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강
오늘 <서장> 61쪽 이참정에게 답하는 내용입니다.
答 李參政 漢老(一) [旦且仍舊 莫作馳求]
旦且仍舊 莫作馳求(단차잉구 막작치구)
제목을, 대의를 그렇게 추렸습니다. 단차잉구 막작치구라. 다만 옛날처럼 살고, 잉구라고 하는 것은 옛날처럼. 이런 말입니다. 옛날처럼 살고, 치구를 하지 마라. ‘치’자는 말달릴 ‘치’자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너무 우리가 뭐 좋다고 하면, 그 좋다는 사실에 빠져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너무 구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오히려 역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래서 막작치구, 치구하지 말라. 너무 지나치게 구하지 말라. 우리말로 번역하면 너무 지나치게 구하지 말라.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앞서 편지 있었던 대로입니다.
示諭(시유)호대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着衣喫飯(착의끽반)하
며 抱子弄孫(포자롱손)하야 色色仍舊(색색잉구)호대
示諭(시유)호대
나에게 편지를 보이되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이참정의 편지에 그렇다는 거지요. 서로 만나서 법거량 끝에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나서 산을 내려가서 성중에 이르렀다는 거죠. 그리고 편지를 보냈죠. 성중에 돌아와서 감사하다는 편지, 그리고 또 ‘보다 더 대법이 나에게 펼쳐졌으면, 대법을 좀 구한다’ 하는 당연히 어른에게, 선지식에게 편지를 하면서, 자기가 설사 ‘나는 더 구할 게 없노라’ 이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지극히 점잖은 분으로 더 법을 구하는 자세로 편지를 보냈죠. 그런 내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중에 이름으로부터
着衣喫飯(착의끽반)하고
평소처럼 옷을 입고 또 식사를 한다던지
抱子弄孫(포자롱손)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하는 것이 사물 사물, 사건 사건, 모든 것들이 옛날 그대로-잉구, 옛날 그대로 이지만
旣亡拘滯之情(기무구체지정)하고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하며
旣亡拘滯之情(기무구체지정)이라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뭔가 가슴에 뭉클하다든지, 끈적끈적하다든지, 꽉 붙들고 놓지 않는다든지 하는 또 뭔가 떨어지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하면 거기에 스스로 상처를 받고 하는 그런 구체의 정이 없다.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짓지 않는다. 그리고
宿習舊障(숙습구장)도 亦稍輕微(역초경미)라하니 三復斯語(삼복사어)하고 歡喜踊躍(환희용약)호라
宿習舊障(숙습구장)도 亦稍輕微(역초경미)라
옛날에, 과거 생에 쌓여있던 업장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전에는 업장에 부림을 당해서 업장이 하자고 하는 대로 했지만, 지금은 가만히 보니까 업장대로 안살아도 가뿐하게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지요. 참 업력난산이라고 우리 염불에 있듯이, 업력같이 불가사의한 것도 이 세상에 없지 않은가? 전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면서 업력만치 센 힘을 가진 존재도 아마 드물 거예요. 그래서 업력난산이라. 참 업력이야말로 불가사이한 거야.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면서 뭐 있는 게 아니죠 사실은. 그러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업력에 끄달려서 별별 일을 저지르고 하고자 하는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업력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발견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발견인데요, 보통 우리는 관습이다, 습관이다, 뭐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다, 선천적으로. 그런 표현을 쓰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을 업력의 발견으로 봅니다. 대단한 발견이예요. 그게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발견했다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러나 혜안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발견을 할 수 있고, 또 우리는 그 가르침을 느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숙습구장도 역초경미라, 또한 가벼워짐을 느낀다.
三復斯語(삼복사어)라
이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歡喜踊躍(환희용약)호라
뛸 듯이 기뻐했다. 이것이 바로 불교 공부하는 영험이다.
此乃學佛之驗也(차내학불지험야)니 儻非過量大人(당비과량대인)이 於一笑中(어일소중)에 百了千當則不能知吾家(백료천당즉불능지오가)의 果有不傳之妙(과유부전지묘)며
此乃學佛之驗也(차내학불지험야)라
불교 공부하는 영험이 바로 이거라. 이런 영험을 바라보고 공부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볼 때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불교는 정말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업장에 떠밀려가지고 온갖 추태를 다 보이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뭐 남의 집안은 놔두고요 우리 집안만 하더라도요. 차내학불지험야라. 이것이야말로 불교 공부하는 영험이다. 그 외 우리가 불교 믿고 공부해서 떠올리는 영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생략하고요.
儻非過量大人(당비과량대인)이 於一笑中(어일소중)에 百了千當則不能知吾家(백료천당즉불능지오가)의 果有不傳之妙(과유부전지묘)며
만일 과량대인이 아니면 그 사람의 그릇이 어느 정도다, 법의 그릇입니다. 이건 배짱이 세다해서 그릇이 크다 이런 게 아니예요. 불교에서는 이 법을 정말 명예나 돈이나 남이 알아주고 몰라주는 그런 데서는 벌써 초탈해있는 그런 깊고 높은 어떤 심성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그릇이 과량대인이죠. 뭐 아주 배포가 크고, 박력이 있는 세속에서 말하는 그런 그릇을 불교에서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용기나 그런 것일 수는 있지만 도에 대해서는 그릇으로 쳐주지 않죠. 과량대인 할 때 우리가 잘 이해해야 돼요. 이런 것도 정확하게.
만일 과량대인이 아니라면 양을 지나가는 그 그릇이 얼마인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깊이 모를 대인이 일소 중에, 한번 웃는 가운데 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소죠. 염화했을 때 미소, 여기 미소실이라고 그러는데 그야말로 염화실만 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실도 역시 똑같은 격이죠. 한번 웃는 가운데
百了千當則(백료천당즉)
천번 요달하고 백 번 알지 못한다면 과연 대인의 일소 중에 그런 것이 아니였다면 어떻게 우리 집안에 천료백당이라는 것은 뭐 일호일일체호?라, 한번 깨달으면 일체 것을 다 깨닫는. 일단에 일체단이라, 한번 자르면 일체가 다 잘라지는 그런 어떤 깨달음만이 갖는 특수한 그걸 頓悟頓修(돈오돈수)- 이런 표현으로 설명을 하죠.
그렇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우리 집, 절 집안에, 불교 집안에 과연 남에게 전할 수 있는
不傳之妙(부전지묘)
전해주지도 못하고, 전해 받지도 못하는 그런 미묘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능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이여. 못했을 것이며 이게 우리가 법을 전한다 법은 전한다 무슨 전법이니 사법이니 법을 이어 받았다느니 그런 말을 너무 무책임하게 우리가 잘 쓰는데 이건 부전이 맞는 말이예요.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전했겠어요? 그게 전해지는 게 아니라구요. 전해지는 것 같으면 석가모니가 누구에게 맨 먼저 전했겠어요? 뻔하다구요. 인지상정이라고 가장 인간적으로 인연이 깊은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이라. 역사적으로 한 번도 자기 자식에게 전했다는 소리도 없고, 과거에 태자 시절 부인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자기 키워준 마하파사파제에게 전했다는 역사도 없습니다.
이건 부전지묘라, 전할 수도 없고 전해 받을 수도 없는 거야.
그런데 법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인정해주는 거죠. 보니까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 아니면 눈을 떴다. 깨달았구나. 하는 사실을 점검을 통해서 알고는 인정해주는 것이지, 전해주는 것은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래 자기 것인데 이걸 누구에게 전해주며 전해 받습니까? 전해 줄 수도 없고, 전해 받을 수도 없는 거죠. 이참정이 깨달은 사실에 대해서 확인하고 칭찬도 하고 그렇습니다.
若不爾者(약불이자)인댄 疑怒二字法門(의노이자법문)을 盡未來際(진미래제)히 終不能壞(종불능괴)라
若不爾者(약불이자)인댄
만약 그러지 못했을진댄, 이렇게 확철히 대오를 못했었다면
疑怒二字法門(의노이자법문)을 盡未來際(진미래제)히 終不能壞(종불능괴)라
의-의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집안의 깨달음이라는 사실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이 깨달음을 부정하는 불자들 많아요. 불교인도 상당히 깊이 공부했고, 여러 해 불교에 투신을 한 사람도 이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 어떤 불교에는 보면 깨달음을 이야기하지 아니한 불교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분노하는 거죠. 너무 거기에 난 허송세월 했다고 하는 그런 뜻에서 의로, 그렇습니다. 의심하고 분노하는 이 두 글자의 법문을
盡未來際(진미래제)
두고 두고 속았다고 선지식에게 속았다고, ‘선지식은 무슨 선지식......’ 하면서 속았다고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마침내 능히 무너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깨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거여.
使太虛空(사태허공)으로 爲雲門口(위운문구)하고 草木瓦石(초목와석)으로 皆放光名(개방광명)하야 助說道理(조설도리)라도 亦不奔何(역불내하)일러니라
使太虛空(사태허공)으로
태허공으로 하여금, 저 드넓은 허공으로 하여금
운문의 입을 삼고
草木瓦石(초목와석)으로서 다 방광하게 해서
助說道理(조설도리)라도
도리를 설하는데 도움을 준다하더라도
亦不奔何(역불내하)일러니라
또한 그를 어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은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을 하며 설득을 시키며 이해를 시키겠습니까? 스스로 깨달음으로 해서 더 이상의 설명과 설득이 필요 없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方信此段因緣(방신차단인연)은 不可傳不可學(불가전불가학)이라 須是自燈自悟(수시자등자오)하며 自肯自休(자긍자휴)하야사 方始徹頭(방시철두)니라
方信此段因緣(방신차단인연)
바야흐로 믿을지니라. 무엇을? 이 차단인연. 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 깨달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 이 집안의 깨달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不可傳不可學(불가전불가학)이라
사실 알고 보면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본래 가진 거야.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확신을 못하고 또 이론적으로도 알지 못하고. 첫째 이론적으로 알지 못하고. 그 다음에 확신이 안가고. 느낌도 없고. 그러니까 볼 줄 모르는 거죠. 볼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 일 문제는 차단인연, 이 문제는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須是自燈自悟自肯自休(수시자등자오자긍자휴)하야사 方始徹頭(방시철두)니라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닫고 ‘증’자나 ‘오’나 같은 뜻입니다. 자긍이나 자휴나. 그런데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보았다 이거죠. 또 손에 잡았다 이겁니다. 견성목. 성품이 뭐 눈에 보이는 겁니까? ‘견’자는 사물을 볼 때 사용하는 ‘견’자 라구요. 어떤 추상적인 것을 보았을 때 ‘견’이라고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견’자를 쓴다구요. 그런 것은 사물을 보듯이 확실하게 보았다라고 하는 뜻에서 견성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긍정하고-자긍, 자휴-공부하는 마음이 다 쉬어져 버렸다. 쉬었다 하는 것도 이럴 때 쉬었다 하는 것은 조동종에서 말하는 ‘휴거헐거’할 때 ‘휴’하고는 전혀 다른 거죠. 공부하는 일을 다 쉬었다. 공부하는 일을 쉬었다. 깨닫지 못하고는 이 불교 집안에 들어와 쉬지 못하는 거요. 확철대오를 해야 비로소 쉬는 거라. 천생만생을 드나들어도 쉬지 못하는 거야. 쉬는 것은 영원히 없어. 깨달아야 쉬는 거지. 마음이 편치가 않죠. 마음이 편치가 않으니까 어디 가서 놀아도 재미가 없죠. 깨닫지 못하고 노니 그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부담감이 늘~ 따라다니는 거야. 하여튼 뒤통수에 따라다니는 거야. 공부에는 모름지기 그래야 돼요. 그래야 공부인이라고 할 수 있어. 잠을 자도 편치가 않고, 어디 가서 놀아도 시큰둥하고. 아무리 외국 가서 신기한 것, 할 수 없이 따라가 보지만 봐도 시들하고 별로 보나마나. 공부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최소한도 그런 양심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게 공부인이야. 평생 여행 안가고 요즘 외국 여행가기가 얼마나 편리하고 좋습니까? 안가는 도반들 있어요. 평생 안가. 전혀 관심 없어. 이 깨달음의 문제에 정말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참으로 시시한 겁니다. 시시한 일을 왜 하겠어요?
公(공)이 今一笑(금일소)에 頓亡所得(돈망소득)하니 夫復何言(부복하언)가
公(공)이 今一笑(금일소)에
한 번 웃음에
頓亡所得(돈망소득)하니
몰록 얻은 것을 다 잊어버렸으니
夫復何言(부복하언)가
다시 무엇을 말할 것인가?
돈망소득이라. 얻은 것을 다 잊어버렸다. 무소득. 이무소득. 유소득심이 재전돈방하야. 그랬죠? 얻을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앞에 탁~ 놓여져 있어서, 그게 얻을 게 있는 게 아닌데 놓여 있어서 주로 공부에 장애를 짓는다. 그러면서 <반야심경>의 핵심은 ‘이무소득’이라는 낱말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 역시 같은 이야기죠.
돈망소득이라, 얻을 바가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싹~ 없어져 버렸다. ‘돈’은 싹 없어져 버렸다. 몰록이라는 말은 요즘 쓰이지도 않는데 어쨌든 옥편에는 ‘몰록 돈’자로 되어 있어요. 싹 없어져 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말할 것인가?
黃面老子曰 不取衆生所言說(황면노자왈 불취중생소언설)인 一切有爲虛妄事(일체유위허망사)하며 雖復不依言語道(수부불의언어도)나 亦復不着無言說(역복불착무언설)이라하니
黃面老子曰 不取衆生所言說(황면노자왈)
황면 노자가 말하기를
不取衆生所言說(불취중생소언설)인 一切有爲虛妄事(일체유위허망사)하며
중생의 말한 일체유위의 허망한 일을 취하지도 말며
雖復不依言語道(수부불의언어도)나
다시 그래서 허망한데 대해서 일체유위법이고 그것은 결국 허망한 일이고, 허망한 일에 대해서 중생들은 이러쿵저러쿵 말하잖아요? 중생들의 말이란 전부 그거야. 일체 유위 허망사에 대해서 말한다구요. 그러니 공부인은 거기에 대해서 관심 없다 이거지. 그래서 수부불의언어도나, 그래서 말에 대해서, 말에 의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다시
無言說(무언설)
말 없는 것에 집착할 것은 아니다. 말 없는 것이 그러면 제일이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 또 ‘中道’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불교의 이론은 중도를 벗어나 있지를 않습니다.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 어떤 사실과 사건과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어떤 공식이 있어. 모든 어떤 원리가 있고 공식이 있어. 그것을 무엇으로 명명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그것을 ‘중도’라고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하도 중도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까 난 중도가 먼저 있고 이치가 있는 줄 착각을 했어요. 불교 공부에 잘못 빠져들면 그래요. 명제가 먼저 있고, 사실이 있는지 안다고요. 중도가 먼저 있고 사실이 있는 걸로 알아야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또는 남에게 가르치려고 하다보니까 뭔가 이름을 만들어 내야 그게 전달이 될 것 같아서 중도라고 이름을 지은 겁니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야. 이름은 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言說이라든지 無言說이라든지 하는 이것은 어디에도 치우치면 안된다. 또 치우칠 수가 없게 되어있어. 치우치면 안된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내용을 알고 보면 치우치도록 되어있지가 안해. 치우치면 안 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치우치지 말라 하는 거죠. 그래서 어디에도 치우치는 것을 떠나라. 떠났으되 말도 할 수가 있고, 또 말을 안할 수도 있고. ‘무언설’도 또는 ‘언설’도 다 수용하는 거야. 용납하고 수용하는 그것이 중도입니다. 그것이 중도예요.
나는 중도 설명할 때 영면 영수 선사 <만선동기집>에 뒤에 아주 짤막한 게송이 있는데 거기에 중도, 나는 그것을 ‘만선 동기 중도송’이라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였는데 전부 중도에 대한 이야기야. 어떤 이야기가 있는고 하면 ‘菩提無發而發(보리무발이발)’, 보리심부터, 보리심을 발하지만 발함이 없이 발한다. 발한다고 하지만 보리심을 발한다, 發菩提心, 발보리심 또는 발심, 발심. 얼마나 잘 쓰는 말입니까? 그렇지만 그게 어디 형체가 있는 겁니까? 꼭 어떻게 마음의 상황이 달라져서 뭐가 있는 줄 알면 또 아니죠. 그렇다고 아무 흔적이 없다고 해서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보리무발이발, 이런 식으로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저기 뒤에 가면 공화와 같은 만행을 짓고 또 허망한 공양구를 부처님께 나열한다. ‘나열환화공구’, 그 구절
나만.....일상생활에서...... 쓸 수가 있어요. 羅列幻化供具, 여섯 자로 되어 있어요. 시가. 육바라밀도 다 거기서 언급하고요, 우리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수행해서 접하는 내용들을 전부 거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육바라밀도 있구요. 보리심부터 또 불사를 짓는 것. 절을 짓는 이야기까지. 중생 제도하는 것도 말할 것 없고요. 아주 중요한 명제들을 중도적으로 다 이야기하는데 우리 공양구를 부처님 앞에 나열하는 일들이 얼마나 흔한 일이고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까? 일상생활에. 그런데 그 공양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중도적으로 이해하느냐? 환화공구인 걸로 알아야 된다. 환화공구 같은 허망하고 환상이고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우리가 공양구를 촛불 하나 올리고, 수박 한 덩어리 올리고, 과일 한 접시 올리는 것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올려야 된다라고 해놨어. 공구, 나열해야 된다. 그것도 많이 차려라. 얼마든지 정성을 들여서 차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잘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저런 것을 부처님께 올리고 하는 것, 부처님도 허망한 불상이고 공양구에 올려봐야 누가 먹나? 우리 선방에 다닐 때 수좌들이 참 잘 쓰는 말이거든요. 아~ 불상도 허망하고 공양구 올려봐야 결국 중, 지가 먹을 건데 뭘 그리 올리냐? 그런 걸 가지고 얘기하는 부분이 많고 그래서 머터러운 사람들, 거친 사람들은 올리지도 안해요. 음식 같은 것 해서 올리지 않고 치우는 그런 경우들도 많거든요. 당연히 올려야 됩니다. 나열해야 됩니다. 정성껏, 정말 정성을 들여서 나열해야 됩니다. 그게 중도적으로 신행 생활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
|
첫댓글 宿習舊障도 亦稍輕微라. 과거 생에 쌓여있던 업장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전에는 업장에 부림을 당해서 업장이 하자고 하는 대로 했지만, 지금은 업장 대로 안 살아도 가뿐하게 벗어날 수가 있어 가벼워짐을 느낀다... 此乃學佛之驗也라. 이것이야말로 불교 공부하는 영험이다... 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不取衆生所言說인 一切有爲虛妄事하며 雖復不依言語道나 亦復不着無言說이라하니...중생이 말한 일체유위의 허망한 일을 취하지도 말며 말에 의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다시 말 없는 것에 집착할 것은 아니다...불퇴지님, 고맙습니다. _()()()_
自證自悟自肯自休하야사 方始徹頭니라.....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긍정하고 공부하는 마음이 다 쉬어져 버려서 철두철미하게 보았느니라....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_()()()_
감사합니다. 만월님^^_()_
_()()()_
不傳之妙(부전지묘).. 전해주지도 못하고, 전해 받지도 못하는 그런 미묘한 사실,..본래 자신에게 갖춰져 있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불퇴지님 고맙습니다._()()()_
모든것은 자신의 숙제.......감사 합니다._()()()_
不取衆生所言說(불취중생소언설)인 一切有爲虛妄事(일체유위허망사)하며 雖復不依言語道(수부불의언어도)나 亦復不着無言說(역복불착무언설)이라.중생들의 말이란 일체유위의 허망한 일이라, 말에 의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다시 말 없는 것에 집착할 것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_()()()_
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