희망은 광범하고 철저한 회개뿐이었다.

 

2) 니느웨의 구원을 꺼려하는 요나

한 사람이 도시의 거대한 죄악앞에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조그마한 나라 시골출신의 선지자 요나가 기울어가는 악명높은 도시 그 거대한 니느웨를 무릎꿇게 만들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전략은 간단한 것이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를 임명하신다.

② 요나는 니느웨에 선포한다.

③ 그러면 니느웨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④ 그 임무의 동기나 이유는 니느웨의 사악함과 임박한 멸망이었다.

⑤ 도구로 사용되는 인간은 히브리 선지자였다.

⑥ 그 밖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그 동 기였다.

요나가 하나님의 위임에 순종할 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씨름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니느웨를 향해 동쪽으로 가는 대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갈 의도로 배에 올랐다. 해상에서의 폭풍이 그 계획을 변경시켰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자신의 반역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참으심과 은혜를 맛보았다.

 

3)도시의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

요나의 선포에 대한 니느웨의 반응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당할 것이다" 라는 외침에 보통 서민에서부터 시작하여 궁전에까지 모든 백성에게 금식이 선포되었다. 심지어 모든 짐승에게도 이 금식이 적용되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불평을 이해시키는 말씀 가운데 좌우를 분변 못하는 니느웨 백성을 말씀하시면서 육축까지 언급하면서 내가 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 라고 요나에게 말씀 하셨다.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가를 엿보게 된다. 결국 니느웨를 향한 선교는 요나의 사명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6. 예수님과 도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의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했으며, 전에 선지자들을 배척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배척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다.

 

1) 도시에서 유리된 예수

예수님은 유다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헤롯의 배척을 받아 도시에서 유리되는 삶을 사셨다. 공생애 기간동안 갈릴리 유다 등의 여러 도시에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늘 피해 다니셔야했다.

 

2) 도시를 향한 사역과 책망

예수님은 도시를 대하시며 회개치 아니하는 그들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치 않는 고라신아, 벳새다야 가버나움아" 라고 도시의 회개를 촉구했으며 제자들을 도시로 보내시며 복음을 증거케 하셨다. 때로는 이렇게 도시를 인격적인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도시의 회개치 않는 사람과 함께 그 도시의 조직과 제도를 통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된다.

 

3) 도시를 향한 긍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예수님은 도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세 번의 눈물은 깊은 긍휼을 나타내 주는데 예수님은 죄로 인해 멸망할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지지 않을 패망을 슬퍼하셨다.

 

4) 도시에서 도시를 위해 죽으심

마태복음 16장 21절을 기록한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3일만에 살아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내려가는 그 도시에서 죽으실 줄 알면서도 그 도시가운데 있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신 것이다.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는 예수님의 선교가 도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7. 안디옥, 선교의 전초기지

수리아 안디옥은 당시 로마시대에서 현대도시와 가장 유사한 성격을 갖는 도시이며, 안디옥에 대한 이해는 도시선교의 성경적인 안목을 갖는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선교역사가 시작되고, 세계 종교의 판도가 변화되는 상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이 아닌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이방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더 나아가 안디옥교회는 성도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이방교회가 해야할 도시선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1) 화려하지만 우상과 죄악이 관영한 도시

로마제국의 세 번째 도시이며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은 아우구스트와 헤롯에 의해 환상적인 도시로 건축되었으며, 로마가 식민지를 다스리는 외교적 중심도시이면서 또한 동서 무역의 중심도시이다. 희랍의 제우스 아폴로등의 신전이 있으며 바알과 여신 가데스를 섬기는 예배자들이 있는 도시이다. 1세기 로마의 시인 쥬비널은 "고린도와 함께 안디옥은 로마의 타락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은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관문도시가 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안디옥의 죄악과 우상숭배, 문화와 화려함, 고대 상업의 중심지라는 언급은 없고 영적인 사건과 복음이 로마제국으로 전달되는 과정만을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을 지닌 안디옥은 1세기경 선교의 중심적인 본부로 발전한다.

 

2)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기원

언제, 어떻게 복음이 안디옥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를 피해 제자들이 흩어진 것을 말한다. 어쩌면 스데반의 순교 전에 안디옥에 믿음의 공동체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행6:5절).

 

1세기 대부분의 교회들은 역사기록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들은 희생과 봉사에 대하여 적어도 이 세상에서의 갈채를 받기를 거부했다. 이름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그들의 수고에 의하여 초기 기독교는 급성장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의 섬김이 안디옥에도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기독교에 유익을 가져왔다.

 

3) 인종과 종족의 문제를 극복함

초대교회의 박해로 믿는 자들은 흩어져 페니키아, 시리아, 안디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유대의 언어와 문화밖에는 경험이 없었으므로 타문화와 인종의 문제를 직면했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복음이 유대문화와 경건한 무리에게만 한정되어 머물렀을 때에 이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빌립, 베드로와 고넬료 사건 등은 당시로서는 괄목할만한 사건이다. 이때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세계로 복음을 펼치게 된다. 마이클 그린은 "초대교회의 전도"에서 안디옥은 1세기에 새로운 신앙이 전 세계로 전달되는데 발생된 인간의 문제들로 둘러싸인 실제적인 축소판적인 도시라고 지적했다.

 

4) 전도와 부흥 그리고 돌봄과 양육.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외국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무리들이 주께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이를 살피려고(혹 문제있는 교회는 아닌가 하여) 바나바를 보내고 보고하도록 한다. 이에 대해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한 것을 보고 기뻐하여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행11:23-24)" 즉, 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확실히 보게 되었을 때 그는 기뻐했다. 또한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는 것이다(행 11:24). 즉 안디옥에는 전도로 인한 수적인 부흥과 그들의 삶의 성장을 위한 양육이 있었던 것이다.

 

바나바는 교사이며 관리자였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상담을 하고 그들이 가야할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양육). 그는 수적인 증가로 혼자 감당이 어려워서 동역자로서 회심한 바울을 찾는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교회가 해야할 전도와 양육의 모델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바울은 전도와 교회개척 전략과 그리고 그의 신학의 영향을 이곳 안디옥에서 받게 된다.

 

5)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짐.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주어졌다. 이것은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졌는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정의되어지고 그렇게 처음으로 그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안디옥의 믿는 무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좋은 예가 된다.

6) 가난한 자들을 향한 애정.

성경은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의 성도들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행11:29). 그들은 공동체의 교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가진 것을 나눌 것을 배웠을 것이며,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의 생활상을 통해서 선명해진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에 대하여 자유함이 있었다.

 

필자는 브라질의 한 작은 교회에서 추운 겨울 헐벗은 어린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안디옥 교회의 긍휼사역의 모델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데 교회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그들은 왜 궁핍해야 하나? 인간의 고통과 필요에 대한 안디옥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7) 균형잡힌 교회로서의 힘있는 교회

메릴 테니는 "안디옥 교회는 위대한 복음의 선포와 구제의 열정이 있는 동시에 선교에 있어 중심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델이 된다"고 말하고 이어서 "안디옥에서 로마를 향한 선교의 불꽃이 퍼져 나간다" 라고 말한다. 누가는 안디옥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기록했다(행13:1). 그것은 복음선포와 가르침이 있음을 암시한다.

 

교회의 힘은 영적인 삶과 훈련에 의해서 나타나지는데, 그러한 모습의 예배와 금식과 기도가 안디옥에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교회로의 선명한 증거는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 사람을 따로 세우고 하나님의 은혜에 저를 위탁했던 교회이다. 즉 선교사를 세우고 간절히 기도한 교회라는 것이다. 또한 선교사가 돌아왔을 때 저들은 모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이방에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과 오래 있었다고 했다. 선교사의 머무름은 교회의 큰 축복이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현대 선교 후원의 파송교회 모델을 찾을 수 있다.

 

8. 바울의 선교전략과 도시

안디옥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바울은 동역자와 함께 로마의 도시에서 도시로 여행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을 위한 여행은 도시의 교회개척이었으며 개인전도를 통한 거점확보에서부터 사역은 전개되었다. 사도바울의 도시를 향한 선교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개인적인 회심과 교회개척

바울은 유대인의 교육과 종교의 구심점이 되는 회당을 중심으로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여 회개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 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으며, 교회가 성장해 감에 따라 그 교회를 통하여 로마 사회나 다른 대상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로마의 정부나 고위층의 기관들에게 증거하며 가이사에게까지 나아갔다.

 

2) 지역교회 지도자 훈련

"바울 신학과 선교의 실제"라는 책에서 딘 질리랜드는 바울이 복음전달에 키(Key)가 되며 지도자로 변화되는 사람을 대하는 괄목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은 회심전에도 이미 지도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행9:1-2, 빌3:6). 바울은 그의 1차 전도여행기간중 바나바의 지도력 아래 있었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바나바라는 지도자를 통해 강하고 효과적인 교회로의 성장의 핵심을 배우게되며 그 원천은 지도력이라는 것을 배운다.

 

행13:1-3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어떻게 지역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지 효과적인 전략을 보게된다(신적인 중재). 영적인 기초 위에 지도자를 세우고 훈련과 교회를 돌보는일, 그리고 거룩한 삶과 지도력에 맞는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9.영원한 도시 새 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하셨던 각 도시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씀하실 때 종종 바벨론을 말씀하신다(계18:2). 이러한 사실은 소돔, 여리고, 니느웨, 예루살렘에도 해당된다. 성경은 가인이 지은 도시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새 예루살렘으로 끝난다. 부도덕한 도시와 세상의 가증한 것들을 상징하는 바벨론이 몰락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다운 도시이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도시에 거하게 될 것이다.

 

Ⅳ마치는 글

 

성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기록된 책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죄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것을 이루시는 구속역사의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관영한 곳에 항상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머물렀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선교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죄인을 찾아가는 것"이라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도시 가운데 있는 죄를 보셨고 그 죄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다루셨다. 도시라는 주제로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된다.

 

도시를 향한 다각적인 전략은 모색되고 또한 그 사역들이 모델로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도시선교에 대한 "공동체적 선교접근 전략", "동질집단을 중심으로 한 선교접근전략", "사회봉사와 구조갱신을 지향하는 총체적인 선교접근 전략" 등 다양한 전략이 모색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종족과 도시 선교연구소는 특별히 Salad Bowl과 같은 현대의 도시들을 보며 종족집단별 전략과 사역모델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러한 사역이 진일보하리라 생각된다.

 

<참고도서>

Robert C. Linthicum, City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91.

Roser S. Greenway & Timothy M. Monsma, Citie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Stuart Murray, City Vision, London, Daybreak, 1990.

김성태, 도시선교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성경적 기초, SIReN 강의안.

로저 그린훼이, 이재범역 도회지 복음화의 성경적 전략, 서울, 여수룬, 1988.

민영진, 성서백과 대사전, 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80.

한화룡, 도시선교, 서울, I.V.P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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