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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밀 농사를 지으며 생각해본 우리농업
정 호 진(생명살림의 농부, 우리의학연구가)
우리밀 농사를 시작하게된 까닭
도시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 시작한 농사 20여 년 간에 걸친 서울에서의 도시적 삶을 청산하고 이곳 거창으로 내려와 농촌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올해로 6년째로 접어들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농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지금은 오로지 농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전업농이 되어 있다. 농사가 취미나 전체 삶의 일부분이었을 때와 전가족의 삶을 농사에다 거는 전업농일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우선 농사를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고 다음으로는 나를 대하는 농민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내가 농사를 전업으로 생각하면서부터 어떤 작목으로 승부를 걸어야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사과와 배가 중심이 된 과수원도 경작해보기도 했고, 비닐하우스 천평을 빌려 무농약 수박을 재배했다가 많은 손해를 보기도 했다. 처음부터 환경과 생명을 살리는 관점에서 농사를 하려고 하면서 생활비를 전적으로 농사로 해결하려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의 처지는 곧 WTO체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망에 빠져있는 이 땅 농민들의 공통된 고민이었기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서라면 돈이 될만한 특용작물을 선택하여 경작에 임한다면 한 두 번 실패는 있을지라도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어도 될 그런 특용작물을 건강한 먹거리로 생산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주식을 오염된 먹거리로 생산하거나 더 오염된 수입물로 채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특작이 아니라 쌀이나 밀과 같은 주곡생산을 하면서도 넉넉한 농민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한다. 주곡생산에 승부를 걸며 밀을 심기로 하고 여러 생각 끝에 어느 정도 가닥을 잡게된 것이 바로 이 땅 농민들의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주곡생산을 시작해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얻게 됐다.
주곡 생산 만이 바른 농사
나의 농사원칙이 농장과 집은 서로 가까울수록 좋다는 것이었는데 마침 집과 경작지가 붙어있는 만평 농장을 임대할 수 있게 되어 그러한 나의 꿈이 좀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땅이 논이었다면 쌀농사를 할 수 있어 더 좋았겠으나 아직은 만평정도가 한곳에 몰려 있는 좋은 조건의 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 이곳 거창의 상황에서는 밭 만평이라도 내게는 너무도 좋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94년 가을부터 새로 시작한 농사가 바로 우리밀농사였다. 밀농사를 하면서 우리농업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우선 만 평에다 밀파종을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비료와 농약에 의한 수탈농법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땅을 갈아엎을 대형 농기구(트렉타)가 필요했다. 우리 농가의 호당 경지면적이 1.2ha(3600평)정도이니 나의 경작규모는 거의 세농가의 분량에 해당한다. 이렇게 넓은 땅을 소와 쟁기로 혹은 관리기나 경운기 같은 작은 기계로 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래서 많은 농민들이 빚을 지게되는가 싶었다. 얼마 안되는 수입을 올리기 위해 일년에 몇 차례 밖에 쓰지 않는 대형 농기계를 구입하고 매년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 한 십 년 만에 그 빚을 다 갚을 때가 되어 가면 이미 그 기계는 못쓰게 되어 또 새로운 기계를 사야하는 것이 우리농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땅을 장기적으로 경작해내자면 트렉타가 필수적이겠으나 3년 간의 임대기간으로는 미래가 불확실하기도 하고 당장 몇 천 만원에 해당하는 돈도 없어서 우선 트렉타를 빌려 쓰기로 했다. 아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55마력짜리 트렉타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는 땅을 12시간에 걸쳐 갈아엎고 다음날 파종기가 부착된 35마력짜리 트렉타를 농촌지도소에서 빌려와 내가 직접 운전하여 파종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우리밀을 심는 농민들의 경우 잡초방제를 위하여 파종 직전에 제초제를 한차례 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제초제는 가장 독한 농약이기도 하고 기형아출산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에 제초제 친 밀을 먹고 싶지 않아 좀 수확량이 떨어질 각오를 하며 제초제를 생략했다.
다행히 밀은 늦가을에 싹이나서 조금씩 자라다 겨울을 넘기고 봄이 되면 다른 잡풀이 돋아나기 전에 쑥쑥 자라 버려 잡초에 대한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작년 봄 가뭄이 너무나도 심해지자 밀이 바짝 바짝 말라가는 것을 보며 밀만이 아니라 내 속까지도 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면적이 얼마 안되면 물이라도 주련만 만평이나 되는 땅에 물을 주기란 우리의 실정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94년 가을 스위스 농촌을 견학했을 때 아무리 산골지역일지라도 마치 우리의 상수도처럼 농장 곳곳에 수도관이 박혀있어서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시설이 정말 부러웠었다. 우리 농업이 제대로 되자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스위스처럼 웬만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견딜만한 농지기반이 조성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
밀을 수확하며
그럭저럭 늦은 비를 맞고서도 밀은 무럭무럭 자라주었고 6월말이 되어 수확철이 다가왔다. 수확을 하자니 또 필요한 것이 기계였다. 이번에는 수확기인 콤바인이 필요했는 데 약간 굴곡이 있는 밭이어서 그런지 좋은 기계(신형 3조식 혹은 4조식) 가진 이는 빌려주거나 와서 추수작업을 해주려 들지 않고 겨우 구할 수 있었던 것이 폐차처리 직전인 2조식 구형 콤바인을 농촌지도소에서 빌릴 수 있었다. 좋은 기계였으면 3-4일이면 끝날 수 있었을텐데 구식기계로 하다보니 수시로 멈춰서는 경우가 많아 일이 너무도 더뎠다. 며칠 하다 비가와 지연되기를 한 두 차례 하다보니 쓰러진 이삭에서 싹이 나는 것이었다. 생산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더 손해가 된 셈이다. 본래 예정은 300가마였으나 위생공사에 요청해서 인분을 갖다 부어 웃자라 버린 곳과 비바람에 쓰러진 곳에서 수확량이 너무 저조해 목표달성은 못했으나 그래도 첫 수확에서 40kg짜리 포대로 230가마를 했으니 적은 양은 아니다.
그런데 파종에서부터 수확 전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밀농사가 참으로 수월하구나 싶었는데 막상 수확을 해보니 그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확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한 데도 구할 수 있는 일손이란 여성노인네들 뿐이어서 무거운 밀포대를 몇 차례씩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농촌봉사활동을 온 대학생들의 부분 지원을 받아서 작업을 해내기는 했으나 수확해서 말리고 바람에 부쳐 창고에 갖다 쌓아놓는 일이 끝나고는 몸살이 나서 다시는 밀을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래도 일이란 하다보면 요령이 생기기 마련인지 처음에는 40kg 한 가마를 혼자서 들기가 너무 힘들어 쩔쩔 맸으나 점차 익숙해지자 나중에는 가뿐한 기분으로 차에 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여간 콤바인에서 떨어뜨린 가마를 트럭에 싣고 멍석으로 가서 내려서는 늘어 말리고 며칠동안 비를 피해 잘 말린 밀을 풍로가 있는 데까지 운반해서 부치고 부친 밀을 저울에 달아 묶어서 차에 싣고 창고로 운반해서 쌓는 과정 동안 밀가마를 수천 번은 들었다 놓았다 한 것 같다. 그래도 난생 처음 수백 가마의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보니 정말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농사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정말 안되는 것이구나를 깊이 체험하고 이처럼 많은 수확을 가능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가공과 유통까지도 함께 생각하는 농업을 향하여
밀을 창고에 쌓아놓고 기쁨에 젖어 있는 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수매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바람에 부치는 작업을 더 해야하기도 하고 푸대 주둥이를 대바늘로 꿰매기도 해야한다. 수매를 하려고 생각하고 계산해보니 그렇게 해서는 정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농사였다. 생산비를 계산해보니 종자값(40만원), 땅 임대료(200만원), 트렉타 비용(100만원), 콤바인 비용(100만원), 푸대값(20만원), 멍석과 갑바값(20만원), 창고비용(30만원), 내 인건비를 제외한 품값(50만원), 운송비 및 기타(40만원) 대략 600만원 정도가 되었다. 모두 1등급을 받아도 한가마에 3만 1000원이 고작인 수매가격으로 따져보면 230가마를 다 팔아도 7백 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 생산비를 제외한 차액 백 만원을 위해서 장장 8개월 동안을 그렇게도 애를 태웠나 싶어 참으로 씁쓸했다.
이렇게 수매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방식의 농업으로서는 한국농업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결론을 얻고 어떻게해서든 가공에 착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밀가루로 만들어 팔기로 했다. 그래서 밀을 제분할 수 있는 방앗간을 수소문해서 한시간이나 걸리는 산청까지 30가마를 싣고 찾아갔는데 그곳에 도착해 방앗간 주인의 말을 듣고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재래식 방앗간이어서 그런지 돌이나 뉘를 골라내기 위하여 전부 물에 씻어 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건비가 비싸 일어 말리는 가격이 밀값 보다 더 많아질 형편이었다. 제분작업 자체를 포기하려다 그래도 중간에 멈출 수 없어 일단 어찌되나 보려고 일지 않고 그냥 제분을 해보았다. 다행히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어도 먹는 데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직접 재배한 밀로 밥에도 섞어 먹고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는 기분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분률이 50%정도 밖에 되질 않아 밀값(3만원)과 제분비(1만원),그리고 운송비(4천원), 포장비(1천원)를 계산하고 나면 밀가루 20kg을 2천원씩 팔아도 4만원 밖에 되지 않으니 어느 모로 보나 밑지는 장사였다. 그래 다른 곳들에 알아보니 제분률이 70-75%는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여기저기 확인하여 한시간 반이나 걸리는 성주에 있는 방앗간을 찾아냈다. 그곳의 기계는 산청보다 훨씬 신형이어서 밀을 씻을 필요도 없었고 제분률도 75% 정도가 되었다. 신형이란 석발기로 돌을 미리 골라내고 벼찧는 기계로 먼저 한 껍질 살짝 깎아내어 뉘를 처리하고 제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여간 새로운 방앗간을 이용하고부터는 밀가루로 팔았을 때 한 가마에 일만 오천 원 정도의 이익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수매 대신 방앗간으로 싣고 가고 실어 오고 또 작은 봉지에 1-2kg씩 포장하는 따위의 일감은 늘어났지만 밀을 재배하는 농가의 입장에서 보면 년 간 300-400만원이라는 소득이 늘어나는 편이니 그냥 수매하기보다는 1차 가공인 제분은 필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차 가공이 없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앞으로의 한국농업이 나아갈 길 가운데 하나는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우리 손으로 생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생산하는 농민에게 생산비가 보장될 뿐 아니라 정당한 이익이 주어질 수 있는 농업구조로 재편되는 것이다. 한 농가가 모두를 다 해내기는 어렵겠지만 몇몇 농가가 힘을 합쳐서라도 생산에서부터 가공과 유통을 농민의 힘으로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농산물의 가공과 유통 뿐 아니라 수입과 수출까지도 농민의 권한에 속하는 것인데도 지금까지의 관제농업하에서는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가공과 유통 및 수출입은 정권의 비호를 받는 대기업에게 다 빼앗기고 농사꾼은 오로지 정부가 시키는 대로 뼈빠지게 흙 만지며 생산하는 일에만 몰두하다 골병든 것이 우리농업의 현실이다.
이런 파행적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민의 안목이 생산과 가공과 유통 및 수출입까지 넓혀져야 하고 대기업과 정부는 그런 권한을 농민에게 넘겨야 한다.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며 2차 가공과 유통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생명누리 칼국수집
그래서 빵집이나 칼국수집을 내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자본이 별로 없는 처지여서 융자를 내서는 우리밀 칼국수집(생명누리식당)을 하나 차렸다. 밀가루에다 전분 약간과 땅콩가루를 약간 섞어 칼국수를 만들어 끓여 먹으면 옛날 어릴 적 먹던 어머니의 손칼국수맛에 가까운 맛이 난다. 수입밀가루로 만든 음식만 먹으면 뱃속이 좋지 않던 터인데도 나는 매일 한끼이상을 칼국수를 먹어도 탈이 없었다. 조미료도 쓰지 않고 표백제 방부제 착색제 일절 쓰지 않은 우리밀가루에 천연조미료(멸치 다시다 들깨가루 등)로만 맛을 낸 우리밀칼국수를 찾는 손님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 외 다른 식단도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믿을만한 식당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식당 한쪽 벽면을 이용해서는 내가 직접 생산했거나 이웃 농민들이 생산한 각종 무농약생산물들(꿀, 솔잎효소, 쑥효소, 현미쌀, 딸기잼 볶은 소금 등)을 진열해놓고 손님들이 사갈 수 있도록 진열해놓았다.
계산상으로만 본다면 우리밀 1kg에 800원인데 밀가루는 2000원, 칼국수는 1kg 한 봉지에 3500원이며 칼국수 1kg면 2500원짜리 5-7인분이 나오게 되니까 밀로 수매하고 끝내기보다는 이처럼 몇 단계의 가공과 유통을 거치게 되면 정말 많은 이익이 농민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농한기로 접어든 겨울 동안은 농사와 식당의 병행이 가능했지만 막상 이듬해 봄부터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도저히 일손이 달려서 우리가족으로서는 두 가지 일을 다 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방맡은 아주머니를 제외하고 또 다른 이를 두었다가는 적자를 면치 못할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농사의 연장으로 시작한 식당을 다른 이에게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래도 누군가가 본래의 뜻을 이해하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널리 알리고 생산농가의 이익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이 식당을 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건만 아직도 농촌의 작은도시(인구 4만의 거창읍)에서는 그 소망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던 식당은 결국 시설비 준비비 등 600만원 정도의 적자를 내고 6개월 만에 문을 닫고야 말았다. 최소한 1년은 버텨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하고 수익도 올랐을텐데 너무 짧은 기간에 문을 닫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아쉬워했던 건 우리가족만이 아니었다. 아마 밀농사를 짓는 서너 농가가 조합적인 형태를 띠고 식당하나를 운영한다면 정말 좋은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을 꾸준히 안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농사를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올해도 우리밀밭에서는 밀이삭이 누런빛을 띠며 익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집에서 밀종자를 가지고 간 세농가에서도 밀이 제법 잘되었다고 한다. 올해부터는 이들과 함께 수확 후의 문제도 함께 상의하며 대책을 마련해가게 될 것이다. 며칠 후에 우리농장을 방문하게될 소비자들과는 밀사리도 함께하며 이런저런 애기도 나눌 것이다. 유월 말이면 탐스럽게 익은 밀이삭을 어루만지며 기쁨에 젖어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을 바탕으로 힘차게 돌아가는 콤바인의 엔진소리와 함께 먼지투성이가 된 채 몇 백 가마의 밀자루와 씨름을 하게될 것이다. 그러면서 곡물자급도가 28%로 떨어져버린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국민 전체의 밀 소비량 가운데 0.3%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우리밀밭이 좀더 늘어나고 밀농사만 지어도 먹고살기 넉넉하고 여가도 즐길 줄 아는 건강한 농민으로 살아가는 이땅 농민들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여건이 되는 한 옹골차게 밀농사를 지어갈 생각이다. (월간 기독교사상 원고 96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