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sia Times Online 2011-8-3 (번역) 크메르의 세계
[위키리크스 분석] 캄보디아의 탈북자 하이웨이
All aboard North Korea's refugee railroad
기고 : Sebastian Strangio
(프놈펜) - 2006년 11월, 한 북한 주민이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부터 길고도 위험한 여행 끝에, 베트남 오지를 가로지른 후 캄보디아 북동부의 몬돌끼리(Mondulkiri) 도로 들어왔다. '캄보디아 국립 경찰'은 리해룡(Ly Hai Long)이란 신원으로 확인된 이 남자를 체포했고, <캄보디아 데일리>(Cambodia Daily) 소속의 한 기자에게 이 남성을 베트남으로 강제송환시킬 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밀 반대 기구인 <위키리크스>(Wikileaks)는 지난 7월11일 캄보디아 관련 미국 대사관 외교전문 777건을 폭로했는데, 이 문서들의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앞서 말한 사건과 동일한 달에 작성된 한 외교전문(분류번호 06PHNOMPENH2072)에 따르면, 리해룡은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잔류했다. 당시 주캄 한국대사는 미국 관리들에게 말하기를, "한국 정부가 그 북한 남성을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캄보디아 정부와 조용하게 공조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프놈펜 사무소의 탐롱삭 미추봇(Thamrongsak Meechubot) 대표는 미국 관리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캄보디아 경찰이 해당 남성의 송환 정보를 흘린 것에 대해 "놀랍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이 함축하는 바는 그러한 소문을 해당 남성을 남한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기밀유지 차원에서 이용했다는 것이다. 탐롱삭 대표는 그러한 일이 캄보디아가 이전에도 사용해왔던 전술이라고 말했다.
폭로된 미국 외교전문은, 캄보디아가 최근 수년간 어떤 방식으로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 조용하게 공조하여, 망명처를 찾아 캄보디아에 도착한 북한 출신 난민 수백명을 처리하고 신병인도를 했는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미국 관리들은 프놈펜과 평양 사이의 역사적 관계에 비춰서나,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반도에 관한 민감한 협상이 진행 중이란 점을 고려하면, 난민의 신병을 처리하는 문제가 캄보디아에게는 고도로 민감한 사안일 것으로 보았다.
북한 주민들이 대규모로 자국을 탈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당시 북한은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식량배급 시스템의 붕괴가 맞물려 있던 때였다.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긴 탈북자들은 대부분 북한의 구멍이 송송한 중국 국경을 통해 출발한 후, 밀입국 전문 범죄조직이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시아에 도착했다. 이후로 탈북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면서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주민들의 수가 21,000명 이상이 되었다.
최근까지 캄보디아는 북한 탈출 주민들의 주요한 목적지 중 하나가 되었고, 이들은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로 들어왔다.
미국의 외교전문들에 따르면, 북한인들이 도착하는 과정은 특별한 의미에서 매우 조용하게 이뤄진다고 한다. 2006년 10월에 작성된 한 외교전문(분류번호: 06PHNOMPENH1927)에 따르면, 훈센(Hun Sen) 총리의 자문위원 중 한명인 옴 옌띠엥(Om Yentieng: [역주] 변호사로서, 현재는 '부패방지단'[ACU] 단장임. 당시에는 '국가인원위원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이 캄보디아에 있어서 북한인들의 처리과정에 대해, "훈센 총리와 주캄 한국대사 사이에 이뤄진 양해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명확하게도 비밀엄수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2007년 7월에 작성된 한 외교전문(분류번호: 07PHNOMPENH925)은 한국과 미국 관리들이 만나서 캄보디아에 체류중이던 북한 출신 난민 5명의 처리 문제를 협의한 내용을 기록했다. 당시 그들 난민은 미국으로의 재이주를 원하고 있었고, 한국 관리들은 "남한의 탈북자 유입경로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과, 미국으로의 어떠한 탈북자 유입경로에서도 거리를 두려는 자신들의 바램을 도출해내는 데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2008년 4월에 작성된 외교전문(분류번호: 08PHNOMPENH316)은 4월16일에 미국으로 떠난 북한인 2명의 출국허가와 관련하여, 캄보디아 관리들의 "신속한 처리과정"(expeditiously processing)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미국 관리들은 또한 그보다 이전인 2007년 11월에 [미국으로] 출발한 또 다른 탈북자 그룹과 관련하여, 캄보디아 이민국 관계자들의 "사려깊은 업무처리"(discreet handling)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외교전문은 "지난 11월의 조용한 출발이 있을 당시, 공항 안의 어느 누구도 북한인들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DHS) 산하 '이민통계실'(Office of Immigration Statistics: OIS)이 금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이 이 은둔국가의 인권상황 개선을 돕기 위해 제정한 <북한인권법>의 적용을 받아, 2006~2010년 사이에 미국으로 재이주한 북한 출신 난민들은 100명이었다.]
일부 전문들을 보면, 미국 관리들은 캄보디아가 서울 당국과 난민에 대한 협상을 하는 일이 행여라도 [캄보디아가] 평양 당국과 타협을 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와 북한의 관계'는 북한의 [소위] "위대한 영도자"(Great Leader)였던 김일성 주석과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임국왕 사이의 밀접한 개인적 친분을 통해 굳어진 사이였다.
2006년 10월에 작성된 한 외교전문(분류번호: 06PHNOMPENH1927)에서는, '캄보디아 외무부'의 롱 위살로(Long Visalo) 차관이 미국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아이콘적인 이미지를 가진 이들 두 아시아 지도자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캄보디아 정부는 북-캄 관게에 심각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외교전문에서, 옴 옌띠엥도 롱 위살로와 마찬가지로 북-캄 관계에 관해 심각한 우려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훈센 총리의 관저가 바로 이웃한 북한대사관과의 근접성 때문에 총리의 안전에 관한 우려는 표명하면서", 난민 문제에 관한 미국-캄보디아 사이의 협조가 공개적으로 되는 데는 부담을 느꼈다.
비밀스런 정거장
미국의 외교전문들은 캄보디아를 거쳐 제3국으로 출국한 탈북자들의 총인원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출신 전향자나 난민들을 돕고 있는 한국의 단체들은, 캄보디아가 현재 지하 유입통로의 중요한 터미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현재 24세인 학생 정유미(Jeong Yu-mi) 씨는 1998년 북한을 탈출했다. 그녀는 중국 북동부로부터 10일 동안 여행한 끝에 캄보디아에 도착했고, 주캄 한국대사관이 재정착을 허가할 때까지 프놈펜에서 5개월을 보냈다고 한다. 아직도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가명을 사용한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들은 안가를 임대해서 그곳에서 5개월간 머물도록 했다. 그 집은 2층집이었고, 300명 가량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
하지만 북한 탈북자들이 라오스를 거쳐 태국 북부로 들어가는 루트를 선호하면서, 이후 캄보디아의 중요성을 감소했다.
서울에 본부를 둔 탈북자 지원단체인 '두리하나'(Durihana) 선교회 대표 천기원(Chun Ki-won) 목사는, 2000년대에 탈북자 유입이 아직 적을 때부터 캄보디아는 몽골과 더불어 탈북자들을 지원했던 극소수 아시아 국가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두리하나'는 지난 수년간 900명 가량의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가도록 도왔다. 2001년 7월부터 시작한 천 목사의 첫번째 구호 선교는 북한 출신 여성 및 그 자녀를 중국 북동부에서 베트남을 거쳐 프놈펜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천 목사는 자신이 몽골 국경을 통해 사람들을 넘어보내려다 탈북자 지원조직 단속에 나선 중국 정부에 의해 투옥될 무렵인, 2001년 12월부터 캄보디아의 중요성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천 목사는 베트남 당국이 경계를 강화하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북한 난민들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동남아시아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증언은 '태국 이민국'이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 수가 2004년 46명이던 것에서 2010년에는 2,482명으로 50배 가량 증가했다고 발표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기에 캄보디아 도착 탈북자 수는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에 태국 치앙마이(Chiang Mai) 주재 미국 영사가 작성한 한 외교전문(분류번호: 06CHIANGMAI79)에 따르면, 한 관리가 북한 탈북자들의 도착이 증가할 것을 예측하면서, "이는 아직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해당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증거들을 보면, 탈북자의 흐름이 감소할 것 같지 않다. 태국과 중국 남부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의 네트워크가 중국의 운남 지방, 버어아(미얀마), 라오스를 통해 태국의 치앙라이(Chiang Rai) 지방으로 탈북자들을 데려오는 데 공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전문은 태국 경찰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체포된 "탈북자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며, 노동 능력 연령대의 남성들이 체포되는 것은 간간히만 존재한다"고 말하고, 이들은 방콕의 이민 당국에 신병이 인도된 후 "[태국 정부와] 한국대사관, 그리고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이의 합의 하에" 캄보디아에서와 유사한 처리과정을 겪게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방콕포스트>(Bangkok Post)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해 남한 사람들이 치앙라이에 "[탈북자] 조정센터"(coordination center) 건립을 제안했지만, 그러한 일이 탈북자 유입의 증가만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여 기각시켰다고 한다.
비록 캄보디아에 도착하는 탈북자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캄보디아 관리들은 탈북자들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프놈펜 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캄보디아의 탈북 난민들의 처리과정에 대한 논평을 사양했다. '프놈펜 주재 북한대사관'의 한 직원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캄보디아 내무부'의 키우 소피억(Khieu Sopheak) 대변인은 캄보디아에 어떠한 탈북자가 있다는 정보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그는 "우리는 1951년 체결된 난민 관련 조약의 회원국이며, 남한 및 북한 모두와 우방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태국과 캄보디아 당국자들의 태도가 어떠하든간에, 전문가들은 빈사상태이자 기근이 엄습한 북한에서 탈북자들의 행렬은 늘어나기만 할 것으로 내다봤다. 서울에 본부를 둔 탈북자 지원 선교단체 '헬핑 핸즈 코리아'(Helping Hands Korea)의 설립자인 팀 피터스(Tim Peters)는 식량부족과 경제정책의 실패, 그리고 "인민들에 대한 정규적인 식량 배급에 실패한 평양 당국의 지속적인 무능함"이 불안과 환멸의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많은 경우 인민들이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결코 시도해보지 못한 여타 선택지들이나 대안들을 바라보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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