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의 길이
벚꽃이 진다고
낮은 언덕 살랑대던 제비꽃
앉지도 못하고 올려다본다.
싱겁다.
봄바람이 끝나는 어느 하루도
무심코 지나치기란 어려운 것이다.
기어이 낮은 꽃들이 몸을 세우고
가지가지 꽃보다 이파리를 많이 붙여 갈 때마다
펄펄-
꽃잎이 날릴 것이며
또, 일년이 금방 지날 것이다
난장
-전주 풍남제-
난장 이다.
아침부터 신작로 따라 저녁 시가행진까지 걸어가면
팡파르에서 폭죽 터지는 날까지 동네 할머니들은
구경꾼의 일당을 소중하게 챙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공공 근로에 갔다 온 듯
일당이 얼마간에 점심 도시락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며
천막촌 길게 늘어선 찬란한 불빛은 아예 상관도 없다.
오늘은 피곤해 일찍 잠이 들 것 같기에
열시 수목드라마 궁금한 장희빈도 못 보겠다.
손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화투에 여념이 없고
객지서 사는 아들 부부 전화가 없는 날이면
손자보다 자식이 더 궁금해 심사도 이상하게 꼬이지만.
염병이 돌아 세상 시끄럽다고 이웃집 댁이 그랬다.
내일은 동사무소에 나가 받을 것 미리 챙겨야겠다고
머리맡에 도장까지 챙겨 두고 잠을 청해도
자꾸 전화가 궁금한 것은 괜한 귀동냥 덕분이라며
가는귀 먹은 앞집 할멈이 부러워 시부렁댄다.
손자 놈의 화투 패엔 매주 열 끗이 힐끗 보이지만
영감이 가고 난 후엔 패를 뗄 때마다
메주가 떨어진 적이 한번이나 있었나 기억도 없다.
내일은 영감들이 모여 노는 싸전 다리로
난장을 핑계삼아 자식보다 궁금해 먼저 갈 것이다.
난장보다 잠자리가 더 어수선하다.
아카시아
비에 젖고 싶다고
빗물에 기대어 보는 것은 아니다.
아마, 따끈하게 덥힌 찻잔으로
너의 얼굴 덜어내며 입술에 적셔 마실 때면
윤기 많은 머릿결 사이 배어 있는
아카시아 향.
비는 내리지만 찻잔은 하나밖에 없었는지
창 밖 바람에 지는 너의 머리 꽃 떨어지면서
빗물도 함께 박히는 유리창 투명한 기억에
엷은 얼룩으로 남는다.
이슬비가 올 때마다 오르던 산은
아카시아 꽃이 진하게 만발한 공원길이었지만
빗물에 손 비벼가며 그 얼룩마저 지워야 한다는 것은
내 가슴에 삼십 년 스며들어서야 알았다.
그 빗물로 남은 흔적이.
장인어른
웬 놈이 샅바를 잡고
놓질 않는다, 밤이 새도록 시커먼 그 놈이
일을 참지 못하고
하나 뿐인 외 뿔 치켜들었을 때
이미 가위는 입을 벌리고
멱살을 움켜 쥔 채
이승에서 마지막 한 모금마저
숨을 막고 있었다.
저승이 얼마나 되는지
봇짐도 없이 와서는
빈손으로 모시고 간
장인어른.
어디쯤 가셨는지
궁금해도 볼 수 없으니
꽤 멀리 가셨나 보다
꿈 많은 마누라가 요즘엔
꿈도 없이
편안하게 잠을 잔다지만
어디가
허전할 것이다.
비가 올 때면
어깨가 아프다.
목이 어깨를 짓눌러 아픈 것은
목젖이 혀를 눌러 끙끙대는 것 말고는
그 원인이 없어 보이지만
어깨뿐이겠느냐.
툭 삐져 나온 뼈마디의 말랑한 디스크
거기를 지나는 뾰죽한 신경들이
손바닥을 따끈따끈하게 지져대고 있다는 것을
얼얼하게 얼음 덩어리 손에 쥐고
멍멍한 신경 줄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가서
내 몸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어디가 어찌 그런지 몰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은
목젖이 혀를 믿을 수 없다고
의학용어 잘 몰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비가 온다는 기상대 예보보다
마디마디 칼등으로 무디게 잘라가듯
지근지근 쑤셔대는 신경 끝으로 가서
양어깨 어딘가 비가 온다고
시꺼먼 구름이 무거워서 가지도 못하고
잔뜩 부풀어 있다, 얼마나 큰지
세상보다 큰 어깨가 짓눌려 저리고 있다.
나를 보고 있다
싫증이 날 때도 되었다.
머리카락에 핀 비듬들이
벚꽃처럼 날리며 번성할 때까지
머리 속 가느다란 실핏줄들은
적당히 양분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며
무뎌터진 손끝으로
머릿속 허연 쓰레기들만 벗겨내고 있었다.
밥은 지금껏 먹었어도
아직도 부지런히 먹고 있는데
가끔 미안하다, 버리고 싶어 게을러지는
나를 보고 있다.
큰어머니
큰어머니 장례 길 따라
금강 하구 둑 건너가는 고향 길은
찔레꽃이다.
입관 식에서 보니
하얀 꽃으로 가시는
영락없는 큰어머니다.
보릿고개 부엌데기 시집살이에도
하얀 꽃잎으로만 피워내던
세상에선 가장 낮은 여인이셨다.
하관을 하다 하늘 보며
저승길 가시는데 가시 하나 달아 드리려 물으니
"고운 옷 입었으니 그냥 갈란다" 하신다.
찔레꽃 나지막 피어나던 큰집 뒷산에
그 깊은 빛깔만을 가슴에 꽁꽁 여미어 담고
하얀 꽃으로 가시는 큰어머니다.
토끼풀꽃
꽃이 잎보다 늦게 나와
쌀눈 같은 꽃망울로 모여 터지며
더 높이 올라와 하늘을 보는 것은
햇살에게 수많은 눈길을 주며
모든 아이들의 꿈이 하늘에 닿게 하는
둥그런 막대 사탕의 과학입니다.
오월의 풀꽃반지
아이들과의 약속입니다.
03-5-28
비 갠 후
뭉게구름이
질끈 또아리를 틀고
하늘은 가벼워진 기분에
맘껏, 햇살을 쏟아 붇는다.
버찌가 새까맣게 익으면서
터질 듯 햇살은 다 담았다지만
울타리 장미보다는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아서 차라리 좋다.
나도 햇살에 익어
신맛을 버리는 달콤한 버찌가 되고 싶다.
혀 밑으로 줄줄 나오는 시큼한 청춘보다는
시커멓게 물들어도
오십 년 햇살에 잘 익어 단내 나는 가슴.
비 갠 후
하늘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03-6-2
어떤 거울
험악한 얼굴로 들어갔는지
입학식이 끝나고 첫 시간 수학시간
아이들은 기가 죽어있다.
험악한 내 얼굴 몰랐는데
어떤 녀석이 "아, 무서버라" 한다.
아, 거울.
깨끗한 거울 하나 여기 있구나.
백로
하얀 백로 한 마리가
모내기 막 끝낸 논바닥,
찰방찰방한 물위를 부드럽게 몇 번 돌더니
모보다 더 키가 큰 다리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먼 하늘 날다가
재수도 좋게 우렁이 눈에 띄어서
맛좋은 저녁거리 잔뜩 눈독이 들어서
긴 주둥이 발끝에 맞춰가며 뒤적거리고 있다.
백로도 먹어야 산다고
고상高尙함 보다 먹어야 산다고
발목 위로 퉁겨 올라오는 흙탕물에
저를 더럽히고 있다, 하얀 깃털에 얼룩 남기며.
03-6-5
목련
이른봄이었다는 것은 핑계였다.
꽃샘추위보다 먼저 꽃봉오리 맺어 터트리는 하얀 목련,
어린 쪽니로 솟아난 하늘
그늘 없이 맑은 꽃이었다.
다소곳이 꽃잎을 하나씩 내어 보일 때마다
마냥 천진하게 웃어 가는 열 아홉 가시나
처음 맞는 사랑, 마술 같은 봄날의 열병은
길어야 이렛길이었다.
꽃길이 너무 깨끗해 잊지 못한다고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가끔 너에게 쓰는 편지가 빗물에 젖는다.
꽃샘이 너무 시려 빨리도 지났을 것이고
봄을 핑계삼아 바람에도 취했을 것이다.
현대의 사랑
잡으면 잡을수록 손잡이에 묻어나는 손때처럼
얼룩으로 남아 가는 흔적이
은은한 옻칠보다
번쩍거리는 니스 칠이 좋다고 발라 가는
일회용 세상이라 미련은 없는 것인가.
시원하게 볼 일 보고 나서
한번씩 쓱-, 닦아갈 때마다 느끼는
호박잎이나 지푸라기 같은
까실까실한 밑씻개의 문화보다
그 보다 더 멀리 가서
단단한 돌 깎아 만든 화살 통 둘러매고
몰려다니며 함께 생존해야 했던
그 오랜 부족의 공동체가 그리워
지금도 백두대간 따라 나누어져 뻗은 갈래 길.
현대는
신기루와 마주 앉은 짝사랑에 미쳐서
점자보다 더 깊은 자판 두드려도
보이지 않아 읽어만 가는 사랑에
눈이 너무 아프다고
부드러운 휴지보다 시원한 비데는
저, 혼자만의 사랑입니다.
(6-16)
자장면
시커먼 자장을 듬뿍 올려놓고
면발이 불어터지지 않게
가만 가만 비벼서 자장면을 먹는다.
시커먼 자장이
오십 년의 내 가슴이랑
칠십 년 내 어머니의 젖가슴이랑
감자랑 양파랑 잘게 썰어 섞어가며
알맞게 익혀 먹어야 맛이 있다지만
먹고 쌀 때마다
시커먼 내 속이 그대로 나와서
잘 익혀 먹어도 지독하게 그대로만 나와서
맛있는 자장면 먹지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는 싸지도 못합니다.
그런 내가 마누라는 걱정입니다만
나도 어머니의 똥을 본 적은 없습니다.
(6-21)
자유
새벽, 잠깐이었나. 얼굴 없는 여자 부둥켜안고
진땀 흘려가면서 씩씩대며 산을 오르고 있었고
산꼭대기에 다 올라가서는 느긋하게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꿈으로만 꾸었던 일을 기분 좋게 치뤄 내는
혼미한 새벽이었다.
절정으로 갔던 단편의 꿈속에서 느릿느릿 나와
꿈보다 해몽이 궁금해 열어본 컴퓨터가
지금껏 별러온 일 마무리한다는 해몽에
자유를 주고 싶다며 능청을 떤다.
바람보다 먼저 비가 내리고
소델로가 먼 남쪽에서 북상중이라며 내리는 태풍주의보는
그래, 나는 바람이었나보다.
넙죽한 프라타나스 잎을
옹골차게 흔들어 가는 바람이었나 보다.
일흔 아홉 편의 넋두리 묶어놓고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6-19)
꽃
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내가 꽃을 아는 것보다
꽃이 나를 아는 것이 많으니
염치가 없다.
산을 오르면
꽃은 인사보다 먼저 향기를 주고
나는 안부밖에 줄 것이 없어
무심히 지나쳐 가지만
꽃은
내 어깨 두드리며
"자주 만나야 오래 만나지"
산이 내미는 들꽃의 손
그 청진기 같은 악수들
꽃이 나를 아는 것이
산에 오랫동안 피어 있다는 그 까닭이라면
나는 아직 산에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해
잘 알 수 없어서
왜-,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산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고 할 수 없어서
(7-1)
발바닥
한 뼘이나 되나 보다
누워서 엄마 젖 먹기 시작하면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고
동네 골목길 술래가 되어
세상 얼마나 넓은지 몰라 뛰기만 했던
일곱 살 발바닥은
가끔 밭 두렁 달려가다 고꾸라져
하늘을 한번씩 본 것 말고는
세상 본 일이 없었지만
이때껏 썼어도 아직은 쓸만해서
밤이면 저리게 피곤하다가
아침이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
신발에 하나씩 쑥쑥 집어넣고
내 육신의 균형 알맞게 지탱하는
오십 년, 짱짱한 발바닥이
감사하다며
오늘은 양말을 벗고 깨끗이 닦은 다음
피곤한 저녁 밥상 물려 놓고
누워버린 머리보다 더 높은 벽에 걸어 놓으면
창문으로 떠 있는 밤하늘의 별,
하루가 무사하다며 실눈 뜨고 웃는다.
(7-3)
뿌리
꽃으로 피었으면 너는 다시 뿌리가 되어라.
뿌리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줄기에게 사랑을 주는
그래, 너는 가지였다고 힘이 들 때마다
꽃으로 피어나기를 고대하지 않았느냐
맨 처음 빨아올리는
신선한 양분의 공급처로 시작하는
꽃으로 가기 위해 다시 깊은 땅속,
쑥쑥 뻗어가며 찾아가는 목숨들이
맑은 샘물로 깨끗하게 녹여 빨아들이는
꽃의 단단한 뿌리.
뿌리가 되어 맑게 씻어라
(7-5)
백련
하얀 연꽃이 좋다하여 찾아간 절에는
거의 다 베어진 감나무
서 너 개 가지로 뻗은 감 이파리는
연잎보다 더 싱싱하였다.
때깔 좋은 감잎은
장마가 지나다가 잠시 쉬어 가는 틈으로
잠깐씩 탱탱하게 여무는 초록에 도통(道通)한 듯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을 내려다보며 있었다.
논에서 걷어낸 평야(平野)의 이삭보다
백련(白蓮)의 잎으로 더 크게 피어나며
논두렁 행렬로 이어지는 문화(文化)는
옴마니반메홈......
하얀 연꽃이 더 무성해지면
감나무쯤 베어지는 것은 예삿일이라고
기왓장에 이름하나 적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등 떠미는 마누라, 그 손가락질에 쥐어주는 보시
아직도 내겐 뻥 과자만 천 원이었다.
(7-9)
꽈리
안에 있는 것 다 버리고
껍데기만 부드럽게 가져야 소리를 낸다고
혀끝으로 열고 닫으며
꽈리를 분다.
꽉 찬 비구름 비워내며
시원하게 소낙비로 터지고 나면
다 비워낸 하늘처럼 너무 맑아
잘 찾아보면
동화 속 같은 전설이 있다며
(7-11)
청춘
어둠에서 바다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람이 바다를 뒤에서 훑어 가고 있었다.
물살이 비상을 몇 번이나 시도하면서
백사장을 타고 상륙하는 작전은
언제나 발끝에서 미수로 끝나고 있었다.
모래밭은 언제 바닷물을 다 마셔버렸는지
입맛만 다시며 매번 입가에 거품만 문다.
어둠의 바다는 어둠보다 바다가 무섭다.
이노마, 이놈아, 이눔아-
몇 구비 파고를 타고 밀려오는 외침.
크기는 다르지만 모양이 점점 증폭되는 닮은꼴로
일렁거리며 거칠게 달려오는 태풍일지라도
서있는 발목까지만 채워야 부지할 수 있는
육신, 우리의 세속적인 열정.
어둠에서 시커멓게 물귀신처럼 달려와
급하게 소멸해 버리는 바다는
그래도 아직 청춘이었다.
(7-20)
방화동 계곡에서
(전북작가회의 여름시인학교)
어둠 벗겨내려고 폭포 같은 장마 끝
끝없이 깎아 내려오는 물줄기는
시원하였다.
별들이 산중에서 제 빛을 건져내
빛보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면서
소리의 높이는 맑았다.
인간, 그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가 참 맑았다.
몇 개
목 힘줄이 꼿꼿이 서서 내는 소리는
시보다 인간이라서 더 좋았다.
사랑을 하다가 들켜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별들이 새벽까지 빛을 던지며 있었고
육신보다는 좀 더 크게 부르고 싶은 노래는
계곡 물살에 섞여 급하게 길을 꺾고 있었다.
갑자기 사랑 하나 그리워 질 때
이 골짜기 찾아와 물소리에 마음 씻으며
내가 사는 세상 같이 씻어보면서
무성한 이끼, 부질없는 생각에
꽤나 그럴 듯 하다는 여유로 취하고 있었다.
(7-28)
갯벌
두 팔로 가만히 보듬어 볼래
바다가 품으로 들어온다.
내 품은 들의 온기가 있지, 살아 숨쉬는 갯물이
골패인 핏줄 타고 들어 왔다 나갔다
수평선 가려지는 거대한 두 팔뚝
달이 목숨을 끊으려 한다.
달은 힘이 있어도 소용없다며
보름달이 반달이 되면 어떻겠냐고
다시 그믐이면 또 어떻겠냐고
팔뚝이 달을 멀리 껴안을수록
바다와 높낮이 같아야 살 수 있는 갯벌.
막으면 죽는다는데 막아야 하다니
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변산반도, 코딱지 만한 땅도 숨쉬며
살아가야 한다고
철새 지나다 배 채우며 쉬어 가는
살다가 뱉어낸 시커먼 가래 삭혀 가는
살아 있어서, 그 말랑한 갯지렁이의 터전
지켜가야 한다고
(7-29)
박꽃
어둠이 올 때쯤이면 달보다 먼저 나온다.
화장기 지독해 하얀 박꽃의 얼굴로
발정이 난 수컷들 길목에 서서
차단기 번쩍 들어올리며
생존에 깃발 던지면
이것은 시가 아니다.
행인들 돌부리가 되어
술 취해 비틀거리는 발부리 걸어
제 발로는 어렵다며 밀어 넣는다.
벽마다 유리창 거울로 세워
거울 뒤편에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예측만으로
빨려 들어오는 불나방 반기기 위해
밤이 오기 전 끈끈하게 거미줄 치는
땡볕에 잠행하는 한산한 거리가
죽음보다 더 깊은 줄 모르고 지나치는 행인들
밤이면 더 하얀 박꽃이 된다.
푸줏간 5촉 붉은 전구로는 너무 축축해
혀끝에 찍어주는 꿀의 단 맛
꽃 분으로 번식시키는 생존의 습성 따라
뿌리고 가는 것은 엉뚱하게도 밥이었다.
밥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을 거라며
꽃이 박이 되는 일도 없을 거라며
(7-31)
줄넘기
사랑하는 일은
위험하지.
벼랑 끝에 서서 눈을 감는다.
떨어질 때까지 열정을 다하다가
순간, 떨어지는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손 내밀어 착지를 찾는 곡예사처럼
사랑하는 일은 많은 훈련을 해야지
떨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단련을 해야지.
피멍이 가슴에 확실히 남아도
별 게 있겠냐고
줄넘기 열심히 하다보면 다시 튀어 오르는
사랑도 그럴 것이라고
(8-2)
영정
웃었다.
세상이 누군가에게 손짓도 못하고
몸을 던지면서 그 웃음 시작했는지
아니면, 소 떼 몰고 가던 그림자 따라
총총 걸음 내 딛으며 개나리 봇짐 풀지도 못한
한 맺힌 통일의 징검다리 다 건너지도 못한
빈소에 걸린 영정
할 말이 많아도 말할 수 없어
누가 걸었는지
정치보다 더 높이 걸려 있다.
(8-5)
매미
빙빙 도는 고추잠자리의 선형을 보고
들꽃 잎 끝에 앉은 나비를 보며
너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매미들이 왼 종일 모양 나게 울며
목청 터지지 않게 붙어 있는 것도
이파리 하나가 만드는 그늘에서
편안한 목숨 줄 다듬어 가듯
끈적끈적한 곳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소리는
깊은 산, 딱딱한 애벌레 껍질을 까고
맑은 기운으로 터져 나오는 매미의 울음이 되어
적당히 오염된 6차선 가로수 등걸에 붙어있는 스피커
매월 보름이면 울렸던 훈련경계경보 사이렌처럼
매미가 대신 경보를 한다고
별 하나 더 만들지 못해
안타까운 과학의 이데올로기 선택도 못하고
어찌 생각이나 해보겠냐고
(8-8)
별
별 하나가 눈을 뜨더니
달 옆에 쪼그려 앉아 내려다본다.
거기서 보면 내가 너만 하고
여기서 보면 니가 나만하니
오늘,
밤하늘은 혼돈이다.
육 만년에 가까운 인사 한번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푸념 섞어 말하지만
넌 손가락이 없나보다.
난 손가락이 있어도 널 셀 수 없는데
(8-14)
삼겹살
돼지고기 맛은 삼겹살이다.
세 개의 층이 잘 어우러져 쫄깃쫄깃 씹을 맛이 있는
젤 비싼 곳이다.
왜 사람들이 삼겹살을 즐겨 먹나 봤더니
한 겹은 돈이요
두 겹은 힘이요
세 겹은 줄이니
씹는 것과 사는 것이 같아 그런가보다.
고기는 보이지 않게 잘 싸서 먹어야
싱싱한 상추, 세척제로 깨끗이 잘 씻어야
철저한 세탁, 기름기 잘 빼야 고소해 맛이 최고지만
소화가 우선 이다.
삼겹살은 언제 먹어도 씹을 것이 많아 좋다.
소주 한잔에 고기는 많을수록 좋다.
돈힘줄이 튼튼해 씹어도 끄떡없다며
너도나도 취해야 나오는 세상이야기
취해야 한다.
취해서 뱉어야 숨구멍이 열리고
멍든 가슴 시원하게 땟물을 빼듯
삼겹살, 하얀 옹이 잘근잘근 씹어가며
(8-16)
돌탑
마이산.
아무렇게나 놓인 삐죽한 돌도
잘 맞춰 쌓아 놓으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비바람에 흔들릴수록
제 몸부터 다듬듯 깎아내며
조금씩 맞춰 가는 틈처럼
탑신塔神의 손, 도통한 위장술보다
더 어려운 눈매에 놀라
잡 돌 같은 몸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게
그대로 끼이고 싶은 것은
(8-18)
핵폐기물
섬 하나 도마 위에서
길을 선택하라 부대끼지만
안개 자욱하기에 사공은 두리번거린다.
사방 뚫려 있는 바닷길이 쉽다며
찰랑대는 금물결 닿는 가까운 땅이어서
다음 올 어둠에 불빛 찬란할수록
번영의 땅,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필연의 논리 과연 맞는지
여기가 아니면 안되겠냐 하지만
썼으면 버려야할 첨단의 문명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고
보장할 수도 없어
(8-19)
쌍무지개
-대구 유니버시아 대회-
모악산부터 비 뿌리더니
평화동 사거리 들어서자
동 쪽 기린봉 너머
쌍무지개 예쁘게 서 있다.
통일처럼 반가운
아리따운 아가씨들 두 손 흔들며
서둘러 들어서고 있는 김해공항
대구, 유니버시아 대회
쌍무지개로 띄운 온고을의 축전
(8-20)
먹는 것처럼
니가 아프지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응어리 풀지도 못해
끙끙대는 세월은
사랑이란 사랑 다 해보았는지.
먹는 것처럼
시면 시고 달면 달고 쓰면 쓴 것이지
혓바닥 종기 하나에 왼통 입안에서부터
가슴까지 아려대는 것은
무슨 맛이냐고
세상 통통히 먹음직스럽게 익어
맛을 낼 때부터 맛을 잃을 때까지
별 사랑이나 있는 것처럼 살다가
사랑이란 사랑 다 받아보았는지.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고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해서
장마
비가와도 넘칠 수 없어
넘실넘실 잔뜩 봇물을 안고
버티고 선 막은 댐은
이미 짙은 녹조가 번져
청정의 하늘을 버린 지가 오래다.
처서處暑가 와도 땡볕은 아직 멀어
무수히 내리 꽂히는 살 끝에는
호박꽃이 아직 싱싱한 호박을 달고
밭 두렁 보다 좀 더 높은 산등,
누런 가을거처 마련키 위해
어떻게 올라가 매달렸는지 보이지 않지만
장마가 아주 누워버렸다, 고추는
역병으로 비틀려 말라 가는데도
(8-25)
수박
여름이 오기도 전
동네 가게 진열대에는
둥그런 줄무늬 정찰(正札)로 앉아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앉아있던 굴렁쇠 누운 빈자리만 있고
팔려버렸는지 아니면 썩어버렸는지
있다가 없고
주욱-, 없다가도 갑자기 나타나는
그놈의 내력 있을 법도 하지만
쥔 어르신께 물어볼 수 없어
오고 갈 적마다 짐작만 해보며 가는 것은
커도 작아도 한 통에 만원
일년 시세 알 수 있어도
크면 얼마나 크겠냐고
손가락으로 눈 셈이나 하면서
마트에 가면 더 큰놈 사오나 싶어
똑바로 쳐다보며 인사도 없이 가지만
정작 동네 가까이 들어서면
고놈이 더 크게 보이면서
내 맘, 꼭 들켜버리는 것은
비단 수박 뿐 아니라고
꿈속에서도
번뜩이는 장검 뽑아들고 칼바람 소리
휙 하니 허공을 가르더니
사정없이 꽂히는 가슴에
진홍빛 놀
뭉게구름 뒤 서있는 장미꽃으로 피더니
식은땀이 송글 맺혔다.
저녁 그림자 뒤 그림자로 숨는
그늘의 어둠, 그림자 하나가 칼에 맞더니
이내 피를 토하는데
나는 구경꾼이어서 괜찮았다.
칼끝이 내 앞에서는 헛손질만 하고
투명한 그 질긴 막 뚫지 못하는 긴장을 보며
먼 그날 무협지의 마지막 장 아쉬움에 접을 때마다
몸을 비틀며 꾸어댔던 꿈.
오랜만에
그것도 하늘이 요동치던 미륵사지 지나면서
시커먼 하늘 지척도 분간 못해 가다가 서서
어느 노老 시인의 방문 길이 그 분 닮았다며
속으로만 히죽거리던 그 날 밤에
피 토하며 안간힘 쓰는 얼굴을 보니
내가 번갯불에 맞았는지.
맞아도 되게 맞았는지.
(9-6)
설움
그랬었나
그래, 그럴 것이라며
고갤 끄덕거렸었나.
그 다음엔 아니-, 아니라며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냐"고 말이나 했었나
너무 먹지 못하면 배고프다는 말도 잊어버리지
사랑도 그랬다.
늘 허기져 어두운 얼굴
쌀처럼 한 줌 바람에 흔들 적마다
쭉정이 저 편으로 다 날아가고
알갱이 하얗게 담겨지는 배고픔처럼
(9-7)
추석
삼일에 한번쯤 어김없이 비가 내렸나
이파리처럼 갉아대는 하늘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애벌레도 슬픈 날, 짊어진 불쾌지수 힘들어도
애당초 맞바람에 넘실대는 어깨춤 느려 빠진 몸짓으로
어찌 되든 오기는 오나 보다, 세월이 무섭다며
또 소낙비가 내렸다. 하루만에
천둥 번개와 함께 줄줄 쏟아버리더니
이른 한가위 매미가 우는데
웬 커다란 매미, 떼 지어 올라온다고
아주 오래 전 태풍 사라까지 치켜세운다.
달빛 없는 열 나흘 밤
아버지 그림자도 찾지 못하고
만사 핑핑 도는 멀쩡치 못한 정신
심야극장 끝나기도 전에 코부터 골았다.
나보다 더 빤질빤질한 새끼도 제 일만 바빠
염불보다 젯밥이라, 정신 있을까 마는
(9-11)
경기전
장마 지다가
한번쯤 해가 고갤 내밀며
경기전 장기판 꺼내 놓으면
느티나무 매미들이 다 나와서
모처럼 끼어 들어 고개 디밀어 보다
어르신들 장기판에 어우러지며
햇살보다 따갑게 훈수를 한다.
말이 뛰어야제, 어허 말이
포로 지키랑께, 아 글씨 포로
그려, 맞는가. 아니, 아닌디.
(9-13)
면도질
아침마다 샤워하면서 면도를 할 때마다
턱 주위에서 자라는 꺼칠꺼칠한 털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깎아내는
어설픈 정성에
하루만 다듬지 못해도 근질근질
자꾸만 얼굴로 손이 가는 탓으로
성가신 하루, 잘 보내도 귀찮아
늦더라도 꼭 밀어버려야 개운하게 잠들 수 있는
어설픈 습관에
사랑도 그렇게 했는지,
마누라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9-15)
추상
유리창으로 뿌옇게 송홧가루 날리는 날에
가느다란 부슬비 내리던 봄비는
흐릿한 저 편 세상처럼
보이는 것 모두 신기루였나 보다.
하기사, 그림 한 겹 더 포개 놓으면
다 발라버린 물감이 엷어
열고 보니 꽃바람에 비틀거리는(흩뿌려지는)풍경
빗줄기 사이로 촘촘히 보여도
다 보이는 것,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볼 수 없던 것이 보일 때까지
보이는 바람 한 줄의 끝, 빗줄기를 열며
비로소 그 끝을 잡는다.
한 폭 그림을 알고 난 후에
(9-16)
밥
토요일, 특별활동 끝나는
등산부 하산하는 점심때가 되었는데
즐비한 식당 간판에 허기진 녀석 중 하나가
"집에 가면 얼른 쌀 안쳐서 밥 먼저 해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지금껏 내가 살면서
한번 해본 적 없는 그 말에
뒤통수 제대로 걷어 채여 어떨떨 했는지
녀석의 푸념, 반에 반도 알지 못했다.
아무 답도 못한 내가
지금도 어정쩡 머릴 굴려 보지만
아직 별스런 답도 못 찾고 있어야 맞는지.
지금까지 잘 먹고 산 내가
"엄마 없는 니 죄 너보다 크다"고
말할 수나 있는지.
(9-20)
코스모스
한 줄기에 뻘건 가슴
모가지 밖에 채우지 못해
연분홍이 된 꽃잎들
노을 빛 저리 붉어도
다 물들지 못하고
날갯짓만 바람으로 너울대는데
옥정호까지 물들어라
진저리치며 짜내야 하는
코스모스
가슴 근처
같아 보여 대 봤더니 다 달라 재밌습니다.
솥뚜껑 적당히 열어주면
한 그릇 하얀 쌀밥 될 것도 같아
열심히 불도 때보지만
푹푹, 김만 나는 것처럼
(9-26)
마흔 아홉 살
하늘보다 자주
땅에 박힌 키 작은 풀꽃까지 눈에 보이니
시력도 고맙다.
늘 건성이다가
떼여 놔야 보이는 때가 되니
예뻐지는 풀꽃, 예삿일은 아니라며
접을수록 다가서는 이 땅에
이젠 숨겨볼까, 망설이는
(9-28)
안개 길
안개가 꼬리만 감춰 놓고
햇살 달래는 아침 길은
하늘까지 막고 서서
앞이 쉽진 않지요
간격이나 적당히 지켜가며
깜박이는 비상등 따라
뒤꽁무니 슬슬 좇아가는
외길은
스쳐 지나갈 쓸데없는 인연에
성큼 나갈 수 없어
그냥 비워 놓고 가야하는
옆길입니다만
(10-2)
생존불량
"어쩌지"하며
고개를 설레 젖는다.
곧은 나무 두 가지 가깝게 잘라
감나무 가지 하나 물어 내려라
하늘대고 잘 끼워 비틀어 보면
주렁주렁 한가지
물고 내려 오기도 전
제 몸 털고 던져지는 홍시의 찰라
박아라 처박아라
넌 서있는데 난 곤두박질이다
툭-, 터지는 몸.
추스를 틈도 없었다고
맨 나중 떨어지는 팔등신
훨훨, 노랑나비 되지도 못하고
반전反轉 드라마 포기해야 하는
현대의 경제처럼
(10-5)
구름
지난 저녁
늦도록 술 취한 화가가
하늘에 양떼를 그렸는데
아침, 거북이와 혼돈하고 있다.
조금씩 흐르고 있었는지
시퍼런 청천晴天에 배를 깔고
저 끝으로 수도 없이 줄을 잇는데
나는 맨땅에 발바닥이나 대고 서 있다.
세월이 이만큼 걸어 왔을까
붓으로 살살 토닥거려
희미한 자국으로 새긴 등판 무늬
햇살에 눈부신 은빛 가득 찼어도
하늘, 그 여백의 무게 멀리 비워내고 싶어
쓱쓱 쓸어 가던 빗자루
그 흔적도 가벼워 새털인가 했다.
가을, 나이가 혼란스러워
(10-7)
억새
가을 산에 오르면
신령이 있지요
능선 따라 오르고 내리는 길에
키 만한 친구들이
그 만한 겸손으로
은빛이던가요
먹물이 좀 들었던가요
햇살 찬란한 눈웃음에 그냥 갈 수 없어
반가이 어루만졌더니
쑥부쟁이보다 맑은 꼭대기
저 아랫마을 지켜보는 눈들이
바람으로 내어줄 사랑이라고
눈부시게 흔들리며 서 있는데
(10-9)
노을
밖으로 나가 보게나
저기, 벌겋게 물들어
시퍼런 하늘 끝이 없는데
가슴 부시도록 타오르는
불길 좀 보게나
불기둥이 산을 가르고
바다를 가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게나
(10-10)
언론
가끔
내가 있으면 니가 있어야 된다고
거리를 혼자 걸을 때마다
뉴스처럼 새로운가
취해본 놈은
노래 한 마디 기억도 없어
흥얼거리는 것이 그냥 편안하다.
개혁은 개에게 주었고
개혁을 다시 개에게 준다해도
개만도 못한 놈은 나뿐이다.
취하면 개가된다고 했지
취해서 개가되면 너를 문다고 했지
개보다 나은 놈, 누군지 궁금해
(10-13)
카페 게시글
2005.6.6 이전
1111
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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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
03.10.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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