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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goodmorningiksan.com/cityinfo/iksan4.htm
web.edunet4u.net/~kyb1028/edu03.htm
iksan.woorizip.conm
[ 미륵사지 ]
금마에서 함열을 향해 조금 가다가 오른쪽을 보면 옆으로 퍼진 삼각형모양의 산이 보인다.금마의 진산에 해당하는 미륵산(용화산)이다.이 산의 남쪽자락 질펀히 펼쳐진 너른 터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가 있다. 동서로172m, 남북으로148m에 이르는 절터에는 서석탑,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당간지주 두 기, 목탑터, 금당터 세 곳,회랑과 강당과 승방의 자취,그리고 남문과 중문의 흔적이 남아있다.또 석등 지붕 돌, 연꽃 잎이 새겨진 석등받침, 그리고 원래의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석물부재들이 둥글거나 모나거나 어렴풋한 자국을 간직한 채 흩어져 있다. 절터로 갈라져 들어 가는 길 옆에 마침 불상이나 탑을 만드는 소규모 석물공장이 자리잡고 있어, 예와 오늘의 연면한 이어짐을 주는 야릇한 감회를 맛보게 한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 ~ 641년)때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 된 것으로 추정된다.조선 정조 때 무장의 선비인 강후진이 쓴『와유록』(歐遊錄)을 보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다.이 때는 이미 절이 폐허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서 전반적인 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절터 앞 쪽에는 발굴하면서 나온 백제 때부터 고려 시대에 걸친 각종 기와 조각들이 돌담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 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무왕이 아내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 속에서 미륵 삼 존이 나타났다고 한다.두 사람은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고, 이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간청에 따라 무왕은 사자사 스님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 밤 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 이때 미륵 삼 존을 본받아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불렀으며,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은 기술자를 보내 그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발굴결과 절터 아래가 뻘 흙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목 탑을 두고 동서로 각각 석탑이 있었으며, 또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고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탑 하나와 금당 한 채를 절 하나로 볼 때 마치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듯한 삼원일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통 남북을 축으로 하여 남으로부터 차례로 탑,금당,강당,승방이 일직선상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가람 배치와는 매우 다르며,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세 개의 금당이 배치되었던 고구려의 회탑식 가람 배치나 고 신라의 일탑삼금당 형식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러한 예는 없다. 이 절이 미륵 삼 존을 위하여 창건되었다는 점에서,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용화세계로 이끈다는 미륵을 위해서 세 군데에 설법처를 마련하느라 이러한 형식이 나왔으리라 여겨진다. 목 탑이 배치된 중원은 규모가 가장 크며 금당은 정면 5칸,측면 4칸의 건물이다. 석탑이 배치된 동원과 서원은 규모가 서로 같은데 금당은 역시 정면 5칸,측면4칸의 건물이다.이들 금당의 초석은 마름모꼴로 다듬어져 있고 그 위에 원형 주좌(柱座)가 높게 마련되어 있다. 각 원 앞에는 전체 길이 172m에 이르는 긴 행랑건물이 배치되었고 각 원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세 군데에 설치되었다. 각 금당과 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었다. 목 탑 자리와 동석탑 뒤편에는 더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선으로 마무리 된 지붕 돌과 참한 연꽃 잎이 새겨진 받침돌 등 석등부재가 남아 있다. 이 미륵사터 석등의 연꽃받침은 석동연꽃받침 가운데 가장오래된 것으로, 백제 와당에 새겨진 연꽃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마음이라도 풀어 줄 듯 부드럽고도 온유하다. 금당자리 뒤편으로는 장대석으로 된 강당의 기단과 층계가 남아 있다. 그 뒤 돌로 된 옛 교각 위에 나무다리가 걸쳐진 작은 개천을 건너면 다시 승방자리의 기단이 정연하다. 강당자리 옆 돌 덮개가 얹힌 물 도랑과 승방자리 뒤편 산쪽으로 무성한 갈대받을 보면서, 연못을 메워 지었다는 창건설화를 다시 상기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 미륵사터에서 그 생경함 탓에 제일 먼저 눈에 튀어 들어 오는 것은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다.그 덕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운 미륵터를 찾는 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아있는 서석탑과 발굴조사 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 내었다는 동석탑은, 아직 세월이 얹히지 않은 새하얀 돌과 금빛 상륜부, 그리고 지붕 네 귀마다 달린 금빛 풍령에서 울리는 쟁 사람들을 약간 당황스럽게 한다.두 탑의 가운데 위치인 목탑 자리에서 몇 번이나 동탑과 서탑을 번갈아 보아도 서탑의 원래 모습이 동탑과 같았으리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1,300년 만큼의 비바람과 햇볕과 이끼 속에 사람살이의 사연을 지켜 보면서 이미 돌의 자리를 떠난 서탑이 안고 있는 무게가 아직은 돌일 뿐인 새 탑에는 실리지 않아서 일까. 한자국 한자국을 정으로 쪼면서 종교적 기원을 새겨 넣었을 옛탑과, 계산에 따라 기계로 두부 모자르 듯 잘라 갈아 낸 새 탑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무왕은 왜 당시의 수도 부여가 아닌 이 곳에 이토록 너른 터를 잡아 공들인 절을 지었는지, 또한 사찰의 경영 실태는 어떠하였는지 등은 미륵사 창건 이 후 곧 백제가 망한 까닭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수가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 지역이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유리한 교통 사정을 배경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고려할때,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 터로 삼아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펴려 했던 것이 아닐까. 미륵사 창건은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권위와 신념을 제시하기 위한 상징적 작업이었으리라 추정된다.미륵사터를 찾는 사람들은 흔히 탑 주변을 뱅뱅 돌거나 당칸 지주들을 대충 살펴보고 돌아가곤 하지만, 군데 군데 잡풀이 쑥쑥한 절터 전체를 거닐며, 한껏 팽창된 힘과 포부를 고스란히 묻어 놓고 짐짓 무심한듯 가만히 고여 있는 백제의 숨결을 느껴 볼 수도 있으리라. 미륵사터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미륵사터 서석탑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탑이다. 원래 미륵사에는 목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투기의 석탑이 있었으니, 구별해서 말하자면 미륵사터 서석탑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관습상 미륵사터 석탑이라 불러온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지금은 한 쪽이 떨어져나간 6층으로 남아있다. 그나마 일제 강점기(1915)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에 시멘트가 무지막지하게 덧 발려, 보기가 안타까울 뿐더러 더 이상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원래 7층이었는지 9층이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으나, 80년 대에 발견된 노반석의 크기와 남아있는 탑신의 비례 관계로 미루어 보아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석탑의 상태를 복원한 동석탑이 목탑자리 건너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탑이 앉은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있는 것 만으로도 14.25m에 이르는데,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서 26m 가량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고 돌과 자갈과 흙을 다져, 천 년이 넘도록 이만한 규모와 이만한 무게의 탑이 서 있을 수 있도록 조성해 낸 백제 사람들의 토목기술이 요즘의 기술수준에 비춰 보더라도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이 탑은 부재를 하나 하나 따로 만들어 맞춰 세운 것으로, 바닥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곧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의 약200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목조건축형식의 목탑이 주로 건립되었다. 7세기 초에 이르러 그 목탑의 전통이 이 지역의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이라는 재료와 만나 마침내 미륵사 탑을 빚어 놓았다. 이 탑은 수많은 돌을 깎아 끼워 맞춰 목조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재료만 돌로 바뀌었을 뿐 이전의 목 탑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우리 나라 석탑발생의 시원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된 석탑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감은사탑을 거쳐 석가탑을 통하여 양식적 완성을 보게 된다.탑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안에서 맞통한다.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1충 주변의 기둥은 당대 목조 건축의 양식대로 위쪽이 좁고, 높이의 약 3분의2 되는 지점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흘림 기법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의 처마부분 또한 목조건축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 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얕아지고 처마 밑 부분의 짜임 등이 간략해 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 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묵직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잃지 않았다.안정감과 경쾌함, 장중함과 단아함을 함께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마음씨고 솜씨였다. 탑 주위의 네 귀퉁이에는 수호 석인상이 있다. 서남쪽 것은 없어지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닦이고 닦여 두루뭉수리 돌 덩어리가 된 세 구가 남아있다. 그 가운데 동남 쪽 귀퉁이에 앉은 것이 비교적 제 모습을 많이 지녔다. 눈, 코, 입은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 덩어리와 가슴 앞에 간종그려 모은 두 손으로 1,300년 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다. 이는 불교 조형물 속에 끌어 들여진 백제의 전통적 수호신상으로, 돌짐승이나 돌하루방 같은 우리 나라 토속 신앙 조형물의 원형으로 생각된다.
☞ 미륵사당간지주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문 앞에 한 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 형식의 미륵사터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 각 64m 되는 곳에 한기씩, 두기가 있다.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대석을 맞춰 만든 기단의 네 변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지주의 양쪽 바깥 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 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 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대체로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을 하여 번잡하지 않은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 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 찾아 가는 길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다. LG정유 익산톨게이트 주유소가 있는 금마 사거리에서 익산 시내로 난 720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300m 가면 길 오른쪽에 금마면 소재지를 우회하는 도로가 나있다. 우회도로를 따라 약1km 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으로 난 722번 지방도로를 따라 2.7km가면 미륵사터에 닿는다. 미륵사터 앞에는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금마에서 함열 행 또는 황등 행 시내버스(약30분 간격)를 타야 한다. 미륵사터 앞에는 가게와 순두부백반 등을 파는 식당이 여럿 있으나 잠잘 곳은 없다.
[ 왕궁리 오층석탑 ]
금마면 익산 톨게이트 주유소 앞 네거리에서 전주 방향으로 접어들어 1.5km 쯤 가다가 왼쪽을 보면, 미륵산에서 남으로 이어지던 산 자락이 끝나는 얕은 구릉의 능선 위로 탑 윗 부분이 살짝 보인다. 이 탑이 왕궁리 오층석탑이고 그 주변의 구릉지대가 예로부터 마한 또는 백제의 궁궐터였다고 전해오는 왕궁평이다. 이곳의 지명인 왕궁리도 궁궐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조선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에 따르면 “왕궁평은 용화산(미륵산)에서 남으로 내려 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朝宮)터라는 성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그 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 보면 기와 조각이 깔려 있고 더러 굴뚝돌이 나온다.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했다”고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익산군의 산천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왕궁정’이라는 항목을 잡아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궁궐터’라고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 곳에서는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 간의 조사에서 남북길이460m, 동서 길이 230m인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성터(왕궁평성)가 확언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유물과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이곳이 궁성이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각 종 석재들이 발견되었다. 이 성터 안에는 백제 와요지(표黑址)와 여러 개의 건물터도 있다. 현재 진행되는 발굴조사가 모두 끝나면 지금은 개연성으로만 남아있는 백제의 금마 도읍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왕궁평의 야트막한 언덕 위 툭 트인 곳, 비바량에 시달려도 석 달 열흘 동안 고운 꽃빛을 간직하는 배롱나무(목백일홍)들 속에 손짓하듯 오층탑이 서 있다. 이 곳의 배롱나무들은 1971년에 80여 그루 심은 것이 단지를 이루어 5월 중순부터 8월 삼복더위까지 아롱아롱한 붉은 꽃을 피운다. 탑의 높이는 8.5m이고 기단 면석에는 두 탱주를 갖추었다. 1충 몸돌은 우주를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의 돌로 네 모서리를 세우고 탱주를 새긴 네 장의 중간면석을 짜맞춰 만들었다. 2층은 4면 1석씩, 3충 이상은 2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를 조각하였다. 3단의 층급받침을 지붕과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고 그위에 지붕 돌을 얹었으며, 지붕 돌의 경사는 완만하고 네 귀가 약간들려 있다. 안내 표지판에는 고려 초기의 탑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탑의 생김새나 여러가지 이유로 백제탑, 신라탑, 고려탑이라고 하는 등 견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지명을 따라 왕궁리탑이라고만 불린다.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선, 첫 인상으로 보면 이 탑은 백제탑의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단층 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 돌등 전체적 이미지가 부여 정림사터 오층 석탑과 많이 닮았다. 탑신의 체감률이 적은데서 오는 굳건한 느낌과, 그에 비해 기단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 지붕 돌 모서리의 상쾌한 들림에서 오는 경쾌함 등 대립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아름다운 백제탑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미륵사탑이나 정림사 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백제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탑신부의 돌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 받침의 기법에서 신라석탑의 양식이 보이므로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옛 백제 지역에서 이어져 오던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견해가 있다.1965년에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해체.복원 공사 중, 1층 지붕돌과 기단뿌리에서 양식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19매의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 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이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국립 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65년의 발굴 결과 이 탑의 기초가 백제 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세번째 주장은 “견훤의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 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하는『금마지』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새 국가의 앞날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도선의 의견에 따라 전국 각처에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牌補)를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과정에서 상부대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들이 나와, 이 곳에 백제의 궁궐이 있었고, 그 내부에 대관사·관궁사·궁사라불리던 절이 있었으며, 오층탑은 이 절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다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 초기의 탑인지, 아니면 백제 때 조성 된 것을 고려 시대에 보수했는지, 아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결론이 나기까지는 연구자들의 노력을 좀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답사객의 입장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보면 날아갈 듯 경쾌하다가도 가까이 가서 보면 장중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이 탑을 눈길로 마음으로 쓰다듬어 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 찾아 가는 길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다.금마사거리 LG정유 익산톨게이트주유소 앞에서삼례.전주 가는 1번 국도를 따라 1.5km 정도 가면 왼쪽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석탑 앞에는 넓은 주차 공간이 있으며 간단한 음료를 파는 가게가 두어 곳 있다. 금마에서 삼례로는 30 ~ 40분 간격으로버스가 다니고 있다.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석탑까지는 걸어서 갈 만한 곳이다.
[ 익산 쌍릉 ]
백제 무왕(30대)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백제 말기(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사적 제87호로 지정되어 있고 행정 구역으로는 익산시 석왕동에 속한다. 두개의 봉분이 있어 쌍릉이라 불리며 좀더 큰 것을 대왕묘, 작은 것을 소왕묘라 한다. 720번 지방도로를 타고 시내로 들어 가다 보면 금마 사거리에서 길 오른쪽에 ‘쌍릉’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그 옆 비포장 길로 800m쯤 들어가면 왼 쪽에 대왕묘가 있다. 근래에 새롭게 단장된 듯 말끔하고 약간 어색해 보이는 석수, 장명등, 문무신석이 놓여 있다. 주변에는 제법 큰 주차장까지 있다. 소왕묘는 대왕묘 옆으로 뚫린 솔밭 사이 오솔길로 200m쯤 간 곳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능에 대해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고려사"에는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라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陸)이라 한다.일설에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것이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왕묘는 지름이 30m, 높이 5m 정도, 소왕묘는 지름24m, 높이3.5m 정도의 원형분으로,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 돌방이다. 널방(현실)은 장방형이며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벽을 세웠다. 널방 중앙에는 관대가 있었고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두 곳 모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도굴되었으나 토기와 나무널 등이 수습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수습 유물과 널방의 규모 및 형식으로 보아 백제 말기의 것으로추정되며, 부근의 미륵사가 백제 무왕때 창건된 것과 관련하여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본다. 가까이에 마룡지, 오금산성,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미륵사터가 있는 등 부근에 무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쌍릉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옆 논 가운데에, 일명 용생이라고도 하는 마룡지 자리가 있다. 나중에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어머니가 이 못가에서 혼자 살다가 못의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깃들인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금사 남쪽 백여 보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葉室)하였던 곳'이라한다"는 기록이 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이곳에 와서 함께 살다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지금은 한쪽에 우물이 있고 한변의 길이가 10m, 다른 변의 길이가6m 가량되는 네모꼴 늪으로 남아 물풀이 우거져 있다. 우물은 마을사람들이 따로 마련한 것으로 속에 파이프를 박아 농업용수로 쓰는 모양이다. 우물 옆에는 자그맣게 빨래터도 있어서 돌과 시멘트에 비누자국이 묻어 있다. 1300년 전 백제 무왕의 사연이 얽힌 이 못은 이제 동네 사람들의 생활 속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곳에는 서동이 마를 캐다가 금을 많이 얻었다는 오금산이 있고 또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오금사터도 있다. 이 오금산에 있는 산성은 익산토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92호로 지정되어 있고, 달리 보덕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1980년에 이루어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 의해 이 성이 석성임이 밝혀졌고 성 시설 중 남문지와 수구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백제 말기의 와당류와 토기류가 주로 발견되었으므로 무왕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 찾아 가는 길
익산시 석왕동에 있다. 금마 사거리 LG정유 익산톨게이트 주유소 앞에서 시내로 가는 720번 지방도로를 따라 2.1km 가다보면 길 왼쪽 앞으로는 쌍용정유 대동주유소가 있고 오른쪽으로 쌍릉 표지판과 함께 능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0.8km 더 들어가면 쌍릉의 하나인 대왕묘가 나오고 묘 뒤로 돌아 왼쪽 소나무 숲길을 따라 200m 쯤 가면 소왕묘가 나온다. 대왕묘 바로 옆에는 주차장이 있으나 대형버스는 주차하기 곤란하다. 쌍릉 입구 길 건너 있는 주유소 한편에 잠시 주차하는 것이 좋다.소왕묘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큰 길가에는 쌍릉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있으나 언뜻 눈에 띄지 않으니 길 건너 쌍용정유 대동주유소를 이정표로 삼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금마에서 익산 시내로 가는 시내버스(10여분 간격)를 타고 덕기동 입구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쌍릉 들어가는 길에는 토종 닭과 갈비 등을 파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으나 잠 잘 곳은 없다.
김제 [ 금 산 사 ]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금산사는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이다. 드넓은 경내에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 석련대, 오층석탑, 혜덕왕사 진응탑비, 당간지주, 석종, 육삭다층석탑, 석등 등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일부문, 금강문, 보제루 등의 건물과 심원암, 용천암, 청련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린 거창이다.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은 큰 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 큼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 또 큼은 금으로 ,뫼는 산으로 적게 되었다는 석이다. 온통 평야인 이 지역에서, 옛날부터 이산의 전재가 외경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다. 창건 당시에는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 이래로 금산사는 미륵신앙, 즉 신라 오료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 문와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며 석가불은 대장전에 따로 모셔져 있다. 한편,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후백제 왕 견훤이 이 절을 자기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설도 있다. 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와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심검을 비롯해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기도 했다.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원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도망 쳐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기 아들을 쳐 줄 것을 청했다. 왕건이 마침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견원은 착잡한 번민과 울화에 싸여 등창이 나서 논산시여산에 있던 황사사에서 죽었다. 고려 시대로 들어와, 문종 33년(1079)에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다시 절을 중수하여 88당 711칸의 어마어마한 거찰을 만들고 금산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혜덕왕사는 원래의 절을 사찰 전체를 관장하는 대사구로 하고, 대사구 남쪽에 경전 강의 및 수련법회를 하는 광교원구, 그리고 동북쪽에 원로 대덕들이 주석하는 봉천원구를 신설하여 그 두 곳이 대사구와 맞먹는 사원규모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렇게 기능에 따라 사찰을 삼분한 혜덕왕사는 경전 연구, 실천 수행, 중생 교화, 사찰 경영 등 합리적인 체계를 확립하여 금산사를 운영했다. 지금 금산사 자리는 대사구 자리이며 다른 두 곳은 터만이 남아 있고 봉천원구는 부도전이 되었다. 혜덕왕사는 당시의 당우들은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금강문 하나를 빼놓고는 모조리 불타고 말았다. 이것은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구국 3화상의 한 분인 뇌묵당 처영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한 것에 대한 왜군들의 보복 때문이었다.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체로 선조 34년(1601)에 수문대사가 금산사 재건을 시작하여 인조 13년(1635)에 완성한 후 부분적인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것들이다. 최근들어 대적광전을 복원하고, 입구에서 보제루를 지나 대적광전과 연결되는 일직선상에 새로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불사가 이루어졌다. 옛 금강문은 현재는 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가람수호신당으로만 사용한다. 예전 금산사 대적광전은 정유재란 후 수문대사가 절을 복구할 때 지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 ,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987년 12월에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대적광전은 우리 나라가 불교를 수용한 이래 숭앙해온 모든 불보살들을 대담하게 종합하여 다섯 여래(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불)와 여섯보살(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그리고 500나한을 한 곳에 모아 모신 건물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옆으로 긴 법당 건물로서, 3층 건물인 우리 시대의 미욱함 때문에 잿더미로 변한 일은 두고두고 안타깝다. 금산사는 삼국 말기 백제에서 크게 일어난 이래, 현세에서 행복하지 못해 새 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서 여러 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미륵신앙. 호남 지역에서 그 미륵신앙의 본산이 되고 있다.
☞ 찾아가는 길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다. 김제시나 금산사교차로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원평으로 온 후, 금산 지서 앞에서 좌회전해 4.2Km 더 들어가면 금산사 입구에 이른다. 전주에서도 712번 지방도로를 타고 올 수 있다. 금산사 입구 상가단지에는 대형 주차장과 숙박시설이 있으나 관광객들이 항상 붐벼 조금은 시끄럽다. 원평에는 식당과 조용히 지낼 만한 여관이 몇 군데 있다. 김제에서 금산사까지는 30분마다 버스가 다닌다.(김제에서 06:30~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