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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군
평안남도 서북단에 있는 군. 동쪽은 개천군과 순천군, 남쪽은 평원군, 북쪽은 평안북도 박천군과 영변군에 접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하여 있다.
자연환경
동쪽은 묘향산맥의 지맥인 자모산맥(慈母山脈)이 뻗어 내려 마두산(馬頭山, 536m)·서삼봉(西三峰, 451m)·두미산(頭尾山, 419m)·상산(上山, 528m)·원룡산(元龍山, 301m) 등이 솟았고, 그 밖은 가두산(加頭山)·태조봉(太祖峰, 167m) 등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이다.
북쪽은 묘향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이 평안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강을 따라 좁은 유역평야가 발달되었다. 동부 구릉 지대를 제외한 지역은 넓고 낮은 안주평야가 펼쳐진다.
역사
〔고 려〕
태조 때 고을 이름을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다. 그 뒤 북진정책의 강행에 따라 청천강의 군사적 요지인 이곳을 서경(西京)의 외곽 요지로 중시하여 931년(태조 14)에 안북부(安北府)로 격을 높였고, 성진(城鎭)을 쌓게 하였다. 983년(성종 2)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서북 국방의 요지로 삼았다.
1018년(현종 9)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로 개칭하였다. 당시 이곳은 역참제(驛站制) 실시에 따라 서북 지방의 주요 교통로인 흥교도(興郊道)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고려 초부터 거란·몽고·홍건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서북 군사 요지로 큰 구실을 하였다. 의종 때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파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조처는 모두 이곳의 군사적 의의를 중시, 취하여진 일들이었다.
〔근 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를 개정할 때 평양부 안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는 3등군으로서 평안남도 안주군이 되었다. 1905년 최영주(崔永柱)·이동직(李東稷) 등이 안흥학교(安興學校)를 설립한 이후 많은 소학교가 세워졌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될 때 청천강 이북에 속한 지역은 평안북도 박천군과 영변군으로 편입되었고, 대신 청천강 남안에 근접한 도서는 이 군에 병합되었다(본래의 박천군 덕안면 박비리와 중흥리, 영변군 독산면 구봉리와 남평리 일부). 1917년에 주내면이 안주면으로 개칭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우근(金宇根)·김찬성(金燦星)·김성택(金成澤) 등이 이곳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뒤에 만주로 가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안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13년 이후로 이곳은 청천강 주변의 넓은 들과 청천강의 수운을 이용한 상업 도시로 그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고, 교통의 요지로 큰 구실을 하는 곳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유물·유적
서북 지방의 역사적 고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이미 고구려 시대에도 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안주성(安州城)은 995년(성종 14)에 고려의 명장 서희(徐熙)가 축성한 것이며, 그 뒤 1607년(선조 40)에 개축되었다. 석축성으로 주위 3,043보, 높이 13척의 규모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문루와 성벽은 태반이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안주성에 남아 있는 성루의 하나인 백상루(百祥樓)는 T자형 이층 건물로서 그 규모가 관서 제일의 누각이다.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말기나 통일신라 초기로 보고 있으며, 일설에는 615년(영양왕 26)에 세웠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누 밑으로 청천강이 흘렀다고 하지만 지금은 약 700m 밖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300여 년 전에 퇴락한 이 누각을 당시의 병사(兵使) 김윤변(金潤辨)이 재건하였으며, 1917년에 다시 개수하였다. 안주성 안에 있는 칠성지(七星池)는 주위가 550m나 되는 인공의 못이며, 안주성 축성 때 조영된 것이라고 전한다. 못 가운데 칠각으로 된 칠성정(七星亭)이 세워져 있다. 안주성 북쪽 칠불산에 칠불사가 있다.
살수대첩 때 7명의 승려가 수군(隋軍)을 유인하여 강을 건너던 곳을 오도탄(誤渡灘)이라고 한다. 한편, 골적도(骨積島)라고 불리는 청천강의 하중도(河中島)는 살수대첩 때 몰살된 수군의 시체로 이루어진 섬이라 전하여지고 있다.
서삼봉에는 이곳 용화면 마산리 출생으로 전하여지고 있는 임진승병장 서산대사가 묘향산으로 입산하기 전에 수도하던 곳으로,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밀려오는 적군을 맞아 싸우다 패하자 자결한 남이흥(南以興) 외 15명의 충신 열사를 제향하는 충민사도 그 대표적 유적이다.
교육·문화
이 지방에 전래되고 있는 설화로 〈열두삼천벌〉·〈서삼봉〉 등이 전한다. 〈열두삼천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왕비인 녹족부인(鹿足夫人)은 한 번에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머니처럼 사슴 발을 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열두 아들을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
20년 뒤 당나라 장군 열두 명이 각기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침범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녹족부인이 들에 나가 누각을 세우고 열두 장군을 초청하여, 열두 켤레의 신과 열두 개의 젖꼭지로 시험해 보았다.
그것들이 모두 열두 장군의 발과 입에 모두 맞았으므로 그들은 녹족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의 나라를 침범할 수 없다고 그냥 돌아갔다. 그후에 들판은 열두 장군이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온 곳이라 하여 ‘열두삼천벌’이라 하였다.
〈칠불사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나라 군사가 을지문덕의 꾐을 받아 청천강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이 막상 강 건너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7명의 승려가 나타나 옷을 걷고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수나라 군사는 그것을 보고 청천강이 얕은 것으로 알고 서로 다투어 강을 건너가다 모두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후에 고구려 군대에 승리를 안겨 준 7명의 승려를 추모하여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승려들이 물을 건넌 곳은 오도탄이라 하였다.
이 밖에 묘향산 일부가 사태로 떠내려와 쌓였다는 〈태향산전설〉, 눈병 있는 사람이 씻으면 즉시 낫는다는 〈불현전설〉, 을지문덕의 청천강 대첩 때 죽은 수나라 군사의 뼈로 이루어졌다는 〈골적도전설〉 등이 전한다.
읍·면
〔안주읍 安州邑〕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읍. 인구 1만7849명(193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칠성리이다. 본래 읍북면(邑北面)과 주북면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병합하여 주내면(州內面)이라 하였고, 1917년 안주면으로 개칭하였다가 1931년 안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서쪽 동면과의 경계에 서삼봉이 솟아 있고, 남단은 마두산이 솟아 운곡면·대니면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묘령산맥에서 발원한 청천강이 서쪽으로 흐른다.
교통은 경의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읍의 북부를 개천선이 동서로 지나며, 안주∼순천, 안주∼영변, 신안주∼함흥 간을 잇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칠성(七星)·청교(淸橋)·남천(南川)·율산(栗山)·건인(建仁)·북문(北門)·차장(差壯)·신성(新城)·금성(金城)·고성(古城)·원풍(元豊)·북송(北松)·서산(西山)·용연(龍淵)·선흥(船興)·도회(都會)·봉서(鳳棲)·장상(長上)·장천(長川)·신의(信義)·장흥(長興)·미상(彌上)·문봉(文峰)·화양(華陽)·용현(龍峴)·용서(龍西)·용흥(龍興) 등 27개 이가 있다.
〔대니면 大尼面〕
군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1만980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협흥리이다. 본래 이산면(尼山面)과 대대면(大代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대니면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마두산이 안주읍과 운곡면과의 삼각 분수령을 이루고 있고, 문남리에 상산, 소니리에 소니봉(小尼峰, 175m)이 있다.
협흥(協興)·봉학(鳳鶴)·용남(龍南)·남계(南溪)·용호(龍湖)·금계(金溪)·쌍계(雙溪)·남상계(南上溪)·용흥(龍興)·문천(文川)·문남(文南)·계림(桂林)·어룡(漁龍)·용포(龍浦)·백학(白鶴)·소니(小尼)·이서(尼西)·봉명(鳳鳴)·용봉(龍奉)·발남(鉢南)·발북(鉢北)·만흥(萬興) 등 22개 이가 있다.
〔동면 東面〕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인구 6,749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흥리이다. 면의 중앙에 두미산, 서쪽 안주읍과의 경계에 서삼봉이 있다. 북쪽으로 청천강이 흐르며, 강을 따라 좁은 유역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옥수수·팥·수수·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예로부터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근래에는 기술 보급으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항라·숙수·관사 등을 직조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업은 청천강 지류 유역에 초지가 많아 원종우 사육과 우량우 증식이 많고, 농가 부업으로 양계·양돈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용흥리의 용흥염직공장에서 관사·화두·숙수를 생산하고 있다.
교통망은 개천선이 면의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철도 연변을 따라 신안주∼함흥 간을 잇는 도로가 있으며, 면의 남부를 안주∼순천 간을 잇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맹주리에 수원김씨, 금서리에 수원 백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흥(龍興)·동맹(東孟)·용계(龍溪)·맹주(孟州)·봉덕(鳳德)·평률(平栗)·명학(鳴鶴)·봉명(鳳鳴)·상서(祥瑞)·봉상(鳳祥)·봉학(鳳鶴)·연풍(延豊)·운흥(雲興)·금천(錦川)·금서(錦西) 등 15개 이(里)가 있다.
〔신안주면 新安州面〕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1만3176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흥리이다. 본래 청산면(靑山面)과 문곡면(文谷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신안주면이라 하였다.
원흥(元興)·운흥(雲興)·운송(雲松)·창송(蒼松)·신원(新院)·용계(龍溪)·명암(明巖)·청송(靑松)·용운(龍雲)·동칠(東七)·증암(甑巖)·상팔(上八)·남칠(南七)·신성(新成)·송학(松鶴)·봉림(鳳林)·오(五)·낙만(樂萬)·소학(巢鶴)·원일(元一)·운학(雲鶴)·송죽(松竹)·신(新) 등 23개 이가 있다.
〔연호면 燕湖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65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흥리이다. 본래 연경면(燕坰面)과 평호면(平湖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연호면이라 하였다.
북쪽으로 청천강이 흘러 서해로 유입한다. 서해안에 넓은 간석지가 전개되지만 대부분이 갯벌로 되어 있어 양항의 발달을 저해한다.
용흥(龍興)·동서(東西)·내삼(內三)·용삼(龍三)·남이(南二)·남일(南一)·북흥(北興)·남흥(南興)·중흥(中興)·노안(老安)·박비(博飛)·용오(龍五)·동림(東林)·서흥(西興)·신설(新設)·인흥(仁興)·신양(新陽)·상팔(上八)·남사(南四) 등 19개 이가 있다.
〔용화면 龍花面〕
군의 서부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8,413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연리이다. 본래 용두면(龍頭面)과 갈화면(葛花面)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용화면이라 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콩·팥·감자 등이고, 특용작물로는 면화·깨 등이 생산된다. 특히 면화의 생산이 많으며, 누에치기는 예로부터 발달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다. 축산업은 농우 사육과 농가 부업으로 양돈·양계 등이 활발하다. 제조업은 운천리에 솥 및 농기구 등을 생산하는 서선주물공장이 있다.
교통망은 경의선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입석∼신안주 간을 잇는 도로가 철도 연변을 따라 있으며, 만성∼노강진을 잇는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연(龍淵)·용반(龍盤)·봉학(鳳鶴)·마산(馬山)·삼산(三山)·응암(鷹巖)·상북동(上北洞)·운천(雲川)·약천(藥泉)·용남(龍南)·용담(龍潭)·용중(龍中)·용전(龍田)·용운(龍雲)·용흥(龍興) 등 15개 이가 있다.
〔운곡면 雲谷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8,480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복리이다. 서북쪽에 안주읍·대니면과 삼각 분수령을 이루는 마두산이 있고, 반룡리에 접무봉(蝶舞峰, 340m), 원룡리에 원룡산이 있다.
용복(龍伏)·용림(龍林)·용천(龍川)·용학(龍鶴)·용전(龍田)·용서(龍西)·재전(在田)·원흥(元興)·용담(龍潭)·용택(龍澤)·중흥(中興)·원룡(元龍)·구룡(九龍)·어룡(漁龍)·용흥(龍興)·반룡(反龍)·운룡(雲龍)·온상(溫上)·입석(立石)·온흥(溫興) 등 20개 이가 있다.
〔입석면 立石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4549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주리이다. 본래 누천면(漏泉面)·남송면(南松面)·남면(南面)·서면(西面) 등 4개 면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병합하여 입석면이라 하였다.
청천강 어귀에 태향산이 있고, 산 아래에 수군첨절제사가 방어진을 구축한 노강진의 옛 자취가 있으며, 그 위로 전선포가 있다. 군내에서 가장 평야가 많은데, 이 면 일대의 평야를 열두삼천벌이라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수수·옥수수·감자 등이며, 수산업은 원조포 일대가 조개잡이 중심지이며, 조개·조기·준치·갈치·홍어·새우 등이 채취 및 어획된다. 특히, 노강진의 조개젓이 유명하다. 광업으로 연간 8만 톤의 갈탄을 채굴하는 안주탄전이 있다.
교통망은 만성∼노강진, 입석∼신안주 간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용담리에 남양 홍씨, 내동리에 양근 함씨, 성법리에 광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용주(龍珠)·입석(立石)·용운(龍雲)·신명(新明)·용흥(龍興)·왕산(王山)·송산(松山)·용정(龍井)·용지(龍池)·성법(聖法)·동호(銅壺)·신(新)·인풍(仁豊)·내동(內洞)·호남(湖南)·기산(岐山)·남조(南造)·상공삼(上公三)·해서(海西)·서호(西湖)·남단(南端)·원북(元北)·중흥(中興)·남상(南上)·용림(龍林)·용담(龍潭)·연흥(蓮興)·용북(龍北) 등 28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용화면·연호면·입석면의 일부 지역이 문덕군에 편입되었고, 1954년 개천군 서남리와 상서리의 일부 지역이 송암리로 되었다. 1961년 3월 원흥리를 신안주노동자구로 개칭, 1967년 10월 금성리를 원풍리에, 삼용리 일부를 이상리에 편입하고 금성리·삼용리를 폐지하였다.
1972년 11월 구안주노동자구를 신안주노동자구로 개칭하였다. 1980년 6월 평안북도 박천군 남흥노동자구와 송도리·남흥리·용흥리·덕성리가 안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8월 시로 승격되었다.→안주시
※ 안주파(한림학사공파)들이 거주하던 곳입니다.
※수원김씨 집성촌
1930년도 국세조사통계에 의함
평안도 안주군(安州郡) 동면(東面) 맹주리(孟州里) 안주파
평안도 안주군(安州郡) 용화면(龍花面) 용남리(龍南里) 안주파
평안도 안주군(安州郡) 용화면(龍花面) 약천리(藥泉里) 안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