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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목소리의 정보가 있었어 공유차원에서 펌하여 올려 놓음.
(수록 내용이 많음.)
벽초|조회 31|추천 0| 2014.11.21. 07:32
*백씨의 연원과 유래
*수원백씨(남포(藍浦)백씨 문간공파(文簡公派)> 시조 백우경(白宇經)의 자(字)는 경천(擎天), 호(號)는 송계(松溪)로 신라 때 벼슬이 좌복사(左僕射) 사공(司空)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다. 임술보(壬戌譜) 총편(總編)에 보면 그는 중국 소주(蘇州)사람으로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조(唐朝)에 출사(出仕),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으나 간신(奸臣) 두이기(杜以奇) ㆍ 배현묵(裴玄墨) 등의 모함을 받고 신라에 망명하였다도 한다. 신라 선덕왕 1년의 일이다. 그런데 백씨(白氏)의 세계(世系)는 신라 경명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그 연유를 ‘임술보(壬戌譜)’에서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조 백우경(白宇經)이 우리나라에 온 해가 780년이고 백창직(白昌稷)이 경명왕 때 출사(出仕)할 무렵이 923년, 그간의 연대는 1백 40여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조 이후 중랑장공(中郞將公)까지 15대로 계산한 ‘정이보(丁已譜)’ ‘갑자보(甲子譜)’ ‘기해보(己亥譜)’ 등은 한 세대 사이가 평균 9년 밖에 안되어 대수(代數)추정에 무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는 형제도 있을 것으로 보아 실데의 대수(代數)를 5 ㆍ 6대로 하여 소목(昭穆)을 추정하는 수 밖에 없어, 보다 계대(系代)가 확실한 중랑장공(中郞將公) 이후부터 세계(世系)를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향(貫鄕)을 삼은 때는 문헌상 명확하지 않으나 세종 때 수성백씨(隋城白氏)라 하였다고 ‘영락보(永樂譜)’ 서문에 적혀 있다. 역사적으로는 중시조(中始祖)의 증손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정당문학(政堂文學) 백천장(白天藏)이 충선왕 때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또 하나 우리나라의 백씨(白氏)는 모두 송계공(松溪公) 백우경(白宇經)의 후예로 동원(同源)을 이룬다. 그러나 관향(貫鄕)을 달리하는 백씨(白氏)도 있어 억지로 수원(水原)을 본관으로 통일할 수 없어 ‘임술보(壬戌譜)’에서는 관향명(貫鄕名)을 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란 이름으로 수보(修譜)하였다. 수원백씨(水原白氏)는 신라 경명왕조(景明王朝)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는 백창직(白昌稷)을 중조(中祖)로 하여 기1세(起1世)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송계(松溪) 백우경(白宇經)으로부터 성씨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역대의 백씨(白氏) 보첩(譜牒)이나 문헌비고 등에서는 백씨(白氏)가 우리나라 고유의 성(姓)이 아니고 중국에서 유래한 성(姓)이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백씨(白氏)는 수원(水原)을 본관으로 하기로 합의하였고, 남포(藍浦), 대흥(大興), 청도(淸道) 등을 관향(貫鄕)으로 삼는 파(派)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백씨(白氏)의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당(唐) 소주인(蘇州人)인데 덕종(德宗) 원년(元年)(780)에 간신(奸臣)들의 참소를 피하여 신라로 왔다 한다. 신라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좌복사사공겸대사도(左僕射司空兼大司徒)에 이르렀다고 한다. 백씨(白氏) 구보(舊譜)에서는 1세조 백창직(白昌稷)이 시조 송계공(松溪公)의 14세손으로 기록된 것도 있었으나, ‘임술보(壬戌譜)’의 ‘백씨(白氏)의 세계(世系)’에서 밝혀놓은 바에 의하면 세계(世系)가 연대상(年代上) 맞지 않으므로 백창직(白昌稷)부터 1세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백씨(白氏)가 언제부터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백씨보(白氏譜)인 영락보(永樂譜) 서문(序文)에 의하면 조선 세종 대에 수성백씨(水城白氏)를 칭했음이 나타난다.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조에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백천장(白天藏)이 충선왕조에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해졌으므로, 백씨(白氏) 후손들은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삼게된 것이 아니가 한다. ‘임술보(壬戌譜)’에는 백씨(白氏)의 분파(分派)가 29개로 되어 있다. 분파(分派)의 명칭은 대개 파조(派祖)의 호(號)나 시호(諡號)에 의거하였으나, 때로는 파조(派祖)의 관직에 의거한 바도 적지 않다고 한다. 중시조(中始祖) 백창직(白昌稷)에게는 길(吉), 탁(卓)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길(吉)의 후손이 28개 파(派)를 차지하고 탁(卓)의 후손은 문간공파(文簡公派) 하나뿐이다. 백길(白吉)의 후손에서도 5세조 백간미(白簡美)의 후손이 25개 파(派)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1세조 백인관(白仁寬)의 후손이 선정공파(禪亭公派), 12세조 백역(白繹)의 후손이 인주공파(仁州公派), 13세조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이 ?산군파(?山君派), 13세조 백유(白維)의 후손이 장단공파(長湍公派)이며 10세조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 담암공파(淡庵公派)이다. 백간미(白簡美)의 셋째 아들인 6세조 백무신(白武臣)의 후손이 양곡공파(陽谷公派), 넷째 아들인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이 태사공파(太師公派)이다. 9세조인 백천장(白天藏)의 후손은 모두 17개 파(派)로 분파되었다. 12세조인 백장(白莊)의후손이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이고 14세조 백사순(白思純)의 후손이좌랑공파(佐郞公派), 16세조 백인현(白仁賢)의 후손이 훈정공파(訓正公派), 백인영(白仁英)의 후손이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백인웅(白仁雄)의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백인호(白仁豪)의 후손이 별좌공파(別坐公派),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 문경공파(文敬公派)이다. 13세조인 백효옹(白效雍)의 후손이 청산공파(靑山公派), 백효연(白效淵)의 후손이 산음공파(山陰公派), 백효약(白效若)의 후손이 임파공파(臨陂公派)이다. 11세조 백인석(白仁碩)의 후손이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이고 13세조 백운실(白雲實)의 후손이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12세조 백수희(白受禧)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백수(白粹)의 후손이 금릉부원군파(金陵府院君派)이고, 18세조인 백응상(白應祥)의 후손이 함판공파(咸判公派), 20세조인 백흥남(白興男)의 후손이 절체공파(節制公派)이다. 그리고 백천장(白天藏)의 여섯째 아들 백거(白琚)의 후손이 중랑장(中郞將) 수의부위공파(修義副尉公派)이니, 이상이 백천장(白天藏)의 후손 17개 파(派)이다. 백천장(白天藏)의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의 후손이 동림공파(東林公派)이고, 5세조인 백행미(白行美)의 후손이 시랑공파(侍郞公派), 백가미(白可美)의 후손이 사전공파(師傳公派), 백채(白採)의 손자인 6세조 백영신(白英臣)의 후손이 부여군파(扶餘君派)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세조 백창직(白昌稷)의 둘째 아들 탁(卓)의 후손이 단계(單係)로 이어져 그 5세손인 백문절(白文節)의 후손이 문간공파(文簡公派)이다. 이상에서 언급된 29개 파는 그 후손에 이르러 다시 몇몇 소파(小派)로 분파되기도 하였다. 1세조 백창직(白昌稷)은 신라 경명왕조(景明王朝)(917~923)에 중랑장(中郞將)에 올랐고, 경명왕(景明王)의 딸 상화공주(尙和公主)와 삼중대광일흥군(三重大匡一興君) 임희(林曦)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고 하나, 중랑장(中郞將), 삼중대광(三重大匡)의 관직, 관계(官階)는 경명왕(景明王) 당시에는 없었던 직계이므로 기록의 착오내지는 미비가 아닌가 한다. 백길(白吉)은 신라 경순왕조에 교위(校尉)를 지냈고, 고려 태조 때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 혜종, 정종에 이르기까지 3대(代)를 섬겼다고 한다. 동생인 백탁(白卓)은 고려 태조 때에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는데 궁예 말년에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고경문(古鏡文)을 해석한 문인(文人)이라한다. 백사유(白思柔)는 백길(白吉)의 큰 아들이며 ‘고려사’에 그의 행적이 기록된 인물이다. 고려 광종 24년 왕융(王融)이 지공거(知貢擧)로 되었을 때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고, 성종 10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송(宋)에 사신을 다녀왔다. 성종 10년 ㆍ 14년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취득했으며 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의 한 사람이다. 백사청(白思淸)은 광종조에 대복경(大僕卿)을 지냈다.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 고려 인종(1123~1145) 때에 녹사(錄事)로서 성내(城內) 좌순검사(左巡檢使)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임술보(壬戌譜)’에는 3세조 백사청(白思淸)의행적란에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인 백탁(白卓)이 활동한 시기 2백여 년 후에 그 아들이 활동한 것이 되고, 또 그 아들인 백광우(白光宇)가 활동한 시기(고려 정종조 976~981)보다도 150여년 후에 활동한 것이 되므로 잘못된 기록인 것 같다. 백휘(白揮)는 16세에 등과하여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고 이어 내봉감(內奉監)이 되었다. 목종조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문학고행(文學高行)으로 이름이 있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백광우(白光宇)는 경종조에 병부원외랑(兵部員外廊)을 지냈고, 백광신(白光臣)은 명종(明宗), 신종(神宗)에 걸쳐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 이부상서(吏部尙書), 판밀서성사(判秘書省事),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역임 하였다. 정민공(貞愍公) 백간미(白簡美)는 성종조에 등과하여 판병부사(判兵部事) ㆍ 감수국사겸대장군복국사(監修國史兼大將軍輔國事)에 이르렀고, 6대왕(代王)을 섬겼다. 백행미(白行美)는 형부시랑(刑部侍郞), 삼사부사(三司副使)를 지냈고, 백가미(白可美), 백세미(白世美)는 판삼사사(判三司事) ㆍ 태자사전(太子師傳),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백여주(白汝舟)는 현종조에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 ㆍ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및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였고, 신종 원년 책봉사로 금(金)에 다녀왔다. 백분화(白賁華)는 신종 원년에 성시(省試)에 급제한 후 예부외랑(禮部外郞), 경산부사(京山府使)를 역임하였다. 궁민(窮民)을 구휼하는데 노력했으며 선법(禪法)에 몰두하여 참선거사(參禪居士)라 호(號)하였다. 백유신(白裕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 ㆍ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고, 백진양(白眞陽)은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올라 임원부원군(林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원태(白元泰)는 등과한 후 이부사랑(吏部侍郞) ㆍ 국자제주(國子祭酒) ㆍ 세자사전(世子師傳)을 거친뒤 수파부원군(水坡府院君)에 봉해졌다. 충숙왕조에 진절보좌2등공신(盡節輔佐2等功臣)이 되었다. 백천징(白天徵)은 고려에서 뿐만 아니라 원(元)에서도 벼슬이 높았다.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으로 원(元)의 국자진사(國子進士)에 올랐고,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시강사(翰林侍講士)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ㆍ 태자태전(太子太傳)을 재수하여 수주백(水州伯) 3만 2천호(戶)를 봉(封)했다. 충혜왕 때 다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ㆍ 정당문학(政堂文學) ㆍ 평장사(平章事) ㆍ 태전(太傳)을 제수하고 수원부원군(水原府院君)에 봉했다. 백천보(白天寶)는 충숙왕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10세조 백관(白琯)은 등제(登第)하여 개부의(開府儀) ㆍ 동삼사(同三司) ㆍ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ㆍ 태자태전(太子太傳) ㆍ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백존유(白存儒)는 명종 ㆍ 신종조에 상장군겸대장군(上將軍兼大將軍) ㆍ 감수국사(監修國史) ㆍ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부(父)인 백천보(白天寶)가 충숙왕조에 벼슬하였는데, 그 아들인 백존유(白存儒)가 130여년 전에 관직에 나아갔으니, 세계(世系)의 착오가 아닌가 한다. 백양신(白良臣)은 정민공(貞愍公)의 둘째 아들이다. 삼중대광평장사(三重大匡平章事)를 지냈다. 백원항(白元恒)은 충렬왕조에 시부과(詩賦科)에 급제한 후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충숙왕을 원(元)까지 호종했는데, ‘동문선(東文選)’과 ‘기아(箕雅)’에 시문(詩文)이 남아 있다. 백웅정(白雄貞)은 태중대부(太中大夫) ㆍ 강도부사(江都副使)를 지냈고, 그의 아들인 백천봉(白天鳳)은 응양위용호군랑장(應揚衛龍虎軍郞將)에 올라 직산부원군(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견(白堅)은 중랑장(中郞將),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역임하였고, 백완(白玩)은 군부판서겸상장군(軍簿判書兼上將軍)을 지냈다.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는 담암공파(淡庵公派)의 파조(派祖)이며 고려 말기의 명신(名臣)이다. 밀직제학(密直提學), 우상시전리판서(右常侍典理判書), 정당문학(政黨文學) ㆍ 세자사전(世子師傳)을 역임하고 직산부원군(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영해 직제학(直提學), 우상시전리판서(右常侍典理判書), 정당문학(政黨文學) ㆍ 세자사전(世子師傳)을 역임하고 직산부원군(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영해 운산서원(雲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결백정직(潔白正直)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척비론(斥佛論)을 주장하였고 송(宋) 사마광(司馬光)의 10과(科) 취사제(取士制)를 도입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재직하던 당시 농상(農桑), 염법(塩法), 등 민생에 관해서 광범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고려사’ 제지(諸志)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기의 신사상이던 주자학을 수용한, 이른바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일물로서 당시의 사회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백천봉(白天鳳), 백문보(白文寶) 양인(兩人)이 모두 직산부원군(稷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백웅정(白雄貞)이 직산최씨(稷山崔氏)의 딸을 부인으로 취한점으로 볼 때 백량신대(白良臣代)나 혹은 그 자손 대에 직산(稷山)으로 옮겨 거주한 듯 싶다. 백가신(白可臣)은 정민공(貞愍公)의 넷째 아들이며 태사공파(太師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등과한 후 벼슬이 태사내사령겸지어사대사(太師內史令兼知御史臺事) ㆍ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숙종 원년(元年)에 하정사(賀正使)로 요(遼)에 다녀왔고, 동(同) 5년에 조위사(弔尉使)로 송(송)에 다녀왔다. 백임지(白任至)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남포군(藍浦君)에 봉해졌고, 백한룡(白漢龍)은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냈으며 공민왕 16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원(元)에 다녀왔다. 백문학(白文學)은 충선왕조에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다.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은 그가 남포(藍浦)에 퇴거한 후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남포군(藍浦君)에 볼해졌다. 그런데 백가신(白可臣)의 후손록에는 연대상의 약간의 문제가 나타난다. 그가 하정사(賀正使)로 요(遼)에 다여온 것이 1096년인데, 손자인 백한룡(白漢龍)이 원(元)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온 것이 1367년이어서 조손(祖孫)이 활동한 시기가 270여년에 걸쳐 있다. 그런데 증손인 백문학(白文學)은 충선왕조(1309~1313)에 벼슬을 하였다 하니, 그렇다면 백문학(白文學)은 아버지 백한룡(白漢龍)보다 60여년 앞서서 관직에 나아간 것이 된다. 6세조 백가신(白可臣)과 그 증손인 9세조 백문학(白文學) 사이에 백한룡(白漢龍)과 그 대(代)가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백경신(白景臣)은 정민공(貞愍公)의 다섯째 아들인데, 선종조(宣宗祖)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였다. 권간(權奸)이 국정을 잡자 임천(林川)에 이거(移居) 임천(林川)하였다. 후손들이 임천(林川)에 세거하게 되었다. 아들인 백진주(白眞周)는 개부의(開府儀) ㆍ 동삼사(同三司) ㆍ 문하좌시중겸태자태보(門下左侍中兼太子太保) ㆍ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서북면병마제군사(西北面兵馬諸軍事), 보문각대제학, 국자제주(國子祭酒)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백진식(白眞植)은 의종조에 중서성상장군(中書省上將軍), 서북면병마제군사(西北面兵馬諸軍事)에 이르러 임천부원군(林川府院君)에 봉해졌다. 변방을 침입하는 여진족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다. 백원식(白元軾)은 태자소보(太子少保) ㆍ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고, 아들인 백미견(白彌堅)은 고종 때 좌헌납(左獻納)에 이르렀고, 원(元)의 행정관사인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등과했으나 그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백원정(白元貞)은 백경신(白景臣)의 손자이며 수원백씨(水原白氏)에서 가장 많이 분파를 낸 백천장(白天藏)의 아버지다. 고종조에 벼슬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ㆍ 검교태사수태보(檢校太師守太保),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판이부사겸서경유수(判吏部事兼西京留守)를 역임하고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으로 임평부원군(林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무신(武臣) 출신으로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역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 문익공(文益公) 백천장(白天藏)은 충렬왕조에 등과한 백심재(白尋齋) 우역동(禹易東)의 문인이다. 원(元)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랐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 좌승상(左丞相)을 역임했다. 고려에 환국하여 수원(水原)에 고주하였고 정당문학(政堂文學) ㆍ 평장사(平章事)로 수성백(水城伯)에 봉해졌다.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ㆍ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고 임원부원군(林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익공(文益公)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백련(白璉), 백전(白琠), 백산(白珊), 백환(白環)은 각각 추밀원좌부승선(樞密院左副承宣), 문하시랑(門下侍郞), 풍해도안렴사(豊海道按廉使),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백황(白璜)은 판전리(判典理) ㆍ 태복사사(太僕寺事)를 역임하였고, 백거(白琚)는 평장사(平章事) ㆍ 상주국(上柱國)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다. 백수원(白壽元)은 5세조 백행미(白行美)의 아들이며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다. 그 손자인 백록진(白祿珍)은 녹사(錄事)를 지냈으며 묘청의 난 때 공을 세웠다. 백영신(白英臣)은 4세조 백채(白採)의 손자다. 헌종(獻宗)(1094~95) 때 학사(學士)였고, 숙종 2년 당(唐)에 가서 광록대부(光祿大夫) ㆍ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고, 3년 후 귀국하여 부여군(扶餘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기서 당(唐)이란 송조(宋朝)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며, 사신으로간 중조(中朝)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는 기록에는 의문이 남는다. 아들인 백승필(白承弼)은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냈으며, 그 손자인 백천수(白天壽)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백웅(白雄)은 중부성상장군(中部省上將軍)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 ‘중부성(中部省)’이란 관서가 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기록의 착오인가 싶다. 백경선(白景瑄)은 2세조 백탁(白卓)의 현손(玄孫)이며 문간공(文簡公)의 아버지다.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를 역임했다. 문간공(文簡公) 백문절(白文節)은 고종조에 과거에 급제한 후 한원(翰苑)에 들어가 중서사인(中書舍人) ㆍ 이부시랑(吏部侍郞) ㆍ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이르렀다. 충렬왕조에 사의대부(司議大夫) ㆍ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ㆍ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에 올랐다. 문간공(文簡公)의 아들 심재(尋齋) 백신정(白頣正)은 충선왕조의 유학자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보급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충렬왕조에 등과(登科)하여 후에 첨의평리(僉議評理) ㆍ 사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처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品階)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충선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10년간 머물면서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을 전공, 귀국 후 보급하였다. 문하에서 이재현(李齋賢), 박충좌(朴忠佐) 등의 고려말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길러냈으며 동방부자(東方夫子)라 불리운다. 남포(藍浦) 신암서원(新安書院), 남해(南海) 난곡사(蘭谷祠) 등에서 향사(享祀)한다. 동생인 백이주(白孝珠)는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고 백홍정(白弘正)은 심재(尋齋)에게 수업하였다. 백의(白誼)는 이색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경상좌도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制使)를 역임했다. 백함명(白咸明)은 공민왕조에 봉익대부(奉翊大夫) ㆍ 밀직부사(密直副使) ㆍ 정당문학평장사(政堂文學平章事)를 거쳤고, 백린(白璘)은 충목왕조에 등과한 후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11세조 백인훈(白仁勛)은 원(元)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개부의(開府儀) ㆍ 동삼사(同三司) ㆍ 좌정승(左政丞) ㆍ 세자사전(世子師傳)에 이르렀다. 백인관(白仁寬)은 등과(登科) 후 이부전서(吏部典書), 집현전대제학을 지냈다. 조선 개국 후 수원(水原)에 나걍했다가 선산(善山)으로 옮겨 길재(吉再)와 사귀었다. 백인성(白仁成)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백관(白琯)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백장(白莊)은 원(元) 과거에 급제, 공민왕 때 이부전서(吏部典書),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 후 새 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해미(海美), 장수(長 水) 등지로 유배되었다. 백계영(白桂英)은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고 박경순(朴景純)의 무리를 무찌른 공으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백순(白粹)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금릉부원군(金陵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사수(白思粹)는 다종 2년 문과(文科)에 급제, 1455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백인걸(白仁傑)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32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 호조정랑(戶曹正郞),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관계되어안변에 유배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 대사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백유양(白惟讓)으 선조 5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후 홍문관교리, 대사성,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백유성(白惟成)은 선조조의 공신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백수장(白壽長)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라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고, 백득손(白得遜)은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백몽호(白夢彪)는 무과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나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백민수(白民秀)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의사(義士)로 활약하였다. 한말, 일제시기를 통하여 백씨(白氏)의 후손들은 많은 사람이 애국, 항일운동에 종사하였다. 백남규(白南圭)는 대한제국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망명의 길로 접어들었고, 백홍인(白弘寅)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과 함께 의거를 결의, 시고8도사민서(市告8道士民書)를 유포하고 제주도로 가다 붙잡혀 수감되었다. 백락관(白樂寬)은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해서 상소, 남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서 성토하다가 투옥되었고, 임오군란 후 사형당하였다. 백락구(白樂九)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하기까지 했으며, 1907년에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순절했다. 백운한(白雲翰)은 3 ㆍ 1운동 후 만주 독립단에서 활동하였고, 백삼규(白三圭)는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양성에 전력했다. 3 ㆍ 1운동 후 대한독립단 부총재로 활약하다가 일군(日軍)에 의해 총살당했다. 백일진(白日鎭)은 105인 사건으로 5년 형을 살았고, 1919년 중국 안동에서 청년단장으로 독립운동 했다. 백광운(白狂雲)은 을사조약 체결 후 이강년을 따라 일본군과 싸웠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3 ㆍ 1운동 후 서로군정서(西路郡政署)에 들어가 국내의 일본기관 파괴활동을 전개하였다. 압록강철교 준공식 때 총독 재슬실(齋藤實)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백운각(白雲閣)은 만주로 망명, 1929년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여 소대장으로 활약하던 중 전사하였다. 백정기(白貞基)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데 노력했다. 1925년 상해에서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 농민활동에 투신했고, 3년 후에 개최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3년 상해 홍구(虹口)에서 이강춘과 함께 주중(駐中)일본대사 암살모의를 하다가 잡혀 투옥되어 옥사했다. 백형철(白亨喆)은 승려로서 3 ㆍ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복역했으며, 출욱 후에는 불교의 대중화, 일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백일규(白一圭)는 미국에 이민,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고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한국인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백남준(白南俊)은 만주 길림성에 이주하여 105인(人)사건으로 5년형을 치렀다. 1919년 한인공회(韓人共會)를 조직하여 군정서(軍政署)와 통합, 1920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복역했다. 백인선(白仁善)은 3 ㆍ 1운동 때 만주로 망명, 독립단에 가입하고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 중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사했다. 백정현(白正鉉)은 1939년 중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회(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 다음해 중국 중앙전시조사간부위원단 한청반(韓靑班)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1943년 유격활동 및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5세 이상의 상계(上系)가 살았던 곳은 짐작하기 어렵다. 6세 백유신(白裕臣)의 자손들은 11세 백인관(白仁寬)의 대에 수원(水原)에서 경북 선산(善山)으로 옮겨간 이후 일부가 18세 백이휘(白以輝) 이래로 밀양(密陽)에 정착한 것이 부정공사적비(副正公事蹟碑)에 보이고, 13세 백응참(白應參)의 후계(後系)가 경산(慶山) ㆍ 영천(永川) ㆍ 청도(淸道) ㆍ 밀양(密陽) ㆍ 대구(大邱) 등지에, 14세 백운봉(白雲鳳)의 후계(後系)가 달성(達城)에 산거(散居)했던 것 같다. 또한 13세 백하손(白河遜)이 남쪽으로 이거하여 후계(後系)가 울산(蔚山)에 살았고, 12세 백택(白繹)이 황주(黃州)에서 안심(安心)으로 옮겨 갔던 사실이 ‘임술보(壬戌譜)’에 나타나 있다. 백유신(白裕臣)의 동생인 백양신(白良臣)의 자손들은 13세 백계영(白桂英)의 후계(後系)가 경북 청도(淸道)에 터를 굳힌 것을 비롯하여, 백유(白維)의 후계(後系)는 영양(英陽)을 거쳐 청송(靑松)에, 10세 백문보(白文寶)의 후계(後系)는 영덕(盈德)의 창수(蒼水), 경산(慶山) 자인(慈仁) 등지에, 12세 백역(白繹)의 후계(後系)는 울진(蔚珍)에 각각 나뉘어 자리잡았다고 믿어진다. 6세 백경신(白景臣)이 벼슬을 그만두고 충남 부여(扶餘)에 속해있는 임천(林川)으로 퇴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중 12세 백장(白莊)이 태종조에 전북 장수(長水)로 유배(流配)된 이후 대체로 13~14세의 대에 걸쳐 일부가 전남 장흥(長興), 전북 전주(全州)에 옮겨갔던 것 같고, 15세 백경(白景)은 경남 거창(居昌)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10세 백환(白環)이 평양(平壤)에 유배(流配)되어 그의 손자 백우(白隅)의 대에 평남 강서(江西)로 이거해 갔고, 15세 백양필(白良弼)의 대에 다시 지금의 순천(順川)의 후탄(厚灘)으로 옮겨가 그곳에 많은 자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13세 백원봉(白圓鳳)이 태종조에 지금의함남 정평(定平) 땅에 유배되어 처음으로 그곳에 자리 잡았고 13세 백붕(白鵬) 역시 세종조에 함북 부녕(富寧)으로 귀양가 그 후계(後系)가 그곳에 뿌리내리게 된 것 같다. 그밖에 12세 백화(白和)의 후계(後系)가 황해도 송화(松禾)의 풍천(豊川) 등지에, 12세 백록(白綠)의 후계(後系)는 부여(扶餘)의 임천(林川)에, 백면(白緬) 후계(後系)는 홍성(洪城)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5세 백가미(白可美)의 8대손 백장공(白章貢)이 국강(國綱)의 문란함을 보고 평남 덕천(德川)으로 퇴거하여 이때부터 자손들이 덕천(德川)과 의주(義州)에 산거(散居)하였고, 7세 백문절(白文節) 이래로 충남 보령(保寧)의 남포(藍浦)에 자리 잡았던 자손들 중에서 일부가 14세 백정수(白精粹)의 대를 전후하여 서천(舒川)에, 일부는 8세 백홍정(白弘正)이래로 경북 예천(醴泉)의 용관(龍官) 등지에 터를 굳히고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수원백씨(水原白氏)는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임남면(任南面), 이천군(伊川郡) 웅탄면(熊灘面), 충남 서천군(舒川郡) 시초면(時草面), 보녕군(保寧郡) 웅천면(熊川面), 부여군(扶餘郡) 장암면(場巖面), 전남 장흥군(長興郡) 안량면(安良面), 경북 예천군(醴泉郡) 개포면(開浦面), 경남 고성군(固城郡) 상리면(上里面), 거창군(居昌郡) 주상면(主尙面), 평남 순천군(順川郡) 후탄면(厚灘面),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신화면(薪花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문간공파(文簡公派)의 파조는 백문절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국자좨주를 지냈다.
*항 렬 표. 16세;-영(榮),17세;-문(文),18세;-윤(允),19세;-민(民),20세;-시(時), 21세;-화,태(華,兌),22세;-용,상(龍,尙),23세;-사(師),24세;-동(東), 25세;-진(鎭),26세;-수(洙),27세;-락(樂),28세;-남(南),29세;-균,기(均,基), 30세;-현,호,흠(鉉,鎬,欽),31세;-승,운(承,雲),32세;-종,인(鍾,寅), 33세;-열,하(烈,夏),34세;-재,규(在,圭),35세;-선,용(善,鎔), 36세;-순,태(淳,泰),37세;-식,근(植,根),38세;-환,섭(煥,燮), 39세;-수,중(壽,重),40세;-상,경(尙,庚),41세;-윤,해(潤,海), 42세;-영,주(榮,柱),43세;-연,희(然,熙),44세;-곤,진(坤,珍), 45세;-은,석(銀,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