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優婆塞戒經卷第五
19. 잡품(雜品)②
19.15. “선남자여, 또 어떤 사람이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고 인색하여 보시하지 않으면 이것을 인색하다고 합니다. 지키고 아끼고 인색한 사람이 보시를 하지 않는 마음은 가여워하지 않고, 복 밭을 놓아두고서 복 밭을 구하며, 이미 얻었어도 지나치게 구하며 재물은 얻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또는 과보도 없고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처자와 가족 등을 아끼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재물을 모으고 쌓아 명성을 구합니다. 많은 것을 보면 기뻐하고 재물을 항상한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색의 번뇌(垢)라고 합니다. 이 번뇌(垢)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이 인연으로 남의 물건에 대해서도 보시하지 못 하거늘 하물며 자기의 물건을 내는 것이겠습니까.
지혜로운 이가 보시를 하는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하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끼고 인색한 사람을 감싸기 위한 것이 아니고 천상이나 인간 속에 태어나서 즐거움을 받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이름이 밖에 퍼지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삼악도의 괴로움이 무서워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의 구함을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재물을 잃기 위해서도 아니고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쓰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고 가법(家法)을 위함도 아니며 친해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지혜로운 이가 보시를 하는 것은 가여워 하기 때문이고 그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하고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시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고 모든 성인의 본행도(本行道)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번뇌를 파괴하고자 하기 때문이고 열반에 들어서 윤회를 끊기 위해서입니다.
선남자여, 보살은 보시로써 네 가지 악을 제거합니다. 첫째는 파계(破戒)이고, 둘째는 의망(疑網)이며, 셋째는 사견(邪見)이고, 넷째는 간인(慳悋) 입니다. 또 다섯 가지 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시할 때 덕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음이고, 둘째는 보시할 때 선과 악을 말하지 않음이며, 셋째는 보시할 때 종성(種性)을 가리지 않음이고, 넷째는 보시할 때 구하는 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시할 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일이 있으면 보시를 하고 나서 뛰어나고 묘한 과보를 얻지 못합니다. 첫째는 먼저는 마음을 많이 냈다가 뒤에 가서는 조금 주는 것이고, 둘째는 나쁜 것을 골라가지고 남에게 주는 것이며, 셋째는 이미 보시하고 나서는 마음으로 후회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또 여덟 가지 일이 있으면 보시를 하였어도 높은 과보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첫째는 보시를 하고 나서 받은 자의 허물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보시할 때 마음이 불평등하게 주는 것이며, 셋째는 보시하고 나서 받은 자가 일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넷째는 보시하고 나서 기뻐하며 자신을 찬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없다고 말하고 뒤에야 주는 것이고, 여섯째는 주고 나서 나쁜 말을 하고 매도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주고 나서 두 배로 갚으라고 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주고 나서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하면, 모든 부처님과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과 친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19.16. “색(色), 향(香), 미(味), 촉(觸)을 갖추어 저 이에게 보시한다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법대로 하여 얻은 재물로 보시한다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이 항상함이 없어서 오래토록 없어지지 않게 지킬 수 없음을 살펴보면서 보시를 한다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보시를 한다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인연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보시라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누가 베풀고 누가 받으며 어떤 것으로 베풀고 어떠한 인연으로 베풀며 이 보시한 인연으로 어떠한 과보를 얻을 것인가를 살펴본다면, 이러한 보시는 곧 십이입(十二入)입니다. 받는 자도 베푸는 자도 인연도 과보도 모두 십이입이니, 이와 같이 살피고 보시를 하면 이것이 깨끗한 보시입니다. 보시를 할 때에는 복전에 환희심을 내고 모든 복전이 구한 그 공덕처럼 나도 그렇게 구하여서 나에게만 그치지 않고 처자, 가족, 종들에게 베풀면서 연민하는 마음을 냅니다. 빈궁한 이에게 베풀어서 고뇌를 없애주고 베풀 때 세간의 과보를 구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물리치고 보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보시합니다. 모든 유(有)를 떠난 보시이고 위없는 해탈을 구하기 위한 보시이며 깊이 생사(生死)에 허물이 많음을 관찰하여 보시합니다. 복전과 복전이 아닌 것을 가리지 않고 보시합니다. 이와 같이 보시를 한다면 과보가 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송아지가 어미를 따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19.17. “과보를 구하여 보시를 한다면 시장에서 장사하여 바꾸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치 몸과 목숨을 위하여 밭을 갈고 씨를 심으면 씨앗에 따라 열매를 얻는 것처럼 시주가 보시하면 역시 이와 같아서 보시한 바에 따라 복의 과보(福報)를 받습니다. 보시를 받는 자가 받고나서 목숨과 좋은 용모와 건강과 편안함과 변재를 얻는 것처럼 시주도 또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과보를 얻습니다.
축생에게 베풀면 백배의 과보를 얻고 파계한 자에게 베풀면 천배의 과보를 얻습니다. 계를 지키는 자에게 베풀면 십만 배의 과보를 얻고, 욕심을 여읜 외도에게 베풀면 백만 배의 과보를 얻습니다. 도(道)에 향하는 자에게 베풀면 천억배의 과보를 얻고 수다원에게 베풀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습니다. 사다함에게서도 한량없는 과보이고 성불한 분께 보시하여도 역시 한량없는 과보를 받습니다. 선남자여, 내가 이제 그대를 위하여 모든 복전을 분별하여 백배의 과보에서부터 한량없는 과보에 이르기까지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크게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 축생에게 베풀고 오롯한 마음으로 공경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면 그 복이 같아서 차별이 없습니다. 백배라고 말한 것은 수명과 좋은 용모와 건강과 편안함과 변재입니다. 저들에게 베풀면 시주가 뒤에 수명과 좋은 용모와 건강과 편안함과 변재를 각각 백배를 얻는다는 것이니, 한량없다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경에서 말하기를, ‘내가 사리불에게 베풀었고 사리불이 또한 내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얻는 것이 많고 사리불이 얻는 복이 많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9.18.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받은 자가 악을 지으면 죄가 시주에게도 미친다’고 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주가 베풀 때에는 그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였고 죄를 짓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주는 당연히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받은 자가 지은 악의 죄는 자신이 받고 시주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시주가 청정하고 묘한 것을 보시하면 뒤에 좋은 몸을 얻어서 남이 보기에 즐겁고, 좋은 이름이 퍼지게 되며, 뜻하는 바대로 구하고, 좋은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나쁜 것들이 아닌데 어떻게 시주가 죄를 얻는다고 하겠습니까. 시주가 베풀고는 기뻐하고 후회하지 않으며 착한 사람과 가까이 하면 재물이 풍부하여 자재하고 높은 신분의 집에 태어나며 인간과 천상의 즐거움을 얻고 무상락(無上樂)에 이르러서 온갖 번뇌의 결박을 없앱니다. 시주가 이러한 훌륭한 과보(妙果)를 얻는데 어떻게 나쁜 과보를 얻는다고 하겠습니까. 시주가 자기 손으로 베풀면 높은 신분의 집에서 태어나고 선지식을 만나며 재산이 많고 보배가 넉넉하며 가족이 번성하고 쓰고 베풉니다. 모든 중생들이 보기를 좋아하고 보고는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합니다. 시주가 이와 같은 것을 과보로 받는데 어떻게 나쁜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겠습니까.
시주가 청정한 재물로 보시하면 이 인연으로 재보가 많고 넉넉하며 높은 신분의 집에 태어납니다. 권속이 많으며 몸에 병고가 없고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없습니다. 이 재물들은 왕과 도적과 물과 불로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설령 재물을 잃더라도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으니 한량없는 세상에 몸과 마음이 안락하거늘 어떻게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하겠습니까. 아직 보시를 못하였을 때에는 신심을 내고, 보시를 할 때에는 기뻐하고, 보시를 마치고 나서는 안락하게 되니, 구할 때나 지킬 때나 쓸 때에도 괴롭지 않습니다. 의복을 베풀면 뛰어난 아름다움을 얻고 음식을 베풀면 뛰어난 건강을 얻으며 등(燈)을 베풀면 아름답고 밝은 눈을 얻고 탈 것을 베풀면 몸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받으며 집을 주면 필요한 것이 궁핍하지 않으니, 시주는 이와 같은 좋은 과보를 받거늘 어떻게 나쁜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겠습니까.”
19.19. “또 시주가 부처님께 베풀면 쓰거나 안 쓰거나 과보는 이미 정해진 것이지만, 사람이나 승려에게 베풀면 두 가지의 복이 있으니, 첫째는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고, 둘째는 받음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주가 베풀 때 스스로 아끼고 인색함을 버리고, 받는 자가 쓸 때에 그의 인색함을 깨어 버리므로 사용함으로써 복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사용함으로써 사람이 돌려서 쓰게 되고 승가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베풀고 나서 세간의 과보를 구하지 않으면, 번뇌를 일으키는 인(因)으로써 베푼 것이 아니므로 위없는 청정한 과보를 얻으니 그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날마다 목표를 세워 남에게 보시하여 그가 먹은 후 자기가 먹겠다고 서원하였으나 이 목표를 지키지 못하면 부처님께 보시를 하더라도 서원을 어겨서 참괴심이 생길 것이나 그 서원을 어기지 않으면 뛰어난 지혜의 인연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는 모든 보시 중에서 최고이며 그러한 보시를 하는 사람도 역시 최고의 시주라고 합니다.
구하는 자의 뜻에 따라 베풀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뜻하는 바대로 구할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재물과 복전이 모든 청정하다면 이 사람은 곧 한량없는 과보를 얻습니다. 처자, 노비에게 옷과 음식을 주되 항상 연민과 환희심을 가지고 준다면 미래에 곧 한량없는 복덕을 얻습니다. 또 전답이나 창고에 많은 쥐와 새가 있어 곡식을 축내는 것을 보면서 항상 가여워 하면서 생각하기를, ‘이러한 쥐나 새들은 나로 인하여 삶을 얻는구나’하고 기뻐하며 그것들을 다치게 하거나 괴롭힐 생각이 없으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복을 얻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의복, 영락, 가락지 따위의 갖가지 몸을 장식하는 장엄구(莊嚴具)를 만들면 다 만들고서 기뻐할 것이나, 그것을 자신이 쓰기 전에 남에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여의수(如意樹)를 얻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시를 하지 않고서도 선과를 얻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 없이 보시할 수 있다거나, 받는 자 없이 보시할 수 있다거나, 인색함을 버리지 않고서도 보시가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는데 보시를 하거나, 없을 때 베풀거나, 적게 구하여도 많이 주거나, 악하게 구하여도 좋게 베풀거나, 저로 하여금 찾게 하여 베풀거나, 스스로 가서 베풀거나하면, 이 사람은 미래의 세상에 많은 보장(寶藏)을 얻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배가 아닌 것도 모두 변하여 보배가 될 것입니다.
장난으로 하는 보시는 복전이 아닌 보시며, 인과를 믿지 않는 보시이니 이와 같은 보시는 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편파적으로 좋은 복전에만 보시를 하고 영원한 보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과보를 얻을 때에 혜시(惠施)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베풀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을 내거나, 남의 것을 빼앗아서 그것으로 보시를 한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비록 재물을 얻더라도 항상 없어져서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괴롭혀서 얻은 것으로 보시하면 이 사람은 미래에 비록 큰 과보를 얻더라도 몸이 항상 아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먼저 부모에게 공양하지 않거나, 그 처자와 노비를 괴롭혀서 곤궁하고 괴롭게 하면서 보시하는 자는, 이 사람은 악인입니다. 이것은 거짓된 보시이고, 옳은 보시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보시를 하는 자는 연민하는 마음이 없고 은혜를 갚을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이 미래에 비록 재보를 얻더라도 항상 잃게 되어 모이지 않고, 내서 쓰지 못하며, 몸에는 병고가 많을 것입니다.
법답게 재물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은 미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얻어서 재물을 지니고 쓰게 될 것입니다. 법다운 재물로써 보시하지 않으면, 이 사람이 미래에 비록 과보를 얻더라도 항상 다른 사람이 얻는 것에 의지해야 하고 그 사람이 죽으면 곧 빈궁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이는, 인간과 하늘과 전륜왕의 즐거움을 깊이 살펴보아, 비록 그것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모두 항상함이 없음을 압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시를 할 때, 인간과 천상을 위해 보시하지 않습니다.”
19.20. “선남자여, 보시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시(財施)이고, 둘째는 법시(法施)인데, 재시는 낮은 것이고 법시는 뛰어난 것입니다. 법시라고 하는 것은, 비구나 비구니, 또는 우바새, 우바이로서 남에게 가르쳐서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다문(多聞)과 지혜를 갖추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여래의 정전(正典)을 종이에 먹으로 쓰게 하거나 자기가 써서 남에게 베풀어서 독송하게 하면 이것을 법시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베푸는 자는 미래에 한량없이 좋은 훌륭한 몸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법을 듣고 성내는 마음을 끊으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에 한량없는 세상에서 훌륭한 몸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마음이 인자해져서 살생을 하지 않으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에 한량없는 세상에서 장수를 얻습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지 않으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의 한량없는 세상에서 재보가 넉넉하게 많을 것입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나서 마음이 열리고 베풀기를 좋아하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 한량없는 세상에서 몸에 큰 힘을 얻습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모든 방일을 끊으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 한량없는 세상에서 몸이 안락함을 얻습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어리석은 마음을 끊어 없애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 한량없는 세상에서 걸림이 없는 변재를 얻습니다. 중생이 법을 듣고 믿음을 내어 의심이 없어지니 이 인연으로 시주가 미래의 한량없는 세상에서 신심이 명료하게 됩니다. 계율, 보시, 다문, 지혜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법시가 재시보다 나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 선법을 닦으면 아버지가 착하지 않은 짓을 하여도 아들이 선법을 닦은 것으로 인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 입, 뜻의 업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이미 아귀들 가운데 떨어졌다면 자식이 추모하여 명복(冥福)을 빈다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 태어났다면 도무지 인간 가운데의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에서 수승하고 묘한 보배를 성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들어갔다면 몸으로 고통을 받기에 사념(思念)할 겨를이 없으므로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축생이나 인간 가운데에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귀만이 무슨 인연으로 유독 될 수 있다는 것이냐 하면, 그 근본이 애욕과 탐심과 인색함이 있기 때문에 아귀로 떨어졌지만, 이미 아귀가 되면 항상 본 허물을 뉘우치면서 얻고자 사념하기 때문에 얻습니다. 만약 하였던 자가 나머지 갈래에 태어나고 그 나머지 가족으로서 아귀로 떨어진 자면 다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아귀를 위하여 부지런히 복덕을 짓습니다. 옷과 음식과 집과와 이부자리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빈궁한 스님들에게 베풀고, 그를 위하여 축원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하면, 이 보시와 축원의 인연의 힘으로 아귀로 떨어진 자가 큰 세력을 얻고 베풂에 따라 얻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곳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귀들은 먹는 것들이 같지 않습니다. 고름을 먹거나 똥을 먹거나 피와 토해낸 더러운 것이거나 코와 침을 먹는데, 이러한 보시를 얻으면 그것이 모두 뛰어나고 훌륭한 빛과 맛으로 변합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을 씻은 물을 주어도 먹습니다. 지키는 경계에 막혀 비록 먹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러한 것을 보시한 주인은 역시 복덕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주의 마음이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사당에 제사하면 누가 받습니까? 그 사당이 있는 곳에 따라서 받게 됩니다. 숲이 가까우면 수신(樹神)이 받습니다. 집과 강, 샘, 우물, 산림, 언덕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 사람이 제사하고 나면 역시 복덕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받는 이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사하는 복덕도 몸과 재물을 보호합니다.
살생하여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이 이란(伊蘭)의 씨앗을 심어서 전단나무가 나는 것과 중생의 목숨을 끊어서 복덕을 얻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고자 하거든 향과 꽃과 젖과 타락(酪酥) 과 약을 써야 합니다. 망인을 위하여 복을 구하고자 할 때는 세 때가 있으니, 봄에는 2월이고, 여름에는 5월이며, 가을에는 9월입니다.”
19.21. “누가 집, 이부자리, 탕약, 정원의 숲, 연못, 우물, 소, 염소, 코끼리, 말과 갖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남에게 보시하고, 보시하고 나서 목숨을 마치면 그 사람의 복덕은 베푼 물건과 그 물건 쓰는 것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서 복덕이 언제나 생깁니다. 이 복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그림자가 형체를 따름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곧 사라진다’고 말한다면 이는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이 파괴되어 쓰지 못하는 것은 두 때 중에 상실된 것이지, 목숨이 다 하여 상실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가한 사람이 재가자를 흉내 내어서 명절에 음식을 버린다면 세속의 법을 따르는 것이므로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속법과 출세간법을 믿기 때문에 집에 있는 좋거나 좋지 못한 것으로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면 일체시(一切施)라고 합니다. 몸과 처자와 소중한 것을 남에게 베풀면 이는 곧 생각할 수도 없이 큰 보시(不思議施)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 계를 훼손한 자, 원수, 은혜와 덕의(恩義)를 모르는 자, 인과를 믿지 않는 자, 억지로 떼를 쓰는 자, 세력이 큰 사람, 나쁜 말을 심하게 하는 자, 얻고 나서 성내는 자, 거짓으로 좋은 체 하는 자, 크게 부귀한 자 등, 이러한 열한 종류의 사람에게 보시하면 불사의(不思議)라고 합니다.
선남자여, 모든 보시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습니다. 빈궁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연민하기 때문이고, 원수에게 보시하는 것은 과보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복덕인에게 보시하는 것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공경하는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많은 재물을 셀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삼보께 공양하는 사람은 비록 한량없는 복덕의 과보를 얻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하여서 함께 화합하여 하는 것만 못합니다. 작은 물건, 나쁜 물건을 가벼이 여겨 부끄러워하면서 보시를 즐겨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내세에 빈곤을 더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함께 재물을 보시하여 복전과 보시하는 마음이 같으면 이 둘은 과보를 얻음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재물과 마음이 같이 뛰어나고 뛰어난 복 밭에 보시하는 자는 과보를 얻음이 뛰어나고, 밭과 마음은 낮지만 재물이 뛰어난 자는 과보를 얻음이 뛰어납니다. 밭과 재물은 낮지만 보시하는 마음이 뛰어난 자는 과보를 얻음이 또한 뛰어납니다. 밭과 재물은 뛰어나지만 보시하는 마음이 낮은 자는 과보를 얻음이 여의치 않습니다.”
19.22.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가 보시를 할 때에는 과보를 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연으로 반드시 과보를 얻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비가 없고 은의를 알지 못하며, 성인이 지닌 공덕을 사모하지 않고 재물과 몸과 목숨을 아끼며,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무거우면 이러한 사람은 보시를 하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일체 중생이 재물을 구할 때에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과 재물을 얻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몸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임을 깊이 살펴봅니다. 이미 얻은 재물을 버려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니, 이 사람은 몸과 목숨을 버릴 수 있음을 살펴봅니다. 아까워하고 인색하여 재물을 희사하지 않는 사람은 몸과 목숨도 아끼는 사람임과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 구하여 얻은 재물을 보시하는 자라면 이 사람은 큰 시주임을 살펴봅니다. 사람이 재물을 얻고서 아까워하여 보시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미래의 세상에서 빈궁할 종자임을 깊이 살펴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경에 말하기를, ‘사천하 중에 염부제 사람에게 세 가지 수승한 것이 있으니, 첫째는 용건(勇健)이고, 둘째는 염심(念心)이며, 셋째는 행실이 청정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용건이라고 하는 것은, 과보를 살피지 않고 원인을 미리 짓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재물을 구하고서 인색함을 버리고 자기를 버려 보시를 생각하고, 이미 보시를 하였으면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으며 또 복전과 복전 아닌 것을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남자여, 보시하고는 뉘우치는 것이 세 가지 일 때문입니다. 첫째는 재물에 탐내고 좋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견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며, 셋째는 남의 허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남의 가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재물이 다하여 고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남이 보시하고 나서 쇠락하고 고통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세 때(三時)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이는 세 가지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인과를 분명히 믿음이고, 둘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재물을 탐하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과를 믿는 데는 또 두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남에게서 법을 듣는 것이고, 둘째는 안으로 스스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좋은 벗을 가까이 하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깊이 믿음이고, 둘째는 지혜로움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집착하지 않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함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는 자재하지 못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시주가 이와 같이 관찰하고, 이와 같이 보시를 하면, 이 사람은 보시바라밀을 갖추어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전에 말하기를, 보시이어도 바라밀이 아니기도 하고, 바라밀이어도 보시가 아닌 것도 있으며, 보시이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한 것도 있으며, 보시도 아니고 바라밀도 아닌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19.23. “선남자여, 지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깥 물건을 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안과 밖의 물건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안과 밖의 물건을 보시하고 더불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교화라는 것은, 빈궁한 자를 보고 먼저 말하기를, ‘그대는 삼보께 귀의하겠는가? 재계(齋戒)를 받겠는가?’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하거든, 먼저 삼귀의와 재계를 주고 다음에는 물건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 다시 말하기를, ‘그렇거든, 그대는 나를 따라서 ‘일체법(一切法)은 무상하고, 나(我)가 없으며, 열반은 적멸(寂滅)하다’고 말하겠는가?’ 하여, 그렇게 한다고 하거든, 다시 그대로 가르치고는 곧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두 가지는 말하되 다만 모든 법이 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거든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모든 법이 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면 모든 법이 성품이 없다고는 말할 수 있겠는가?’하여, 그리하여 그가 하겠다고 하거든, 그렇게 가르치고는 곧 보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먼저 가르치고 뒤에 보시한다면 이것이 큰 시주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여 모든 원수도 친구도 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큰 시주입니다.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재보가 있으면 그때 이와 같이 수행하여 보시하고, 재물이 없으면 다시 다른 재물이 있는 자에게 가르쳐서, 이 보시를 하게 할 것입니다. 다른 시주가 이미 이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르칠 필요가 없거든, 마땅히 몸으로 가서 이를 도와야 합니다.”
19.24. “만약, 궁핍하여 보시할 물건이 없으면 의약의 처방이나 갖가지 주술(呪術)을 외우고 돈과 탕약(湯藥)을 구하여서 필요한 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병을 간호하고 진단한 바에 따라 치료하여야 합니다. 재물이 있는 자에게 권하여 약을 갖추게 하니 환약이나 산약(散藥)이나 갖가지 탕약으로 할 것입니다. 이미 의약의 처방을 마쳤으면 두루 간병을 하되 의방에 따라서 병을 진찰하여 병의 소재를 알고, 그 병을 따라서 치료하되 병을 치료할 때 방편을 잘 알아서 할 것입니다. 비록 병든 곳이 깨끗하지 않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병이 더하면 더한 줄을 알고 덜할 때는 덜한 줄을 알며, 또 이 약을 먹으면 병고가 더하고 이 약을 먹으면 병고를 제거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병자가 병이 더해질 약을 먹겠다고 찾거든 마땅히 방편으로 적당하게 타이를지언정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없다고 말한다면 고통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을 알더라도, 죽는다는 말을 하지 말고 다만 가르쳐서 삼보께 귀의하게 하고 불법승을 생각하면서 공양을 닦도록 권할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병고란 모두 지나간 세상의 착하지 않았던 인연으로 이 고통의 업보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이제 마땅히 참회하라고 할 것입니다. 병자가 듣고는 화를 내어서 나쁜 말을 하거나 매도하더라도 잠잠히 대꾸하지 말고 또 버리지도 말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간호하더라도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병이 나아도 오히려 뒤에 회복이 어려울까 염려하면서 간호하여야 하고, 평상으로 회복하여 본래대로 건강해졌을 때에는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은혜 갚기를 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죽는다면 빈소에 안치하고 설법하고 위로하며 깨우쳐서 친지와 가족들이 병을 더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음식과 의약을 사람에게 베풀어서 병이 나았을 때, 그가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이라면 이를 받는 것이 옳습니다. 받고나서는 다시 다른 궁핍한 자에게 보시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간호하고 병을 치료한다면 이 사람은 큰 시주이며 참으로 위없는 보리의 도를 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보리를 구할 때, 재보가 많더라도 이와 같은 의방(醫方)을 독송하고 병을 간호하는 집을 짓고 병에 필요한 것을 갖추며 음식과 탕약 등으로 공급할 것입니다.”
19.25. “움푹 파였거나 튀어 나온 도로는 넓고 평편하게 수리하고 뾰족한 돌이나 오물 등 깨끗지 않은 것을 제거합니다. 험한 곳에는 판자나 사다리, 연목, 밧줄 등 필요한 것들을 모두 설치할 것입니다. 빈 들판 길에는 우물을 만들고, 과수를 심고 샘이나 못을 고치며 수목이 없는 곳에는 수주(竪柱)를 세우고 짐을 내려 쉴 곳에는 짐을 받칠 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객사를 짓고 항아리, 동이, 촉등(燭燈), 와상(臥床), 깔개 등 필요한 것들을 갖출 것입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흐르는 곳에는 다리를 놓고 나루의 건널목에는 다리와 배, 뗏목을 설치할 것입니다. 건너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가서 이를 건네주고 늙은이나 어린이나 병약하여 근력이 없는 자는 손수 이끌어서 지나가게 할 것입니다.
길 가에는 탑을 만들고 꽃과 과수를 심을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자를 보면 구원하여 보호하고 물건과 좋은 말로써 포자(捕者)를 잘 타이릅니다. 길 가는 자가 험한 곳에 이르는 것을 보거든 곧 앞에서 막아서 험한 곳은 건너가게 할 것입니다. 땅을 잃고 파산하여 망한 사람을 보거든 뜻에 따라서 공급하여 주고, 좋은 말로 위로하고 타이릅니다. 먼 길에 피로가 심하거든 목욕을 하게하고 수족을 안마하고 자리를 베풀 것이며 걸상이나 자리가 없으면 풀이라도 깔아야 할 것입니다.
뜨거울 때는 부채와 옷(衣裳)으로써 그늘을 만들고 추울 때는 불과 의복을 베풀어서 따뜻하게 하되 스스로 하든가 남을 시켜서라도 할 것입니다. 물건을 파는 시장에서 하는 교역은 공평하게 하여 작은 이익을 탐하여 서로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길을 가는 자를 보거든 길과 길이 아닌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물과 풀이 넉넉히 있고 도적이 없는 것이며 길이 아닌 데는 환난이 많다는 것을 말하여 줄 것입니다. 사람의 신발과 옷과 그릇이 낡아서 못쓰게 된 것을 보거든 곧 깁고 씻고 물들이고 하여 고쳐줄 것입니다. 쥐, 뱀, 벌 등에, 독충의 괴로움과 환란이 있으면 제거하여 주고 사람에게 뜻과 같이 하도록 물건을 취할 것과 귀걸이(耳鉤)를 베풀며 승단의 공유물(招提僧物)을 꿰매어 고치고 빨 것이니, 이를테면 방석, 이부자리와 화장실 위에 두는 물과 비누와 정회토(淨灰土)등입니다. 스스로 의복과 발우를 만들면 먼저 부처님께 바치고, 아울러 부모와 스승과 화상께 올려서 먼저 한 번 쓰시게 한 후에 자신이 쓸 것입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이는 꽃과 향으로써 바치고 먹을 것은 먼저 사문과 바라문에게 베푼 후에 제가 먹을 것입니다. 멀리서 오는 자를 보거든 좋은 말로 안부를 묻고 깨끗한 물을 주어서 몸을 씻고 기름을 주어서 발에 바르게 하며 향화(香花), 양치도구, 비누, 회토(灰土), 향유, 향수, 밀비발라(蜜毘鉢羅), 내의, 속옷을 줄 것입니다. 기름을 바르는 자는 씻고 나서 또 갖가지 향화, 환약, 산약으로써 하고 음식, 장물(漿水)은 필요한 바에 따라서 베풀 것입니다. 또 체도(剃刀)와 녹수낭(漉 水囊)과 침루(針縷)와 의납(衣納)과 지필묵(紙筆墨) 따위를 줄 것입니다. 항상 할 수 없으면 재일(齋日)에 따라서 베풀어야 합니다. 눈먼 사람을 보거든 스스로 나서서 손을 잡아주고 지팡이를 주며 길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을 잃거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괴로워하는 자를 보거든 재물을 주고, 좋은 말과 설법으로 위로하고 타이르며, 번뇌와 복덕의 두 가지 과보를 잘 말하여 줄 것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보시행을 닦는 자라 청정한 시주라고 할 것입니다.”
19.26. “선남자여,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고, 둘째는 출가보살입니다. 출가보살이 청정한 시주가 되기는 어렵지 않으나, 재가보살이 청정한 시주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재가보살은 많은 악연으로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보시와 시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