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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삼태극
고누놀이와 바둑으로 보는 참역사
1. 머리말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 시골에서 ‘호박고누판’을 땅에다 그려놓고 동네 아이들과 ‘고누놀이’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때는 그것이 고누놀이인지도 모르고 놀았다. 고누놀이는 발굴된 공식기록상으로도 최소한 1천2백년이 넘게 우리 생민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윷놀이’지만 김홍도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고누놀이는 일상의 힘겨운 로동을 잊고 시름을 달래주는 생민들의 삶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설명: 단원 김홍도 풍속도첩의 13번째 ‘윷놀이’그림(국립중앙박물관소장)-기존의 교육과학부 제작, 학생교육용 교과서에는 ‘고누놀이’라고 쓰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1891∼1968)이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조선민속자료 조사에서 ‘지기지도(地碁之圖)’ 즉 ‘고누놀이그림’ 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그대로 써 온 폐해다. 친일청산이 안된 채, 해방을 맞이하고 우리는 이 일인의 표기를 그대로 써왔던 것이다. 위 그림은 분명히 윷놀이 판이다. 선사시대로 올라가는 둥근모양의 윷놀이 판은 경북 영일군 칠포리 바위에 새겨진 원형의 윷놀이 별자리 구멍에서 찾을 수 있다. 윷판이 지금은 4각형으로 그려 쓰고 있으나, 원래는 하늘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원으로 하여 천체를 운행하는 별을 그린 것이며 특히 윷판가운데 별을 북극성으로 하여 이를 중심으로 북두칠성 4개를 그려 넣어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에워싸고 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http://cafe.daum.net/mookto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누놀이를 하면서 자라는지 궁금하다.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거의 잊혀 져 간다고 한다. ‘빨리 빨리, 바쁘다 바빠’ 라는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이제는 박물관에 가서나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에 바둑과 장기는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바둑은 경기대회를 정기적으로 꾸준히 추진하고 고급두뇌놀이라는 인식이 생민저변에 깔려 있어 앞으로도 발전계승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한중일 3국이 국제대회까지 만들어 시행함에 따라 동양 삼국에서는 바둑올림픽이라고 할 만큼 성행하고 있다. 소식에 의하면 한국의 바둑기사들의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이 바둑의 종주국임을 등록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한 고누놀이와 바둑은 언제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대부분의 전통놀이문화에서 보듯이 지금처럼 서양적 사고방식이 지배하여 기록을 남겼으면 좋으련만 그냥 세대를 거쳐 이어져 왔을 뿐 공식적으로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유물과 문헌 구전 그리고 언어학적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다. http://cafe.daum.net/mookto
2. 고누놀이와 바둑은 어디서 왔는가,
일반적으로 고누는 바둑과 장기의 원조라고 알려져 있다. 고누를 한자로 기碁라고 하는데 그 뜻도 바둑, 바둑돌, 장기, 장기짝이라고 한다. 따라서 고누와 바둑과 장기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으며 고누가 바둑보다 원시적이라는 점에서 고누에서 바둑이 나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고누놀이는 세계에 40여 가지가 있다고 하며 그 중 20가지가 한반도에 있다. 이는 세계고인돌의 절반이상이 한반도 권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 고인돌의 원조가 한반도 한겨레라는 근거는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가장 복잡하게 발달한 것에 이르기 까지 가장 다양한 모양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모두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산업혁명에 바탕을 두고 있는 오늘날 첨단과학기술의 보유국을 보면 알 수 있는 이치다. 기초과학에서부터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이며 이들에게서 오늘날의 첨단과학기술이 나왔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재화를 생산케 한 과학기술의 원조가 이들 나라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똑 같은 경우를 고누놀이에서도 대입시켜 고누놀이의 원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정할 수 있다. 세계고누놀이 중의 절반이 한반도에 모여 있고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것까지 다 모여 있다. 따라서 앞서 문자적으로도 논증한 것을 비롯하여 고누놀이의 원시적인 형태와 가장 복잡하게 발달한 형태 그리고 가장 다양한 형태가 모두 한반도에 있다는 점에서 고누놀이는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http://cafe.daum.net/mookto
사진설명: 북조선 개성 만월대유적지에서 발굴된 4각형이 4개인 48교차점의 참고누판-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복잡하게 진화된 참고누판으로 알려져 있다. (mbc문화방송 특집다큐, ‘남북최초 공동 발굴, 고려왕궁 만월대’ 서기2007.) 국내 기존의 참고누판은 모두 4각형이 3개인 24교차점이었다. http://cafe.daum.net/mookto
그러면 바둑과 장기도 한반도 한겨레가 발명한 것인가, 장기는 바둑과 고누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여기서는 바둑만 살펴보기로 한다. 바둑의 원조가 어디냐에 대하여 몇 가지 설이 대립 하고 있다. 한반도 한겨레기원설, 차이나족 기원설, 티벳기원설, 인도기원설 등이다. 먼저 차이나족 기원설을 보면 다시 시기별로 여러 가지로 나뉜다. 요순시대설, 춘추전국시대설, 한나라시대설 등이다. 여기서는 약 4천년전 한대륙(중원대륙)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요순시대설을 대표로 살펴본다. 바둑이 요순시대에서부터 있었다고 하는 설은 박물지博物誌라는 문헌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러한 문헌이 요순시대 것이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 이상 단순히 문헌기록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더구나 요순시대는 신시배달국 치우천황시대와 단군조선의 2세부루단군의 치세를 받아 우리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즉 오행치수의 법, 관혼상제법을 배워 갔으며 단군조선의 음률과 도량형에 맞추어 통일했다. 요순시대의 하나라는 단군조선에 조공을 하며 종주국으로 섬긴 제후국이었다(歲二月 東巡守 至于岱宗 協時月 正日 同律度量衡 修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 如五器卒及復-서경 경문편/한단고기 216쪽. 임승국역주. 정신세계사 2000.). 따라서 문화적으로도 요순시대는 우리의 영향을 직접으로 받았다고 볼 때 바둑이라는 놀이문화도 단군조선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오래된 바둑유물을 가지고 바둑의 기원지를 찾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오래 된 것이 발견된 곳을 바둑의 기원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 오래된 바둑판이 다른 곳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차이나족 기원설의 경우, 이성계 ‘리씨조선정권’ 5백년을 지나면서 대 중국 사대주의 사상이 골수에 사무쳐 버렸고 그 폐해로 모든 것이 중국 차이나에게서 왔다는 풍토가 생긴 것을 감안하면 사대주의 폐해에서 중국기원설이 나왔다는 것을 배제 못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티벳기원설과 인도기원설은 어떤가, 티벳은 우리와 역사 문화적으로 신시배달국 또는 단군조선에서 분가해 나간 형제관계라는 점에서 한반도한겨레 기원설과 동일시하여도 된다고 본다. 즉 신시배달국 또는 단군조선 시절, 티벳에 우리의 바둑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도기원설을 보자. 인도기원설이 내세우는 근거는 산스크리트어(범어)에서 찾는다. 산스크리트어로 바둑을 ‘바드’라고 부르는데 ‘에워싸다, 맹렬히 압박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현재 바둑의 전술방식과 맥이 닿아 있어서 설득력을 갖는 모양이다. 그런데 산스크리트어의 뿌리가 천축 ‘실담어’이고 이는 우리 사투리라는 점에서 어원적으로 우리말에서 나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바둑’과 ‘바드’가 소리가 유사하게 난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http://cafe.daum.net/mookto
더구나 인도와 한국은 수천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해왔고 그 증거의 한 사례는 인도의 동남부지역 타밀라두주와 스리랑카에 상당수 거주하는 타밀족(인더스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족의 후예)의 말과 우리말이 무려 1천여 개가 같다는 점이다. 세계4대 문명 중의 하나로 알려진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족(타밀족)의 말과 우리말이 1천개가 넘게 같다는 것은 단일문화권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인도의 고어로 알려진 산스크리트어의 뿌리인 ‘실담어’는 한국의 사투리인데 무려 1만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가 인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도의 고인돌이 한반도에서 왔다고 인도의 메갈라야 주 박물관장이 실제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전역에 퍼져 있는 삼사상 유물과 유적 그리고 힌두교의 사두들 말속에서 우리와 같은 의미의 삼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삼사상의 뿌리는 우리 한겨레이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바둑역시 한국에서 인도로 문화전파의 한 일환으로 전해 졌을 가능성이 크다. http://cafe.daum.net/mookto
한편, 바둑을 두는 방식을 볼 때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의 재래식 바둑인 순장바둑을 가지고 있다. 순장바둑은 순장점을 바둑판 한폭판의 점을 포함 모두 17개로 찍고 여기에 흑돌과 백돌을 각각 8개씩 서로 마주보게 하여 미리 바둑판에 올려놓고 시작하는 방식이다. 승패는 나중에 빈집을 만들어 결정한다. 그리고 이 순장바둑에는 하늘자손을 나타내는 하늘의 별과 관련된 사상이 깃들어 있다. 순장順將이라는 벼슬아치가 순회하면서 북극성을 지키는 것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바둑서지학자이자 바둑문화재 수집가인 안영이씨가 인도 북부의 시킴왕국의 왕족으로부터 천으로 된 바둑판을 선물 받았는데 순장바둑으로 보았다. 이 천바둑판은 17줄로 되어 있는데 티벳의 돌바둑판이 17줄로 되어있는 것과 같다. 북인도 시킴지역은 인도원주민처럼 살이 검고 코가 큰 흑인계통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티벳 계통의 동북아 황인종들이 대부분을 차지는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히말라야 산맥을 중심으로 황인종계열의 네팔, 부탄, 그리고 티벳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인도바둑은 티벳 바둑과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또한 순장바둑이라는 점에서도 역사 문화적으로 인도바둑은 한국에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순장바둑의 역사는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세계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하는 ‘목화자단기국’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후 후고려시대, 리조시대까지 꾸준하게 순장바둑이 이어져 왔다. 만약에 바둑이 차이나족에게서 건너온 것이라면 우리고유의 순장바둑이 그 시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축구나 야구 같은 놀이가 서양에서 건너온 지 1백년을 상회하지만 우리고유의 축구나 야구 등이 없다는 점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놀이의 원형을 쉽게 개조하여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 순장바둑은 모두 17개의 점을 찍어놓고 거기에 흑백돌을 미리 올려놓고 시작하는데 반해 차이나족 바둑은 흑백돌 2개를 미리 올려놓고 시작하고, 일본바둑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바둑 두는 방식이 한국의 바둑이 가장 복잡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한.중.일 바둑 중에서 가장 복잡하게 진화, 발달한 것이라고 본다. 가장 복잡하고 고도로 발달된 현대과학기술을 보유한 서양제국이 현대과학기술의 원조이듯이, 바둑의 원조도 가장 복잡하게 진화한 방식을 가진 한국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http://cafe.daum.net/mookto
그림설명: 현재 일본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목화자단기국’ 과 ‘바둑알’이다. 한국고유의 순장점 바둑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선명하게 표시하기 위해서 참역사동아리 삼태극에서 원판에 새겨져 있던 순장점위에 바둑알을 올려놓아 순장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고유의 바둑은 이렇게 16개의 순장점위에 바둑알을 미리 올려놓고 시작하였다. 위 목화자단기국와 수정으로 만든 바둑알(돌)인 홍아와 감아 그리고 은평탈합자를 백제 의자왕이 일본왕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http://cafe.daum.net/mookto
바둑을 현재 차이나족 문자라고 하는 ‘한자’로 기棋라고 하는데 차이나 족에게는 이 기라는 문자자체에 ‘바둑’이라는 뜻이 없다. 차이나족 사전을 보면 단순히 바둑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즉 한나라 보다 앞선 시대의 바둑을 기록한 문헌이 '좌전'이라고 하는데 좌전은 '말을 둘러싸 잡아먹는 것이 위기圍棋다' 라는 식의 설명뿐이다. 그것도 ‘기棋’ 라는 한 개의 문자로만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인지 ‘둘러싸다’ 는 뜻을 가진 ‘위圍’자를 하나 덧붙여서 바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바둑이 차이나족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어적으로 실토하는 증거라고 본다. 우리처럼 ‘바둑’ 기棋라고 글자 자체에 대하여 뜻을 풀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바둑은 차이나족 기원설보다는 우리 한겨레가 만들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편, 후한이 망하고 수나라가 설 때 까지 이른바 위.촉.오 삼국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이어 5호16국이 한대륙에 난립한다. 이 때 한대륙 북방에는 가장 강력한 북위가 서는데 이는 선비족의 나라다. 그런데 이 선비족도 바둑을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선비족은 흉노족의 후예이며 흉노족은 단군조선에서 가지 쳐 나간 우리의 갈래 겨레다. 따라서 바둑이 전통문화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비족은 단군조선에서 바둑을 이어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고누놀이와 바둑개관
고누놀이와 바둑은 모두 다 성장기어린이 및 성인의 두뇌개발과 집중력향상에 아주 좋은 놀이로 알려져 있다. 고누놀이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바둑판 못지않게 복잡한 것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바둑은 고누놀이가 최고로 진화한 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우의 수가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어떻게 머리를 쓰느냐에 따라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방송이나 일간지에 바둑대회나 바둑전술 강의가 정기적으로 나오는 지도 모를 일이다. http://cafe.daum.net/mookto
1) 고누놀이
고누는 ‘고노, 꼬노, 꼰, 꼰질이, 고노’ 라고도 한다. 고노는 ‘소학언해小學諺解’ 에 따르면 “높프며 낫가옴을 고노와 막히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고노와’ 는 무엇을 ‘꼬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꼬누다->고노다-> 고노-> 고누 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사람을 째려볼 때 ‘꼬나본다.’고 한다. 고누놀이에서도 고누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사람이 서로 이기려고 상대방을 꼬나보기 때문에 “꼬누, 고누” 로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누놀이 흔적은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 가마터에서 나온 참고누판이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서기9백년대 초라고 알려져 있다. 북한학계가 보고했다는 기록에 의하면 10세기 초에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가마터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던 갑자가 발굴되었는데 이 갑자에 ‘참고누’판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는 하대신라(이른바 통일신라)말이나 후고려(고려)초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리조시대 건물인 ‘소쇄원’의 마루에도 고누판이 그려져 있다고 하며, 나주 철야마을 만호정 마루판에도 고누판이 그려져 있다. 이외에도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서도 발견된다.
사진설명: 나주 철야마을 만호정 마루판에 새겨져 있는 참고누판-4각형이 3개인 24교차점의 고누판으로 참고누판의 전형이다. 출처:http://blog.daum.net/dj062/18267822
고누의 종류에는 전 세계적으로 40여 가지가 있다고 하며 그 중 절반이상이 한국에 있다고 한다.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밭고누, 강 고누, 우물고누, 곤질고누, 네줄 고누, 아홉줄 고누, 짤 고누, 장수고누, 꽂을 고누, 호박고누, 팔팔 고누, 불알고누, 문살고누, 십자고누, 사발고누, 패랭이고누, 자전거고누, 자동차고누, 줄고누, 참 고누, 포위고누, 왕 고누 등 이다. 이는 말판의 모양에 따른 분류이며 총 20여 가지다. 아래 그림은 몇 가지 고누놀이판을 그린 것이다. http://cafe.daum.net/mookto
이 고누놀이 방법은 고누판 위에서 수평이동을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모두 잡아먹거나, 상대방의 말을 못 움직이게 가두거나, 상대방의 집을 먼저 차지하면 이긴다. 시작은 실력이 달리는 사람이 먼저 하거나 가위 바위 보로 정하여 할 수 있다. 말 수는 고누판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두 개 또는 네 개로 한다.
(1) 몽골과 한대륙에서 발견되는 고누놀이
한국에서 발견되는 가장 단순한 고누는 우물고누다. 다른 말로 ‘샘고누 강고누’라고도 부른다. 이 놀이 방법은 한 칸씩 이동하여 상대방의 말이 못 움직이도록 길을 막을 때 승패가 결정된다. 이 고누놀이와 유사한 것이 몽골의 ‘낙타발굽’ 놀이판이다. 장애물의 이름도 우리의 우물과 같다. 이 놀이는 사막지방에서 시작하여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놀이라고 하며, 나중에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수소네마리, 뿔난수소, 조르가대’ 등이다. 그리고 ‘송아지’라고 불리는 놀이에서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곤질고누와 참고누, 짤고누, 꽂을고누와 같은 고누를 몽골에서는 ‘지르게’라고 부른다. 몽골에서는 이 놀이를 ‘지르게-허닌 샤타르’ 라고도 하며 동서몽골의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즐겨 노는 놀이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 이 지르게 놀이를 ‘망아지’라고도 부르며 ‘황금대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대 몽골사람들은 ‘양羊장기’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한편 한 대륙에서도 고누놀이가 전승되어 오는데 주로 소수민족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분포지역은 광서성, 운남성 등지의 장족, 산동성, 복건성일대다. 고누놀이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족은 장기藏棋, 특히 땅위에 그림판을 그려놓은 고누놀이를 파룡擺龍, 세 개의 알이 한 줄로 놓였을 때를 성룡成龍이라고 부른다. 산동성에서도 파룡이라고 하며 이때는 놀이를 변형시켜서 하는데 세 사람이 겨룬다고 한다. 그리고 광서성 북해일대에서는 1인의 심판까지 두고서 한다고 해서 삼기三棋라고 부른다. 복건성 일대의 소수민족, 서족 역시 이 놀이를 즐겨한다고 하는데 타삼기打三棋, 대삼기對三棋, 삼삼기三三棋라고 부른다. 한편 러시아도 이와 비슷한 놀이를 하는데 ‘트뢰냐 맬니차’라고 부른다. 다른 점은 4개의 사선이 없다는 점이다.
2) 바둑
바둑은 한중일 3국에서 보듯이 현대에 와서도 왕성하게 놀이문화로 행해지고 있다. 고급두뇌놀이로 인식이 되어 바둑을 잘 두면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 방송국에서는 1주일에 한번씩 바둑겨루기 방송을 편성하여 내 보내고 있다. 여기서는 고누놀이에 비해 거의 절대적으로 널리 대중화 되어 있기 때문에 바둑에 대하여 일반적인 얘기를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바둑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바둑의 사상적 철학적 의미를 몽골한겨레, 칭기즈칸의 제국이 13세기 서양을 초토화 시키면서 서양인이 오늘날 까지 느끼는 공포감과 경계심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서양의 장기, 체스(chess)놀이에 녹아 있는 서양철학사상과 함께 언급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바둑에 대한 기록은 앞서 살펴본 것 외에 차이나족 문헌사료인 신당서 고구려전에는 ‘바둑과 투호놀이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후주서(後周書) 백제전에는 ‘여러놀이 중 바둑을 특히 숭상한다’고 한다. 신라의 박구라는 사람은 당나라에서 바둑의 최고수가 되었는데 당왕唐王의 바둑스승인 기대조棋待詔라는 직책을 맡아 보았다고 한다. 당왕의 초빙을 받아 우리 선진바둑의 우수함을 당왕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문헌사료에서는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중, 도림이 백제에 가서 간첩활동을 하였는데 이 대목에서 바둑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http://cafe.daum.net/mookto
한편,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는 파죽지세로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그리고 서유럽을 향하여 진군한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서양의 중세기독교, 야만이 지배하던 암흑 속에서 허덕이는 서양인들을 당시 최첨단 동양문명으로 광명, 해방시켰다. 제지술, 화약술, 항해술, 기타 기초자연과학적인 요소를 전해 줌으로써 서양에 르네상스 바람을 일으켰고 오늘날 현대과학문명의 기초가 된 산업혁명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초창기 이런 칭기즈칸의 몽골한겨레 제국의 군대가 서양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서유럽의 중세 폴란드 왕국의 ‘크라크포’시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시민들은 타타르 즉 몽골군의 침공을 상기하는 시가행진을 한다. 이는 ‘라이코닉’이라고 하는 민속축제다. 먼저 교회종탑에서 나팔수가 몽골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알리는 나팔을 분다. 그러다가 나팔소리가 뚝 멈춘다. 당시 최강의 몽골군이 보유한 화살에 나팔수가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이어 긴 행열이 이어지며 몽골군의 장수로 분장한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나온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데 이 사람의 방망이를 맞으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서양인들은 징기스칸과 몽골기마군단의 이름을 들을 때 어떤 공포심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까지 스며있는 이러한 공포심은 서양의 석학들은 어디에서 찾는가,
그림설명: 칭기즈칸의 몽골기마군단의 변화무쌍한 전투대형-삼삼삼 대형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도 몽골기마군단은 완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삼수체계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http://cafe.daum.net/mookto
서양장기인 체스(chess)놀이는 동양의 고누놀이의 한 형태로 보이며 동양의 바둑처럼 진화하지 못한 놀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동양의 장기와 비슷하여 장기수준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체스는 동양의 장기처럼 역할이 정해진 말들을 갖고 정해진 출발점과 목표점을 향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장기판에 올라와 있는 정해진 숫자의 말들 안에서 평면이동을 하며 먹고 먹히며 나중에 승패가 결정된다. 즉 닫힌 공간을 의미하며 어디로 가는지 예측이 가능하다.
사진설명: 칭기즈칸의 몽골군단이 사용한 무기들-왼쪽 맨 위의 화살은 이른바‘명적’이라고 하는 화살촉이다. 고구려수렵도에도 그려진 화살촉이다. 이 화살촉은 고구려->훈족->몽골로 이어지는 한겨레가 발명한 첨단고유무기체계이다. 맨 위 오른쪽에 ‘폭탄’은 지금으로 말하면 ‘수류탄’이다. 그리고 왼쪽아래는 ‘말지뢰’인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전차지뢰’인 셈이다. 아래 맨 오른쪽 사진은 ‘아부라’유적지 발굴모습니다. 이는 제철 및 무기제조공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군단은 이렇게 당시 서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첨단을 자랑하는 무기체계로 세계를 정복했던 것이다. http://cafe.daum.net/mookto
그러나 몽골의 칭기즈칸의 군대는 어디서 튀어 나올지 감을 잡지 못한다. 3일 후에 나타날 것으로 알고 대비를 하고 있는데 그날 새벽에 칭기즈칸의 군대는 폭풍우가 몰아치듯이 들이닥쳤고 초토화 시켜버렸다. 바둑이 바로 이런 경우다. 경우의 수가 무한하여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모른다. 말은 흑백의 두 가지 색으로 되어 있지만 바둑판에 이미 올라와 있는 것 외에 수시로 새롭게 말들이 공중에서 진입하여 쟁패를 한다. 입체적이며 열린 공간이며 언제 어디로 들이 닥칠지 몰라 예측이 불가능하다. 정해진 틀이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변화무쌍하다. 이 예측불가능성을 칭기즈칸의 몽골군단이 유감없이 서양을 초토화 시켜주면서 보여준 것이다. 서양인들이 오늘날까지 공포심을 갖는 근원적 바탕을 서양의 석학들은 이 동양의 바둑에서 찾고 있다(마릴린 아이비 교수/콜롬비아 대학, 인류학/ 한국방송 몽골리안루트 제8편 천마의제국). 어떤 이는 한국에서 이러한 변화무쌍한 현상을 지적하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력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질서이다. 무질서는 예측불가능성을 말한다. 틀지워 지지 않으려는 성질, 어디에 갖히지 않으려는 성질이 특히 한반도 한겨레에게 지독하게 많다는 것이다. 고여 있지 않고 늘 꿈틀거리며 팔팔하게 살아있는 생동감이 넘치는 성질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림이 ‘삼태극’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적이고 고여 있으며 닫혀있는 서양장기, 체스와 비교할 때 바둑은 이러한 성질을 현실로 보여주는 고급두뇌놀이라고 할 것이다.
4.맺음말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물질적 혜택과 문화 우리의 역사가 차이나족 또는 서양에서 전수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뼈 속까지 스며들어 있다. 고누놀이와 바둑을 연구하면서 이런 점을 다시한번 뼈저리게 확인할 수 있었다. 차이나족 한나라가 단군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이라는 식민지 총독부를 세운 후 한국은 한나라의 지배아래 놓였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중국’으로부터 장기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풍토를 소위 바둑 8단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논증한대로 문헌적 언어학적 역사문화적인 객관적 증거를 통해서 우리 한겨레에게서 고누와 바둑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누와 바둑의원조가 우리 한겨레라는 것은 우리가 동양정신문화의 종가집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이것은 ‘약소국의 비애’ 운운하며 피해의식과 패배주의 그리고 오늘날 외세 특히 북조선은 중공에, 남한은 미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려는 의타적이고 사대적인 폐습을 극복하고 주인으로 돌아오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기적인 거지노예근성으로 살았을 때, 우리는 외세의 거지노예가 되었다는 뼈아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생멸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에 그 어느 것도, 특히 특정종교로 민족통합을 이룰 수는 없다. 각자 이해타산으로 사분오열되어온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통합을 이루는 길은 이와 같은 우리의 뿌리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중심에 참역사동아리 ‘삼태극’이 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 태 극 http://cafe.daum.net/mookto
참고 및 인용의 주요출처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김병호. 2003. 하서출판사.
-개관 동양사/동양사학회편. 1995. 지식산업사.
-한단고기/임승국역주. 2000. 정신세계사
-ㅎ한글 고어사전 실담어 주석/한국어는 실담어의 태초의 연원, 실담어는 동서문명의 연원
(강상원 박사. 한국세종한림원.2002.)
-문화방송 특집다큐, ‘남북 최초 공동 발굴, 고려왕궁 만월대’ 2007.
-‘한.몽 고누놀이’비교연구(장장식/한몽민속문화의비교/지은이:비교민속학회/도서출판 민속원 2002.)
-한국방송 ‘몽골리안루트’ 제8편 ‘천마의 제국’
-다큐‘위대한 칸, 칭기스’ 교육방송 2009.
-민속놀이 활성화를 위한 문화상품 개발에 관한연구(윷놀이, 칠교놀이, 고누놀이를 중심으로/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전공 신정희. 2003.)
-인터넷 어린이 민속박물관/민속놀이 중<고누놀이>
-인터넷 국립중앙박물관
-기타 인터넷 게시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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