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의 대표적 물리학자이며 아카데미 정회원(USSR Academy of Sciences), 이론물리학연구소장. 바쿠(Baku)시에서 석유 기술자 다워드 리보비치 란다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 바쿠대학(Baku University)의 물리수학부에 입학하고,1924년 레닌그라드대학(LeningradUniversity)의 물리수학부로 옮긴 후에 1927년 졸업하였다. 최초의 논문은 2원자 분자의 스펙트럼 이론(1926)이며(그는 그 당시 횐르(H rnl)와 런던(London)이 이미 이런 결과를 출판지 몰랐다.) 그 후 제동복사의 메커니즘에 관한 논문으로 통계역학을 사용하여 밀도행렬(density matrix)의 개념을 도입하였다.1929년부터 정부 유학생으로 1년 반 동안 외국에 유학하고 이 동안에 젊은 날의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 enberg) , 디락(Paul Adrian Maurice Dirac), 파울리(Wolfgang Pauli), 보른(Max Born),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등의 물리학자를 방문하여 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란다우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보어이며 코펜하겐에서 그의 세미나에 참가하였고 그 후 라이프치히, 케 임브리지 등에 들른 다음 1931년 귀국하였다. 그간의 큰 업적은 파울리가 쓴 자 기장 내의 전자운동을 근거로 한 자기화의 논문에 잘못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1930년에 「금속의 반자성」이라는 논문을 Zeitschrift f r Physik에 발표했다.
이것이 현재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논문에 의해 당시의 유럽 물리학자들에게 높게 평가되었다. 많은 대학에서 초청되었으나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레닌그라드에서 하리코프(Khar'kov)오 옮겨 우크라이나 물리·공학연구소(Ukrainian Physicotechnical Institute) 이론물리학부장, 하리코프 기계공업 대학의 이론물리학 강좌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 후 1937년에 모스크바(Moscow State University)의 물리문제연구소(Institute of Physical Problems) 이론부장이 되었다.
란다우의 연구는 이론물리학의 넓은 분야에 걸쳐 있으나, 액체헬륨의 초유동이론(Theory of superfluidity)과 양자유체이론(Theory of quantum fluids)이 가장 유명하다(1940-1941). 그밖에 란다우 감쇠(Landau damping)로 알려져 있는 플라스마의 진동 이론(1946), 진즈브르그(V. L. Ginzburg)와 공저한 『초전도이론(1950)』아브리코소프(A. A. Abrikosov), 하라토니코프(I. M. Khalatnikov)와 공저한 『양자전자역학의 기초(1955)』 『페르미 유체이론(1956)』등이 있다. 이러한연구 중에서 '응집물질 특히 액체헬륨의 이론에 관한 선구적인 이론적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1962년에 노벨물리학상(Nobel Prize)이 수여되었다. 란다우의 연구는 예리한 직관적 통찰에 근거하고 있어 다른 물리학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또한 소련 물리학을 현재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적은 매우 크다.
란다우는 하리코프 기계공업 대학에서 젊은 물리학자의 발굴과 교육을 위해 이론 미니엄이라는 새로운 교수요목을 작성하였다(1934). 또한 1948년에는 『일반물리학 교본』을 출판하고 또한 리프시츠(E. M. Lifshitz)와 공저한 『이론물리학 교본(Course of Theoretical Physics)』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과학계몽서로서 유명한 것은 『상대성이론이란 무엇인가』(1959)가 있으며,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때쯤에 르메르와의 공저로 『시간의 패러독스』라는 상대성이론의 해설을 이즈베치아에 썼다.
란다우는 노벨물리학상 외에 많은 상을 받았다. 1946년부터 3회에 걸쳐 레닌상(Lenin Prize)을 수상하였다. 또한 1954년에는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고, 1960년에 캐나다의 런던상(London Prize)을, 또한 구서독의 막스 플랑크 메달(Max Planck Medal)을 수상하였다. 또한 네델란드, 기타 각국의 물리학회와 아카데미의 회원에 추천되었다.
그는 시를 좋아했는데 특히 시모노프의 시를 사랑하였다. 회화도 사랑하고 전람회에 자주 나갔다. 또한 영화 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란다우는 1938년 하리코프에 있을 때, 독일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 투옥되었다. 러시아의 저온물리학자이며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카피차(Kapitza)의 노력으로 1년 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1962년, 자동차 사고를 당해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1966년, 애제자 포멘라크체의 죽음에 크게 낙담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1968년, 60세의 생일을 맞이한지 약 일주일 후인 3월 24일 사망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등급에 따라 여자들을 분류하는 등, 사람을 분류하길 좋아했다. 물리학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이론물리학자들을 분류했는 데, log단위로 5부류로 분류했다. 2번째 부류는 아마도 3번째 부류에 비해 10배쯤 뛰어나다. 이 단위에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1/2에 위치한다. 반면에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어, 디락 등은 1번째 부류이다. 란다우 자신은 겸손하게도(물론, 1번째 부류에 속할 것이다.) 2와 1/2에 자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