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도 독립운동
유하현 삼원포 (삼원보)
유하현은 연변(북간도)의 용정시와 함께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수놓은 유서깊은 고장이다. 그 치열한 서간도독립투쟁의 중심에는 우당 이회영,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시영, 이호영 여섯형제를 비롯한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여준, 이탁, 양기탁, 윤기섭, 김세영, 이형식, 김창환, 지청천, 김대락 등 독립운동의 거목들이 우뚝 서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신민회 간부였던 이회영은 가을에 중국 남만주 일대를 답사한후 눈가루가 휘날리는 겨울에 일가족 60여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유하현 삼원포(삼원보) 추가가에 이주해왔다.
1910년말부터 1911년초에 걸쳐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김창환·이동녕·여준·이탁 등도 선후로 가족을 단위로 이주하여 와 류하현 삼원포추가가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였고 1911년 4월 경학사를 설립하였다. 그 때로부터 러시아와 만주지역을 통털어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된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 – 부민단 – 한족회.서로군정서 및 192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드는 치열한 투쟁사의 서막을 열게 되였다.
경학사는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주된 활동목표로 삼았는데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대한민국 최초이 사관학교로 불리우는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민회의“신”자와 흥기할 “흥”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를 설립하였다.
1912년 7월 이회영 형제들의 거금과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 등의 노력으로 통화현 합니하(현 광화)에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면서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현대적인 교육이념을 지닌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과 김경천, 중국 운남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이 신흥학교의 교관으로 되였고 독립의 꿈을 지닌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목표로 압록강을 건너 대거 몰려오자 학교를 확대건설하기 위해 유하현 고산자 하동 대두자 지역의 광활한 대지를 개간하여 40여 칸의 병영과 연병장을 만들고 합니하와 쾌대무자에 분교를 두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일본 군경과 마적의 습격 등 크고 작은 문제와 일본군의 독립군 탄압 작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여 1920년 8월 결국 폐교되었는데 그때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독립군 연합부대, 의렬단, 광복군에 소속되여 청산리대첩을 이루는 등 광복전까지 중국 전역과 러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경학사는 농업개발과 교육구국을 취지로 하여 설립되였는데 당시 신흥강습소뿐만 아닌 많은 학교를 꾸렸다. 1919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부민단 관할구역내에 30여소의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유하지역에 설립한 학교만 해도 11소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하에 삼원포교회의 방기전장로, 안동식장로、이호림영수、김세택영수 등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1912년10월 10일 삼원포 추가거리(邹家街)에 <>(하늘의 은혜로 설립)가 세워졌다. 초대교장은 방기전 ( 方基典 )장로(부민단, 한족회의 주요간부) 초기학생 370여명 (1910년대말에는 800여명에 달함), 교원20명이였다. 은양학교는 일반 학과 외에도 신흥무관학교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군사학과도 설치하였으며 해마다 체육운동대회도 거행하였다. 그때면 류하、해룡、신빈、통화、청원、산성진 등지의 청년、학생들이 수백명씩 몰려들군 하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은 각 지역 독립운동경험을 교류하면서 새 출발점을 찾군 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3월 12일 당시 남만주 조선족사회의 중심지였던 삼원포에서 은양학교학생들과 기독교교인이 주축으로 된 200여명이 모여 독립축하집회를 열었고 4월 22일까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부민단 단원들, 그리고 인근의 해룡、신빈、통화、청원、환인、장백、산성진 등지의 청년, 학생들까지 삼원포에 운집하면서 반일시위 행진에 합류하였는데 후기10여일 사이에는 그 인원이 무려 만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일컬어 “3.12반일운동”이라 한다.
그렇게 은양학교의 영향력은 아주 대단하였다. 그러던 1920년 11월5일 경신년 대토벌 때 배일(排日)교육을 했다는 죄명으로 강제폐교되였는데 교장 방기전은 체포되여 통화로 압송되여가던 도중 합니하 광화의 다리밑에서 일제의 군도에 잘리워 몸이 네동강나 순국하였고 은양학교 선생으로 있던 안동식장로의 두 아들도 일제의 군도에 잘리워 몸이 세 동강나 순국하였으며 연세많은 안동식장로에게는 맨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게 한 후 산채로 매장하였고 일송 김동삼의 동생이자 당시 삼성여자학교교장인 김동만교장은 두손이 꽁꽁 묶이운채 일제의 군마에 10여리나 끌리워나가다가 군도에 잘리워 장렬히 순국하였다.
1922년 12월 7일 김동삼을 위수로 한 <>의 주밀한 조직과 지지 및 삼원포교회 한경희(韩敬禧)목사의 적극적인 활동하에 삼원포 서문안에 “은양학교”의 대를 이은 <>(동명왕의 이름을 따서 지음. 삼원포의 조선족 마을은 지금까지 동명촌으로 불리우고 있음)가 건립되였는데 역시 배일교육과 임강현 일제영사관설립반대시위 등과 같은 반일활동으로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여1927년 8월에 산성진으로부터 들이닥친 일본군경들에게 소각당했다가 보름만에 다시 복구되였다.
1928년 여름 한경희교장이 일제에게 붙들려 3년3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자 <>를 졸업한 그의 큰 아들 한청옥이 제3임교장으로 임명되였다.
(한경희목사는1935년 1월 초 호림으로 진출하여 썰매를 타고 5명의 신자들과 같이 수원, 요하현 지역의 열악한 교회들을 순회하고 목사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선전활동을 하였는데 1월 4일 지금의 흑룡강성 우쑤리강을 따라 북상하던 도중 소목하(小木河) 지역을 지날 때 40여명의 비적들에게 잡혀 심히 구타당하였고 그놈들이 꽁꽁 얼어붙은 우쑤리강에 구멍을 뚫고 밀어넣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서울에 한경희목사를 위해 <>를 세웠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국장 수여.)
1930년 3월 14일,한청옥교장이 불행하게 백운각암살단의 암살을 당하였다. (묘지 삼원포 서산, 조선공산당원,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열사로 추인) 그때 교장에 서ⅹⅹ였다.
1932년. 한경희목사가 1915년 10월에 꾸린<>도 일제에 의해 소각되고 동명학교에 통합되였다. 일제의 노화교육이 가장 혹심했던 30, 40년대에도 동명학교 교직원들은 항일구국, 애국애족교육을 놓지 않았는데 “학도가”와 같은 애국노래도 몰래 배우고 불렀다고 한다.
<>광복후 대부분 교사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동명학교는 의연히 꾸려져나갔고 1946년 10월 국민당의 파괴로 하여 동명학교가 또 한번 해체되였다가 1947년 7월에 재다시 학교문을 열었다. 그때의 교장에 한경희의 3남인 한진옥 (제11임)이였다. (한진옥선생은 후 연변대학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였다). 동시에 강가점 <>가 동명학교중학부에 통합되여 <>로 되면서 <>는, <>와 <>로 분리 운영하게 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경학사 – 부민단 – 한족회 등 반일단체와 신흥무관학교, 은양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거친 독립운동을 전개한 류하현은 독립운동사에 회기적인 한획을 그은 곳이며 독립지사들로부터 평범한 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광복을 위해 뜨거운 피를 휘뿌린 곳이다.
유하현 서쪽에서 흐르는 강변에는 옛날에는 버드나무가 즐비하게 서있었는데 당시 일본군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해내여 굶긴 군견을 풀어 물어죽이거나 작두로 머리를 자르거나 전선줄로 목을 감아 양쪽으로 잡아당겨 목을 자른뒤 그 머리를 강변의 버드나무에 줄줄이 매달아놓고 백성들이 보도록 하였다고 한다. 잘려진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천을 붉게 물들였다는 노인들의 진술이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조선의 최고 갑부였던 이회영, 이석영 일가도 지금으로 치면 한화 600억에 달하는 거대한 재산을 독립자금에 깡그리 쏟아부었고60여명이 이주하였던 이주초기의 가족성원이 광복후 서울로 돌아갈때에는 만주에서 태여난 후손까지 합해 겨우 15명 밖에 남지 않았고 호구조차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여섯형제중 이회영의 동생 상해임시정부 법무부장, 재무부장직을 지녔던 이시영은 대한민국 건국시 초대부대통령으로 되였다. 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여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켰으며 이것이 지금의 경희대학교로 발전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정부에서는 이회영을 열사로 추인하였고 2007년말 이회영이 순국한 대련 여순감옥에서는 안중근, 신채호에 이어 우당 이회영의 영정과 유품을 국제전시장에 전시하였다.
그러나 유하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독립투쟁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역사가 세월의 갈피갈피에 서서히 묻혀져가고 있다.
/ 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