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어눅하고 격렬한 브람스를 들었다. 그러나... 줄리니의 뒷맛은
그리 쓰게 느껴지지 않는다. 강배전으로 진하게 우러나던 원두와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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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오한으로 깽깽거리다가 - 잠들기 전 샤워하고(아직까지는 뜨슨 물 나온다! 감동~) 깜박 난방으로
버튼을 안 누르고 잤던 게 화근이었다. 머리는 온통 뻗쳐서 새둥우리 같이 말랐고 덜덜덜... 천만다행으로
오후 쯤 정신차려서 허리 겨우 펴고 등 지졌더니 정신 난다. 감기도 뭣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흑!
혹시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가 아닐까 싶어서 문병 받기도 겁났다. 죽으면 혼자 죽지 뭘... ^^;;
김밥 사 갖고 들어와 - 밥솥에 밥도 없더라! ㅠ_ㅠ;; 하긴, 오늘 잘 먹을 거라고 싹 비웠는데... 쩝! ㅡ_ㅡ;;
이런 젠장, 하며 일어나서 장 보려니 시장까지 걸어갈 힘도 없다. 대충 때우고 말자! 휴우우우......
오늘 친구들은 모여서 생새우부터 시작해서 주야장창 놀고 마셨다는데 부러움에 방바닥을 뒹굴다가
저녁 나절 '택배' 가 도착했다. 에스프레소 원두(어제 볶은 것이라는!) 1kg... 이를 어쩐다 짱구를 굴리다가
주섬주섬 에스프레소 머신을 이것저것 눌러보며 뜯어보았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1차 시도.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추출이 안되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서 봤더니 호스를 잘못 넣었던 거다.
(공기와 물 호스 두 개인가 본데 물이 빨려나가지를 않고 부글부글...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일단 시도는 좋았는데 이게 뭐야?! 한없이 나온다. 크레마고 뭐고 간데 없고... 너무 황당해서 기계를 껐다.
커피도 좀 미지근 한 게 아메리카노라고 하기도 그렇고... 일단 원샷했다! 허허... 커피 카페를 다 뒤져 얻은 결론!
내가 만든 건 '에스프레소 롱고'였던 셈이다.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solo>를 뽑지 못했으니 실패면 실패.
뭐... 아까워서 다 마셨다. 어흑~ 놀랍게도 심장 뛴다! 어지간히 차 마셔도 안 이랬는데... ㅠ_ㅠ
아, 김밥 안 먹었다. 빈 속에 에스프레소 왕창 들어갔더니 위가 놀란 모양이다. 급격하기 흡수된
카페인이 혈관을 미치게 만들던가. 이런 때는 음악만이 구원이 될 것 같아 가만히 음반을 뒤져본다.
...그러나 역시 브람스로 회귀한다. 그 어떤 선율도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더니 어떻게 브람스 4번 4악장 틀자
첫 소절에 뚝...... 쾅, 우르르르~ 하고 팽팽하게 뿜어진 관악 뒤로 장렬한 현악이 넘실대자 함께 꿈틀댄다.
브람스가 커피를 좋아하던 사람이라 그럴까? (간암으로 죽긴 했지만 무소륵스키처럼 알콜중독은 아니었고
가족력과 담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여튼 19세기에는 커피 값이 비싸서 여러 대용품들이 사용되었다.
커피에 치커리가 들어 있는 것을(당시 독일에서는 치커리를 섞었나보다!) 싫어한 브람스는 여주인을 부르더니
'존경하는 아주머니, 치커리를 가지고 계신가요?" 라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단다. 브람스는 더욱 정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주방으로 가더니 치커리 두 상자를 가지고 와서
브람스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그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이게 전부인가요?' 라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그 상자들을 주머니에 넣더니 여전히 정중하게 말을 하였다. '자, 이제 돌아가서 우리에게 블랙 커피를 끓여 주시겠습니까?'
설탕 따위 들어있지 않은 커피맛 같은 브람스... 그의 독설처럼 진하고 쌉쌀한 음악들이 향을 타고 손끝으로 번진다.
두 겹 껴입은 쉐터 덕인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한기가 가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머리 속으로는
여전히 냉막하다. 'Frie Aber Einsam'의 젊음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그런가? 말년까지도 노총각으로 죽었던
그는 영원한 고독과 자유의 수호자였나? 클라라 슈만을 사랑했던 것처럼 건너보며 그 간절함을 삭혀야 했던
- 아니, 애저녁에 그는 그런 사랑 밖에 못했을지 모른다. 다가오는 것은 두렵고 다가가는 것은 껄끄러운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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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고가 끊긴다. 커피가 부족하다는 신호이다. 바로 커피메이커 불을 켜고 사은품으로 함께 온 코스타리카 원두를
갈아서 넣는다. 400ml 규모의 잔에 가득 부어 마셨다. 잡맛없이 향도 깔끔하고 구수한 첫 입 뒤로 신 맛이 올라온다.
이것은 교향곡 그만두고 곡목을 바꾸라는 뜻이겠지... 몇 장 되지도 않은 음반 위로 손가락이 더듬는다.
감이 오지 않는다. 문득 잔 위에 그려진 베토벤에 시선이 모아지고... 피아노 독주곡 모음으로 정했다.
(왜냐하면 베토벤이 피아노 앞에 앉아 널려 있는 악보 틈으로 작곡을 하고 있는 그림이... 그래서 샀다!)
독일 모처에 사실 이웃 분의 연주가 담긴... 꽤 깔끔하고 담핵한 학생들의 음률은 커피만큼이나 수준 이상이다.
음반은 시간을 담고 있다. 그 연주를 하고 있었을 시간... 그리고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끊어서 들을 수 없는
그 시간 자체가 예술이다. 그림의 시간은 주관적일 수도 있다 - 한 작품을 1시간 이상 볼 수도, 혹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그것이 개인의 선택으로 가능하지만 음악이 어디 그렇던가? 후각은 일정 이상 지나면
마비가 온다. 촉각의 예술... 은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아닌담에야 그리 다양하지 못하다. 눈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담는 반면 착각과 왜곡도 심하다 - 본 것을 속이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한없이 <기울이게> 하는 음악... 그 속삭임에 저절로 눈을 감고... 이 때 머금는 커피 한 입은
다시금... 어눅한 지하로 인도한다. <엘레시움>이라고 할만한 그 곳에 그리운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