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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심사평>
그리움과 슬픔의 이중주, 그 극복의 크로노토프
심사위원
정 목 일 (수필가)
신 현 식 (수필가)
최 태 준 (수필가)
2013년 『수필세계』 하반기 신인상에는 13명 105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응모작 중에 눈에 띄는 수작도 있었지만 응모자의 다른 작품들이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논의 끝에 작품 수준이 비교적 고른 김제숙, 김영희 두 명을 신인상 당선자로 결정하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며 뽑히지 않은 응모자들의 정진을 당부한다. 신인상 당선자는 자부심을 가지고 왕성한 활동으로 수필 세계의 빛나는 작가로 거듭나 주길 기대한다.
쭗 김제숙의 「감꽃 목걸이」 외
수필의 서정은 허구를 근간으로 하는 시와 소설이 닿지 못할 순정한 영역이다. 그것은 수필의 서정이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까닭이다. 성찰과 비전은 대개 서정의 말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체화된 서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공감한다. 단순한 감성적 서정만으로는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어렵고, 감동을 줄 수도 없다.
작가(이후 화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다섯 살 무렵 시골의 할아버지 댁에서 잠시 동안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농사일로 바쁜 조부모를 대신하여 자신을 돌봐 준 분은 홀로 지내던 작은어머니였다.
작은어머니는 성품도 온화했고 거기다가 상당히 미인이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랑에게 소박을 맞고는 아이도 없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적적하게 살고 있던 터에 어린 질녀가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내심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감꽃 목걸이」 중에서
수필의 서사 요소인 크로노토프는 과거 특정 시점의 기억에 대한 시․공간을 재현한다. 화자는 「감꽃 목걸이」에서 유년의 기억을 통해 그리움과 아픔을 들려준다. 다섯 살 무렵의 할아버지 댁, 작가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작은어머니는 크로노토프의 핵심 인물이다.
하룻밤 사이 떨어진 감꽃은 작은어머니의 손을 통해 눈부신 목걸이로 태어난다. 감꽃은 훗날 그리움과 슬픔으로 환기된다. 감꽃은 보조관념, 그리움은 원관념이다. 꽃이 시들어 목걸이가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 주던 작은어머니의 사랑은 화자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그 사랑은 화자에게 체화되었고, 작은어머니는 화자의 마음속에 연민의 대상으로 들어앉았다.
감꽃(감꽃 목걸이)은 객관적 상관물이다. 엘리엇(T.S. Eliot)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말로 특정 정서를 반영하는 사물인데 화자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기억 속 서정에 상감 된 감꽃은 화자의 내면에 그리움과 슬픔이라는 트라우마를 환기시킨다. 그러기에 화자는 감꽃을 보면 감꽃 목걸이와 함께 유년에 만난 작은어머니를 곧장 떠올린다.
감이 떨어질 무렵 개울에서 작은어머니와 고디를 잡던 중 화자는 작은어머니의 눈물을 목격한다. 우리 음전이 착하네. 작은엄마랑 여기서 살자 작은어머니의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모녀 관계를 반영한다. 작은어머니의 눈물에는 비장미가 있다. 신랑에게 소박(?)맞고도 시부모를 모시고 혼자 사는 그녀의 역설적인 운명과 고독은 화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고디 또한 그리움과 슬픔을 환기하는 상관물이다.
화자의 다른 수필 「고디국」에서 고디국은 친정 엄마와 암으로 일찍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또 다른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주제와 형식 면에서 「감꽃 목걸이」와 「고디국」은 궤를 같이할 만큼 서로 닮았다.
고디를 사려고 몇 번이나 큰 시장에 갔지만 그때마다 허탕을 쳤다. 엄마는 그 가을에 먼 길을 떠나셔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고디국은 내게 그리움이다. (중략)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병원에 갔을 때였다. 이미 말문을 닫은 친구는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천국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고디국은 내게 슬픔이다.
―「고디국」에서
수필이 과거의 체험만 보여 준다면 불완전하다. 그것은 시․공간의 설정, 즉 크로노토프의 미완성을 의미한다. 바람직한 시공성의 관계 정립은 온전한 서사 구도를 잡는 일이다. 체험을 통해 성찰하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수필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시와 달리 수필은 성찰을 통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해야만 한다. 체험을 펼치고도 성찰의 결과물이 없다면 시공성의 확립, 즉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프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탓이다.
「고디국」의 화자는 이것을 어떻게 성취했을까? 화자는 그리움과 슬픔에 머물지 않고 상관물인 고디국을 한 솥 끓여 마을 사람들에게 보시한다. 이 희망 메시지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감꽃 목걸이」에서 크로노토프는 미진하다. 화자의 기억 창고에 저장된 풍성하고도 흥미진진한 그 무엇의 힌트만으로 글을 끝낸 까닭이다. 그리움과 슬픔의 이중주를 넘어 치유와 극복의 과정까지 보여 줘야 한다는 점이다.
「감꽃 목걸이」를 읽은 후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그것은 체화된 사랑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립고 슬픈 감정은 체화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애도 일기」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슬픔을 일기 형식으로 쓰고 있다. 「감꽃 목걸이」와 「고디국」에 내재된 화자의 그리움과 슬픔의 비중은 비록 「애도 일기」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동일한 기제로 다루더라도 아마 무방할 것이다.
나머지 세 작품, 「대청」 「새가슴」 「장바구니 이론」은 앞서 다룬 두 작품과 달리 부부가 함께 살아가며 겪는 일상적 갈등과 치유의 이야기를 쓴 수필이다. 양보할 마음을 전제하고 접근하는 갈등은 해피 엔딩으로 귀결된다. 조화로운 부부의 삶이 건강하다. 지면상 자세한 분석은 여기서 생략한다. 김제숙의 5개 작품 모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녀가 스토리텔링에 능하며,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문장력과 기본기를 제대로 갖추었다고 믿기에 신인상 당선자로 선정하였다.
쭗 김영희의 「빈방」 외
체험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문학은 생명력을 지닐 수가 없다. 단순한 기록을 초월하여 서정성과 미적 구조를 갖출 때 문학이 된다. 비록 체험을 말하더라도 작가의 실존적 입장이 글에 구현되어야만 한다. 이런 전제를 통해 수필은 비로소 문학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이후 화자)는 노년의 어머니가 기거할 집을 보러 다닌다. 중개소에서 보여 주는 아파트 공간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어떤 할머니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유품을 정리했다는 방에 할머니의 세간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이 죽음의 흔적에 화자는 스산한 느낌을 받는다.
중개사의 안내를 받아 다음 집을 방문했으나 그곳도 역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방이어서 유품이 그냥 남아 있다. 창밖을 내다보니 떨어지는 낙엽과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며 화자는 인간의 삶과 나무의 삶이 닮았다는 것과, 화자가 머지않아 어머니가 겪게 될 별리를 생각한다. 가슴에 밀려드는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순간 화자는 어떤 깨달음에 이른다.
누구나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나면 주인이 사용한 가재도구들은 타인의 손에 치워지게 된다. 주인에게는 하나하나 추억과 함께한 손때 묻은 물건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애착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노년의 삶은 조금씩 비워야 한다. 한 존재가 세상을 등지면 일생을 함께한 유품들은 흔적 없이 버려져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진다.
―「빈방」 중에서
세속의 삶을 소풍으로 읊은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했지만 죽음이란 사실 소풍보다는 무거운 명제다. 결국 어머니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방을 얻지 않고 화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한다. 화자는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라고 당부한다. 나중 다른 누군가가 엄마의 방을 사용할 때 깨끗한 빈방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화자는 「빈방」에서 방의 비움과 인연의 비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 떠나면 그가 살던 빈방을 비워야 하듯 그가 맺은 인연도 비워야 한다는 것을 상호 텍스트적으로 들려준다. 모녀의 인연, 인간과 사물의 인연을 언급하며 누군가 나에게서 떠나면 인연은 끝나고 그리움과 슬픔만 남으므로 나이가 들수록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방과 인연이라는, 비워야 할 두 명제가 물고 물리는 이중적 기의에 문학성이 들어 있다.
「삼색등」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쓰고 있는데 아버지와 나의 관계 속에 비춰지는 힘들던 시절의 사실적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선명하게 다가와 가슴 찡한 무엇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수필이란 삶의 궤적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쓰면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내」는 남자같이 생긴 치킨 집 뚱보 여주인과 역마살 돋은 이모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순정파 이모를 그려낸다. 예쁜 얼굴과는 거리가 먼 이모는 평소 화장을 잘 하지 않는 성미인데 오래 전 출타한 이모부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분첩을 꺼내 들고 분주하게 화장을 한다. 이것은 치킨 집 뚱보 여주인이 손님을 기다리며 화장하는 기제와 겹쳐진다. 외모가 못나도 여자는 여자이며, 이성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은 숨길 수 없는 본능이리라.
「외동무니」에서는 외동으로 살아가며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는 남편과 고명딸인 화자의 경우를 비교해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외동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주관적이다. 외동이 외로운 것은 가정사라는 공간에서 가능하며, 이것을 일반화해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외로움은 철학적 명제이며, 대중 속에서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즈넉한 산에서 홀로 살아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목」에서 가난이 안기는 외로움도 의미심장하다. 이해하지 못할 친구가 안겨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 내지 트라우마는 또 다른 외로움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문학성은 추상적 개념은 아니다. 효용에서는 감동과 깨달음을, 형식에서는 미적 구조를 확립하는 것을 말한다. 작가 김영희는 섬세하고도 절제된 감성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서정과 미적 구조를 세우는 능력을 갖추었다. 제출된 작품들에 미약한 수준 차는 있으나 「빈방」 「삼색등」 및 「분내」는 문학성이 다분하며,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은 작가라 인정되어 신인상 당선자로 선정하였다.
<신인상 당선 소감>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
김 제 숙
포항소재 문학상 수필 최우수상(2011)
동서문학상 수필 동상(2012)
신라문학대상 수필 대상(2012)
2014 젊은 수필 선정(2013, 문학나무)
어린 딸은 자주 열병을 앓곤 했습니다. 젊은 엄마는 딸의 이마를 짚어 보고, 땀으로 젖은 속옷을 갈아입혀 주었습니다. 잠시 품에 안고 있으면서 나직하게 속삭였습니다.
설탕물 줄까?
어린 딸은 열에 마른 입술로 응! 설탕물, 설탕물! 소리치곤 했습니다.
뜨거운 물에 노란 설탕을 한 숟가락 듬뿍 넣고 휘저어서 엄마는 딸에게 그 달고 따뜻한 물을 떠먹였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열이 내리고 몸은 가뿐해졌습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꾸준히 달리다 보면 힘든 고비를 지나면서 경험하는 은근한 황홀경이 있어서 마라톤 중독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게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에 대한 소망이 일었습니다. 마라토너가 달리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상쾌한 느낌을 경험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이들도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써 내려가면서 영혼을 적시는 감동에 빠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살아오면서 마음의 열병에 시달릴 때가 잦았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타 주시던 그 설탕물이 서럽도록 그리웠습니다.
한 그릇의 설탕물이 그랬던 것처럼 부대끼는 몸과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이에 이르면 실현 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쯤은 알게 됩니다. 거창하게 영혼을 적시는 감동에 연연해 속을 끓이는 대신에 호학심사(好學深思)에 마음을 두고자 합니다. 즐겁게 배우고 깊이 생각한다면 행복한 글쟁이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먼 길을 가는 강은 천천히 흐릅니다. 흐르면서 자신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넓어집니다. 제가 제 글에 거는 기대도 그러합니다. 조금씩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
이제 수필 쓰기를 시작한 글쟁이의 글을 눈여겨봐 주신 『수필세계』에 감사 드립니다. 쉬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지친 영혼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글을 쓰도록 애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인상 당선 작품>
감꽃 목걸이 외 2편
김 제 숙
간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자는 내내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감꽃이 하얗게 떨어져 있다. 굵은 열매를 수확하려고 일부러 품을 들여 적과를 하는 마당에 하룻밤 비바람에 떨어진 감꽃이 무슨 대수랴 하겠지만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옛 생각에 젖어든다.
초가집과 흙담과 마당 한쪽에 서 있는 감나무, 그 아래 수북이 떨어져 있던 하얀 감꽃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얼마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네 살 터울로 동생이 태어나자 힘이 드신 어머니가 나를 잠시 친가에 맡기신 것이었다.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오셨다. 손가락처럼 길게 생긴 과자 한 봉지를 사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 다 먹으면 오마.
어린 마음에 빨리 먹어 버리면 아버지가 오래지 않아 오시겠지 하는 생각에 마구 먹다가 할머니께 들켜 혼난 기억도 난다.
농사일로 늘 바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보살펴 준 사람은 혼자 지내시던 작은어머니였다. 작은어머니는 성품도 온화했고 거기다가 상당히 미인이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랑에게 소박을 맞고는 아이도 없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적적하게 살고 있던 터에 어린 질녀가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내심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말이 없고 겁이 많은 내가 안쓰러웠던지 작은어머니는 마당에 수북이 떨어진 감꽃을 모아다가 실에 꿰어 목에 걸어 주곤 했다. 가끔은 작은 경대 앞에 앉혀 놓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연지를 발라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피어 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자신의 인생을 곱게 단장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시골의 밤은 일찍 어두워졌다. 호롱불을 끄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기 전, 하루 종일 걸고 다닌 감꽃 목걸이를 윗목에 조심스레 벗어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줌도 누러 가기 전에 감꽃 목걸이부터 찾았다. 빛나던 하얀 감꽃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실에 꿰여 있는 것은 그저 시들어 말라 가는 거뭇거뭇한 감꽃 뭉치였다.
어린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시든 목걸이를 만지며 소리 죽여 울고 있으면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작은어머니는 어느새 내 기척을 알아차렸다.
밥 많이 먹으면 이따가 또 만들어 주마.
날마다 마당에는 감꽃이 떨어졌다. 감나무는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만큼의 꽃들만 달고 있고 나머지는 떨어뜨린다고 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이제는 제법 몸집이 굵은 감들이 떨어졌다. 작은어머니는 그것들을 모아다가 소금물 단지 안에다 삼사 일 동안 담가 두었다가 나에게 간식으로 주곤 했다.
감이 떨어질 무렵이면 개울로 고디를 잡으러 갔다. 산 그림자가 내려오기 시작하면 돌 틈에 숨어 있던 고디들은 마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시침을 떼며 슬금슬금 제법 커다란 돌들 위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어린 나도 한 보시기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욕심을 내지 않고 네 식구가 두어 끼 먹을 정도만 잡으면 집으로 와서 뒤꼍에 걸어 둔 솥에 장작을 때어 고디를 삶았다. 작은어머니는 탱자나무 가시를 하나 꺾어 나에게 쥐여 주면서 껍데기 안에 숨어 있는 알갱이를 꺼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고디를 한 줌 집어 주면 나는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서 그것을 까먹었다.
작은어머니는 국이나 무침을 하기 위해 다른 그릇에다 알갱이를 담았다. 알갱이 까먹는 것에 빠져 있다가 한참 만에 얼굴을 들면 작은어머니는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 많이 까먹어서 그런가 하고 눈치를 보며 작은어머니가 한 줌 집어 준 고디를 다시 그릇에 담았다. 그러면 작은어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우리 음전이, 착하네. 작은엄마랑 여기서 살자.
내 이름이 음전이가 아니었지만 작은어머니가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내가 있어서 작은어머니가 울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집에는 오빠와 동생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어머니보다 작은어머니가 더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일가친척들이 한동네에 모여 살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혼사나, 제사나, 어른들의 생신 등 집안의 모임이 생겨서 개울을 건너 마을을 오갔다. 밤이 아주 깊어서야 지내는 제사를 나는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기다렸다가 그렇게도 맛이 있다는 제삿밥을 먹어야지 다짐을 하지만 매번 나는 작은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개울을 건너올 때에야 잠이 깨곤 하였다. 잠결에 느닷없이 달려드는 서늘한 기운에 눈을 뜨면 작은어머니는 나를 업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계셨다. 은빛 실타래를 풀어 놓은 듯 달빛에 젖어 있는 개울의 풍경은 어린 나의 눈에는 신기할 뿐이었다. 밤인데도 이렇게 밝을 수가 있다니. 희게 빛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감나무의 하얀 감꽃도 밤이면 달빛 아래 밝게 빛났다. 개울을 건너 골목길에 들어서면 집집마다 서 있던 감나무의 감꽃 향이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먼저 알고 반겼다.
여름과 가을이 흘러갔다. 내 어린 날의 나이테는 그렇게 여물어 갔다. 작은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야속함, 품에 자식을 두지 못한 허전함을 질녀인 나에게 쏟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어린 시절 잠깐 나를 거둔 작은어머니와는 긴 세월 동안 각별하게 지냈다. 그 작은어머니도 몇 년 전 먼 길을 가셨다.
감꽃 목걸이는 내 기억 속의 가장 첫 부분이다. 인생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긴 여정 속에 산재해 있는 장면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더 풍성하고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수많은 풍경이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남아 내 인생의 갈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감꽃이 필 때쯤이면 어쩐지 외로움이 밀려들곤 한다. 내 유년의 뿌리와 닿아 있던 작은어머니를 여의고 난 후의 증상이다. 그날이 그날 같다는 서글픔이 마음을 잡고 놓지 않는다. 이런 날이면 느리고 고요하게 한 자락 추억을 불러와서 펼쳐 볼 일이다.
떨어진 감꽃을 주워 든다.
고디국
십여 년 전 가을, 친정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엄마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그 무렵을 외로움 속에서 사셨다. 그나마 말동무라도 될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은 버스로 다섯 시간의 거리에 살고 있었으니. 외로움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쯤이면 에미 보아라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다. 내용은 주로 빠듯하게 꾸려 가고 있는 살림살이 걱정, 사위의 건강에 대한 염려, 두 손주에 대한 그리움들이었다. 어디에도 당신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글의 행간에 뿌려져 있는 수많은 눈물 위에 내 눈물도 보탰다. 그 애틋함이 커서 잠시라도 모셔 와서 함께 있고 싶었다.
하루는 고디국을 드시고 싶다 하셨다. 어릴 적에 여린 배추를 살짝 데쳐 넣고 정구지도 씀벙씀벙 썰어 넣고 밀가루를 풀어 끓인 고디국을 즐겨 먹었다. 지금처럼 찹쌀가루를 풀고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옹골찬 고디국이 아니었다. 열대여섯 식구가 먹어야 했으니 풋내 나는 멀건 국이었다. 엄마는 그 생각이 나신 듯했다. 고디를 사려고 몇 번이나 큰 시장에 갔지만 그때마다 허탕을 쳤다. 엄마는 그 가을에 먼 길을 떠나셔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고디국은 내게 그리움이다.
몇 해 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친구와 황토 찜질방에서 만났다. 세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는 내가 고디국을 끓이고 머위 잎을 데쳐 된장에 무쳐서 도시락을 싸서 가면 그렇게 좋아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등 뒤에 바투 붙어 있건만 친구는 연신
얘, 너 정말 고디국 잘 끓이는구나, 정말 맛있다.
하며 콧등의 땀을 닦았다.
친구인들 그것을 느끼지 못했겠는가. 지천명의 나이에 섰으므로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늘에다 대고 삿대질이라도 하며 묻고 싶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는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순리대로 가겠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길길이 화를 내었다. 죽음은 연인이 아니야. 네 나이에 죽음이란 원수야. 원수에게 곁을 내어 주지 마.
단발머리 시절, 그 친구와 나는 앞뒤 번호를 나눠 가졌다. 친구가 46번, 내가 47번이었다. 집에서 잠을 잘 때 외엔 하루 종일 붙어 지냈다. 그러던 것이 서로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각자 다른 삶을 사느라 잠시 헤어졌다. 내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을 때, 친구는 우리의 남다른 인연에 즐거워했다.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병원에 갔을 때였다. 이미 말문을 닫은 친구는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천국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고디국은 내게 슬픔이다.
그 후로 나는 고디국을 끓이지 않았다. 나도 엄마를 닮아 고디국을 좋아한다. 언제든 끓여야지 싶어서 고디를 삶아 물과 함께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고디가 보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움이나 슬픔은 볕이 바르고 바람이 좋은 날 높이 걸어 두어도 마르지가 않았다.
그런 내가 어제는 큰 솥으로 한 솥 가득 고디국을 끓였다. 우리 동네는 이맘때가 가장 바쁜 시기이다. 과수원에서는 너무 많이 달린 열매는 따 내고 남겨 둔 엄지손톱만 한 열매에 봉지 씌우기를 한다. 기계로 하기 때문에 그전처럼 그리 많이 가는 일손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모내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일 사람의 손이 많은 것은 산딸기를 따는 일이다.
나는 산딸기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웃의 밭에 가서 잠깐씩 일손을 거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고디국 생각이 났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한 그릇의 고디국을 대접하고 싶었다.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고디를 해동시키고 장에 가서 정구지 석 단과 솎음배추 한 단을 샀다. 배추를 슬쩍 데쳐서 잘게 썰어 두었다. 정구지도 잘 다듬어 씻어 썰어 두었다. 찹쌀가루와 들깨가루를 물을 부어 개어 놓았다. 고디 삶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배추와 정구지를 넣고 한소끔 끓인다. 그러고 나서 찹쌀가루와 들깨가루 갠 것을 넣고 간을 한다. 나는 간장과 소금 간을 반반씩 한다. 이게 시원하게 끓이는 맛의 비결인 것 같다.
동네 사랑방 부엌에 국솥을 가져다 놓고 입도 빠르고 손도 빠른 이웃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하루 종일 과수원이나 들에서 일하시느라 저녁 반찬 준비를 못하신 분들 한 냄비씩 떠 가서 저녁에 드시라고 했다.
이제 그만 그리움과 슬픔에서 놓여날 때가 되었다.
대청
사흘째 냉전이다. 남편은 밥을 차려 주면 먹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들어와 잠을 잤다. 나도 내 일을 말없이 했다. 그전 같으면 그냥 두었을 살림살이들을 꺼내 씻고, 잘 갈무리해 두었던 철 지난 옷도 다시 끄집어내어 세탁기에 넣었다. 장롱 깊숙이 잠을 자던 이불도 꺼내 거풍을 시켰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알 리 없는 햇살이 찰랑찰랑 다가와 흰 광목 이불에다 대고 재재거렸다. 갑자기 불려 나온 이불은 내 눈치를 보느라 머뭇댔다. 괜히 방해하기 싫어서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내 몸속에 내가 모르는 순간 이동하는 길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가슴이 젖는다 싶더니 이내 눈에서 찔끔 물기가 묻어났다.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남편이 일을 일찍 끝내고 점심 무렵에 집에 들어왔다. 무심한 듯 물었다.
바람 쐬러 갈까?
나는 대답 대신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백설기를 꺼내고 차를 끓여 보온병에 담고 과일 몇 개로 바구니를 꾸렸다. 마지못해 한다는 품새를 보이려고 평소와는 달리 일부러 굼뜨게 행동을 했다.
집을 나서면서 군위군(郡)에 있는 한밤마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하기는 싫었다. 지금껏 남의 삶을 치보며 살지 않았다. 재물이나 명예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 연연해하지 않아서 그런 일로 인해 부딪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물과 같았다. 카멜레온처럼 색깔도 자주 변했다. 어쩌다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인해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어디에 쟁여져 있었던지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와 쌓이고 만다.
대율리 가 볼까?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심상하니 대답을 했다.
그러든지.
고택이 있고 돌담 길이 아름답다는 한밤마을을 보고 싶었다. 언젠가 한 말을 남편이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두어 시간 자동차를 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제법 높다란 담 위로 흰 불두화가 만개해 있었다. 붉은 장미도 한창이었다. 돌담 사이사이에 낀 초록의 이끼가 나도 여기 있어요. 하는 듯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식물들은 저렇게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사람은 그만도 못한 것이 자못 부끄러워졌다. 사람이라고는 옆에서 나란히 걷는 남편밖에 없지만 그 마음을 들킬세라 일부러 목을 길게 빼고 담 안을 기웃거리는 시늉을 했다.
제법 너른 골목길을 올라 왼쪽으로 꺾어지니 바로 유명한 남천 고택이다. 빈번한 방문객 때문인지 안으로 잠겨 있다. 그 앞에 서자 나는 고택보다 옆에 있는 대청에 마음을 빼앗겼다. 답답했던 속이 훤히 뚫리는 기분이다.
대청 중앙에는 세로로 두 자씩 쓴 대율동중서당이라는 현판이 높이 걸렸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금은 사면이 개방된 구조이지만 중건할 당시는 중간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둔 형태였으리라 한다. 이 대청을 중심으로 한밤마을의 길이 방사선 모양으로 갈라져 있고 그 길 따라 전통 가옥들이 숨바꼭질하듯 드문드문 숨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한밤마을 전 지역이 사찰 터였고 이 대청은 대종각 자리였다고 한다. 타종을 하면 그 여운이 마을 멀리까지 퍼져 나갔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 종소리를 듣든지 구심점은 이곳이니 지금처럼 대청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복잡한 마음을 대청에 내려놓았다. 따스한 햇살이 눅눅한 마음을 어루만졌다. 무심히 지나갔던 바람도 되돌아와 뭉쳐 있는 마음을 헤집어 길을 내었다.
남편은 인생의 가을을 좀 힘들게 건너고 있는 중이다. 처진 어깨를 보니 마음 한쪽이 기우뚱거렸다. 나라도 중심을 잡자고 다짐을 해도 그건 잠깐이고 다시 발밑이 꺼져들었다.
평생을 모범 답안처럼 살아왔지만 세상일이 어디 내 마음처럼 움직여지는 것이던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구설에 말릴 때마다 남편은 좌절했다가 다시 추스르곤 했다. 몸이 늙어 가는 만큼 마음도 탄력을 잃어 가는 모양이었다. 요즈음은 그전처럼 쉬 마음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을 거란 것을 알면서도
어깨 좀 펴고 다녀요.
보다 못해 짜증스럽게 내뱉은 말이 이번 냉전의 시작이었다.
대청은 만남의 장소가 아닌가. 서로 소통하고 화해를 이루는 곳이다. 남편과 내가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이 멀뚱히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두 마음도 아마 이런 대청에서 만났나 보다. 그래서 같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 부부의 잦은 다툼은 어쩌면 소통으로 가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뜻인 남편이 대율리, 내가 한밤마을이라 칭하는 것처럼.
갑자기 요란한 참새 소리가 들렸다. 돌담 길 여기저기에서 한꺼번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입구에 관광버스 세 대가 서 있더니 수학여행을 왔나 보다.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너른 대청을 점령해 버렸다. 휴대전화기로 전화를 하는 아이, 작은 책자를 들여다보는 아이, 사진을 찍는 아이, 간식을 먹는 아이, 옆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아이, 무언가를 쓰는 아이……. 하고 있는 일만큼이나 자세도 다 달랐다. 대청 끝에 걸터앉고, 엎드리고, 기둥에 기대고, 양반 다리로 앉아 있고, 벌렁 눕기도 했다. 대청은 아낌없이 자리를 내주었다.
참새들이 사라지고 나자 사위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대청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팔공산 자락의 풍경이 각각의 액자처럼 걸려 있다. 대청은 모두 열다섯 개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로 기둥을 세웠다. 대청의 바닥은 땅에서 아이의 허리 높이만큼 올라와 있었다. 위아래로 막힘이 없다. 이렇게 바람 길을 두었으니 기우뚱거릴 리 없을 터이다.
신산스런 마음을 대청에 그대로 두고 좁은 돌담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초입에서 대청까지 올라오는 길의 담은 제법 높고 육중했다. 대청에서 다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의 돌담은 낮고 아담했다. 집들도 소박하다. 이끼 낀 돌담을 들여다보니 켜켜이 쌓아 견고해 보였지만 그 사이사이에 바람 길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돌담이 무너지지 않을 성싶다.
낮은 돌담 안쪽에는 흰 보석들로 한껏 치장을 한 감나무가 다소곳이 서 있다. 껑충 키가 큰 호두나무는 엄지손톱만 한 열매를 수없이 매달고 뽐내듯 그 옆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청춘의 두 나무는 서로에게 풍요한 미래를 약속하고 있는 듯했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어때, 괜찮은 한 쌍이지? 하는 듯했다. 복잡한 마음을 대청에 두고 와서 그런지 이런 상상력이 더해졌다. 나도 모르게 남편과 내가 부부의 인연을 맺을 때 생각이 나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철없던 단발머리 소녀였을 때 까까머리 남자애를 처음 보았다. 인연으로 묶여 오랜 세월을 함께 걸어야 할 운명이었는지 이십대 중반에 몸이 아파 휴학을 하고 있는 더벅머리 청년인 그를 다시 만났다. 눈에 보이는 결혼의 조건을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지만 순수한 마음과 성실함과 책임감이 그가 갖고 있는 재산이라 믿고 모험을 했다. 긴 인생의 여정에 잠시 동안의 주춤거림이 무엇이 문제가 되랴 싶었다. 더디 가는 만큼 한 생애의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성해지리라 생각했다. 주어진 날들을 순리대로 살면 시간의 끝자락에 섰을 때, 그래도 괜찮은 부부였다고 서로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
우리의 삶이 벽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 거칠 것 없이 훤히 트인 대청에 머무를 때도 있어야 함을 간과했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잠시 멈추어 서서 비우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노폐물이 쌓여 동맥경화를 일으키곤 했다.
아! 이제부터는 남편의 마음 한 귀퉁이, 내 마음 한 귀퉁이를 비워 우물마루를 깔고 열다섯 개의 원주 기둥을 세워 볼까? 기둥 하나하나에 우리 부부가 그동안 써 내려온 삶의 이력을 새겨 넣으면 제자리를 잃고 자주 기우뚱거리는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속에 잠시 휴지(休止)가 필요할 때면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곳이 많았으면 좋겠다. 책이나 사람도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앞선 삶을 살다 간 이들의 흔적들 위에 현재를 건너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얹을 수 있다면 좀 더 깊고 융숭한 호흡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걸음을 돌려 다시 대청으로 왔다. 햇빛도 만지고 바람도 쓰다듬고 지나간 마음은 한결 말랑말랑해졌다. 사느라 다시 때가 끼고 거칠어지면 이 훤히 트인 대청을 생각할 것이다. 마음을 제자리에 담았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올 때의 그 걸음이 아니다.
<신인상 당선 소감>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처럼
김 영 희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 졸업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2013)
능선을 따라 오르다 솜 꽃 같은 갈대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았습니다. 소리 없이 잦아드는 가을의 너그러운 배려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갈대는 바람이 일렁이는 대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이방인들의 방문을 맞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서성이며 숨소리를 죽이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잔잔한 바람의 일렁임에 흔들리는 은빛 물결은 느린 곡조의 우아한 블루스를 추는 듯했습니다. 경쾌하고 싱그러운 바람에는 리듬에 맞춰 탱고의 스텝을 밟는 무희들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연약하지만 재치 있는 갈대들의 춤사위에 매료되어 감탄사만 연이어 나왔습니다.
조용한 바람만 지나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머리를 가누기조차 힘들고 눈도 뜰 수 없게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습니다. 은빛 물결은 일제히 한 곳으로 쓰러졌습니다. 뿌리까지 흔들리는 세찬 바람에 한동안 순응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갈대들은 서서히 제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한이 서린 우리의 가락을 춤사위로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기우가 무색하게 부드러운 곡선은 몸을 일으켜 당당히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갈대는 지나가는 바람만 있으면 다양한 느낌과 언어를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에도 연약한 줄기로 다시금 자신을 일으키는 강인함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난날 내 안의 풍경들이 울타리에 갇혀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고 외쳤지만 아직은 안 돼 하고 눌러 두었습니다. 누름돌로 눌러 둔 부끄럽고 아팠던 기억들이 곪아 가고 있을 때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가두어 둔 상처들이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잠자던 기억들은 두레박으로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솟아올랐습니다. 나의 이야기가 이처럼 많았던가? 드러내지 않았으면 생채기가 되어 나를 할퀴고 지나갔을 아픔들이 하나, 하나의 글이 되었습니다. 글쓰기는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서서히 열어 주었습니다.
신인상 당선 소식에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했습니다. 힘든 일상을 지워 버릴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고개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용기와 열정으로 더욱더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씀 같았습니다. 힘들지 않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리 꺾인 갈대처럼 주저앉은 무릎을 다시금 일으켜 걸어가야겠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던 갈대들의 다양한 춤사위처럼 힘차고 당당한 모습으로 독자와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채 여물지 않은 씨앗이지만 튼실한 열매를 맺으라고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진솔한 수필이 되도록 채찍과 격려로 힘을 실어 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제 먼 길을 가기 위해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마음의 고삐를 다잡아 봅니다.
<신인상 당선 작품>
빈방 외 2편
김 영 희
빈방이라 했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주인이 부재중인 방에는 사용하던 물건들이 더미를 이루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을 가득 채운 세간들을 마주하며 삶을 살아갈수록 안부터 허무는 비움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엄마는 동생과 한집에 살고 있다. 동생네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살림을 합친 것이다. 엄마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 가니 아들에게 보탬이 된다고 뿌듯하게 생각했지만 살림을 도맡아 하기에 힘에 부쳐 했다.
조카들이 중학생이 되자 엄마는 혼자 살겠다는 말을 여러 번 내비쳤다. 집을 새로 마련한다는 것이 여건상 쉽지 않아 뭉그적거리다 몇 계절이 지나가 버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부동산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적당한 집이 있다는 말에 댓바람에 달려갔다. 사무실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나 홀로 동 아파트가 외롭게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니 아파트 마당에는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발치에서 어룽대고 있었다. 아파트 소개업을 하는 그녀는 현관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차가운 금속이 찰칵하는 울림과 함께 어떤 슬픔의 시간들이 덜컹거리는 문짝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모든 게 지워진 어둠 속에서 물큰한 냄새가 콧잔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현관 입구에 조심스레 발을 들이밀며 스위치를 찾았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실내로 들어서니 시력이 순간 멈춘 듯했다. 불을 켰으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형광등은 요란하게 깜박이기만 할 뿐 보탬이 되지 못했다. 침침한 분위기가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주위 사물들이 하나 둘씩 망막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 없는 빈방은 고요한 정적 속에서 시간이 박제되어 멈춘 듯했다. 괴괴한 기분이 갈라진 벽 사이에서 스멀거리듯 주위를 에워쌌다. 방에 대한 첫인상은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지 않아 방을 미처 치우지 못했다고 했다. 유품의 수령인이 없어 유품 정리 신청을 조금 전 그녀가 했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장롱 속 서랍은 미처 닫지 않고 반쯤 열려진 채 있었다. 유족들이 유품을 가져가며 서랍 문은 미처 닫지 못했나 보다. 문갑 위 액자에는 웃음 띤 얼굴이 정지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사진 속의 할머니는 고왔다. 빈방의 공허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니 주인 없는 물건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듯 이 세간들도 머지않아 폐기될 것이다. 눈으로 보고 만지던 물건들은 그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지점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각각의 의미와 세월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은 재활용 센터로 보내지기도 하고, 폐기물로 처리되어 쓰레기 더미에 쌓여질 것이다.
빈방에 서 있으니 이승에 벗어 놓고 간 슬픔이 나에게 전이된 듯했다. 생의 어두운 마디마디가 집 안 여기저기 스며든 곳에 엄마를 모신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전 주인의 영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서둘러 다음 집을 보자며 채근했다.
그녀는 평수가 조금 더 넓은 아파트로 향했다. 주인은 중후한 분위기의 중년 신사였다. 고풍스런 가구들로 방을 가득 채운 살림은 생활이 여유로웠음을 짐작하게 했다. 숨죽인 공간에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살아 있다는 것이 반가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도 많이 적요했는지 나 여기 있다는 소리를 냈다.
중년의 주인은 며칠 전 할머니 삼우를 지냈다고 했다. 유품을 치우려면 며칠간의 말미가 필요할 거라고도 했다. 또다시 정적이 부유하는 빛처럼 떠돌았다. 나는 할머니의 작은 소품들에 눈을 보탰다.
할머니께서 솜씨가 좋으셨나 봐요. 예쁜 수예품들이 많아요.
남자는 내가 유품들에 관심을 기울이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시큰둥한 목소리로 속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하루속히 물건을 정리하고 새롭게 단장해 집을 처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파트 창문으로 늦가을의 낙엽이 빙그르 내려앉았다. 생을 마감한 낙하가 소슬한 여운을 남긴다. 잔바람에도 느티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며 제 몸의 일부를 내려놓는다. 나무도 때가 되면 제각각 사연을 품은 나뭇잎과 결별을 하듯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 방에서 바라보는 낙엽은 이우는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암시해 주었다.
누구나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나면 주인이 사용한 가재도구들은 타인의 손에 치워지게 된다. 주인에게는 하나하나 추억과 함께한 손때 묻은 물건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애착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노년의 삶은 조금씩 비워야 한다. 한 존재가 세상을 등지면 일생을 함께한 유품들은 흔적 없이 버려져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진다.
그녀는 어느 방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노후의 삶 자체가 황량하지만 방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은 비애감에 젖어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듯했다.
며칠 뒤 엄마는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이삿짐을 꾸리는 엄마에게 주변을 정리하길 당부했다. 필요 없는 물건은 누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들에게 주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지금 받고 싶다고 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방보다 꼭 필요한 것만을 소유한 깨끗이 정리된 비워 있는 방이었으면 좋겠다.
삼색등
고향 마을을 지나다가 낡은 간판에 눈이 머문다. 빨강, 파랑, 흰색의 삼색 원통이 저 혼자 빙글빙글 힘없이 돌아간다. 간판 옆에 매달려있는 빛바랜 삼색등에는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누구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 문이 열려진 이발소에는 적막함이 깃들어 있다. 문 사이로 드리워진 주렴을 걷어내며 나는 오랜만에 친정을 찾은 딸 인 양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낯선 곳에 온 기분이다. 세월을 깎던 아저씨는 손님이 없어 혼자 졸고 있다. 쇠잔한 모습이 지난날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느껍다.
어릴 적 아버지는 이발소를 하셨다. 이발소는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삼거리에 위치했다. 나는 식사 때가 되면 대문을 열고 종종걸음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닥에 먼저 눈이 갔다. 손님들의 잘려진 머리가 수북이 쌓여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주말이면 손님이 많아 끼니를 제때 못 드실 정도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이발소는 어린 나의 눈에 무척 크게 느껴져 우리 집이 부자라는 생각을 한동안 하게 했다.
벽면을 둘러보면 새끼 돼지들이 줄줄이 누워 어미 젖을 물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액자와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스러운 분위기에 미소가 그려지는 정겨운 그림들과 시였었다.
엄마는 식구가 많아 늘 일손이 바빴다. 먹고 자는 종업원까지 끼니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항상 북적대던 집이 언제부터인지 객식구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저녁상을 받으며 새로운 가게가 들어선 곳에 규모가 큰 이발소가 들어섰다며 힘없이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개 숙인 모습을 보았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객식구가 한 명뿐인 이발소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부모님의 근심은 날로 늘어 갔다. 마지막에는 있던 사람마저 그만두어 날로 쇠락하여 갔다. 아버지는 웃음기를 거두었고 나는 객식구들로 웅성거리던 그때가 그리웠다.
그때 이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아누우셨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아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병원을 다녀도 병명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돈이 없으니 더 이상 이 병원 저 병원 다니지 않겠다며 역정을 내셨다.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는 집에서 굿도 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신 아버지의 손에는 가위가 없었다. 동네 분들은 살아생전에 모습을 본다며 다녀가셨다.
우울한 집안 분위기로 힘겨웠다. 이웃들과 정답게 너털웃음으로 세상살이의 시름을 달래던 그 시절의 아버지가 진정 행복했었다는 것을 느꼈다. 아프기 전에는 많은 분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머리만 깎은 것이 아니라 정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으며 이발소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다. 장기를 두거나 신문을 넘기던 모습은 추억 속의 시간에 묻혔다. 아쉬움이 밀려오는 날에는 이발 요금표와 모범 이발사 표창장을 꺼내 보며 미련을 삭이곤 하셨다.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 속에서 정지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머리를 깎을 일이 생겼다. 근처 미장원에서 머리를 끊을까 했는데 아버지가 힘겹게 일어나셨다. 겨우 몸을 추슬러 나를 툇마루에 앉히고는 가위를 잡으셨다.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했다. 오래도록 가위를 손에 놓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과는 달리 머리 깎는 시간이 더디 갔다. 아버지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며 가위를 놓아 버렸다.
옆에 놓여 있던 거울을 보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양쪽 머리의 길이가 다르고 비포장 길처럼 삐뚤빼뚤 거렸다. 친구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창피했다. 며칠 뒤 다시 손봐 준다고 하셨지만 그 후 머리를 맡기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되돌려 달라고 떼를 쓰며 울었다. 철이 없어 아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쇠락해진 고향의 이발소를 보며 내가 남자라면 머리를 내밀고 싶다. 비록 이발사의 머리 자르는 솜씨가 서툴더라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여유도 있다. 턱 밑에 하얀 비누 거품을 바르며 면도하던 모습, 칼을 가는 가죽 띠, 거품을 내는 비누통, 접었다 펼 수 있는 긴 면도칼, 이발 도구는 이제 시골이나 소박한 이발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정지되어 어린 시절의 행불행을 추억하는 풍경이 되었다. 사각사각 아버지의 손에 가위가 춤을 추던 소리는 지금도 내 귓전에 남아 맴을 돈다. 어린 시절 기억 저편의 삼색등이 지금은 낡아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돌아간다.
분내
치킨 가게를 들어설 때 주인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비만의 정도가 심하고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로 착각했다. 다만 여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두드러진 가슴뿐이었다.
나는 주문을 해 놓고 순서를 기다렸다. 치킨 가게는 주말이어서 생기가 돌았다. 주인의 표정도 그러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춤을 질끈 묶어서 주인의 몸피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잡티가 많았다. 윤기 없는 두꺼운 입술은 여자로서의 매력을 반감시켰다. 큰 키는 몸집이 시각적으로 더 크게 보였다. 요모조모 살펴보아도 여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중성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돌싱이라며 이웃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기다리기가 무료하여 켜 놓은 TV에 눈이 갔다. 전국노래자랑 시간이었다. TV에는 중년의 여자가 물방울 넥타이를 한 남자를 부르고 있었다. 치킨을 기름 솥에 넣고 노래를 같이 불렀다. 흥에 겨운 그녀는 스텝을 밟으며 몸을 흔들었다. 오늘 무척 신나는 일이 있는지 아니면 휴일이라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TV보다 그녀의 몸짓과 노래를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에게 저런 노래를 한 곡 불러 주며 빈말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
그녀는 사랑을 원하는 여자였다. 방송이 끝나고 화장품 광고에 눈을 고정시킨 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분내를 물씬 풍기는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기억 저편 지난 시절이 분내의 향기처럼 코끝을 스친다.
시골에 살던 이모는 살림이 어려워 도시로 이사를 왔다. 이모부는 가족들과 이삿짐 보따리만 덩그러니 우리 집 옆에 내려놓았다. 이사를 왔지만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가 녹록하지 않아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던 이모부는 겨울 한 철 장사인 젓갈 도매를 해 보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곧 오겠다던 이모부는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엄마는 이모부가 처자식 건사도 하지 않고 고향에서 무위도식한다며 못마땅해했다. 시간이 지나니 이모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고 한숨이 늘어 갔다. 때론 밤이면 하늘을 쳐다보며 소원을 풀어 놓는지 합장한 두 손에는 경건함이 묻어났다. 언제나 합장한 손은 이모부가 있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이모부는 애초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게으른 성격 탓인지 힘든 농사일을 싫어했다. 어쩌다 일거리가 있어도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한 발 물러나 꽁무니를 빼곤 했다. 무슨 일이든 결과물이 없었다. 이모부가 감감무소식이니 도시 생활이 낯선 이모는 궁여지책으로 남의 집 빨래며 청소를 해 주며 근근이 살림을 이어 나갔다. 생활이 궁핍하니 이모의 외모는 말이 아니었다.
이모는 자매들과는 다른 독특한 외모였다. 길쭉한 얼굴은 몸이 야위어 더욱 길어 보였으며 높은 코에 홀쭉한 볼살은 누가 보아도 예쁜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는 고민이 쌓인 얼굴을 두드러지게 했다. 살아가는 데 아무런 재미도 희망도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이었다. 하루하루를 먹고살기가 바빠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 이모는 중성으로 보였다.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니 이모가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와 엄마 화장품을 찾았다. 웬일인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거울 앞에 바투 앉은 모습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추어진 이모의 얼굴은 생경스러웠다. 이모도 오랜만에 자신의 모습을 보니 어색했던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멋쟁이였었는데 삶의 세파에 찌든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음식 장만에 분주했다. 모처럼 쇠고기 국을 끓이는 맛있는 냄새가 콧등을 간질거렸다. 오늘은 집에 특별한 손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오늘 누가 오시느냐고 물었다. 이모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홍조까지 띠며 이모부가 온다고 했다. 행복에 젖어 흥분된 이모의 얼굴은 어느 날보다 예뻐 보였다.
이모는 기초화장품을 꼼꼼히 바르고 엄마가 평소에 아끼는 크림을 듬뿍 발랐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을 한올 한올 펜슬로 그림을 그리듯 정성을 기울였다. 얼마 남지 않은 립스틱은 새끼손가락에 묻혀 입술을 선홍색으로 덧입혔다. 마지막으로 뽀오얀 분첩을 꺼내 콤팩트로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환하게 마무리했다. 이모는 화장한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 있게 나를 보며 웃었다. 감미로운 분내의 잔향이 안방에 퍼지며 이모가 여자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분내는 엄마의 냄새였지만 이모의 분내는 여자의 냄새로 아련한 그리움처럼 내 가슴에 들어왔다.
치킨 가게를 지나치며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보았던 얼굴이 아니다. 화장품 광고를 유심히 보더니 오늘은 화장을 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을 틈타 콤팩트를 꺼내 한 번 더 얼굴에 덧바른다. 꽃무늬 치마를 입고 머리에 핀을 꽂은 모습이 여성스럽다. 오늘은 웬일인지 손님이 가게로 들어서니 나긋나긋한 눈웃음과 정겨운 인사로 맞이한다. 행인이 지나다니는 골목에까지 옅은 분내가 바람결에 실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