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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9回 慶北歷史人物學術發表會에 참석하다==
(지산 조호익선생의 학문과 사상편)
언 제 ; 2013년 6월 21일 오후 2시
어디서 ; 영천시 청소년수련관 2층 대회의실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고 경상북도와 영천문화원이 후원하는 芝山 曺好益 先生의
學文과 思想에 대한 학술발표회의 초청장을 받고 금천(돈식)형님과 회장으로 갔드니
구일(연화)아재며, 용주(동옥)형님, 훈수할아버지 종손 윤극교수, 선원에 재용씨
영천향교 전 전교하신 한밤(대업씨)어르신,산림조합장 기준형님 그밖에도 우리 문중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오천정씨의 참석율이 좋다는 평을 받았으며
영천향교에 연관된 유림분들과 장의분들이 많이 참석하시어 대호황의 발표회가 되였었다.
***지산 조호익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조선 선조(1567∼1608)때 문신이며 학자인 지산 조호익 선생은 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명종 15년(1560)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선조 9년(1576) 경상도
도사 최황의 모함으로 강동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선생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민들을 한데 모아 중화, 상원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성주, 성천, 정주 등의 목사를 두루 거치고, 관직을 그만두었다.
선생이 죽은 뒤, 선생의 공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영천청소년 수련관 본체
지산 조호익(1545~1609)=조선 중기 문신학자로 경상도 도사 최황의 모략으로 평안도
강동현으로 유배, 그곳에서 후진양성등 학풍을 일르키던 중 임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의
고변으로 유배가 풀린 후 소모관이 되어 그곳 풍화, 상원 등지에서 의병을 일르켜 전공을
세움. 후에 안주부사, 정주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호수선생보다 나이는 열살가량
아래이나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학문이 고상하고 인품이 있어 당시 호수 정세아,
여헌 장현광,이준(영의정),지산 조호익 선생 사이에 교분의 왕래가 있었다고 함.
<지산 조호익 선생 학술발표 프랑카~드>
조호익 [曺好益, 1545~1609]=본관 창녕(昌寧). 자 사우(士友). 호 지산(芝山). 초시 정간(貞簡). 개시 문간(文簡). 이황(李滉)의 문하생. 1576년(선조 9)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최황(崔滉)에게 반항한 죄로 평안도 강동현(江東)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성주(星州)목사를 거쳐 1595년 안주목사가 되고, 이어 성천(成川)·정주(定州)의 목사를 지낸 뒤 사직하였다.
<시도하는 모습>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뒤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지산집》 외에 저서로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제서질의(諸書質疑)》 《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등이 있다.
** 명(明)나라 가정(嘉靖) 24년 을사(1545, 인종1)
○ 10월 21일 경술에 선생이 창원부(昌原府) 지개동(芝介洞)의 집에서 태어났다.
-집은 창원부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선생의 선대 관향(貫鄕)은 창녕(昌寧)이다. 7대조인 참판공(參判公)이 고려 말엽에 영천군(永川郡)의 창수리(蒼水里) 마단촌(麻丹村)에 은거해 살았으며, 증조인 정우당공(淨友堂公)의 부인 박씨(朴氏)가 친정의 제사가 끊긴다는 이유로 마침내 창원의 지개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탁월한 자질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이 안자(顔子)와 민자(閔子)가 다시 태어났다고 칭찬하였다.
영천향교 장의님들이 많이~~
31년 임자(1552, 명종7) 선생 8세
○ 처음으로 아버지 참찬공(參贊公)에게 글을 배웠다. -선생은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글자를 배우자마자 전체의 큰 뜻을 통하였다. 항상 작은 방에 거처하면서 책을 읽느라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이 ‘작은 방 아이’라고 불렀다.
○ 참찬공의 호는 노재(魯齋)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당세에 존경을 받았으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갈천(葛川) 임훈(林薰)과는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40년 신유(1561, 명종16) 선생 17세
○ 윤5월에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뵙고는 배우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책의 앞면에 ‘신유년 윤5월 26일에 퇴계 선생을 뵈었다.’고 썼다. ○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퇴계 선생은 순수하고 온화하여 모시고 앉아 있으면 화기(和氣)가 사람을 엄습하는데, 명도(明道) 선생도 응당 이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였다.
<준비요원으로 아가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42년 계해(1563, 명종18) 선생 19세
○ 퇴계 선생을 마중 나가 뵙고 《대학(大學)》을 강독하였다. -선생이 손수 쓰신 필적(筆蹟)에 “선생께서 창원 집 초정(草亭)의 벽에 글을 써서 붙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강고(康誥)에서 말한 ‘작신민(作新民)’에 대해 강의하였다.” 하였다. 이는 퇴계 선생이 어떤 일로 창원에 가셨을 때 선생이 《대학》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을 강독하고
질문하여 구명한 것이다.
<다과상도 잘 준비되어 있고>
**44년 을축(1565, 명종20) 선생 21세
○ 취원당공과 함께 도산에 가서 퇴계 선생을 뵈었다. -취원당실록(聚遠堂實錄)을 살펴보면, 《주자어류(朱子語類)》,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강독하고 질문하여 구명하였다.
여러곳에서 보내온 화환
**45년 병인(1566, 명종21) 선생 22세
○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융경(隆慶) 원년 정묘(1567, 명종22) 선생 23세
○ 6월에 퇴계 선생을 도산에서 뵙고 이어 퇴계 선생을 모시고 서울로 갔다. -당시 퇴계 선생이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올라갔는데, 선생도 장차 과거에 응시하고자 잠시 도산에
머물면서 강독하다가 그대로 퇴계 선생을 모시고 서울로 간 것이다.
여기도 화환이~~
4년 경오(1570, 선조3) 선생 26세
○ 12월에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애도하였다. -만사(輓詞)와 제문(祭文) 등의 글은 초고(草稿)를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모두 없어져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 퇴계선생행록(退溪先生行錄)을 지었다. -평소에 퇴계 선생을 모시면서 알게 되었던 바를 간략하게 서술하여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담은 것이다.
○ 이희백(李喜白)이 와서 글을 배웠다.
학술발표 자료
<도잠서원과 지산선생 묘소>
**5년 신미(1571, 선조4) 선생 27세
○ 기고봉(奇高峯) -대승(大升)- 이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고봉이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는데, 상이 당시의 현명한 인재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그러자 고봉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선생의 중형인 취원당 및 선생이라고 답하였는데, 선생에 대해서는 실행(實行)을 칭찬하였다. ○ 살펴보건대, 선생이 정묘년에 서울에 갔을 때 조정에서 국상(國喪) 때문에 복시(覆試)를 물려서 시행하였으며, 퇴계 선생 또한 성균관(成均館)에 여러 달 머물렀다. 그때 고봉이 퇴계 선생을 뫼신 자리에서 선생과 오래도록 서로 종유하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 11월 5일에 참찬공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였는바, 잠자리를 보살피는 일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 또한
반드시 몸소 행하면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을 당하자 장례에 필요한 모든 준비와 절차를 한결같이 예법에 따라
하였으며, 너무 슬퍼하여 몸이 축난 탓에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영천향교 전 전교하신 한밤(정대업씨)어르신도>
**5년 정축(1577, 선조10) 선생 33세
○ 고지산(高芝山) 아래에다 살 곳을 정하였다. -고지산은 강동현에서 동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골짜기가 깊숙하고 숲이 우거졌다. 그 가운데 깊숙하고
우묵한 석두(石竇)가 있어서 샘물이 흘러나와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돌을 던지면 옥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영천향교 장의분들이~~>
<앞부분 교수진들>
선생은 그 곁에 축대를 쌓고서 명옥대(鳴玉臺)라 이름 붙였으며, 서재(書齋)는
수지재(遂志齋), 당(堂)은 풍뢰당(風雷堂)이라 하였다.
그러고는 좌우에 도서를 비치해 놓고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에 땟거리가 자주 동이 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지내면서 유거부(幽居賦)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당시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술을 보내고 시(詩)를 지어 위로하기를,
“신용탄 가 서재 안의 도학 공부하는 사람, 번잡스런 객은 문 앞 찾아들지
않으리라. 가을 이슬같이 맑은 술 한 병을 보내니, 책 읽느라 바짝 마른 입술
가끔 적시게나.[神舂灘上下帷人 想得門無好事賓 寄與一甁秋露色 倦來時潤讀書脣]”
하였으니, 도학을 서로 권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석두(石竇)를 일명 신용탄(神舂灘)이라고도 한다.
<전체 분위기>
○ 학도(學徒)들이 몰려들어 서사(書舍)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관서(關西) 지역은
문학(文學)을 숭상하지 않고 있었는데, 선생의 풍모를 듣고는 원근에서 와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 철종조(哲宗朝)에 판서(判書) 홍우길(洪祐吉)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성천(成川)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어떤 관속(官屬)이 학문과 덕행을
지녀 한 지역에 명망이 대단하였다. 그 고을의 선비들이 그를 별도로 추천하여
학령서원(鶴翎書院)의 원임(院任)을 맡겼다.
내가 그 사실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그를 불러 연원(淵源)의 내력을 물었더니,
지산 선생이라고 답하였다. 관서 지역 백성들이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지금도 이와 같다.” 하였다.
**6년 무인(1578, 선조11) 선생 34세
○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관서 지역의 습속은 사리에 몹시 어두워
고례(古禮)를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이에 단(壇)을 설치하고 향음주례를 행하여
읍양(揖讓)하는 절차를 보였다.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장 권창호씨>
○ 심의(深衣)와 치포관(緇布冠)을 만들었다. -《예기(禮記)》 옥조(玉藻)를 바탕으로
하고 명나라 학자인 경산(瓊山) 구준(丘濬)의 설을 참고하여 옛날의 제도대로
만들어 가끔 착용하니,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들 경탄하였다.
선생이 지은 시에 “치포관과 심의의 옛날 제도 순박하니, 당우 시대 남은 모습
꾸밈없는 참이라오. 변방 풍속 놀래킨다 괴이하게 생각 마소,
은주 시대 이상의 몸이 되게 한 것일세.[緇撮深衣古制淳 唐虞遺像是天眞
相逢莫怪多驚俗 喚做殷周以上身]” 하였다.
○ 3월에 취원당공을 맞이하였다. -취원당공이 선생을 만나 보기 위하여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귀양지에 자주 와서 함께 머물렀는데,
이율곡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뜻을 갖추어 서술하였다.
<김영숙 대구한의대 교수 기조강연>
○ 5월에 취원당공이 임지(臨地)에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곡하였다. -취원당공은
선생이 귀양에서 풀려나는 은혜가 내릴 기약이 없다는 이유로 항상 울적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에 가끔 술로써 회포를 풀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점점 병이 되어 이때에
이르러 임지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생은 몹시 비통해하면서
염습(殮襲)하고 귀장(歸葬)하는 데 있어서 정성을 극진히 하여 조처하였다
<성영관 영천문화원 원장의 인사>
○ 12월에 막내동생인 사직(司直) 겸익(謙益)이 세상을 떠나 곡하였다.
-사직공은 선생을 따라 강동에까지 와 오래도록 근심과 괴로움을 함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지 겨우 한 해가 지나 죽었다. 선생은 이런 일로 더욱 감회가
깊었으므로, 제문(祭文)을 짓고 제수(祭需)를 갖추어 보내 치전(致奠)하게 하여
몹시 슬퍼하고 애석해하는 뜻을 표하였다.
<사회하는 대구대 교수 조순>
**11년 계미(1583, 선조16) 선생 39세
○ 9월에 정한강(鄭寒岡) -구(逑)- 이 찾아왔다. -한강이 선생과 정의가 가장
친밀하였다. 당시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가 파주(坡州)의 수령으로
나가 있었는데, 공이 형의 임지에 왔다가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금천형님과 내 모습도 한 컷~트>
○ 5월에 왜적들의 뒤를 밟으며 남쪽으로 내려가 양산(梁山)에서 진을 치고 머물렀다.
-당시 왜적들이 퇴각하여 부산(釜山)에 웅거해 있으면서 바닷가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였으므로 명군(明軍)이 양산(梁山)과 울산(蔚山) 사이의 여러 고을에
주둔하여 왜적들을 막았는데,
선생 또한 양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경리(經理)를 응원하였다.
<경북대 우인수교수>
○ 6월에 대구 부사(大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遞職)되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즉시 부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뢰어서 체직된 것이다.
**22년 갑오(1594, 선조27) 선생 50세
○ 3월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 백매원(百梅園)으로 정한강(鄭寒岡)을 방문하였다.
○ 10월에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돌아갔다. -원수(元帥)의 미움을 받아 해임되어
돌아가려고 하는데, 군민(軍民)들이 길을 막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잠시 머물러 일을 보다가 틈을 타서 되돌아갔다.
○ 부인 신씨(愼氏)에게 새로 장가들었다. -처사(處士) 신복진(愼復振)의
따님으로 어진 행실이 있었다.
**23년 을미(1595, 선조28) 선생 51세
○ 4월에 의흥위 부사정(義興衛副司正)에 제수되었다.
○ 강동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남쪽 지역에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또 부인 허씨를
안장(安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가족을 데리고 강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 5월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상이 경연에서 하문하기를, “
조호익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자, 정곤수(鄭崑壽)가 대답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의 가족들이 자주 굶주리므로 도로
관서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특명으로
안주 목사에 제수한 것이다.
사람들이 신명(神明) 같다고 칭송하였다. 《성천지지(成川地誌)》에 실려 있다.
<영천유도회 회장 조성보씨>
**26년 무술(1598, 선조31) 선생 54세
○ 안주(安州)의 삼천촌(三阡村)으로 옮겨서 우거하였다.
<여자분들은 며느리일까 딸내일까?>
**32년 갑진(1604, 선조37) 선생 60세
○ 모월(某月)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정한강(鄭寒岡)이 찾아왔다. -선생이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 정한강이 잇달아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다시 찾아왔으며, 또 아들 정장(鄭樟)을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하였다.
<정윤극교수도 보이고~~>
**33년 을사(1605, 선조38) 선생 61세
○ 겨울에 장여헌(張旅軒) -현광(顯光)- 이 찾아왔다.
<경주향교 전교 최현재씨도 보이고~~>
○ 《주역》을 읽고 단(彖)과 상(象)의 의심스러운 뜻을 미루어 설명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역전변해(易傳辨解)》를 저술하였으나, 불태워 버린 원고 속에
포함되어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주역》을 읽고는 의심나는 뜻을 미루어 밝힌 다음
이를 각 조목에 따라 판본의 상단에 써 놓았다.
후대에 선비들이 그것을 베껴 모아서는 《역상추설(易象推說)》이라 이름하였다.
<지산선생 직손 조정현씨 모습>
35년 정미(1607, 선조40) 선생 63세
○ 3월에 《포은선생시집(圃隱先生詩集)》의 중간(重刊) 발문(跋文)을 썼다.
○ 장여헌(張旅軒)이 찾아왔다. -여헌과 여헌을 종유하는 여러 선비들이 찾아와 며칠 동안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
**천계(天啓) 6년 병인(1626, 인조4)
○ 1월 6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인조 갑자년(1624)에 문인 박돈(朴暾) 등이 상소를 올려 표창하고 증직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조호익에게 증직을 더해 주어 남방 사림들의 소망을 위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조정의 중신들 역시 아뢰었으므로,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인조 13년 을해(1635)
○ 4월 8일에 관서의 사림들이 선생을 학령서원(鶴翎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 -학령(鶴翎)에는 옛날에 서당이 있었는데, 난리 통에 불타 버렸다. 그러다가 갑술년(1634, 인조12) 9월에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공 언(金公琂)이 본 고을의 사림들과 함께 모의하여 다시 서원을 건립한 다음, 선생 및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을 함께 제향하였다.
**인조 20년 임오(1642)
○ 4월에 신도비(神道碑)를 망회정(忘懷亭) 동쪽에 세웠다. -문간공(文簡公)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비명(碑銘)을 지었으며,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의 지(識)가 있다.
현종 1년 경자(1660)
○ 모월에 학령서원의 편액(扁額)이 하사되고, 또 경서(經書)가 하사되었다. -관서의 문인 박대덕 등이 상소를 올려 편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당시에 판서로 있던 김육이 경연에 입시하여 선생이 관서 지역에서 백성들을 가르친 공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이에 상이 학령서당 때 내려 준 옛날의 편액을 그대로 내려 주었으며, 예조에 명하여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내려 주도록 한 것이다.
<옆에 소나무의 푸르름도 좋고~~>
**숙종 4년 무오(1678)
○ 3월에 도잠서원(道岑書院)의 편액이 하사되었다. -지봉서원(芝峯書院)의 유생 정시간(鄭時衎) 등이 상소를 올려 편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자, 도잠서원이란 편액을 내렸으며, 또 예관(禮官) 이상제(李尙悌)를 보내어 본원에 사제(賜祭)하였다. ○ 사제문(賜祭文) 가운데, “내가 깊이 사모하는 뜻을 부친다.”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사우(祠宇)의 이름을 성모묘(聖慕廟)라고 지었다.
**숙종 7년 신유(1681)
○ 모월에 묘갈명(墓碣銘)이 완성되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었다.
영종 57년 기해(1779)
○ 《지산집속집(芝山集續集)》 및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을 간행하였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도~~>
**고종 1년 갑자(1864)
○ 7월에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쳐서 내렸다. -‘도덕이 깊고 학문이 넓은
것[道德博聞]’이 문(文)이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는 것’이 간(簡)이다.
○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실제의 덕행에 걸맞지 않다고 하여 다시 조정의
논의가 있었는데, 대신(大臣) 조두순(趙斗淳)과 임백경(任百經) 등이 논의해
아뢰어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10월에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예관(禮官)은 김종환(金宗煥)이다.
고종 20년 계미(1883)
○ 《지산집》 및 《가례고증》, 《심경질의고오》, 《대학동자문답》, 《역상설(易象說)》을 다시 간행하였다. -옛날 판본(板本)에는 원집(原集)과 속집(續集)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합쳐서 한 부(部)로 하였다. 《역상설》의 경우는 옛날 판본에는 속집 가운데 있었지만, 지금은 따로 한 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