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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고난회 한국 관구 창립 약사(略史)
창립 전사(前史)
1961년과 1962년 두 차례에 걸쳐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성 십자가관구(Holy Cross Province) 소속 예수고난회 전(前)중국 선교사 한 명이 당시 지방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피정을 지도하러 한국에 왔었다. 그는 일찍이 불과 수년 전에 막 중국 교도소의 독방을 나왔었는데, 즉 그는 중국에 머물며 활동하였던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1950년대 중반 추방되었던 것이다. 마오쩌뚱 군대에게 중국 국민당이 항복하던 그 시기까지, 벌써 사제생활을 40년 한 이 사람은 중국에서만 30년 이상 살았었는데, 그 시간의 절반 이상을 고난회 중국 선교사들의 수도원장으로 지냈다. 피정지도를 위해 한반도에 왔었던 그 두 해에, 그는 단지 서울에 있던 골룸반 외방선교회 본부에 모인 선교사들과 광주 대교구청에서만 활동하였던 것이 아니라 또한 인천에 있던 화교 공동체에서도 여러 차례 피정지도를 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그가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하기 9년 전에 끝났던 한국전쟁 기간에 피난 왔던 사람들이었다.
다채롭고 넉넉한 삶의 소유자로 기억되는 이 사람 윌리암 웨스트호번(William Westhoven)신부는 전라남도에 위치한 광주대교구장이며 골룸반 외방 선교회원었던 현 하롤드(Harold Henry) 대주교와 처음 만났다. 분명한 것은, 그가 지도하였던 피정들 가운데 헨리 대주교가 고난회원들이 복음화의 큰 일을 돕기 위해 자기 교구에 와 줄 수 있는 지를 물었는데, 그곳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곳은 독일에서 진출한 분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교회들로, 60년 내지 70년 동안 그 지방의 일부 지역은 선교사들이 활동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아일랜드와 미국 출신의 골룸반 선교회 신부들이 그 지역을 위한 책임을 맡았다. 이후 골룸반 회원들이 교회의 불모지 가운데에서 매우 유익한 사도직을 통해 그 교구에 많은 봉사를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윌리암 신부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하나의 계획을 세워 그에게 주기로 대주교에게 제안하였고, 1962년 성 십자가 관구 총회 때 그 계획을 제출하기로 약속하였다. 윌리암 신부의 회고에 의하면, 관구 총회는 대주교를 위해 어떤 사람이나 재화도 제공할 수 없음을 결정하였다.
1947년에서 1953년까지 그리고 1962년에서 1968년까지 성 십자가 관구의 관구장이었던 제임스 패트릭 화이트(James Patrick White)신부는 일본에 고난회 선교사를 파견하려는 생각이 처음 논의되었을 때 관구장을 지냈었는데, 그는 극동 아시아에서 하나의 수도회를 창설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랜 세월 활동하였었던 중국에서의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관구장 제임스 패트릭 신부가 일본에서 그곳 선교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는 한국을 지나갈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헨리 대주교가 고난회원들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대주교를 방문하였다. 거리낌없는 성격의 하롤드 대주교는 관구장에게, 자기 교구의 한 지역을 고난회원들의 독점적인 선교지역(Vicariate Foraine)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마도 상당히 유혹이 되었을 법한 제안을 내놓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 선교의 폐쇄시기에 관구장을 지냈던 제임스 패트릭 신부는, 중국에서 30년 동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고난회가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의 수도회 활동은 1950년대 중반 마지막 선교사의 추방과 함께 끝나버렸던 것이다. 중국에서 고난회원들은 교구 사도직에 종사하였었는데, 그러한 삶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고난회 생활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고난회 수도생활을 위한 지원자들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포교성성의 지시 때문이기도 하였는데, 즉 외국 선교사들은 우선적으로 그 지역교회를 건설해야 하고 그것이 끝난 후 저마다 자신들의 공동체 창설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 포교성성의 지침이었다.
대주교와 관구장은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모두 통 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만일 고난회원들이 한국에 가야만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자신들의 사도직을 위해 가게 될 것이며, 대주교가 일찍이 제안하였었던 교구 사목의 의무들은 맡지 않는다는 상호 합의에 도달하였다. 하롤드 대주교는 고난회원들이 줄 수 있는 어떤 도움이든 좋다고 하였고, 자신의 교구 안에서 첫 번 째 창설에 필요한 적당한 토지를 찾는 것을 시작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는 동안 제임스 패트릭 신부는 그 이전 수도회의 노력들이 바로 최근 무위로 돌아갔었던 아시아 대륙 또 하나의 새로운 지역에서 이러한 최초의 창설을 맡게 될 첫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향후 미래를 숙고하며 한국으로 향한 이 중요한 첫 진출을 함에 있어 유용한 사람을 찾느라 그 이후 4-5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선택은 보다 성숙한 연령의 사람으로서 수도회 안팎으로 모두 경험이 풍부한 장상을 찾는 것이었는데, 그는 서원 20년과 사제서품 16년을 넘어선 라이문도 맥도너(Raymond McDonough, 한국명-마 신부)신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임스 패트릭 신부가 이미 제기된 그 창설 작업에 나서도록 하는 제안을 가지고 그를 만났을 때, 마신부는 43세였다. 마신부는 멕시코로 보내질 것을 예상하며 그 새로운 제안을 듣기 위해 불려 들어갔는데, 그러나 “당신은 이 큰 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이 모험에 나서지 않아도 될 어떤 이유를 얼른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마신부는 중서부와 서부 해안지역의 성소담당을 겸한 소신학교 선생으로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동료 고난회원들과 함께 피정지도와 순회설교를 하였고, 단지 수도회의 사도직에 대해서만 훌륭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양성부분에 있어서도 또한 정통하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학위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극동 아시아에서 별 쓸모 있는 것으로 판명되지는 않았지만! 1963년 10월 마신부는 새로운 한국 고난회 선교사들을 위한 장상으로 임명되었다.
1963년 10월 같은 시기에, 제임스 패트릭 신부는 마신부와 한국을 동행할 사람으로 패트릭 오멜리(Patrick O`Malley, 한국명-오대건) 신부를 선택하였다. 오대건 신부는 1963년 서품 받았고 1956년 서원을 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저스틴 발토젝(Justin Bartoszek, 한국명-박도세)부제가 이 새로운 모험에 임명되었다. 박도세 부제는 1960년 서원을 하였고, 관구장이 그를 불렀을 때는 부제로서 마지막 양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관구장 패트릭 신부는 180센티미터 이상의 거인들을 비교적 작은 키의 마신부를 도와줄 협력자로 삼았다. 이 새로운 생활을 위한 첫 번 째 팀인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는 이듬해 출발 준비를 위해 1964년 함께 모이게 되었다. 박도세 부제는 성무활동을 위한 사제서품과 미시건 주립대학에서의 문화 인류학 공부를 좀 더 한 뒤, 1965년에 뒤따라야만 하였다.
1964년 여름, 오대건 신부와 막 사제로 서품 된 박도세 신부는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미래 생활을 위한 준비로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선교학 공부를 찾아내었고, 마신부는 이 새롭고 흥미로운 미래를 위해 오랜 미국 생활과 사도직을 마감하였다.
그것은 순명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진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미래 사도직에 대해 어떻게 협력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시대였다. 극동 아시아를 향해 가는 데 있어서 결코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이 세 사람, 그리고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도전적이며 전혀 다른 생활을 향하도록 그들의 최고 장상이 자신들을 불렀을 때 이를 열심히 수용하였던 세 사람에 대해 우리가 실감하게 되는 것은, 감동적이면서도 또한 성령께서는 때때로 우리들 각자의 요구들에 대해 온화하게 일깨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평화로우냐? : 1964년-도착과 새로운 시작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는 곧 그들이 도착한 여러 해 동안 매일 기본적으로 듣게 되었던 인사말 같은 기초적인 말들을 배웠다. 8월에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테(C.E. Dant)호라는 배를 탔고,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의 고요한 해안을 향해 태평양의 한없이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전에 경험하였던 그토록 다양했던 한 문화는 첫 날 바다에 휩쓸려가 버렸다. 그 문화충격이란 그들에게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닌 매일의 양식이었다. 그것은 한국이 전쟁으로부터 회복하는 과도기에 아직도 있었음을 기억해야만 하며, 뒷날 이 한반도와 관련된 경제 기적이란 아직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9월 16일 마신부는 서해에 있는 서울로 향한 항구인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오대건 신부가 일본에서 사람들을 방문하는 동안 그를 거기에 남겨두고 홀로 고베(Kobe)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떠났었다. 광주에서 온 골룸반 회원 클레어리(Sean Cleary)신부가 자신이 그 배를 타고 상륙하였듯이 마신부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나와있었고, 마신부는 한국 땅에서 처음 맞는 시간을 위해 거닐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 고난회원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열흘 뒤, 마신부는 고난회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생활과 사도직이라는 연약한 묘목을 심어야만 했던 도시, 광주를 향한 수백 번의 여행들 가운데 그 첫 여행을 시작하였다. 거기서 마신부는 온화한 주인이었던 교구 총대리 서베이지(Sean Savage)신부와 많은 사제들 그리고 골룸반 회원들과 교구 사람들을 그 첫 방문 동안에 만났다. 한편 머물 곳이 없었으므로, 주교관사가 마신부를 위한 손님숙소로 제공되었다.
9월 29일 한국에서 살게 될 두 번째 고난회원인 오대건 신부가 일본으로부터 김포공항에 도착하였고, 서울에 있는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곧장 광주로 내려왔다. 그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공동체 생활의 첫 경험이 이제 가능하게 되었지만, 거처할 곳이 없었다. 자신들의 서울 수도원에서 생활하라는 살레시오 회원들의 친절한 제안을 숙고한 후에,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는 서울에 있는 자신들의 왕십리 본당에서 생활하라는 골룸반 회원들의 제안을 대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에서 그들은 언어 공부를 하는 동안 그 다음 해까지 살아야만 했다. 10월 3일 그들은 그 즈음에 문을 열었던 “명도원”, 즉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서울 도심지에서 운영하던 어학 기관에서 한국어 공부 정규 과정을 시작하였다.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은 보다 상세하게 미래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를 현 하롤드 대주교와 가질 수 있었다. 현 대주교는 그 때 더 심해진 매우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요양 차 미국에 가 있었다. 대주교는 그들을 화정동에 자리를 잡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광주 대교구에서 그들의 미래 일을 위해 대주교가 고난회원들에게 제공하는 12,536평의 땅이 있었다.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 두 사람에게는 공군기지로부터 광주 도심을 향해 나있는 길이 언덕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논들로 둘러 쌓인 그 자리의 고독함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은 훌륭한 자리였다.
12월 4일, 전임 총장 말콤 라벨(Malcom Lavelle)이 한국을 첫 방문을 하였고, 오랜 세월 한국 고난회원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타지역 방문자들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말콤 총장을 통하여,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는 전임 한국 수상이며 저명한 가톨릭 평신도였던 장면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장면 박사는 바로 3년 전 박정희에 의해 정권을 찬탈 당했다. 장면 박사는 이미 고난회에 관한 다수의 저술들과 성녀 젬마 갈가니(Gemma Galgani)의 전기를 번역하였는데, 이찌기 수 년 동안 로마에서 말콤 신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를 통해, 한국 천주교인들 가운데서 일하기 위해 첫 고난회원들이 한반도에 진출하기도 전에 고난회는 이미 한국에 알려져 있었다. 성인과 관련된 고난회원의 또 다른 삶은, 장차 청주 교구장이 될 정진석(니콜라오) 신부에 의해 성녀 마리아 고레띠(Maria Goretti) 전기로 번역되었다.
1965-1966 : 한국말을 배우기 위한 투쟁
또 다른 전임 중국 선교사 프란시스 플래어티(Francis Flaherty)가 4월에 한국을 잠시 방문하였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 있는 메리놀회 수녀들에게 일련의 피정들을 지도하러 왔었는데, 그는 한국과 그곳에 최근 형성된 공동체를 찾은 두 번 째 방문객이었다.
5월경, 토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리는 그 땅이 고난회원들의 자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주교의 명의로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는데, 이것은 5월 2일자 포교성성의 방침을 따른 것이었다. 헨리 대주교는 자신의 개인 돈을 가지고 구매하였던 그 땅에 대해 첫 기부를 하였는데, 그 친절한 선물은 결코 돌려 받을 수 없었다.
9월 16일 그 당시 일본에서 휴가 중이었던 오대건 신부를 만난 박도세 신부가 비행기편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박도세 신부는 휴가를 마친 오대건 신부가 떠나는 중이던 요코하마(Yokohama)에서 배를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즉시 어학기관인 명도원의 새로 지은 건물에 주거지를 잡았고, 새로운 언어라고 하는 이 낯설고 복잡한 것을 공부하는 동안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하였다. 언어에 대한 확실한 자신을 가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문동 본당의 한 선교 부서에서 일하던 마신부와 함께 매 주일 일정한 사도직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마신부는 미사를 드렸다. 오대건 신부 역시 한 주일에 여러 본당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비무장지대를 따라서 미군 부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강론에 대한 사본들은 남아있지 않다.
오대건 신부는 또한 알로이시오 맥도너(Aloysius McDonough)신부가 쓴 성 가브리엘(St. Gabriel)에 관한 소책자와 “고난회원들”이라는 소책자를, 단순한 번역을 넘어선 관점에서, 고난회와 고난회 주변에 관한 출판 일을 확대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1966년 새해에 관구장 제임스 패트릭 화이트 신부와 일본의 고난회 선교사인 데니스 맥관(Denis McGowan)신부의 방문이 시작되었다. 이 방문기간 동안 피정집이 마침내 세워지게 되었던 실제 자리인 6810평의 다른 토지를 구입하기 위한 최종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해에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는 그들의 언어 공부를 마쳤고 두 본당에서 사도직을 시작한다. 즉 마신부는 광주대교구 주교좌 본당에서 그리고 오대건 신부는 나주의 사골본당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미래에 우리가 사도직을 시작해야할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직접 일함으로서 자신들의 언어 능력을 한층 강화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 해 연말, 오대건 신부는 간염에 걸려 내려왔고 목포에 있는 골룸반 수녀회 병원에서 한 달을 보냈다.
1966년 7월 박도세 신부는, 리카르도 롬바르디 신부(Ricardo Lombardi)가 창설하고 고난회 아르헨티나 관구의 루이스 돌란(Luis Dolan)신부와 아시아인 협력자 헬렌 부루어(Helen brewer)에 의해 개최된 M.B.W (Movement for a Better World-"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공동체 묵상회”) 피정을 그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해달라는 요청 받았고, 그리하여 이 운동과 함께 오랜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그 해 연말에 박도세 신부의 부친이 시카고에서 임종하였는데, 제임스 미카엘스(James Michaels) 보좌주교와 성직자 수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는 장례식을 위해 집에 갈 수 없었다.
그 해 9월에는 캐롤 스튜뮐러(Carroll Stuhlmueller)가 몇 차례의 방문들 가운데 처음으로 도착하여 서울에 있는 예수회 대학(서강 대학)과 또한 한국에 있던 두 개의 신학교 가운데 하나인 광주 대건 신학교에서 성서에 관한 세미나를 하였다.
1967-1969 : 광주 피정집
언어가 장벽이 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 고난회의 미래 사도직은 항상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주에서 자산을 구입하였지만, 거기에는 정확히 빌딩 형태의 집을 짓기 위한 콘크리트 공장이 없었다. 더구나, 만일 고난회가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면,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까?
그리고 관구장 제임스 패트릭 신부의 바램과 꿈이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리고자 한다면, 이 적은 무리의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 한국 고난회원들의 삶의 방식과 사도직을 형성하도록 하였던가 하는 그 사실을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첫 번 째 물음에 대해 답하자면, 아이오와(Iowa)주로 돌아온 오대건 신부 가족들의 관대한 마음 덕분에, 우리는 남쪽 제주도에 있는 작은 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마침내 우리는 자그마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한국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좀 더 복잡한 문제였다. 언어의 한계와 토착화의 과정 때문에 그 세 개척자는 언어에 대해 좀 더 편안해지고 또한 미래 고난회원들이 머무르게 될 집을 위한 장소를 가지게 될 때까지, 즉 1970년까지는 지원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사도직 부문에서는, 오대건 신부와 박도세 신부가 한국에 꾸르실료 운동을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오대건 신부는 서울에 있는 성수동 본당에서 한국에서 개최된 첫 번 째 꾸르실료 운동을 지도하였고, 박도세 신부는 서울에 있는 프란치스코회(現 작은형제회) 언어학당에서 두 번째 꾸르실료를 지도하였다. 언어공부를 마친 마신부는 본당을 떠나 광주신학교로 이동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영성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오대건 신부는 광주대교구에 있는 본당에서 계속 지냈으나, 언어학당을 마친 박도세 신부는 문화인류학을 좀더 공부하기 위해 서울대학교를 다녔다.
미래 광주 피정센터에 관한 일련의 첫 모임이 한국인 건축설계사 엄덕문씨와 더불어 마신부와 오대건 신부 그리고 박도세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열렸다. 1967년 12월, 일본 출신의의 베드로 기므르(Peter Kumle)와 함께 관구장 제임스 패트릭 신부가 다시 서울에 왔는데, 그는 그 계획을 검토하였고 예산 안에서 그것을 시행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변경을 하여, 최종 계획은 1967년 12월 15경에 끝났다. 이제 문턱은 넘어섰고, 고난회원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집을 곧 갖게 될 것이었다.
1968년, 그 해 동안 일하기로 되어있었던 가지각색의 노동자들 사이에 책임 분배라는 그들 간의 문제가 벌어졌다. 그 첫 번째 문제는 시카고 관구장의 존재로 인하여 완전히 종결될 수 있었는데, 정치적인 상황이 좋게 말해, 다소 불안정한 한국에서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조심해야한다는 심각한 불신이 있었다. 그 당시 휴가를 위해 미국을 방문중이었던 오대건 신부는, 비록 그 당시 다소 유동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선량한 대주교가 있는 좋은 교구에서 훌륭한 수단을 가진 고난회의 미래라는 관구의 보증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였었다.
답장이 돌아왔고 이와 같은 내용이 태평양을 건너갔는데, 관구장 패트릭 신부는 최종적으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받아들여 그 계획에 대한 자신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함께 청사진을 만들어 가던 그 마지막 단계 동안, 박도세 신부는 자신들의 입찰을 위해 여러 회사들에게서 그 당시 제시되었던 계획들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엄덕문씨의 사무실을 거의 매일 방문하였다. 이 작업은 4월에 완료되었고, 미국 시카고 관구 참사회의 최종 승인이 있은 후인 5월 8일 건설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5월 20일 가장 낮은 입찰을 한 김 파트리시오가 소유하였던 회사와 함께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 사업은 여러 해 동안 광주대교구에서 다양한 건축 일에 종사하였었던 독일 기술자 게르하르드 놈로우스키(Gerhard Nomrowski)가 감독하였다.
건축 작업이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구장은 또한 한국의 마신부와 그 동료들이 곧 새로운 협력자를 가지게 될 것임을 통보하였는데, 가브리엘 물닉스(Gabriel Mulnix, 한국명-문가별)신부가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던 것이다. 건설까지 열흘은, 그 작업을 잇기 위한 보다 많은 노력들이 이미 있었다.
1968년 5월 같은 시기에 열렸던 관구총회 동안, 한국을 대표하여 오대건 신부는 참사회원들에게 한국의 상황과 그곳에서의 가능성에 대해 열렬히 보고하는 설명을 하였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 오대건 신부는 인디아나 대학(Indiana University)에서 여러 달 공부를 하였고, 또한 새로운 건물을 짓는데 실질적으로 빠른 진척이 있도록 하기 위한 비용 충당을 위해 모금활동을 하였다.
박도세 신부는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공동체 묵상회(M.B.W)'에 보다 더 열중하였는데, 그 해 한국에서 두 개의 코스를 지도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서울에 있는 예수회 학교인 서강대학에서 M.B.W 지도자를 위한 훈련코스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베테딕토 수도원이 있는 왜관에서 국내 주교들과 주요 장상들을 위한 코스였다. 국내를 넘어선 다른 M.B.W 직책들은 제쳐놓고, 박도세 신부는 또한 마신부로부터 인계 받은 광주신학교 영성지도자로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서울에서 이동을 하였다.
미국대학에서 휴가와 공부를 하는 동안 오대건 신부는 새로운 피정집을 위한 막대한 양의 비품을 모았다. 화물선을 타고 시애틀을 떠나 한국에 온 문가별 신부는, 오대건 신부가 모았던 그 짐과 화물들을 동반하였다. 네 번 째 사람까지 한국에 임명된 고난회원을 실은 그 배는 마침내 9월 24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성 십자가 관구의 관구장으로 막 선출된 폴 보일(Paul Boyle) 신부는 완성되어가고 있었던 피정집을 보기 위해 1968년 12월 한국을 첫 방문하였다.
성탄절 날, 새로운 고난회 피정집과 거주지에서 거행된 첫 미사가 마신부와 박도세 신부 그리고 문가별 신부에 의해 공동집전 되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또한 아시아의 한 모서리에서 고난회의 수도생활과 사도직의 탄생이라는 결실을 더 친근하게 만들어주었다. 비록 삼 개월 이상 건물공사가 더 계속되었지만, 마신부와 박도세 신부는 예수공현 대축일인 1월 6일, 신학교에서 새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시간이 흘러 1969년 경, 한국 고난회원들은 서울지역에 좀 더 영구적인 주거지의 필요를 느꼈다. 리차드 톰슨(Richard Thomson, 한국명-손어진)신부가 늦여름에 합류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이 문제는 다소 급하게되었다. 4월경 골룸반 외방선교회에서 가까운 서울 돈암동에 큰 저택을 구입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 집은 언어학당이 있는 서울 도심지와 버스로 매우 가깝다는 것과 광주행 버스를 타기에도 편리하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4월 28일에 있은 피정집의 봉헌 전에도, 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45명의 광주대교구 교리교사들이 서울대교구 교리신학원의 창설자이며 서울대교구 사제인 이 상훈 리노 신부의 지도로 피정을 하였다. 이 피정은 1969년 3얼 19일 성 요셉대축일에 있었다. 4월 21일, 광주대교구 소속의 김 요한 신부가 피정강의를 돕기 위해 피정집에 배치되었다. 이것은 첫 방인 고난회 사제가 서품 될 때까지, 지난 7년 간 계속된 하나의 전통의 시작이었다.
1969년 4월 28일, 예수고난회 피정집이 정식으로 봉헌되었다. 주한 교황대사 히뽈리토 로톨리(Ippolito Rotoli) 대주교가 야외미사를 주례하였다. 미국에서 온 관구장 폴 보일 신부는 광주대교구 미카엘스(James Michaels) 보좌주교 그리고 전주교구 한공렬 베드로 주교와 함께 장엄미사를 거행하였다. 로마에 있던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는 그 축성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워드 비들(Ward Biddle)신부와 폴 플러첵(Paul Placek)신부 그리고 바오로 수사와 가브리엘 수사 같이 일본 손님들이 많이 온 것은 물론, 현 하롤드 대주교의 특별한 손님으로서 윌리엄 웨스트호번(William Westhoven) 신부도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또한 성 십자가 관구의 회원인 안토니 맬로니(Anthony Maloney)신부가 필리핀에서 형제들을 대표하여 왔다. 그것은 신학교에서 온 합창단이 미사곡을 노래하고,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온 소녀들이 앞뒤로 노래하며, 밴드가 한국군에 의해 제공되었던 잔칫날이었다. 거의 5년 동안의 힘든 노력 끝에, 고난회의 사도직과 삶이 시작될 수 있었다.
중요한 성소 사목에서의 첫 번째 노력은 박도세 신부의 책임 아래 1969년 여름 개최되었던 성소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다.
8월에는 손어진 신부가 로넌 뉴볼드(Ronan Newbold)신부와 함께 각 각 한국과 일본을 향해, 양쪽 모두 다 가는 동양 행 배를 타고 미국을 떠났다. 그 여행 도중 그들은 하와이에서 잠시 배를 내렸는데, 출발 전 승선 하는 데 실패하였다. 여권이나 돈도 없이 8일 동안 하와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들은 도쿄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합의하였고, 거기서 손어진 신부는 며칠 동안 그곳 사람들을 방문하며 머물렀다. 9월 5일, 손어진 신부는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부두에서 자신의 짐을 찾기 위해 인천에 갈 수 있었다. 광주를 잠시 다녀온 후, 그는 프란치스코회원들과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익숙한 패턴에 들어갔다. 그가 가졌던 한 가지 유리한 점이란, 고난회 건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9월 15일 서울과 광주의 두 집은 교회법적인 수도원 창설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광주 수도원은 본 회 창립자인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보호 아래 맡겨졌고, 반면에 서울 수도원은 나중에 복자 도미니코 바베리 수도원으로 명명되었다. 비록 서울이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두 집 모두 피정자들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수도회의 사도직이 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마신부는 광주수도원의 첫 번째 원장이었고, 반면에 문가별 신부는 서울 수도원의 첫 원장이었다. 한국에 있는 모든 고난회원들이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한국 수도원 창설의 꿈이 시작된 이후 그 첫 시기 동안, 각 고난회원들은 바로 6년 전 가능성을 믿기에는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매일 매일 우리의 삶과 사도직의 발전을 위해 열중하였다.
1970 : 양성의 시작
당장 자신들의 가장 큰 경제 문제에 직면하여 교중미사에 협력하는 가운데 두 공동체에 분산되어 살고있었던 이들 다섯 외국인들의 소그룹에, 가장 커다란 도전은 아직 닥치지 않았다. 전쟁의 황폐함으로부터 한국은 서서히 빠져 나오고 있었고,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저개발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한 길 위에 서있었다. 이것은 미래 현실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1970년대 이야기로서 즉 사 반세기 이상을 거슬러 가보는 것인데, 경제적인 성공 신화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성공은, 전세계에서 대부분 똑똑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재건하는 도전 앞에서 젊음과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1200년 전 삼국이 한 나라로 통일된 이후로 여러 세기 이상 함께 문화를 공유하였던 가치관은 많은 변화 속에 서서히 사라져갔다. 14세기 후반 조선 왕조 이래, 유교 윤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모든 개인들을 통합해주었던 사회적 규범이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 그리고 1945년 강대국들에 의한 국토 분단과 함께 완전히 정반대의 사회체제를 가진 두 나라가 이전에 존재했었던 단일 사회체제를 대체하였다. 비록 그 자체의 형태는 아직 존재하지만, 유교사회란 여러모로 옛 것이라는 외피를 가지게 되었다.
1970년대는 새로운 사회의 그물로서 후일 역할을 하게 될 하부구조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였던 시기였다. 유물론적 자본주의가 지난 60년 동안 병실에 있었던 유교국가를 대체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적 자본주의는 한반도 이남의 주민들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를 행사하였던, 상대적으로 온화한 군부 독재권력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 시대의 선전을 통해 전통적인 관계들이 표현되었지만, 그 슬로건 뒤에 숨겨진 선전은 더 이상 유교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서 전통적인 의지처를 더욱 침식시켰던 변장한 형태의 유물론이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놀랄만한 성장은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설명이 된다. 영성을 포함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망은 내적인 인간 존재를 충분히 채워주기에는 부족이었다. 사회질서의 안정은 그 자신과 나뉠 수 없었던 세계무대에 대한 역할을 발견하도록 한국을 향해 도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세계무대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일정한 형태를 계속 간직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헛수고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따금 훌륭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실 가운데 하느님의 성령은 아마도 언젠가는 복음적 가치에 근거한 생활양식과 함께 크리스챤 사회로 이끄는, 어떤 새로운 탄생을 돕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소비 중심이었던 서구의 환경에서 모두 성장했지만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다섯 사람과 함께, 말 그대로 ‘싸우던 사람들’의 연합은 새로운 세계에 용감히 맞섰고, 그것은 각 자 튀던 것에서 벗어나 그 현실들을 반성하게 하였던 어떤 고유한 도전들과 함께 끝장이 났다. 이것은 선교에 있어 가장 큰 도전인 토착화에 대한 싸움인데, 거대한 격동과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개인들을 향한 커다란 도전은 옛 문화로부터 온다. 선교사는 자기 문화의 상대적인 안전함으로 항상 돌아갈 수 있지만, 그 같은 수도회 단체에 입회한 젊은 한국 사람은 자신들의 인격 매우 깊은 곳에서 그들에게 도전하도록 결정을 내리게 하곤 하였다.
선교사들은 아마도 이 점에서 성공적이었는데, 즉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화를 이식하려는 사람들을 대면하였고, 오직 다른 이들을 바꾸려는 선입관들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이해시키거나 올바로 인식시켰다.
(계속)
**노인조 수사님의 수도회 역사 기록물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오래전에 번역에 조금 손을 대었다가 여지껏 손을 놓고 끝을 못보고 있던 자료입니다. 일단 번역된 부분이라도 망실되지 않도록 자료로 올려둡니다.
첫댓글 ..경외심과 기쁨으로 글을 접하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