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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회 평신도의 자기혁신 모색-
I. 문제
1. 먼저 필자는 1995년부터 2002년 현재까지 8년 동안 설교자나 부흥집회 강사로 다니면서 관찰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파악해 보고자 합니다.
이 강연의 주제가 새롭게 ‘변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그 원인들과 개선방법들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 1995년도와 1996년도 2년 동안은 수요 저녁예배나 금요철야기도회에 주로 초빙되어 가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 당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에 대한 간증에 관심들이 많았고, 찬송도 기도도 뜨거웠습니다. 강화도부터 해남까지, 대천에서 동해까지 두루 집회하고 다니면서 관찰한 바, 그 당시에는 어느 지역의 교회든지 간에 대개의 경우 눈에서 빛이 날 정도로 순수하게 듣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했습니다. 그 만큼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생생한 분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뜻입니다.
3. 특히 여선교회 회원들의 안내와 봉사가 특별했습니다. 집회 전에 일찍이 교회에 와서 준비하고, 집회가 보통 밤 10시 넘어서 끝나도 준비한 대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집 안 일도 바쁘고, 그렇게 많은 시간 교회에 와서 일하고, 집회도 그렇게 늦은 시간에 끝났는데도 그들의 얼굴에 기쁨과 미소가 넘쳐나는 것이 그 당시 초년생 간증강사, 부흥강사인 저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만큼 그 분들에게 은혜체험이 아직 생생했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확신이 생생했다는 뜻입니다.
4.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집회에 가려면 대개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날에 누가 나와서 저를 태워갑니다. 그 당시에는 저를 태우러 나오는 차량봉사자가 대개 그 교회에서 지금 막 은혜받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맛보기 시작한 집사님이나 집사님 부부가 많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부흥강사인 저보다도 더 밝았습니다. 신혼부부같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기쁨을 애써 감추는 듯한 얼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사님 모신다고 특별히 차량청소를 그날 한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대화 중에 대개 자기 교회 자랑이나 목사님 자랑을 하는데, 저에게는 참으로 기분 좋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다녀 본 전국의 감리교회들마다 대개의 경우 그러했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특이한 공통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것이 바로 그 당시에는 그래도 믿음으로 거듭나는 일이 계속 일나고 있었다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은 대개 믿음으로 중생한지 몇 달 안 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5. 1996년도에 경기도 어느 지방의 큰 교회에 주일저녁에 간증하러 간일 있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주일 이틀 전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전교인이 기도원에 가서 산기도하는 기도회를 마치고, 주일 낮 예배를 드리고 주일 저녁예배로 다시 모였던 것입니다.
한 1500명가량이 모인 것 같았고 좌석을 다 채웠습니다. 이틀 밤잠을 설치고 주일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한 그 피곤한 몸으로 부르는 찬송이 성전을 가득 채우면서 올라가는데, 그 찬송의 열기와 기도의 열기가 얼마나 뜨겁던지, 제가 단에 올라가서 강단에 서기 전에 의자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벅찰 정도로 은혜가 임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은 성도들의 찬송과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내리시는 성령의 감화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 교회 뿐 아니라, 많은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특별 기도회를 통해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는 일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교회를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들의 영적 문제 가운데 하나를 여기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5년 뒤인 2001년 같은 교회에서 지방연합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회중석의 양쪽 가의 좌석들은 대개 비어있었고, 회중의 분위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강사인 제가 설교 중에 여러 번 말을 더듬을 정도였습니다.
영적 분위기가 냉각된 원인을 뒤에 가서 분석하겠습니다만, 한마디로 기도를 통하여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는 능력이 지난 5년 동안 서서히 상실되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눌려있는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6. 그러다가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금요철야기도회에 와서 간증하라는 교회의 숫자가 급속히 감소하게 됩니다. 특히 1997년 후반기에 시작된 IMF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금요철야기도회에 와서 간증하라는 교회의 숫자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에 오라는 교회도 감소했고, 그 대신 주일저녁에 오라는 교회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경부터는 주일 낮 예배와 오후예배를 일일 부흥회식으로 인도하라고 청하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박4일 부흥회 대신 매주 주일 저녁마다 연속 네 번 와서 설교하라고 청하는 교회도 생겼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3박4일 부흥회는 아주 드물어지고, 그 대신 2박3일 부흥회가 일반화됩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어느 교회나 공통적으로 같은데, 바로 예배 또는 집회참석 인원의 감소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금요철야기도회 참석인원이 감소하고, 그 다음 수요예배 참석인원이 감소하고, 그 다음 주일 저녁예배 참석인원이 감소해 갔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복잡합니다만, 우선 가장 표면적인 원인은 IMF 이후 일자리를 찾아 나선 주부들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더욱 교회 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일단 눈에 보이는 문제해결 방법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 그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믿는 자를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가르침에 대한 체험적인 불신감이 더 깊은 원인으로서 밑바닥에 깊이 깔려있습니다. 가계를 유지하고 아이들 교육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교인들은 교회에서 그리고 기도에서 쌀도 돈도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는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우선은 생활고를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을 예배에, 집회에 불러 모으기 위해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교인들은 가면 갈수록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를 상실해 갔고, 결국 교회가 오히려 교인들의 세속화(즉, 우선 생활을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신앙생활은 여유 있을 때 열심히 하자는 사상의) 추세를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교단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감리교회의 교인들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예배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부흥집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기도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한 교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감소되고 상실됐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7. 이런 현상을 아주 상징적으로 나타낸 일이 있었습니다. 2001년 하반기에 경기도 어느 지방의 평신도 연합 집회에 이틀 동안 강사로 간 일이 있습니다. 저를 강사로 초빙하게 된 사연을 평신도회 회장되시는 장로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강사로 초빙하느냐에 대해 평신도회에서 회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1) 전문 부흥강사는 절대로 피한다.
(2) 가급적 목사님 말고, 평신도를 초빙하자.
(3) 2시간씩 이틀 동안 해야 하므로, 대학교수를 초빙하자.
이 결론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1) 전문 부흥강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현상을 보여 줍니다.
(2)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현상을 말해 줍니다.
(3) 이제는 세상지식에 뭔가 그래도 들을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기대가 옮겨가고 있는 현상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훨씬 더 심각한 영적인 문제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타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감리교회에도 진정한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한 실망감은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성경말씀 말고, 세상의 학술적 지식에 무언가 우리가 따라서 유익한 길안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현상에 반드시 병행하고 있는 영적인 문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진정한 부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는 일과 믿음으로 거듭나는 일과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거룩하게 사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적어도 190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체험한 바대로, 예수 믿고 새 사람되는 일이 집단적으로 강렬하게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일들이 이제는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체험 없이 그냥 교회에 다니면서, 마치도 천주교인들처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도 믿고 선행에 힘쓰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자꾸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미 새 사람이 되어서 거룩하게 사는 길로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입장에서 앞으로 언젠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선행을 힘써 하는 소위 구도자의 숫자가 우리 감리교에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에도 젊은 사람들의 계층에 이런 구도자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구도자 정도만 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서서히 생기고 있습니다.
(2) 성경을 영감있게 이해할 줄 아는, 즉 성령의 감화감동을 따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재미없고, 늘 그 얘기가 그 얘기처럼 들리고, 들어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그래서 성경을 내 수준에 맞게 해석한 것에 귀가 솔깃하다가, 그것도 곧 재미없어집니다. 내 생각이나 그 성경 얘기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은혜가 되고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자꾸만 무의미한 책, 무기력한 책, 무능한 책처럼 보입니다.
고리타분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기대를 상실하고, 하나님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없으면,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면, 성경에 대한 무지가 곧 도래합니다.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면, 과거에 부흥을 체험하고 중생을 체험한 사람들도, 꾸준히 열심으로 은혜생활에 몰두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메마른 분위기에 휩쓸려서 성경이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더구나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려 하다가 포기하든지 아니면 제 나름대로 명심보감 읽듯이 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성경을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가 없고, 그래서 조만간에 중단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짐만 됩니다. 그래서 한 이 년여 전부터 이제는 감리교 안에서도 ‘목사님, 성경공부 또 시작해요?!’라는 담대한 저항인지 좌절인지 알 수 없는 한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믿음으로 중생한 것이 없고, 그래서 성령 받은 것이 없고, 그래서 영감 있는 성경독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하고, 영적으로 자꾸 말라가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지식에 눈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3) 그래서 교회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새로워지고, 말씀대로 살면서 거룩해지고, 그래서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해결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그 대신 인생의 문제들을 세상의 학술적 지식의 응용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문제는 부부세미나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고,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는 ‘좋은 아빠 되기 운동’ 같은 것을 통해 해결해 보려고 하고 하는 식입니다. 이런 시도들은 대개 심리학이나 인간관계학 같은 세상 학술을 응용한 방법들입니다. 이런 류들은 갈수록 그 숫자가 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준비세미나, 이혼상담 등이 그런 류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털어서 소위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성훈련’은 천주교에서 벌써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는 영성훈련과 동일합니다. 천주교는 본래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교리가 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통해 서서히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선행을 종교적으로 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이 이제는 개신교의 교회들에서도 유행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이 개신교의 교회들에서도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들에서도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 그렇게 열심히 선행과 행동을 강조하고 영성훈련에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는 오늘날 다시 가톨릭교회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하고 가톨릭교회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성경말씀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면서 거룩하게 살자고 했던 개신교 교회들이 이제는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선행과 행동이 있어야 된다고 외치면서 다시 가톨릭교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말씀을 따라 점점 거룩해지는 방법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인간이 고안해낸 지식과 방법에 의존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해 보려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확신도 없고, 하나님은 그냥 머리 속의 지식 가운데서도 무기력한 지식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지식을 응용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하는 것이 어떤 교인들에게는 오히려 세련되고 앞서가는 방법처럼 보여서, 그런 강좌를 교회에서 한다면 그 참석률이 오히려 부흥회 참석률보다 높으니까, 어떤 교회들은 한술 더 떠서 꽃꽂이 강좌, 영어회화 강좌, 붓글씨 강좌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을 교회에 자주 그리고 많이 모이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일종의 학원이나 동호인 친교단체처럼 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곳, 즉 죄를 깨닫게 해서 죄를 회개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알게 해서 믿음으로 죄사함 받게 하며, 믿음으로 중생을 체험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서 사람들이 말씀의 형상으로 점점 성장하며, 그래서 육신이 점점 죽고 영이 점점 커져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때를 따라 영육 간에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하며 증거하며 살아가면서, 재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런 집단이라는 교회의 자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을 재미있게, 보람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이런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교회관 안에는 내 인생에 유익이 되지 않는 교회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또는 다른 곳에서 내 인생을 위해 더 유익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곳으로 간다든지, 또는 교회와 이런 세상적 방법을 얼마든지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결국에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인간의 집으로 변질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유럽의 교회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스위스는 1500년대에 칼빈의 종교개혁을 통해 카톨릭 교회로부터 벗어나서 개혁교회가 됩니다. 이 교회의 기본 신앙과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서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 백 년을 거쳐 오면서 이 개혁교회는 스위스 전국에 걸쳐서 수차례에 걸쳐서 커다란 부흥을 경험하고 크게 성장합니다.
그래서 스위스 취리히라는 도시에는 이런 부흥의 시기에 700여명 들어가는 성전을 나란히 둘을 건축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일예배에 노인들 10여명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스위스 한인 교회에 부흥강사로 집회하러 갔을 때, 제가 머물었던 권사님 댁의 스위스인 남편이 사람은 참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돈도 잘 버는 은행가로서 스위스의 엘리트 가운데 한 사람이데, 교회에 다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부인도 아이들도 교회에 다니게 하면서, 당신 자신은 왜 교회에 다니지 않는거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이렇습니다.
(1) 종교는 자유이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2) 나도 기독교인으로서 월급에서 헌금을 원천징수 방식으로 내고 있다.
(3)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배울만한 모범이 없기 때문이다(즉, 내 인생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곳이 못되기 때문이다).
(4) (‘그래도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사실 나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인생의 문제해결을 교회 이외의 곳에서 더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즉 인간의 발달된 다양한 지식의 응용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들이 유무식 간에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한 기독교관, 교회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은 부흥을 체험하며, 중생하며,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1400명 들어가는 교회를 짓고 신앙생활했는데, 그 후로 기백년도 안 지나서, 그들의 후손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교회들도 (교파를 불문하고) 정확히 이 코스를 밟으면서 선진국들의 기독교의 슬픈 운명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8. 요약: 오늘날 한국감리교회 성도들이 당면해 있는 영적인 문제는 한 마디로 신본주의(하나님 중심주의)를 상실하고 점점 인본주의(인간 중심주의)로 변질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점점 줄어들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보다는 행동을 더 높이 평가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은근히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행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의 구원이나 성령충만 같은 말들은 이름만 있을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동들에 집착하고 집중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진정한 영적 감각을 서서히 상실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서구 기독교처럼 겉으로는 세련되어 보이나 사실은 하나님도 말씀도 능력도 없는 하나의 인간적인 사회적, 종교적 기구와 집단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문제가 역시 우리 감리교회의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