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Holy Bible) : 영어의 Bible은 헬라어 '비블로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기독교의 경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교회적인 용어이다.
성서 (Holy Scripture) : 라틴어 '스크립투라(Scriptura)'에서 유래된 것으로 '문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거룩한 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학문과 연구 대상으로서의 용어이다.
신구약 (New & Old Testaments) : 라틴어 '테스타멘툼(Testamentum)'에서 유래된 것으로 '약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옛 약속'(구약)과 '새로운 약속'(신약)으로 구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2.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성경은 약 1600년에 걸쳐 40여명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렇게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부르고 또 믿고 있는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딤후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 (벧후1:21)
성령께서 이 글들을 모으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34:16)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두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깨어 있으나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13:37)
3. 성경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구약 성경
구전 전승 시대 - 인류의 원역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직접 주시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시대로서, 글자가 생겨나기 이전 시대이다.
문서화 시대 - 주전 11,12세기경부터 기록된 문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다.
책으로 편집하기 시작한 시대 - 주전 8세기경부터 흩어져 있던 필사본들을 모아서 책으로 편집하기 시작하던 시대
신명기법전의 정경화 시대 - 주전 400년경 신명기법전(오경)의 정경화 과정을 거쳐 오경이 모든 회당에서 읽게 되었다. 이후에는 사람의 손으로써 새로이 중보되는 일이 없었다.
예언서들의 기록 시대 - 주전 7세기부터 5세기 사이에 예언서들이 기록되고 편집되었다.
'타낙'의 형성 - 유대인의 구약 성경 토라(율법서) 5권, 느비딤(예언서) 19권, 크투빔(성문서) 11권으로 형성되어 있다.
최종 정경화 - 주전90년 랍비들의 회의인 "얌니야회의"에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성경을 확정하였다. 이것이 '70인역성경(Septuaginta)'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 성경의 순서는 이 칠십인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신약성경
구전전승시대 - 주후 30년에서 70년까지로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기록시대 - 주후 40년에서 140년까지로 교회의 확장과, 사도들의 죽음, 재림의 지연 등으로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던 시대
집성시대 - 90년에서 140년까지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신약 문서들을 수집, 집성하였다.
정경화 촉진시대 - 140년에서 400년까지로 이단 문서들의 출현으로 정경화작업의 필요성이 대두하던 시대였다.
정경 완성 - 주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다나시우스의 안을 받아 들여 현재의 27권을 신약성경의 정경으로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4.정경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정경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정경(Cannon) : 헬라어 '카논'에서 나온 말로, '표준'이나 '규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말한다.
외경(外經) : 정경화 과정에서 정경에 들지 못한 책으로 구약 15권, 신약 63권이 있다.
위경(僞經) : 성경으로서의 가치 기준에 미달된 정경과 외경에 포함되지 못한 21권의 책들.
신약 성경의 정경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도적 권위를 지닌 책들이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영감성이 풍부한 책들이 정경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믿음의 법칙과 일치하는 책들이 정경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5.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모두 6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성경
율법서 : 5권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서 모세 오경이라고도 부른다. 모세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서 : 12권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기상, 역대기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로서 유대인의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시가서 : 5권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로서 개인적이며, 인간의 심령의 문제들을 다루며, 시와 체험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언서 : 17권 -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대선지서 5권)이 있으며,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소선지서 12권)가 있다.
신약성경
복음서 : 4권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으로, 이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3권을 특히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마태와 누가복음이 그 뒤를 따르며 요한복음이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다.
역사서 : 1권 - 사도행전으로 사도들의 기독교 전파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서신서 : 21권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가 있다.
묵시 : 1권 - 요한계시록
6.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자신이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 그와 같은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성령의 인도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성경을 그 역사적 문맥이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여야 한다. 즉, 성경 혹은 그 일부의 저자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였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계약공동체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성경의 해석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친교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신앙이란 성경의 메시지 및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구주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이다.
성경을 순종의 행동 속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1. 신학이란?
신학이란 날아가는 새를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학이란 하나님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신학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부한다. 신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방법이 있는데, 이는 신앙의 방법이다. 신학은 신앙의 맥락에서 태동한다. 신앙에서 유리된 신학은 공허하다. 신학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신학은 신앙을 명료하게 만들어준 다. 신학은 현재의 신앙 형태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신앙의 지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연구하는 것과 같다. 신학이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theologia'는 하나님(theos)과 논리(logia)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파생된 낱말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의 분과 속에는 일반적으로 네가지가 있다.
첫째,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이다. 성서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분야이다. 성서신학은 성경 사본의 형성, 본문의 비평, 편집의도에 따른 비평 등 여러 종류의 신학적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둘째,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조직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신학의 다양한 고리를 정리하고 체계화 하는 신학 분야이다. 조직(Systematic)이라는 말은 '체계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조직신학은 교의학(Dogmatic)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셋째,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이다. 역사신학은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신학분야이다. 이는 교회의 실천적 분야의 지나간 흐름을 추적하는 교회사 분야와 교회의 사상적 측면을 연구하는 교리사(사상사)분야가 있다.
넷째,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이다. 실천신학은 성경과 신학의 가르침이 실천적 삶의 측면에서 반영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 분야이다. 실천신학에는 기독교 교육, 예배학, 설교학, 기독교 상담학 등의 다양한 세부 분야가 있다.
2. 계 시
신학이 하나님을 공부하기 위하여는 자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자료를 얻는 사건을 우리는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이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계시의 지식은 인간 이성을 초월한다. 하지만 계시의 지식은 이성을 폐지하는 것이기보다는 이성을 교정하며 교양시킨다.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이성은 더욱 온전해지며, 더욱 합리적이 된다.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며,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자꾸 공허한 생각만을 전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찾는 길을 열어 주지만, 다만 그길을 걷는 자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랑을 받는 가운데, 신앙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 계시가 잇고, 믿음이 없는 곳에는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참된 모습, 하나님앞에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 또한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인하여 새롭게 드러나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계시는 약속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며, 우리는 전에는 결코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대면하게 되며, 그 세계 속으로 초대받는다.
계시의 종류
일반계시:
자연, 양심, 역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행위, 존재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찬송가 301장 눅13:4- 실로암 망대사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일반계시는 인간의 죄악된 습성으로 인해 일반적인 하나님 지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의 마음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경우 인간은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참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지만 인간은 그 뜻을 곡해하거나 울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이와 같이 양심은 죄를 송사하기도 하지만 때로 변명하기도 한다. 이는 양심이 언제나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화인 맞은 양심'에 관해 얘기한다.
(딤전 4:2)
특별계시:
자연계시는 이미 오류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뜻과 행위를 하나님믜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이를 우리는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가 주어진 것은 일반계시의 왜곡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함이여, 특별계시를 통하여 일반계시의 손상된 측면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특별계시의 창고이다. 그리고 특별계시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존재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 11:1-2)
계시와 이성
계시는 분명히 인간 이성의 능력을 초월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초합리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비합리적 성격을 띄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화된 이성'과 모슨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은 인간이 감각, 이성, 상상력을 활용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계시와 해석
계시적 사건에는 언제나 해석이 따라 온다. 예를 들어 바울이 다메섹 사건에 믿음의 해석을 하였기에 그 사건은 바울의 인생에 계시적 사건이 될 수 있었다. 믿음의 자세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믿음의 눈이 닿는 곳마다 모든 땅은 하늘로 불타오르며, 모래 한 알 속에서도 하나님의 세계가 펼쳐진다.
3. 성 경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지 성경의 문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문자와 하나님의 영이 합쳐진 것이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흐름속에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다. 우리가 이 기록된 문자의 문자화 과정을 역추적함으로써 최초의 감동에 참여할 수 있다. 조립 과정에 하나님의 성령이 개입했듯이 이제 분해 과정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개입하셔야 한다.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은 문자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앎의 내용은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와야 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과 만남의 세계 속에서 좋은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말씀의 세계를 떠올려야 한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래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2)
천지를 창조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제 우리 가운데 있다. 우리는 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말씀을 만나야 한다. 말씀과 만난다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며, 암송하는 것이며, 또 말씀을 개인화 하는 것이며 말씀의 틀로 나의 삶과 상황을 진단하는 것이다.
4. 신 론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의 몇가지 이름이 나온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최초로 나타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이며 그리스어로는 '데오스'(theos) 이다. 엘로힘은 우리말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엘로힘'이라는 단어와 함께 '주'(主)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라는 표현이며, 그리스어로는 '퀴리어스'(kyrios)라는 표현이다. 또 이와 함께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있는데, 이는 '여호와'(jehova)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라는 뜻을 의미한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야훼'(Yahweh)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 신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임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보혜사 성령이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조주 안에서 구원자 안에서, 보혜사 안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났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모호한 신 개념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오신 하나님, 성령 안에서 우리를 어루만지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었는가의 문제이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면 삼위일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음의 구절에서 예수에게 하나님에게만 돌려지는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한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계1:6)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가 이룩한 십자가의 성취는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도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일 때 예수가 진 십자가는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위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성립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또한 성령에 관해서도 주관적 느낌인가, 한때의 흥분이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제자들의 체험이 한때의 감정이었다면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기운이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제자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다. 예수의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경에서 성령은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신학 개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셔서 헤매고 있는 피조물을 위하여 탄식하며 친히 간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불변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우리는 하나님의 고정성과 무감각성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은 죽은 우상과 같이 말하지 못하며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물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 인격자이며, 우리가 아는 바 인격의 원천이 되신다. 또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가운데 모든 시대와 기한을 변화 시키는 분이다. 결국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심 안에서의 불변하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에게 있어서 전능성은 절대적 전능성과 섭리적 전능성이다. 절대적 전능성은 당신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섭리적 전능성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과 동시에 이 세상의 질서와 법칙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에 상응하는 분이므로,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곧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펼쳐 나가는 능력은 기계적이며 마술적인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다.
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의로움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모든 의로움의 궁극적 표준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도덕,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의 의로움이 신앙인의 성품안에 전달된다. 하나님의 의는 동화시키는 의로움으므로 유통이 일어날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
5. 창 조
창조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를 비신격화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현실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선하게 창조되었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무대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 영광을 재현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단순히 반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의식하고 기뻐하는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창조신앙은 인간 삶에 있어서 염려의 문제에 대해 견고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창조의 범위에 있어서 보이는 피조물 뿐 아니라 자연법칙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자연법칙을 무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도 자연 법칙을 존중하고 그것을 방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자신이 세우신 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유보하기도 하신다.
창조론은 두가지 철학적 이론을 반대한다. 그것은 이원론과 범신론이다. 이원론은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세력으로 이해하는 이론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는 세계를 열등한 물질과 우월한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원론의 입장을 따를 때 세계의 어떤 부분은 악마적이 되거나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창조론은 세계를 선한 것임을 말한다. 창조의 세계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선하게 창조되었다. 창조의 세계는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의 손길이 미치는 곳이다.
범신론은 세계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보는 일원론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세계의 모든 것은 신적인 질서의 표현이며, 일체의 자연은 신이며, 신은 곧 일체의 자연이란 이론이다. 이에 의하면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6. 하나님의 예정
칼빈의 예정은 이중 예정으로 선택과 유기이다. 선택이란 인류의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에 의하여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선택의 교리는 자연적으로 인류의 얼마는 선택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기란,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은혜의 역사로,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또 그의 공의의 현현을 위하여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게 될 때, 유기는 두가지 목적을 가지게 된다.
첫째, 중생과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신다.
둘째,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수치와 분노에 임하게 하신다.
예정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권리 요청의 차원에서 하나님께 구원에 대한 형평성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그 인류는 죄로 인하여 약속된 죽음에 놓이게 된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간과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간과의 이유의 설명을 하나님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7.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 사람의 삶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하여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예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수 사건을 통하여 역사 속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디.
예수는 탄생한 이후, 공생애 사역에 종사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준비하였다. 예수는 지적인 차원, 육신적 차원, 영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라갔다. 인간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배우기를 즐려하였으며, 일상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다.
예수의 생애는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로 요약된다. 예수의 생애에 많은 고난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고난이었다. 예수는 인간을 위해 고난을 당했다. 구약의 틀에서 이해해 볼 때, 예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예언자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둘째, 예수는 제사장과 같이 사람들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사람들의 병든 것과 연약함을 담당하는 가운데 예수는 스스로 저주의 길로 들어섰으며,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케 하였다
8. 성령론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다. 성령 하나님은 객체적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며 스스로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분이다. 성경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저정의를 가진 인격자 하나님이다. 성령은 에너지나 힘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은 성령의 현재화의 사역이다.
만약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의 객관적 사역에 머무르고 만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고 탄식하는 영이시다.
성령은 또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전도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전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을 뜻한다. 성령의 은사는 지체로 하여금 다양한 기능을 감당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며 덕을 끼치며 유익하게 하려 함이다. 성령의 은사는 완성품으로 주어지기 보다는 씨앗으로 주어진다. 성령의 은사는 외재적 은사와 내재적 은사로 나뉜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은 능력의 영인 동시에 생명의 영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는 궁핍함이 사라지고 풍성한 삶이 시작된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많은 열매가 맺혀진다. 성령의 은사는 열매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벧후1:5-7)이며 바울에게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은,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2:22-23)이다.
9.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적 이끄심은 하나님의 보존, 동행, 인도하는 세가지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보존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금도 피조물의 호흡을 지키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동행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함께 계시는 가운데 피조물을 지탱하고 피조물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시는 사역을 뜻하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변질시키지만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인도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인데, 모든 사건들을 사용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섭리적 이끄심을 믿는 신앙은 자연 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인생과 역사의 객관적 법칙을 존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체적 인도를 체험하는 것이 섭리적 신앙이다. 섭리적 신앙에서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입체적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고난 속에서 중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신앙인을 도우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적 이끄심을 따라서 환난 속에서 인내한다. 우리는 인내하는 가운데 한 두 번 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는 성품의 사람, 곧 연단의 사람이 된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서 변덕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연단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 사람에 대해서 소망을 회복하는 사람이 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1. 무속신앙
한국에서는 샤마니즘이 종교적 바탕, 4세기 이후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 도입 혼합하여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 형성.
무속의 정의: 샤만(shaman)은 퉁구스족의 토어(주술사, 무당, 의약사) => 종교적 체계(샤마니즘), 신비적인 엑시타시 속에서 신과 교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는 초자연적 신령과 교접을 통해, 자연과 인생의 길흉운명을 조절하려는 원초적인 기술로서 주술(magic)이며, 종교임.
1) 신관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믿는 Animatism => 자연물, 모든 물체에 정령이 있다(Animism: 유령관), 한국은 유령관에서 유신관으로 바뀜.
유일신도 아니요 多神을 통솔하는 단일신도 아닌 일신의 萬化.
신의 사자와 신의 化現이 동일시 되는 특징 => 엑시타시를 구사, 죽은 자의 영과 산 자의 영들의 맺힌 한을 풀고 禍神을 조절.(제천의례, 무당굿)
2) 세계관
굿을 통해 무병장수와 사후복락을 빔.
이승과 저승이 있고 그 중간에 그 죽은 망령들이 거처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곧장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에서 헤맨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망령(처녀, 총각, 과부...) 그러나 죽은 자의 영혼은 반드시 저승에로 가야 한다.
저승은 윤리, 도덕적 책임을 묻는 심판주가 있는 곳이 아님. 그저 죽은 자들과 下界諸神靈들이 모여사는 영들의 세계.
* 무속의 제사
무당/박수는 영계와 인간 사이의 중재 역할, 이는 巫를 통해서만 가능. 엑시타시와 신들림 속에서 영계를 탐지하고 영능을 행사할 수 있어 제사, 주술 등으로 끌어들이는 제사(기능: 사제직-제례수행, 靈意전달. 예언직-점치는 일, 醫巫職-악령을 쫓아냄) cf, 祝祭 용어 설명
* 무속의 제의
巫 - 여자가 무형의 신을 섬길새 양편 소매를 드리우고 춤을 춤으로 신을 내리게 하는 형상.
工 - 하늘과 땅을 연결, 人 - 춤추는 사람
=> 가무(노래와 춤)로서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게 함.
* 굿
무교의 종합적 표현, '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화근을 없애고 축복을 비는 제의 =>가치기준이 윤리적 선악이 아니라 소유의 유무 => 목적 위주, 방법과 과정 경시하는 책임의식의 결여 => 교회의 기복신앙
3) 특성
세상적, 현실주의적 성격: 하늘나라 개념이 없다. => 사회성의 결여, 세계관이 가족과 동네의 차원을 넘지 못함 => 내세적, 영적세계, 미래적 전망이 없다. 망령의 명복을 비는 것도 후손들의 평안을 위한 관심. =>근본적 개조나 혁신이 없다.
책임의식의 결여: 저승은 심판의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삶의 연장. => 신령과의 수직적 관계만 있고 수평적인 사회적 관심이 부족. => 교회의 양적 부흥에 치중
의타성과 운명신앙: 주체적 신앙의 결단없이 무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사화복을 의뢰, 귀신들의 비위를 맞춰 만사를 해결하려함. => 팔자소관 => 나약한 인간 => 퇴행적 보수주의, 비관주의 => 패배주의
보수성(정체성): 무교가 타종교와 만날 때, 타종교의 요소 중에서 무교의 성격에 맞는 주술적인 면은 쉽게 받아들이나 상반된 것은 배타적 의식이 강하다. 이는 보수성이라 볼 수 있는데 보수성이 강하면 창의성이 부족해진다. 무교는 혼합적 기질이 강한 반면 타종교와의 본질적인 것과 동화하여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는 종교절충주의을 형성하지 못했다.
역사의식 결여: 꼭같은 일을 하는 천편일률적인 기계적 반복만이 존재(순환적 자연 - 비역사, 역사문제의 해결은 무망. * 역사-과거의 잘못을 반성 새로운 현실을 창조
2. 불교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고등종교.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형성 측면에서는 가장 소극적임. <= 이조 오백년의 억불승유 정책. 한때 일제의 한국지배 도구로 육성, 불교의 관용성은 무교와 깊게 혼합 => 불교의 민간신앙화.
1) 신관
인간 석가모니가 도달한 불타(진리를 깨달은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 => 수양, 노력으로 불타가 될 수 있음. 불교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일어나는 일체를 고뇌로 본다.
인간의 생노병사,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 이 모두는 고뇌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이요, 불타가 되는 것이 목적.
불타는 신이 아닌 인간이므로 불교는 인본주의 신앙이요. 아래서 위로 향하는 신앙이요. => 신관은 무신론.
* 염불 : 인격적인 대상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생각하며 정신을 일념으로 집중시켜, 안정되고 평안함을 갖기 위함.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는 불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처럼 신과 타인을 무시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너'를 전제한 '나와너'의 종교와 구별된다. => 극단적 개인주의, 이웃에 무관심, 자기 신앙과 자기 구원에 촛점.
2) 세계관
인생의 존재양식: 사성제(Four Noble Truths)에서 인생의 전모를 설명, 인생의 모든 문제는 苦이며 고의 원인은 그릇된 욕구(misplaced desire)이다. 그런즉 생의 문제해결로 발정도(八正道, Eightfold Path)를 제안했다. 이 길에는 正思(right thoughts), 正業(right actions), 그리고 正命(right deeds)이 내포된다.
세계의 존재양식: 삼법인 즉, 현실은 괴롭다는 것, 세상 모든 현상을 원인에 의한 것이고 세상에 생겨나는 것은 정상이 없고 생겼다가 반드시 소멸되는 것(무상), 諸法無我(나와 제법도 무아임을 증명)
일체의 존재양식: 모든 존재양식은 相依相得의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
3) 특성
세계부정과 비관주의: 세계를 부정하는 비관주의에서 출발한 불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집착성을 버릴 것을 권한다. => 역사의식과 진취성 결여, 체념/ 무기력/ 비윤리적 성향
혼합절충주의: 무교와의 혼합속에 민중을 지배해 왔다. 호국불교의 소산인 대장경 역시 샤마니즘과의 절충을 의미(화랑도, 팔관회). 이조 때에는 음양오행, 지리, 풍수설 등의 잡설과 혼합 => 미신에 빠짐. 공리적 현실주의: 불교의 관용성은 대상을 변혁시키는 창조적 작용이 아니라 잡다한 것을 표용 => 고려의 호국불교(불교의 정치개입, 권력과의 결탁) => 기독교의 혼합현상(전도간, 통일교...)
은둔적 내향의식: 불교의 국교화 => 타락 => 이조의 억불숭유 정책 => 승려의 천민화 => 은둔, 교리 자체의 비정적 세계관과 해탈 추구, 현실의 혁신이 아닌 수용하고 적응하는 내향적 의식 형성 . 유교
공자의 근본사상 - 仁, 이조에 와서 인의 근본사상을 孝(유교 의식구조의 중심체제)로 둠 => 보수성, 정체성을 가짐.
1) 신관
死의 문제 보다 生의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둠. 그러나 실제는 生, 人道, 事人, 天理, 神, 天道, 事鬼를 전제로 하고 기초로 한다. 死 보다 生의 다 중히 여기는 유교에서는 귀신에 대하여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다.
* 유교의 귀신관 :
생존한 사람의 사고와 활동작용 즉, 정령과 형체를 말함. 사람은 본래 신의 신령을 가지며, 천지귀신에 통하는 까닭에 귀신이다. 사람의 신령성을 강조
鬼(사람이 돌아가는 것 => 넋이 땅으로 돌아간다, 넋)
神(사람이 죽으면 心思를 가진 혼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고, 형체는 땅으로 돌아가 신이 되고 형체의 주제인 넋은 鬼로 된다는 말) ==> 귀신은 인격신이 아니고 德性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이 섬길 것은 사람이요 귀신이 아니며 生적 문제요 死적 문제가 아니다. ==> 인간이 전지의 일부분으로써 또는 귀신의 덕의 분신으로써 그 자체가 한 천지이며, 귀신인 것을 자각, 자득함으로써 자제의 誠을 다하여 천지귀신의 실상인 誠과 如一하고자 노력하는 것 =>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인간교, 인본주의 종교.
2) 제사관
상제즉천(上帝卽天)과 조상은 제사의 중요한 대상이고 유교사상의 근원.
孝 : 德과 仁의 근본, 조상신에 대한 제사(땅으로간 鬼로와 하늘로간 神을 도로 다시 합해보려 함이 곧 제사, 孝의 극치라고 공자가 주장,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확인하고 선조의 현존하심을 되살리면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경험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새김, 그러나 인격신을 섬기고 대화한다는 관념은 유교에 없다. => 죄의식/회개가 없다 => 형식주의) 종교적 의미를 가짐.
3) 특성
현세중심의 현실주의: 유교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도모하려는 윤리학. => 신의 문제, 사후문제등은 무관심 => 절대가치와 관련한 선악의식, 죄관이 결여, 현실문제에 중점(선비에겐 출세 중요)
이기적 가족중심주의: 혈연, 정실관계에 의한 가족중심 관념(삼강오륜) => 주체성 결여, 창의성 약화
주세성의 상실: 개인의 운명이 가족에 의해 좌우됨(출세의 가문의 명예), 주체적이 사람이 아니라 체면과 형식이 중요.
보수적 권위의식: 주체성이 없는 개인을 지탱해주는 요소는 가족과 전통의 권위. 잘못된 효의 개념으로 특권계급을 존속케 하고 윗 사람에게 절대복종 개념 낳음 => 보수성, 폐쇄성.
상향의식: 선비의 속성중 하나는 감투와 권력, 생활에 관여 않음.
4. 토착 종교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
1) 무속의 영향
현세적 기복신앙(현세적인 재앙을 면하고 그래서 목사가 현세적 축복만을 빌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경향, 잘못된 예배와 헌금의 동기 => 사랑과 희생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생각해서는 안됨. 이것없이 현세적 축복만 추구한다면 기독교적이라기 보다는 무속적임)
主情주의 예배(바울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은 열중한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요한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뜨거움 없는 상태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한 것이지 열광적으로 이끌어가는 광적인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님. 성경의 열심과 샤만의 엑시타시는 다른 개념, 복음의 내용이 없는 열광적 예배는 생활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감정의 발산으로 끝나고 만다.)
개인주의 신앙(샤마니즘적인 개인구복의 신앙이 많다. => 그리수도의 몸의 지체로서 연합된 삶 결여)
2) 불교의 영향
타계주의 신앙(비관적이고 도피적인 인생관 <= 비존재 상태인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 인간의 생의 가치와 의미 축소, 타계 사모, 기독교의 지나친 내세주의는 그리스도적이라기 볼 수 없다. =>책임의식, 사회적 무책임)
혼합 절충주의(불교와 무교의 영합 => 기복사상)
3) 유교의 영향
외형적 신앙: 유교의 외면적 윤리 영향, 기도할 때 눈물은 있으나 거지를 향한 냉정한 태도(표리 부동한 이중생활, 신앙을 단지 천국 가는 입장권같이 생각 => 교회안과 밖의 삶이 같아야)
편협한 분파주의 신앙: 유교의 가족적 이기주의 영향 => 교회분열 => 선교에 악영향.
인본주의 신앙: 인격적 신을 믿지 않은 유교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인본주의화, 복음성 상실. 눈치보는 신앙생활 =>진실성이 없다. 직업적 소명의식이 부족하여 출세주의로 치닫고 있다.
I. 교회음악의 정의
교회 음악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의 지체가 된 유형, 무형의 교회가 그 교회 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음악적 활동입니다.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드는 창작과정과 하나님께 모든 종류의 연주를 통해 드려지는 행위와 회중의 입장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감상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II. 교회음악 목적
첫째는 이사야 43 :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찬송'이란 단어가 351회, 신약성경에 48회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인간에게 찬송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인간으로 지음 받은 목적입니다. 또한 찬송은 오직 하나님만을 그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는 찬양 가운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응답하며, 치유되며, 성도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것 입니다.
셋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창조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II. 교회음악의 분류
교회음악의 목적에 따라 교회 음악을 내용적인 면에서 구분해 보면 예배를 위한 음악, 전도를 위한 음악, 교육을 위한 음악, 교제를 위한 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목적에 맞는 적절한 사용이 요구되어집니다.
찬송가의 분류
복음가 福音歌 : 1911년 성결교회에서 편찬한‘복음가’라는 책이름에서 처음 사용 되었습니다. 복음적인 노래라는 뜻으로 영어 Gospel Song이나 Gospel Hymn을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편집된 찬송가 중에는 민요나 잘 아는 노래에 목회자들이 새로운 가사를 붙인 것도 있었고 부흥회 시 부르는 복음찬송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복음성가 福音聖歌 : Gospel Song. 말그대로 복음의 내용을 노래하는 거룩한 음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송 福音頌 : 복음Song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복음 찬송이라는 뜻 입니다. 그러나 복음노래(福音)라는 뜻과 찬송(頌) 이라는 뜻의 합성이라고 볼 때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복음 성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복음찬송 : Gospel Hymn. 복음성가 중 가사나 음악적 내용으로 볼 때 찬송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교리, 윤리,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간증, 훈계, 권면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배찬송보다는 설교 후 결단, 헌신찬송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찬미 : 복음찬송과 같은 말, Evangelical Hymn
찬송 贊頌 : 교회에서 부르는 정선된 회중의 노래.
찬양 : 1894년 언더우드가 편찬한‘찬양가’라고 명명하여 이미 찬양이라는 단어가 이미 찬송이라는 어휘와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비단 음악만이 아니고 시나 말로도 가능한 것으로 보아 찬송의 개념보다 넓습니다. 한동안 예배와 관련되었을 때만 국한하여 사용되어 왔으나,‘경배와 찬양’집회 이후 찬양이라는 말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찬양합시다’하면 으례히 '경배와 찬양합시다'라는 말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이와함께 찬양 집회’‘찬양 사역’‘찬양 팀’‘찬양 노래’등 복합 어휘로서 많이 사용되어 의미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찬미 : 카톨릭, 성공회에서 사용. 찬송, 찬양과 동일. 1892년 감리교에서 찬미가라는 찬송가집으로 사용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경배와 찬양 : 1980년대 이후 가스펠과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가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선택하여 예배에서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경배와 찬양을 내용으로 되어있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복음가요 : 다양한 장르의 가요풍 음악에 복음적 가사를 부친 것. C.C.M과 같이 사용됩니다.
C.C.M :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 크리스쳔 뮤직. 새로운 대중음악이라는 슬로건으로 1970년대 초 태동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의 언어인 대중음악으로 그들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한다(양동복:C.C.M)’는 것이 이들의 목표 입니다III. 회중 찬송의 역사
출애굽기 15장 1절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초기부터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후에는 회중 전체가 찬양했다기보다는 조직화된 성가대 (레위인)가 찬양하면 일반 회중은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함을 볼 수 있습니다(역대하 5:11-14).
신약시대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훈련받은 성가대가 없었으므로 일반 회중이 찬양하였고, 박해를 받으면서는 지하에서 고요하게 찬양하다가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다시 조직된 성가대에 의해 불리워지고, 회중 찬양은 카톨릭 교회에 이르는 중세까지 그 기록이 없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시 '만인 제사직'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회중찬송은 다시 부활하게 되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개념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 현재 우리가 부르는 회중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예배 중에 사용되고 보급되었습니다.
- 회중 찬송은 평신도의 위치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며 직접 찬양으로 영광 돌릴 수 있는 음악이므로 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