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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춘천 칠전동에 계신 21대 조부 광성군(휘 정) 묘역에 참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직장에서 한참 부림을 받을 연령대이고 보니 좀처럼 뜻대로 시간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광성군의 세일사 음력 10월 1일이 시조공의 사우제와 같은 날이라 더욱 실행을 하기가 어려웠다.
광성군(휘 정)은 14세 양간공후 17세 판군기감사공후 18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찰방사(察訪使 : 감사관)을 역임하고 대호군(大護軍 : 정3품)과 삼중대광(三重大匡 : 정1품)을 지냈다. 공민왕의 내외 국난시 왕실보호와 국난극복의 공훈으로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봉 되었으며 광성군(光城君)으로 봉작을 받았다.
부산의 광성군 후손으로는 20세 퇴촌공(휘 열)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작년 11월경에 청년회 전임회장 영복대부에게 가족동반으로 광성군 묘소에 참례가자고 얘기하였더니 선뜻 동의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른 일가들의 동참여부를 탐문하는 사이 날짜는 후다닥 지나 12월 중순부터 휴일도 없는 업무에 몰입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영복대부와 태완(容)일가 둘이서 일정은 물론 차량준비, 숙소물색까지 계획하고 정작 제안한 나는 몸만 덩그러니 가게 되었다.
출발을 이틀 앞두고 지곡 양중국장에게 광성군 재실인 모술재(慕述齋) 방문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더니 고맙게도 재실 관리사에 연락을 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춘천에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만날 수 있는지 메일을 보냈더니 만나자고 한다. 그 사람은 연안인 아돈 이구영씨로 5년 전에 연안이씨 홈페이지에서 처음 만나 보학과 관련해서 논쟁을 벌였던 사이다. 그는 나 보다 나이는 적으나 창해(蒼海)와 같은 인품을 내가 흠모하여 지기(知己)가 되었다. 아울러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다. 연안인들은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명문이다. 저헌 이석형을 비롯하여 월사 이정구, 묵재 이귀, 백주 이명한, 청호 이일상, 성로 이존수 등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출발 전날에 업무에 치이다보니 덜컥 감기 몸살이 났다. 몸이 스산하고 뼈마디가 저려와 주사를 맞고 약도 지었다. 저녁에 묘소 참배에 쓸 제주를 사면서 과연 내가 내일 떠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나는 한번 감기몸살을 하면 최소 일주일은 끙끙 앓는 체질이다. 그런 체질을 잘 아는 아내가 잠자리에 드는 나에게 “과로에서 오는 감기 몸살인데 웬만하면 다음 기회로 미루세요.”하고 말린다. 나는 태연스럽게 “춘천에 계신 할배 할매가 내가 보고 싶으면 낫게 해 주시겠지”하고 잠을 청하는데 아내가 “어이구 됐네요”하며 말문을 닫게 한다.
다음날 아내가 깨워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
출발시간이 7시인데 늦을 것 같아 서둘러 아이들을 깨워 씻기고 준비물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운데 아내가 “당신 몸 괜찮아요?”하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몸이 말짱하다. 오히려 엄살을 떨었나 싶을 정도로 컨디션도 좋다. 아내가 “할배가 간밤에 오셔서 할배 손이 약손이다 하고 당신을 어루만져주고 가셨는가베“ 실없는 농을 한다.
출발장소인 영복대부 회사에 가니 용호(淳)일가도 있고 태완(容)일가 가족이 우리 뒤를 이어 도착하였다. 22인승 미니버스에 네 가족 17명이 타니 자리가 넉넉하다. 두서너 가족정도는 충분히 탈수 있는 공간인데 동참이 예정된 일가들이 급한 일이 생겨 네 가족만 가게 되었다. 영복대부와 태완일가가 1종대형면허를 가지고 있어 운전기사 없이 렌트하였다.
대구-구포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가지고 간 계간 ‘아시아’ 문학지를 모두 읽을 즈음에 춘천톨게이트다. 4시간 만에 도착하였다. 모술재(慕述齋) 재실 관리사에 도착을 알리고 아돈 이구영씨에게도 도착을 알리니 재실로 나오겠다고 한다. 우리는 춘천이 초행이라 중간에 시민들에게 칠전동을 물어물어 갔다. 칠전동에 이르러 주유소에서 다시 광성군 묘역을 물으니 “아마 저~기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조달청 옆에 있는 기와집을 말하는 것 같다”고 한다. 막상 가보니 조달청 옆에 모술재(慕述齋)가 있다.
모술재에 이르자 관리하는 분의 여대생 딸이 마중을 나온다. 여대생의 안내를 받아 먼저 광성군의 부모님인 군기감사공(휘 영리)과 배위 남양홍씨를 모신 모덕사(慕德祠)에 올라갔다. 아이들에게 모덕사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돈 이구영씨가 당도했다. 처음 본 얼굴이지만 몇 해 동안 메일을 주고받아서 그런지 낯설지 않다. 아돈은 자신이 이끄는 사회단체 행사계획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에게 일을 맡기고 나와 주어 미안하였다. 우리 일행은 사당에 들어가 분향하고 배례하였다.
모술재를 나와 광성군 묘역으로 향했다. 묘소가 재실 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재실 전방 200m 앞에 있다. 걸어서 묘소에 도착하니 마음이 뭉클하다. 광성군 묘소는 언제 실전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돌아가신 후 350년이 지나서야 다시 찾게 되었다. 그간 후손들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하다가 영조임금 때 후손 화택께서 춘천 부사로 있을 때 묘소를 다시 찾아 모시게 되었다. 나는 그 어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찾았다고 생각한다.
묘소 주위는 아파트촌이다. 과거에 아파트 부지의 땅이 묘역일원이었다고 들었다. 광성군의 묘는 배위 연안이씨와 합폄이다. 배위 연안이씨는 전법판서 방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대과에 등과해서 숙신택주라는 작호를 조정으로부터 받았다. 묘소에 참배하고 음복하니 빈속이라 취기가 확하고 달아오른다. 아이들은 부산에서 보기 힘든 눈이 반가운지 장난치며 즐거워한다. 경망되어 나무라고 싶었지만 광성군께서 멀리 부산에서 온 어린 자손들을 무릎위에 앉혀주고 재롱을 본다고 생각하였다.
묘를 시위하는 문인석이 독특하다. 세월이 흘러 조각미가 풍우에 약간 부식되었으나 그 각이 뚜렷이 남아있는데 고려말 석물양식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비록 아파트가 시야를 가렸으나 주위 풍광을 살펴보았다. 근처에 의암댐이 있고 산맥 두텁고 산세의 선이 굵고 진하여 풍채가 멋있는 것 같다. 얼풍수 입장에서 산수를 살펴보니 주산의 산맥이 자못 웅장하고 기운이 세게 굽이쳐 묘소 뒤 주산에서 강하게 응결하여 용맥이 깊게 뻗어내려 묘소에 입수했다. 안산은 문필봉으로 곧게 솟아 기상이 깨끗하다. 전형적인 대명당이라 여겨진다. 조금 더 머물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조손(祖孫)간에 시공을 초월하는 정을 느끼고 싶었으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입장이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때가 점심시각을 한참 지났으므로 점심을 먹으려 이동했다. 영복대부가 춘천의 명물 닭갈비를 먹자고 하여 아돈이 시내 명동거리로 안내했다. 춘천 명동거리는 드라마로 유명한 ‘겨울연가’의 촬영 장소이다. 가로등 곳곳에 배용준과 최지우 사진이 걸렸다. 태완일가가 “광성군할배 덕에 겨울연가 촬영지도 왔다”고 농을 던진다. 닭갈비 가게가 즐비한 가운데 그 중에 「고려」라는 상호가 왠지 마음에 닿기에 들어가자고 했다. 광성군께서 고려시대 인물이라 그런 모양이다.
춘천 닭갈비는 처음 먹었는데 맛이 있다. 소주를 곁들여 몸도 녹이고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아돈에게 나는 말이 많았다. 내가 아는 연안인들의 안부와 아돈의 근황, 그리고 그의 성찰된 세계관이 문학으로 승화하여 대성하기를 바라였다. 그는 충분히 그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영복대부의 동향인 완수일가가 오셨다.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영복대부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다며 대부와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춘천에서 아돈 이구영씨와 완수아저씨와의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숙소인 주문진을 향했다.
오던 길을 되돌아 횡성군을 가로질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니 봉평을 지난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의 그 봉평 장날을 한때 가고자 하는 희망을 품은 적이 있다. 소설속의 봉평 장날은 이제 더 이상 난장에서 솥단지를 걸어놓고 장국을 팔던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옛 향토 장터는 이제 마음속에 남겨두고자 한다. 봉평 터널을 지나니 대관령으로 터널을 열개이상 통과했다. 도시인이면 누구나 삶이 부대낄 때 이런 초목과 어울려 살아봤으면 하는 곳이다. 발아래 구름이 짙게 깔려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구름을 밟고 가는 기분이다. 동서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으니 멀리 평지와 동해바다가 파랗게 굼실대고 있다.
주무진에 도착하여 마을 이장님의 안내로 마을회관에 숙소를 정했다. 마을회관에 숙소를 정한 것은 숙박비가 많이 들어 부산 진구청에 근무하는 청년회 전임 선명회장이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선입견으로 시골 마을회관쯤으로 여겨 조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틀렸다. 읍내 번화가에 있는 건물로 오래되었지만 깨끗이 정리정돈이 되어있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보일러를 얼마나 가동했는지 발바닥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로 복어를 먹기 위해 횟집을 찾으려니 이장님이 만류한다. 어판장에 가서 복어를 사서 횟집에 가져가면 저렴할 것이란 얘기를 듣고 영복대부와 태완일가가 이장님의 안내로 시장을 보러갔다. 얼마 후에 복어를 사서 횟집에 가서 열어보았는데 A4크기 4접시에 10만원이다. 부산 일식식당에서 먹었으면 아마 1접시에 50만원은 족히 주었을 것이다. 크지도 않은 손바닥만한 오징어도 별미였다.
저녁식사 후 아이들은 숙소에서 자유롭게 놀고 어른들만 장소를 옮겨 방파제에서 스티로폼을 주워 깔고 한잔했다. 가로등 아래에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를 타고 넘으면 부인들이 남편들 품에 안긴다. 밤 11시 칠 흙의 수평선에는 오징어 배들이 불꽃을 피우고 있다. 그 불야성 아래에서 차가운 바다를 데우는 어부들의 열기를 피부로 느끼니 추운 줄 모르겠다. 몇 년을 가족동반으로 어울리니 서로 편안하고 분위기가 낭만적이라 학부시절 MT를 온 기분이다. 숙소로 돌아와 평소보다 적게 먹은 술에 심심풀이로 남자들끼리 화투를 잡았다가 2시간 만에 오링직전까지 갔다. 매번 경험하지만 놀음판에 내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글.사진/편집:東巖/松鶴)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항상좋은글 감사합니다. 둘째날도 기대할게요. 날씨가 오락가락합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
광성군할배 묘소주위가 아파트촌으로 둘러싸여 그 옛날의 정취를 잃어버려 아쉽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좋은글잘읽었습니다. 정부인 순천김씨 할머니제사와겹치지않았으면 내가가서안내했어야 아돈도만나고했을텐데 아쉽군요 여름휴가때 전화주시고 가족과가서하루유숙해도됩니다.
청장년회에서 기획한 이번 겨울 동해안 문화유적답사는 아주 유익했다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 자라나는 2세들에게 이런 현장 체험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 이번 답사여행에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