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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心行善分 第二十三 (정심 행선분)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새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受一切善法하면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하리라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반갑습니다. 오늘 6월19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 하겠습니다.
오늘 금강경 제 이십삼분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할 차례입니다.
정심행선이라. 텅빈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이런 뜻이죠. 정심! 뭐 청정한 마음 이렇게 하는데 뭐 무슨 때묻은마음, 깨긋한마음 그렇게 해석 하기보다는 텅빈마음이다, 이렇게 해석 하는것이 제일 그 바람직 합니다.
에~ 왜냐하면은 불교에서 청정이라는 말 이것은 이제 텅빈것이다라는 그런 의미가 제일 많아요.
염화실을 이제 수월도량이라 그런 표현을 썼는데, 저희들 축원 할때도 불공을 드린다든지, 뭐 기타 축원 할때 보면은 淸淨道場(청정도량)水月道場(수월도량)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 청정도량이나 수월도량이나 결국 같은 뜻이예요. 그러니까 뭐 거 사바세계 남섬부주 동양 대한민국 부산시 금정구 금정산하 범어사 수월도량, 그 다음에 뭐 범어사 청정도량 이렇게 이제 그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또 범어사 청정 수월도량 이렇게도 이제 부르는데, 그게 이제 수월도량이라는 것도 공하다라는 뜻이죠.
있으되 텅비어서 空性(공성)인 그런 도량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그걸 이제 수월이라는 말이나 청정이라는말을 같은 뜻으로 보기 때문에 청정이라는 말은 으레히 공한도량, 공한 어떤 그 것을 바탕으로하고 있는것, 이런 의미가 포함 됩니다.
그래서 이제 공한마음으로 텅빈마음으로 정심! 하면 청정한 마음이니까 텅빈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그랬습니다.
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모든 존재의 본분입니다.
또 점잖은 사람들은 다~ 당신의 자식들에게나 또 학교 선생님들은 뭐 제자들에게나 의례히 착하게 살기를 바라고, 그 착하게 사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뜻을 삼고 있죠.
일체 성인들이 모두가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길이 있겠는데 무엇으로서 선을 행할 것인가 이것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이 하셨듯이 그렇게 선을 행한다 이렇게 알면 뭐 제일 간단해요. 불교에서 어떻게 선을 행하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그건 뭐 굳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을 위해서 당신의 가치관으로 최상의 선을 행하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또 그 제자들이 불법을 제대로 아는 제자들이 또 부처님이 하신대로 또 스스로 깨달으신 대로 최선의 선을 행하고 사셨다 이렇게 알면 뭐 간단하죠.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이 선을 행했던 그 선을 우리도 이제 행해야 된다 그런 말인데, 저 무비스님은 입만 벌리면 뭐 으례히 그 뜻이 다 정해져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는 분이 아마 계실 거예요.
그렇습니다. 뭐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답게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 부처님 사신대로 우리가 가능하면 본받아서 살려고 하는 것 이게 부처님 제자 된 그런 도리 아니겠습니까?
또 이 시간을 통해서 불교를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분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행하신 선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행했다 이렇게 이제 저는 믿습니다.
또 사실 저의 판단으로도 그렇구요. 그것은 결국 뭔고 하니 당신이 수행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인생과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아주 투철한 깨달음의 안목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가르쳤거든. 당신도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셨고, 당신이 그 온갖 희생과 고행을 치르고서 얻어낸 그 깨달음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나누고자 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생각하신 최고의 선행입니다. 그건 뭐 아마 누구도 거기에 반기를 들거나 부정을 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 후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이 삼천년의 긴 세월동안 불문에 몸을 담고 정말 한 생을 다 던져서 불법에 종사하신 모든 분들도 역시 이제 부처님 이 하신대로 그런 선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인생과 세상사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것, 그것 이예요. 다시 말해서 이제 법을 전하는 일로서 최상의 선을 행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이고, 부처님은 그렇게 하셨고, 모든 제자들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여기서 行善(행선)! 선을 행한다는 말은 다른 뭐 금강경에서 우리가 익히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왔듯이 어떤 물질적인 그런 그 보시를 행해서 사람들을 돕자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깨달음에 의한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법공양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뭐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공양,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공양하고 이런 등등 다 좋고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불교에서는 그것보다 더 가치 천배 만 배 더 가치 있는 그런 그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법공양을 올려야 하지 그 같은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정말 최선의 가치를 우리가 추구 하는 것 그것이 아니고야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그 참 귀한 몸으로써 피나는 고행을 그렇게 해서 큰 깨달음까지 얻었겠는가?
뭐 다른 물질적인 그 선을 행하는 사람들 그렇게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사실 많구요.. 그런데 부처님의 생애는 정말 남다르시고,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그런 그 스승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어떤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지 않습니까?
그게 이제 사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종교는 다 똑같다 뭐 무책임하게 그런 표현을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요 그거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선을 행하는데도 부처님이 하셨듯이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좀 뭐 생활은 궁핍하고 좀 헐벗고 일상생활은 좀 가난하게 사는 한이 있더라도 뭐 안빈낙도까지는 설사 아니라하더라도 정말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생과 세상의 실상을 환히 들여다보고 살 수 있도록 스스로 살고 남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어떤 법을 통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뭐 그보다 더 좋은 공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뭐 그보다 더 좋은 자선, 그 보다 더 좋은 행선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금강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은 모든 종교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서 본분을 삼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지상의 선, 가장 좋은 훌륭한 선을 행하는데 그것은 곧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是法(시법)이 平等(평등)하야 無有高下(무유고하)일새
하~아 금강경에서 아주 촌철살인 같은 아주 뛰어난 명구 중에 명구가 여기 또 나왔습니다.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라 이법이 평등해서 고하가 없다.
참 이 종교에 몸담고 또 뭐 보통 아마추어가 돼서 종교를 이렇게 적당히 그저 악세사리로 좋아하고 적당히 불교를 믿는 그런 그 설사 수준이라 하더라도 이 종교라 하는 것이 참마음에 부담을 많이 주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그 첫째 이제 선한일인가? 악한 일인가? 이게 뭐 부처님 맘에 드는 일인가? 안드는 일인가? 사람으로서 이게 올바로 사는 것인가?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인가? 일단 그런 그 어떤 굴레와 그런 그 규정 이런 것들을 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떠올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실 부담을 많이 줍니다.
저야 뭐 정말 평생 이런 부담속 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데 이런 말 한마디씩 들어도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 가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다. 왜 고하가 없느냐? 왜 평등하냐? 일체가 空性(공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中道(중도)기 때문에 그래요. 늘 내가 말씀 드렸듯이 금강경은 無相(무상)으로 宗(종)을 삼잖습니까? 無相(무상)이란 곧 空(공)을 뜻하는거죠.
그래 일체가 알고 보면 공성이고, 그래서 그걸 이제 단순한 공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구구한 설명을 또 붙이자면 중도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또 금강경에서 저 앞에서 나왔듯이 일체법이 개시 불법이니라. 모든 것이 다 불법이다.
불법 이라는 것이 공성이라는 뜻이고 중도라는 뜻이죠, 결국. 그런 말씀 한마디 그냥 들으면 은 정말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고, 온갖 그런 규정과, 제도와, 어떤 선과 틀과 그 실지로 종교 안 에서 본격적으로 몸담고 살면 은 뭐 되느니 안 되느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이야기들이 좀 많겠습니까? 뭐 우리 신도님들이 그 불교에 크게 몸 담지 않고 조금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런 것 때문에 가까이 안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아유 뭐 나는 뭐 절에만 다녔지 ‘계’는 안 받는다, 내가 뭐 ‘계’ 받아 가지고 괜히 그렇게 부담스럽게 살 게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한다든지, 또 절에나 불교에 깊이 이제 젖어 들면 은 그런 뭐 부처님이 이런저런 잔소리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지고 나는 뭐 적당히 그냥 절에 가서도 법당에 안 들어가고 맑은 공기나 마시고 맑은 물이나 한통 떠가고 그저 등산이나 하고 뭐 이정도 선에서 끝내겠다 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실 의외로 많습니다.
제가 많이 만나 봤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드리는 거죠.
그런데 실지로 좀 더 깊이 알고 보면 전혀 그런 게 아니죠. 시법이 평등하여 무유고하라든지,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는데 뭐 우리 사람이 하는 일이 불법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뭐 좀 선한 일이다, 좀 악한 일이다 해두요 그거 다 공한거예요. 다 중도고. 아예 없는 것은 물론 아니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죠. 마치 우리 염화실 도량처럼. 어떻습니까? 수월도량이라고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인간사가 이 인터넷의 원리를 통해서 들여다보면 아주 그야말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또 부처님의 최상의 깨달음이란 결국 뭐냐? 이거라는 거죠.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시명아뇨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랬잖습니까? 이법이 평등해서 고하가 없다 라고 하는 이 이치가 그대로 최상의 깨달음이다 그러니 여기에 바탕을 두고 살자 이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바탕을 두고 무슨 뭐 법을 전하든지, 돈을 희사 하든지, 어떤 선을 행하든지, 어디 가서 봉사를 하든지, 뭐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마음의 준비가 되고,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삼고 행해야 그게 이제 근사 하다는 거죠.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로 아도 없고, 인도 없고, 나니 남이니 도 없고, 중생이라는 열등의식도 없고, 나이 먹는다는 그런 한계의식도 없는 그런 자세에서 修一切善法(수일체선법) ㅡ>일체선법을 닦을 것 같으면 은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즉득아뇩다삼먁삼보리)하리라.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이건 그대로 최상의 깨달음을 따로 얻을게 없죠. 따로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최상의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 자세가 정말 우리가 선을 행하더라도 제대로 행할 수 있다하는 것을 여기서 아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참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아주 좋은 내용 이예요. 종교는 선을 행하는 것이 본분이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인가? 그리고 선을 행하되 어떤 자세에서, 어떤 마음 자세에서 선을 행할 것인가?
이 짧은 글 속에 이런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뭐 과거 역대 조사 스님들이 정말 좋아 하셨죠. 그 저는 뭐 그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하고, 설명하노라고 하지만은 또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 무진무궁한 뜻이 얼마든지 또 담겨 있습니다.
그건 이제 모두 우리 공부하는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사실 이런 말도 뭐 아인중생수자가 없는 텅빈 마음으로 일체선법을 닦을것 같으면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바로 그 앞에서 無法可得分(무법가득분)이라 그랬어요. 깨달음깨달음 하지만 깨달음을 부정 했어요. 그런데 깨달음을 부정하고 여기서 또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중도의 이치를 이론적으로나마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하면은 이런 그 모순이 있을 수 가 없습니다. 이런 모순에 걸려 버리죠. 그러니까 空性(공성) 이라는 것, 中道(중도) 라는 것, 眞空妙有(진공묘유) 라는 것, 이것을 이제 정말 좀 너무 참 지루할 정도로 그렇게 이제 이야기한다 싶지만은 사실은 여기에 대한 이론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이런 말이 녹아들지 않을까 그런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뇩다람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하고
須菩提(수보리)야 所言善法者(소언선법자)는 또 선법이라는 말을 해 놓으니까 종교의 본분은 선을 행하는 것 이다. 다 그렇게 알고 있죠. 다 그렇게 또 합니다. 그래 선법 하면 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종교의 본분이다, 그냥 선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걸려요. 거기에 또 설이 생기고 , 잣대가 생기고, 틀이 형성이 되 버립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집착을 떼 줘야 되고, 그 흔적을 또 없애줘야 되겠죠. 그래 所言善法者(소언선법자)는 如來(여래)가 說卽非善法(설즉비선법)일새 是名善法(시명선법)이니라. 선법 선법 하지만은 선법이 선한 법이라는 게 곧 선한법이 아니야.
말로 하자니까 선법이다. 시명선법이다. 참 시원시원 하잖아요. 금강경이 아주 좋아요. 그러니까 우리 조계종에서는 법적으로 종원종법이다 하면 아예 우리 불자들은 무조건 이건 공부해야 된다 그렇게 정해놨어요. 그게 소의경전이라고 하고 교과서라고 정해 놨어요. 그리고 우리 불자들도 포교하는데 크게 많이 공부할 필요가 없고, 또 복잡한 교리 많이 알려고 할 필요 없이 이 금강경 하나정도는 좀 익숙하게 알아가지고, 금강경 하나만 가지고 그저 포교를 해도 평생 써먹어도 다 못 써먹죠. 사실은. 어려워할 게 없습니다.
이 금강경 하나정도면 좋죠. 뭐 그렇다고 구지 화상처럼 손가락을 계속 들어 보이기도 또 그렇고요, 그것도 자신이 있으면, 자기 소신이 확실 하다면 은 구지화상처럼 손가락하나 세워도 좋습니다. 또 황벽스님처럼 불법이 뭡니까? 하고 물어 오면 은 그저 사정없이 몽둥이를 가지고 후려쳐도 그것도 좋은 방법 이예요. 자기 소신이 확실 하다면 은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뭐 덕산스님처럼 ‘방’을 하던지, 임제스님처럼 ‘할’을 하던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이제 열반경의 그 설산동자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도 참 좋은 이야기이거든요. 그것도 좋은 소재입니다. 우리가 법을 전하는데. 어려워 할 게 없죠.
그 또 내가 이제 사리불과 목건련 이야기 할 때는 으레히 마성 비구라고 하는, 그 마성비구를 사리불과 목건련이 만나 가지고 발심 하게 되고, 부처님께로 인도 되었든 그 사연도 또 좋아요.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자기의 어떤 강점 하나만 확실하게 준비하고 있으면 그걸 우리가 18번이라고 하죠. 그것만 딱 준비하고 있으면 뭐 전법 활동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까지 금강경한권정도 입에 아주 익숙하게 읽고, 쓸 수도 있고, 또 그 내용을 해석 부연 해석 할 줄 알면 은 아~ 그 뭐 또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복지무비분 제이십사)
須菩提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의 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하고 若人이 以此般若波羅蜜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於前福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百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그다음에 이제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이라. 여기 이제 그런 내용과 연관되는 경문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제가 좀 역설하고 있습니다. 복과 지혜는 비교할 데가 없다 그랬어요. 복과 지혜는 비교 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건 뭐 금경경에서 앞에서 수차 나왔던 이야기고 앞에 그 淨心行善(정심행선)! 청정한 마음으로 또는 텅빈 마음으로 선행을 한다, 그랬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선을 행해야 된다 그 이야기도 결국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 때문입니다.
그거 아주 참 우리가 여기에 대한 것을 확실하게 세워야 되요. 그렇다고 뭐 어디 가서 절에 가서 시주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그 물질적인 보시를 하던 것을 싹 거둬 들여라 는 그런 뜻은 아니죠. 절대 그런 뜻은 아니고, 아! 절을 지어놔야 가서 법문을 할 수 있고, 말하자면 기도도 할 수 있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 절이 있어야 되고, 법당이 있어야 되고 건물이 있어야 됩니다.
아!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법을 전하죠.. 이 염화실이라고 하는 이거 저 수월도량이라도 하나 지어 놓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여기서 이제 강의도 하고, 글도 올리고,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의견도 교환하고 그러잖습니까?
비록 수월도량이지만은 이렇게 수월도량이 하나 건립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법을 교환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거예요. 마찬가지로 사찰도 그런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사찰의 존립 목적은 본래 수행 하는 곳, 법을 배우는 곳, 이런 곳이죠. 거기서 이제 모든 사찰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사찰이든, 큰 사찰이든, 산중 사찰이든, 시내사찰이든 사찰의 존립 목적은 무조건 법을 공부하고 전하는 것이 존립 목적입니다.
그것을 그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은 그건 있을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사찰을 건립한다든지, 법당을 건립 할때는 당연히 그런 목적하 에서 건립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런 불사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기도도 하고, 공부도하고, 수행도 하고, 법도 법문도 듣고 그렇게 하는 거죠. 당연히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라고 봅니다.
에~ 복지무비분!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약삼천대천세계중소유제수미산왕)의 如是等七寶聚(여시등칠보취)를
모든 수미산 왕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큰 산만, 산들, 이 지구상에 있는 그 수미산 왕, 왕이라고 하는 것도 이제 산중에 제일 크다라는 뜻에서 王(왕) 자를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큰 산들, 그런 그 산 왕의 이와 같은 칠보무더기들, 칠보무더기가 그렇게 크다 이거죠. 저기 뭐 히말라야 산 무더기만한 그런 그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
有人(유인)이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보시에 쓰고
若人(약인)이 만약 또 어떤 딴 사람이 以此般若波羅蜜經(이차반야바라밀경),여기는 이제 차반야바라밀경 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이제 경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이 반야바라밀경으로서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ㅡ> 다하거나 내지 아니면 사구게 등을 가지고 受持讀誦(수지독송)해서 爲他人說(위타인설)ㅡ>딴사람을 위해서 연설 할 것 같으면 은 於前福德(어전복덕)으로 百分(백분)에 不及一(불급일)이며 ㅡ>앞에 복덕으로서 백분에 하나도 미치지 못하고, 百千萬億分(백천만억분)과 乃至算數譬喩(산수비유)로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ㅡ>백천만억분 내지 산수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게임이 안 된다는 얘기예요.
이 반야바라밀경하고, 칠보무더기, 저 설산만치 큰 그런 그 칠보무더기하고 그 비교가 안된다, 아예 뭐 거론을 할 수 없다, 이걸 이제 세상에 있는 것을 세상에 우리들 수준으로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금은보화, 그리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제일 큰 산 덩어리, 우리 한계가 거기까지니까 이제 그런 비유를 든 것이죠. 그렇지만은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그 참 功德(공덕)과 거기에 따른 福德(복덕)은 그런 것 하곤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뭡니까? 앞에 복덕으로는 백분의 불급일이다. 천만억분 의 불급일이다 , 내지 산수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산수를 잘 하는 사람이 그것을 몇억만 분 산수능력으로 따진다 해도 안된다 이런 뜻입니다. 어떤 비유를 가지고도 이것은 안된다 이런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열반경에서 설산동자 즉 석가모니의 전신은 그 한마디의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몸을 던져서, 기꺼이 몸을 던져서 보시를 했죠. 뭐 저 앞에서 여러 번 나왔습니다만 은 생명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이런 표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데 대한 어떤 우리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 참 중요하죠. 그 전법문제에 대해서 假使頂載經塵劫(가사정재경진겁) 身爲床坐遍三千(신위상좌변삼천) 그런글을 올려서 여러분들이 보셨을겁니다만은 가령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또 부처님께 잘 보일려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려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억만년의 세월을 지난다 하드라도, 부처님을 위하느라고 이 육신이 부처님이 깔고, 눕고, 생활하는 평상이 되가지고, 넓은 평상이 되가지고, 이 지구넓이만한 평상이 되가지고, 부처님을 거기에 모신다 하드라도, 내몸 내몸 위에 그렇게 모신다 하드라도, 若不傳法道衆生(약불전법도중생)畢竟無能報恩者(필경무능보은자)니라.
만약 진리의 가르침을 전해가지고서 사람들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이건 결코 부처님께 불공을 했다 할 수 없고, 부처님께 잘 보였다고 할 수 없고, 부처님의 은혜를 갚았다고도 할 수 없다. 아!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그 알고, 이런 가르침을 알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냥 있을 수 없는 거죠, 사실은. 에~ 보현행원품이라고. 그 보통 신행하는데 세 가지 그 품을 이야기하는데, 그건 이제 법화경 ‘보문품’ 그건 이제 일명 ‘관음경’이라고 하죠. 그 다음에 원각경의 ‘보안장’ 그다음 화엄경의 ‘ 보현행원품’ 이렇게 세 가지 품을 그 受持(수지) 讀誦(독송)하고, 또 爲人解說(위인해설)하고, 寫經(사경)하고, 하는 그런 그 본으로 옛날부터 아주 인기가 높은 것이 그 세가지 기본이죠. 보문품, 보안장, 보현행원품, 그 보현행원품에 공양문제, 이제 廣修供養(광수공양)라는게 나오죠. 널리 공양을 닦아라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뭐 부처님께 촛불 켜는것도 좋다 이거야, 저기 저 동해바다 동해바다가 아니라 저기 저 태평양바다물 과 같이 많은 기름을 장만하고, 저 히말라야 산처럼 큰 심지를 장만하고, 그래서 거기다가 그 심지에다가 불을 붙여서 부처님께 공양 하는 것도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그 온갖 물질적인 공양보다는 법공양이 제일이다~ 그랬습니다.
그 우리가 아주 좋아하고 정말 우리 불자들에게 인기 있는 그런 보현행원품에 분명히 광수공양편 에 가면은 법공양이 제일이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식성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식성에 맞는 것 올려야 복을 받죠. 식성에 안맞는것 괜히 뭐 돈만 비싼 것 사다가 공양 올린다고 그 저기 저 손님이 뭐 흡족해 할 일은 없는 겁니다. 상대가 흡족해 할려면 그 사람이 제일 좋아 하는 것, 제일 즐겨 하는 것, 이걸 공양해야 제일 흡족해 하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처님께서 흡족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법공양을 할 줄 알아야 그게 이제 진짜 좋은 불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올려요. 우리 좋아한다고 돈 갖다 올리고, 사람이 돈 좋아하니 돈 갖다 올리고, 밥 좋아한다고 밥 갖다 올리고, 가난 할 때 는 곡식 저 양식 좋아 하니까 양식 갖다 올리고, 요즘 조계사 법당에 가면은 생수 좋아 한다고 생수가 그렇게 많이 올라 오데요. 뭐 요구르트다 뭐 사이다다 그 음료수가 그렇게 많이 올라 오더라구요. 그전에는 도대체 볼 수 없었던 공양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 하는걸 갖다 올리는 거야. 물 좋죠. 생수 같은 것 아주 좋은 물 요즘 얼마나 참 소중하게 생각 합니까?
그래놓으니까 조계사 법당에 가보면 생수가 가득히 올라와 있습니다. 덕택에 그 사무 보는 사람들이 잘 먹긴 하죠 만은 그 중생들의 소견들이 그래요. 자기 좋아하는 것 갖다 올린다구요. 그 뭐 손님 대접한다고 자기 좋아하는 음식 시켜놓고, 자기 혼자만 맛있게 먹고, 손님은 먹는지 안 먹는지, 식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 배탈이 나는지 안 나는지, 그것 생각하지 않고 지가 좋아하는 음식만 시켜가지고 지 혼자만 맛있게 먹고, 아유 맛있다 하고서 일어나나면 그 꼴이 무엇이겠습니까?
조금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 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거죠.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 우리가 공양 올리는 것도 그래 생각해야죠. 그래 생각한다면 이거 한시 바삐 뜯어 고쳐야 됩니다. 하아~ 참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 다 보니까 아! 경전을 그렇게 안 봐서 그렇겠죠, 물론. 봤다면 뭐 그런 생각을 안 할텐데. 그래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 지혜는 무어겠습니까? 반야바라밀경이고,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고, 복은 금은보화, 수미산만한 금은보화무더기다. 이게 우리의 교과서가 되어있고 소의경전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금강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고, 또 읽어도 뜻도 잘 모르는 사라들도 많겠고, 또 아예 금강경을 한 번도 설법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죠. 뭐 알고야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왕이면 소득이 많은걸 하죠. 누구든지 뭐 소득이 많은걸 할 줄 아는 것은 안 가르쳐도 잘 압니다. 그 효과적인 그 노력을 , 이왕 같은 노력이라면 효과적인 노력을 하자 이런 뜻입니다. 그 여기에 이제 좀 우리가 참고로 들어둬야 할 만한 그 내용으로서, 근래에 우리가 가장 믿을만한 그 믿을만한 선지식이며, 또 가장 존경받는 선지식, 또 가장 훌륭한 큰 스님이다 라고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성철스님이죠. 저도 뭐 성철스님 밑에서 강의도 많이 듣고, 또 좌선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 이제 성철스님 같은 분들의 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주 빼어나지 않겠나 아주 본보기가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스스로 많이 해 봤어요.
그런데 이제 제가 파악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자신은 이제 젊을 때 는 좌선을 좀 하셨어요. 그러나 평생에 가장 자신이 많이 하신 것은 경을 읽었습니다. 경과 어록을 많이 읽었어요. 백련암에 가면 지금도 당신의 개인 장경각이 있습니다.
그 장경각에는 거의 수 만권 에 가까운 뭐 권수는 알지 못하지만 하여튼 중요한 세상에 있는 중요한 책은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 장경각이라니까. 암자에 그런 장경각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뭐 설사 다 읽지는 않았다 하드라도 그런 정도로 당신은 경을 많이 읽으셨고, 보통 총림을 이제 운영하면서 방장을 지내셨으니까 전체적으로 승려들에게는 좌선을 하기를 이제 권했습니다.
그런데 상좌들에게는 좌선 권하지 않았어요. 거의가 경전 공부 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그 일본 학자들이 그 경전이라든지, 불교연구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공부하셔가지고 저희들에게도 그 일본책을 권하고 상좌들에게는 반드시 읽히도록 하는 그런 그 책이 있어요. 일본책이. 그래서 뭐 당연히 그 일본어를 공부해야 되고, 또 경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만 받았어요.
학력이 못 미치는 사람들은 아예 안 받았습니다. 그런 정도로 경전과 어록을 습득하는데 우선을 뒀어요. 그럼 신도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쳤냐? 잘 아시는 대로 절을 가르쳤고, 그다음에 아비라 기도를 가르쳤고, 능엄주를 가르쳤습니다. 또 그 상좌들도 능엄주를 하는 상좌들은 별로 없어요, 솔직하게. 그런데 비구니스님들은 성철스님에게 다닌 비구니스님들은 거의 능엄주를 합니다. 아비라 기도를 하고 능엄주를 하고.
그게 이제 그 근기 따라서 아주 적절하게 근기에 맞춰서 아주 적절하게 그렇게 안배를 해서 지도를 했다 하는 것을 아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뭐 되지도 않을 사람에게 뭐 해봐야 뭐하겠나 이렇게 생각을 하셨는지 총림에 그때 있어 보면은 일반 대중들은 무조건 좌선으로 꽉 묶어놔요.
그런데 한 번씩 백일법문이니 무슨 법문이니 해서 경전을 가지고 강의를 아주 그 참 많이 하시곤 했어요. 당신께서는 백일법문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이건 상좌들도 많이 아는 사람이 없는데, 대성사에서도 첫째 이제 백일법문을 한번 했구요, 그다음에 이제 대성사에 계시다가 해인사에 방장으로 추대되어 오셔 가지고 그때 이제 두 번째 한 백일 법문이 세상에 나온 그 책이고 , 또 이제 녹음 테잎이고 그렇습니다. 그게 두 번째한 백일 법문이예요. 그런 정도로 어떤 경전이나 어록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이셨고, 깊은 관심을 보이셨고, 당신이 아끼는 당신 상좌들에게는 전부 경전 공부하고 어록공부하기를 바랐지 그 뭐 제대로 일념이 화두일념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그런 좌선을 꼭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이제 근기 따라서 하시기는 그 잘 하셨는데 이왕이면 근기를 무시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런 그 수준으로 사람들을 끌어 올렸으면 어땠을까, 신도들에게도 무슨 그런 그 주문이나 이런 기도 절이나 이런 것보다는 그 시간에 경전이나 어록을 가르쳐서 심성을 개발하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그런 그 길을 열어줬더라면 그런 위치에 있는 큰 스님이 그런 기치를 들고 좀 강하게 표현했더라면 한국불교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참 제가 많이 아쉬워하는 점이 그런점이예요. 내가 하는것보다 성철스님이 한마디라도 하는것이 천배 만배 효과가 있을것 아니겠어요? 법문에 그러것을 자주 강조를 했고, 다른제자들이나 또 총림에서나 그 분별하지 말고, 또 신도들에게도 분별하지 말고, 그 뭐 근기 맞춘다고 하는것는은 좋지만은 분별하지말고, 당신이 좋아하는대로 그렇게 가르쳤으면 한국불교가 상당히 많이 달라졌으리라 하는 그런 그 아쉬움을 늘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는 지금 처음 하죠, 처음 하는데. 이렇게 이제 福智無比(복지무비)! 복과지혜는 비교할데가 없다, 하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런 대목을 보면서 아이 참 부처님은 그렇게 많은 경전을 설하시면서 제자들을 경전으로서 깨우쳤지, 뭐 주문 외우게 한것도 아니고, 좌선을 그렇게 뭐 만사 제쳐놓고 좌선을 하게 가르친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 정말 눈밝은 선지식이 있을때, 눈밝은 선지식은 바로 그렇게 바로 가르칠수 있었으면은, 그리고 근기가 모자란대로 근기를 좀 끌어 올리는 그런 그 입장이 되었으면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한국불교가 훨씬 달라지지않았을까 그런 그 영향력 있는 분이 한마디라도 그렇게 강력하게 권했더라면 훨씬 달라졌으리라고 하는 그런 아쉬운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또 뭐 그 밑에서 그 어릴때 살았던 저같은 사람에게서 이런 소리를 안들으면 어디 들을 기회가 다시는 없는거죠. 그래서 또 비록 수월도량에서 인연이 되었더라도 또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淨心行善分(정심행선분)! 그리고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 뭐 어느구절 하나 중요하지 않은게 있겠습니까만은 참 그 우리 일상적인 신행 생활에 꼭 점검하고 이런 그 기준에 근거를 해서 우리가 신행생활을 하면 훨씬 신행생활이 값지고 효과있고 소득이 크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마음에서 중언부언 여러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금강경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문녹취: 희견 법보행)
부처님께서 흡족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 바로 알고 행하시라는 말씀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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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선을 행하도록 노력 하겟읍니다...............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 ()....
고맙습니다()()()
공부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_()()()_
높으신 가르침 깊이 새깁니다. -덕운합장-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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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 합니다 앞으로는 부처님 좋아 하실 일을 잘 생각해서 작은일이라 도 행하겠습니다
선심용출의 경지는 근기에따라 절,주력,능엄신주,좌선도 맞다고 봅니다. 어느 순간 경전 공부의 열망이 날때 누가 말리겠습니까? 금강경은 우주본질을 보는 마음, 보리심이 나도록 해주는 경전으로서 처음부터 한글로 석존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모두 누구나 다 혜능조사의 사촌이나 조카는 되었지 않았을까요... 정말 내용이 풍부하여 마음창고가 가득해지는듯합니다.
금강경만이라도 잘 공부하여 부처님 좋아하시는 법공양을 드릴 수 있는 불자가 되겠습니다...()()()
큰스님의 법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是法平等 無有高下 _()()()_
至上의 善! 無住相傳法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정심행선,복지무비,
이렇게 법공부를 할 수 있어서 감사 드립니다
모든 종교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서 본분을 삼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지상의 선, 가장 좋은 훌륭한 선을 행하는데 그것은 곧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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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건강하세요! 스님... 고맙습니다. _ ()()() 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_()_
이법이 평등하야 높ㆍ낮이가 없도다 ㅡ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