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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어머니!
굽이치는 섬진강
잿말 어귀에다
가슴에 맺힌 한마디
어머니! 를 외칩니다!
어머니!
오실 수 있다면
아니,
아니 오신다 하여도
어머니를 외칩니다!
어머니!
사무치도록
서러운 생애를
둘러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2. 어머니의 비애(悲哀)
2-1. 새 논의 시련
외딴집으로 이사를 하고서 일만 하는 가운데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었다. 인간의 애환 따위는 속절없는 듯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산소 옆에 새로 친 논에도 모내기를 하게 되었다. 새 논에는 모내기를 하기엔 많은 문제가 우리를 거부하고 있을 줄이야! 물을 넣고 논둑에 진흙을 이겨서 매끄럽게 손질을 하여야 했다. 논둑의 높이가 낮은 곳이 1미터 높은 곳은 2미터 이상이었다.
물을 담고 써레질을 하는데 소가 발이 빠져서 배꼽까지 논바닥에 닿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써레질은 고사하고 소를 논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소가 겁을 먹고 말을 듣지 않고 허우적거렸다. 마른 논에 물을 넣었기에 설기 떡이나 빵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을 때처럼 단번에 와르르 무너지듯 부서지는 것이었다. 조금만 허우적거려도 저절로 반죽이 되었다.
정말 소가 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육중한 소를 어떻게 밖으로 이끌어내는가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눈앞에 허우적거리는 소를 느긋하게 바라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인가를 서둘러 해야만 할 긴박한 순간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처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그렇다고 제힘으로 나올 수 없는 소가 저절로 나오기를 기다릴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잠시 동안에도 소는 허우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정녕’이라는 아버지 친구이자, 우리 집안의 나보다 한 항렬 아래인 그는, 내가 아는 이 근방 동네에서 최고의 쟁기질 꾼이었다. 그는 성실하기로 치면 어느 성직자를 초월하는 경지의 소와 쟁기질에 관한 한 따를 사람이 없는 장인이었다. 일꾼의 정도를 초월한 상일꾼이었다. 남들이 다하는 술 담배 옆에는 서성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말도 벙어리의 수준으로 아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그는 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도 없는 듯 평안하기만 하였다.
논 밖으로 나와서 할아버지와 편안한 어조로
“황재네 할아버지! 일이 많게 되어버렸네요.”입을 떼었다.
“일이야 사람이 하면 되네만 소가 더 큰 문제 아닌가?”할아버지는 소가 더 근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위로하였다.
할아버지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고요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는 서두르거나 조급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 일이 어디 만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할아버지께서는 글을 가르쳐 사람농사도 지으시는데 저야 일 년 농사도 제대로 못하는데요.”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이 누가 잘하고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세상의 돌아가는 원리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수없이 겪어본 달관자의 모습이었다. 말투나 얼굴 표정이나 행동이나 일이 일어나기 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논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그를 부른 것은 새참을 머리에 이고 오던 어머니였다.
“청석골 양반! 청석골 양반! 새참 먹고서 하세요! 새참이요!”
“예, 먹고 해야지요. 소도 좀 쉬게 하고 먹지요.”
그는 가던 걸음 그대로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소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멍에를 풀고 쟁기를 소와 분리했다. 소를 향해 몇 마디 하는 것 같았다. 들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이다. 그는 쟁기는 그 자리에 세워놓고 소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거친 손으로‘딱딱’소리 나게 두 번을 어루만지듯 손질을 했다. 소는 마법에 걸린 듯 구렁에서 쉽게 나왔다. 고삐를 잡더니 소의 얼굴 부분을 둥글게 몇 바퀴 쓸어 주더니 고삐에서 나온 긴 줄을 가지런히 세려 소등에 얹는다. 소는 주인의 뜻을 알았다는 듯 논둑으로 올라가더니 산속에서 풀을 뜯는다. 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시련을 죄다 잊은 듯이 말이다.
써레질을 해도 이미 끝났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소는 주인의 말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홀로 제집으로 한쪽 발을 절면서 가버렸다.
새참을 조금 아주 조금 입에 넣은 그는 써레질을 못한 것이 자신의 무능이나 요령 부족인양 무척 미안해하였다.
할아버지나 어머니는‘소가 저 혼자서 가도 되느냐’고 걱정스럽게 말했지만‘괜찮다’며 그 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어머니 고생하는 것하며, 산속 외딴집에서 어린애들과 지내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며 논일과는 상관없는 말을 한동안 했다. 그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큰 괭이를 잡더니 논 안으로 들어가 오전 내내 쟁깃밥을 물속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우리식구들과 같이했다. 제일 큰 논을 고르다가 점심때가 다되어서야 쟁기를 지게에 얹고서 동네 쪽으로 난 굽은 산길로 뒤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간 뒤에 나머지 논을 고르면서 거의 다 써레질을 하고서 하필 그곳에서 소가 빠지게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써레질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일상적인 방법이 아닌 태풍이 돌면서 전진하듯 뒤 쪽부터 빙빙 돌면서 점점 소가 빠진 부분으로 향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다. 소가 빠진 곳은 논을 치면서 흙을 가장 많이 돋운 자리였다. 논 치기 전, 산으로 있을 때의 지형을 떠올리며 괭이질을 하다 보니 그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이미 그렇게 될 줄을 알았던 것이라고 나는 그를 믿었다. 그렇더라도 조금이라도 써레질을 더 많이 하려고 다른 데부터 일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감의 형세를 미리 꿰뚫어보고서 일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견된 일이었기에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서두르거나 남을 탓하지 않은 것이다. 6월 중순 뙤약볕 아래, 힘든 무논 일도 노련한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힘든 일만은 아니었다. 감동이었다. 지식이나 요령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지혜를 보이고 덕을 베푼 것이었다.
오후에는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가늘게 비가 내렸다. 여름이라지만 비를 맞으면서 무논에서 흙을 고르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형과 둘이서 힘껏 한다고 하였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방죽 골 논배미 중에 가장 큰 논이라야 고작 삼백 평 안팎 정도였다. 오후 내내 논을 골랐지만 그 논 한 다랑이를 다 끝내지 못했으니 우리 둘의 힘은 어리 디 어린 정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쉬지도 않고 했지만 한쪽 구석을 남김 채로 무논에서 나왔다. 형은 혼자서 알 수 없는 노래를 조그마한 소리로 읊조리며 집으로 올라갔다. 나는 형을 뒤로한 채 수로 아래편 몇 다랑이의 논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에서 발길을 그리로 돌렸다. 갈치처럼 긴 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물이 가득 담겨 있어 할 논에 물이 하나도 없었다. 웬일인가! 호수처럼 논물이 일렁이며 빗방울과 속삭여야 할 논에 물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은 일이 있어도 큰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산 쪽에서 바라보던 나는 긴장되었다!
논둑으로 내려섰다. 내 키보다 한참이나 높이 쌓아올린 논둑이 한발 정도가 아래 논으로 무너져 내렸다. 논에 들어가 무너진 곳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게 작은 가랑을 손으로 만들었다. 허겁지겁 만들었다. 당장 손을 써야 하지만 날이 저물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수문을 틀어막고 물고를 낮추고 돌아올 수밖에. 써레질한 논을 고르는 일보다 골라놓은 논흙이 굳지 않게 둑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 일이 더 급했다. 요란한 마음으로 바삐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그 얘기를 하자 할아버지나 어머니는 몹시 걱정스러워했다. 무너진 논둑은 처음으로 물을 담았기에 무너질 수도 있었겠지만 비로 인하여 물기 머금은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한 논둑은 그 해에 아마도 예닐곱 번은 더 무너졌다.
우리 논 아래에 있는 논 주인들이 더 신경을 쓸 만큼 우리 논은 요주의 논이 되었다. 방천 하는데 이골이 날 정도로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논둑이 무너지는 일은 거의 삼 년을 두고 모든 논에서 서너 번은 치러야 하는 농사철의 행사였다. 방천을 하기 위해서 아예 메를 만들어 놓고 대기 상태였다. 떡치는 메 말이다. 방천이 났다 하면 아래 논 주인들이 알기 전에 복구하기 일쑤였다. 다 된 곡식이 매몰 된 것을 본 그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너무도 잘 알기에 복구를 서둘렀다. 심지어 심하게 매몰 된 것은 뽑아버리고 논 안쪽에 들어가 벼를 몇 포기씩 옮겨 심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을에 얼마를 변상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하여 할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논 주인들과 각별한 이웃으로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그 뒤로 점점 주인들이 대드는 경우도 적어졌고, 그들이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이 그렇다.
농사라는 것이 어찌 하루 이틀로 끝나랴 만, 우리 논처럼 사람의 관심을 끄는 논도 없었다. 별명이‘시루논’이라고 할 만큼 물이 새어나갔다. 거의 물이 그치지 않고 들어가야 했다. 어쩌다가 저수지에서 물을 내리지 않는 날이면 금세 논이 말랐다. 그런 날이면 옛날에-아마도 증조할아버지 대(代)에 관(棺)으로 쓸려고- 만들어 놓은 7-8cm두께, 길이 3m, 폭 60cm 정도 되는 소나무 판자로 수로를 가로막고 수위를 높여 논에 물을 대고는 했다. 이렇게 물을 대던 일은 우리 집에 경운기가 들어올 때까지 족히 15 년간은 이어졌다.
종종 그 우람한 관목 판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독을 이기지 못하고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경운기로 양수 작업을 할 때에는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것도 한 시대의 인연 밖에 가질 못했다. 그 관목이 남아 있었더라면 할아버지의 관(棺)으로 제 임무를 다 했을 것인데 아쉽기도 했다.
2-2 형의 가출
1966년 9월 28일 음력으로 8월 14일 추석 하루 전날이었다.
해가 서산에 막 걸치려는 시각.
월말고사를 보고 시장 통에 있는 헌책방에서 산 마분지로 된 아주 허름한 책에 온 신경을 쓰면서 재수네 산을 넘었다. 어느 때보다 밖은 훤했다. 내일이 추석이라 음식을 만드는가 싶었다. 작은아버지도 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추석 분위기가 아닌 성 싶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누군가는 동네에 나가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 같았다. 웅성웅성. 그리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울도 없는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어머니는
“동네에서 형 못 봤냐?”는 것이다.
“봤으면 같이 오지.”내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가기도 전에 작은아버지가 걱정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물었다.
“형이 어머니 장 마중을 간다고 장에 갔는디 아직 오지 않았단다.”
동네 나간 것도 아니고 장에 가서 오지 않았다니. 더구나 이 시각까지! 일이 났다! 배고픔도 잊고 오던 길을 다시 뛰었다. 금세 날이 어두워졌다. 좁고 구불구불 거리는 산길을 지나 동네 입구에 왔지만 형은 보이지 않았다. 늦게 장보기를 마친 사람들은 느린 걸음으로 동네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었지만 본 사람은 없었다. 잔뜩 화장한 보름달이 얼굴을 들고 있어서 사람들을 알아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달빛 덕택에 먼 길일지라도 형이 제대로 찾아오기를 기대하였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이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동네로 들어오는 어른들조차 뜸했다. 이제는 외지에서 택시를 타고 근사하게 오는 사람 밖에 없었다. 싱싱하던 보름달도 하품을 하듯 지루하고 피곤하게 보이는 시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동네 다리에서 조금씩 걸어 나와 윤식이네 집을 지나 앞 동네로 가는 삼거리까지 나왔다. 이제는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원평에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즈음 동네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뿌연 달빛을 휘젓는다. 몇 발짝을 느릿느릿 걸었다. 어머니였다.
“없어? 못 보았다지?”힘없이 물었다.
“응, 다들 모른대.”
어머니는 포기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에나 혼자서 잘 갔을까 몰라. 내일 전주 종문이한테 찾아가든지 지서에 가서 전화를 해야겠다.”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작로 쪽의 길을 돌아보았다.
‘형은 어머니 할아버지와 원평 장에 추석 장보기를 하려고 장에 갔다. 마른 고추 두 포대를 지게에 지고 장에 갔다가 제수용품을 지게에 지고 할아버지와 집에 왔다가,
‘에이 장에 가서 놀다가 와야지’하면서 다시 혼자서 장엘 갔다.’는 것이었다.
“원평 장에서 마지막 밥을 먹은 성 싶다. 국밥 한 그릇이 막 밥이 되다니!”
어머니는 혼잣말로 형과의 마지막 장면을 울부짖듯 달빛이 비단처럼 깔린 동구 밖 길에 피맺힌 한을 새겼다. 쉽게 어머니의 품에 안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내다보았다. 탄식이 절절이 나왔다.
추석을 어떻게 보냈는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로 성묘를 마쳤다. 오후에 작은아버지와 전주를 갔다. 어머니가 말하는 종문이를 만나든지 전화를 하든지 하려고 전주를 갔다.
그 당시 최종문이는 전라북도 경찰청 수사 과장으로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가출신고를 하여 전라북도 일원에 경찰서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신 장애인으로 KBS방송국의 방송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경찰 수사는 물론 두 달 이상 하루에 두 차례는 라디오 방송을 탔다. 아무 반향이 없었다. 성과가 전혀 없었다. 원평 지서에서 순경들이 몇 번 다녀가기도 했지만 형이 돌아오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를 걱정하며 형을 그리워했다. 인근 용하다는 점쟁이는 거의 다 찾아갔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산에 땔나무를 다니면서 혼자서 점을 치기도 하였다. 손대 점이라는 것이었는데 풀 섶이나 여린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오른손에 움켜쥐고서 어느 쪽에 가야 형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있다고 하는 방향으로 풀 섶이나 나뭇잎 달린 가지를 쓰러뜨리는 점이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보지 않을 때만 그런 점을 손수 해보았는데 얼마 안 가서는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도 시간만 나면 줄곧 했다.
그 점을 치는 어머니는 정말 진지했다. 눈물도 보이면서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형의 행방을 점쳤다. 처음에 그 모습을 목격했을 때에는 우습기까지 했었는데 가까이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내용을 들어보면 신(神)과의 대화였다.
형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말로 표현 하지 않아서였지 어머니 못지않았다. 어머니의 정도를 넘어 버린 지경이었다. 그 해 12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임실로 시제(時祭)를 모시러 갔던 할아버지는 장수(長水)에 가게 된다. 무주 진안 장수하는 장수에 가신 것이다. 시제를 며칠 동안 지내다가 하루는 형이
‘장수에서 어느 집에 붙잡혀 살고 있는데 왜 데리러 오지 않느냐?’
는 꿈을 꾸게 된다. 할아버지에게 현몽(現夢)을 한 것이었다. 좀이 쑤셔 시제를 다 모시지도 못하고 장수군 번암면으로 형을 찾아 나선 것이다. 번암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청년 걸인을 만난다. 한눈에 형이라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점심을 사 먹이고는 진안을 거쳐 전주에 들른다. 전주에 들린 것은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대고모가 교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돈푼이나 얻어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을 버리고 새 옷이라도 한 벌 사 입힐 심산이었다. 옷을 사 입혀 집으로 그 청년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윗방에서 할아버지와 그 청년과 나 셋이서 먹고 자고를 며칠 했다.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는 형이 아니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어머니나 내가 아무리 고개를 갸우뚱거려봤자 할아버지 귀에는 들릴 리 없었다. 그 청년도 제 나이가 몇인지 성이 무엇인지 물을 때마다 달랐다.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었다. 말은 하는데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도였다. 방학을 하고 집에 있으면서 어머니와 산에 땔나무를 하러 그와 같이 갈 것을 청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도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행장을 차려 집을 나섰다. 그도 따라 나섰다. 체격으로만 본다면 우리 집에서 최고의 일꾼이었다. 산길을 한 삼십 분쯤 갔을까. 어머니가
“나는 여기서 갈퀴나무를 할 테니 너도 이 근방에서 풋나무를 해라” 하셨다. 굳이 먼데로 가서 자리 잡을 필요가 없었다. 두어 시간 마른 억새풀을 베어 네댓 주먹씩 한데 모아 작은 묶음을 만들었다. 열 묶음이면 충분히 한 짐이 되었다. 이제 기다란 솔가지를 낫으로 꺾어 바닥에 놓고 지게에 얹어 짐을 짜면 되었다. 솔가지를 낫으로 자르는 데는 나보다 키가 큰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낫을 그에게 주면서
“저기 가지 두 개만 잘라 봐요. 요것 하나하고 요것 하나”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 나무쪽으로 가더니 힘도 들이지 않고 그 두 가지를 잘라 내게로 가져왔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받은 나는 바닥에 놓으면서
“이렇게 생긴 가지 두 개만 더 잘라 와요”라고 말했다.
그는 말없이 방금 자른 그 소나무를 향하여 가더니 나무를 오르려고 하였다. 말릴 사이도 없이 묶은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순간 육중한 몸은 우지직 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낫을 왼손에든 채로 나동그라졌다. 벌러덩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였지만 한편 다치지 않았나 하여 놀랐다. 누운 채로‘씨~익’웃기만 했다. 그때 그가 웃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다친 데는 없었다. 헌데 그의 몸에 눌려 낫자루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나는 손으로 몇 개의 솔가지를 꺾어 풋나무 묶음을 한데 모아 짐을 꾸리고 어머니와 산을 내려왔다. 어머니와 두어 번 나무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굴메(일제 강점기에 금을 채굴하던 금광 터로 산 밑으로 굴을 파던 곳으로 칠팔 미터 아래에는 검푸른 물이 악마의 눈처럼 위를 울려다 보고 있는 곳- 우리들은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뜻도 모르고 이렇게‘굴미’라고 부른다.)를 지나서 힘들게 비탈진 계곡을 내려가고, 계곡 바닥에 징검다리를 건너 바위 비탈을 올라와 공동묘지 앞에서 무거움 덩어리를 부리듯 내려놓고 휴식을 청하였다. 으레 그곳에 오면 나무 짐을 내려놓고 등허리를 주인 없는 묘의 잔디에 대고 쉬는 곳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나무꾼들의 쉼터였다. 겨울철에서 봄철 농사철이 될 때까지 나무꾼들의 애환이 공동묘지에 갇힌 혼들의 수만큼이나 갖가지의 넋두리가 흥건히 스민 곳이 기도하다. 우리가 나무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즈음에는 아무도 없었다. 겨울의 가는 햇발은 우리를 마냥 쉬게 하지는 않았다.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작정한 듯 물었다.
“저 청년이 형과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아니어”나는 강하게 부정하였다.
어머니는 내 옆에 앉아있는 청년의 거취를 결정하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임실에서 장수까지 가셔서 형이라고 데려왔다. 몇 달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여 형이 저렇게 변해버린 것이라고 하신다.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며, 뭘 물어도 오직‘장수 황씨’라고 만 하니 답답하지 않느냐?”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가‘장수 황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일관되게‘장수 황씨’라고 하니 그것만이라도 믿기로 한 것이다. 그것마저 믿지 않으면 그의 말을 하나도 믿을게 없다.
“저 사람이 장수 황 씨는 맞데 여?”되물었다.
“할아버지는‘장남 황재’라는 제 이름을‘장수 황씨’라고 헷갈려 알고 있다고 하신다. 그간 고생하여서 머리가 돌아버린 소치라는 말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믿어?”나는 되레 어머니에게 물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실지로 집안에서 한 달 가량이나 벌어지고 있었다. 수습은커녕 조금도 나아질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을 떠나서 이제는 이 청년의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걱정도 이 한겨울에 집도 절도 없는 이 사람을
‘어떻게 우리 집에서 내보내는가?’였다. 계절적으로도 그렇고, 할아버지의 그 사람에 대한 믿음도 그렇다. 할아버지는 조금도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완고한 할아버지를 어머니가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자포자기 한듯했다. 그렇기에 나를 끌어들여서 할아버지를 설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말하는 중에도 눈시울 붉혔다. 옆에서 들을성싶은 그는 표정이 없다. 그 모습에서 나조차도 그가 몹시도 애처로웠다. 저렇게 순진무구한 그를 내칠 수 있을까? 난감하기도하고, 매정하기도 하였다. 미루어 생각하면 이미 그 사람은 형처럼 우리 가족으로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절은 매서운 겨울로 치달았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최종문씨가 어머니를 찾아왔다. 동네에 지프차를 세워 놓고 외딴집을 찾은 것이다. 금산지서 순사와 함께 찾아온 것이다. 자그마한 키에 깨끗한 얼굴을 한 종문씨는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하고는 어머니에게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그간 형에 관한 수사 상황과 방송국을 통한 방송으로 몇 가지 제보에 대해서도 말을 간단하고 조리 있게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형의 사진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형의 사진은 없었다. 다만, 머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작다는 특징을 말할 뿐이었다.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정도로 형에 대한 인상을 말해주었다. 따라온 순사는 옆에서 꼼꼼히 적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을 얘기한듯했는데 그들은 일어났다. 어머니는 점심을 먹고 가라며 일어서는 종문씨 일행을 붙잡았지만 금산지서 관내에 사건이 있어서 가보아야 한다며 단호하게 일어섰다.
종문씨는 어머니에게 안심 시키는 말을 했다.
“한 겨울이라 사람들의 활동이 적은 시기라 그렇지, 봄이 오고 사람들의 활동이 많으면 경찰들의 눈에 반드시 들어올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면 틀림없이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솔잎을 흔들어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산을 넘어갔다.
그들은 오후, 해가 뉘엿뉘엿 할 즈음에 또 찾아왔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종문씨가 물었다.
“동네 소문을 들으니 형을 찾았다는 데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는 휑한 눈으로 종문씨를 처다 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무슨 말이 데여? 황재를 찾았다는 말이? 동네 누가 그려?”
그들 둘은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원평 장터 안에서 포목상을 하는 박정열이라는 사람이 그렇다고”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무엇이 생각났다는 듯
“아! 저 청년 이야기! 저 청년 얘기여”
하면서 장수황씨라는 청년을 가리켰다. 그들도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말을 듣던 종문씨는 옆에 있던 순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저 청년을 돌려보내든가, 신원을 확인하여 조치하게!”
또,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청년을 데리고 있는 것도 죄일 수 있습니다. 제가 장수에 데리고 가서 신원을 확인하여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전에 봤을 때는 이 집 손님인 줄 알았습니다.”
해가 저무는 시각에 그들과 함께 그 청년도 우리 집을 떠났다. 우리 곁을 떠나는 줄도 모르면서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렇게 떠난 그를 못내 아쉬워한 것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였다. 그 청년을 잃어버리고 찾아 헤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를 떠나보내면서 그렇게 애잔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한동안 일을 손에 잡을 수 없으리 만치 심한 마음고생을 하였다. ‘사람이란 나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알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헤아려서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의 처지를 형의 처지로 생각했다.
2-3. 형의 그리움
겨울이 가고 있었다. 방학이 강물 흐르듯 가고 있었다. 낮엔 산에 올라가 땔 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방학숙제를 했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한문공부도 열심이었다. 호롱불을 밤늦게 켜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밤이 계속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면서 코를 풀면 호롱불의 그을음이 새까맣게 나왔다. 어머니는 아랫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을 쉬는가 싶으면 어느 땐가는 신음을 내고는 하였다.
한숨을 쉬는 것은‘먼저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회한이고, 이제는 외진 곳으로 들어와 형까지 나가버린 비통한 신세’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신음은 ‘아 구구! 아 구구!’늘 한가지였다. 고된 일과의 싸움이 연속이다 보니 그야말로 저절로 나오는 신음이었다. 낮에는 누가 들을까 두려워 참았다가 깊은 밤 깊은 잠 속에서 신음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아프다고 하여 누구 하나 치료를 해줄 수 있다거나, 고된 일을 덜어 줄만한 가족이 없었다. 오히려 그 신음을 듣고 옆 사람까지 마음만 상하게 할 것이 너무도 뻔 한일이었다. 어찌 처절한 한숨과 절규 같은 신음을 할아버진들 듣지 못하였으랴!
할아버지는 안들은 척, 못들은 척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논어를 외우고 주역을 외웠다. 혼자서 점을 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주역의 점 궤를 뽑는 거북이를 흔들었다. 거북의 입에서 철로 된 바늘보다 약간 큰 철심 대를 늘어놓고 주역을 펴서 점을 쳤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평상적인 일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적을 깨는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늘 있는 일이지만 어머니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은 호롱불을 끌 때가 아님을 안다. 공부를 재촉하는 경종(警鐘) 이었기에.
아침이면 어머니는 저녁에 있었던 한숨과 신음은‘언제 그랬냐는 듯’ 활발 하셨다. 내가‘잘못 들었는가?’라고 생각할 만큼 활발하셨다. 땅이 꽁꽁 얼어 버린 추운 날이면 땔나무 하는 것도 접고 동네로 종종 마실을 나가셨다. 하루 종일 집을 비웠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어떻게 모진 국면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수다를 떨기 위한 마실이 아니라 고백을 하기 위한 마실 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오욕(五慾)이 있다지만 어머니에게는 고백욕(告白欲)을 하나 더 추가해야 했다.
아니, 우리 어머니에게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백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한숨을 쉬면서 마음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한숨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고백하면 들어주고 같이 한숨을 쉬어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그 상대가 아쉽게도 우리 가족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섬진강의 수려한 풍광(風光) 속에서 소설을 읽고 키웠던 감성이 마실을 부채질했다. 그 울분을 외딴 집에서 혼자 삭이기에는 가슴이 터질 일이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메었다. 어머니가 자주 동네에 마실을 나갔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식량문제였다. 농사지어서 빚 갚고 나면 여섯 달 분의 식량은 다시 빚을 얻어야 했다. 쌀 빚을 얻기 위한 로비도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싼 이자로 식량을 구하고자 자주 동네 사람들과 접촉 해야만 했다. 외딴집이라서 빚을 얻었다 하더라도 즉시 쌀을 집으로 가져오지도 못했다. 좁기도 했지만 도둑이나 강도의 위험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칠십 세의 상노인이었고 우리들은 그야말로 고사리 손이었다. 어머니가 젊은 과부로 외딴집에서 큰 사고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외줄을 타는 듯 위험한 일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적나라한 표본이었다. 그나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온 역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겨울은 어두운 밤이면 차갑고 거친 갑옷자락으로 대지를 쓸었다. 봄을 밀어냈다. 낮에 피었던 꽃들이 밤이면 떨었다.동장군의 갑옷자락에 할퀴어 멍이 들기도 하였다. 밤마다 극성을 떨던 동장군도 여인네 속치마같이 가녀린 꽃잎을 어쩌지 못하고 그림자까지 걷어갔다.
중학교 삼학년이 되었다. 삼 개월 분의 학비를 할아버지가 작은댁에서 장학금처럼 받아오셨다. 고마웠다. 작은댁도 작은아버지 혼자 벌어서 집세 주고 여섯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삼 개월 분의 학비를 주실 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작은댁이 있는 전남 장성읍에 대고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다.
형이 있을 때에도 농사일이 어머니에게 벅찬 판국이었는데 그나마 일손이 없으니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형이 있을 때는 몰랐던 농사일에 틈새가 생겼다. 형이 하던 대부분의 일들을 동네에서 일꾼을 불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밭에 두엄을 내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형이 있을 때보다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형이 쓰던 지게를 짊어져 보아도 그런대로 맞았다. 삼 년 차이가 나는 형의 키와 비슷할 만큼 커진 것이었다. 새봄이 오면서 나에게는 신체적으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약간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여드름도 생기고 키도 커졌다. 우선 운동화가 맞지를 않았다.
1967년 삼월 하순 어느 날, 외딴집으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사건이 터졌다. 우리가 이사 와서 일 년 정도 살았을 때였다. 삼학년에 올라와 처음으로 월말고사를 치르기 바로 전 날이었다.
아홉 마리의 닭을 키우고 있었다. 닭들은 낮에는 산으로 밭으로 먹이를 찾아 나섰다가 저녁이면 윗방 문 앞에 놓인 짚으로 짠 함지박 안으로 모여들었다. 평화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나 나는 모여든 닭들을 서너 번에 걸쳐 윗방 한쪽 구석에 들여다 놓고 새벽에 홰를 치고 울고 나면 밖에 내놓고는 하였다. 수탉은 한 마리였다. 대부분의 암탉들이 낳은 알을 먹기도 하고 팔아서 학용품도 샀다.
월말고사 시험을 앞두고 아마 새벽 두 시까지는 윗방에서 공부를 한 것 같았다. 새벽이 되자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문풍지가 윙윙 울었다. 그리고 연이어 장독대 쪽에서 무엇이 날아가는 듯 한소리가 나기도 하였다.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이내 문살에 빗방울이 부딪쳐 깨졌다. 영등 할메는 밖에서 일부러 물을 뿌리듯 문에 빗방울을 뿌렸다. 잠을 끌어 눈 속에 넣으려고 할아버지 곁에 누웠다. 방이 식었다. 잠이 이불 밖에서 서성이며 내게로는 오지 않는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곤히 잠든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문 쪽에서 자리를 잡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났다. 아니 아침이 되기 전이었다. 호롱불을 켜놓고 윗방과 아랫방 사이의 문을 열어놓고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무엇에 심하게 놀란 낯빛으로 별 말씀도 없이 앉아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데여?”
어머니는
“일은 무슨 일, 알 것 없어야, 없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요 근방 놈들은 아니어. 저 밑에 사는 봉수동 놈들이 맞아. 나뭇짐 짊어지고 우리 마당으로 다니면서 닭 있는 것을 여마린 놈들이 틀림없어.”
나는 일어나 윗방에 가보았다. 검붉은 수탉이 보이지 않았다. 암탉도 큰 것으로 세 마리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 분에게 물었다.
“다른 것은 가져가지 않았어?”
어머니가 말했다.
“응, 그런 것 같은디. 모르것다. 나가 보아야 알 것인디. 놈들이 가면서 ‘밖을 내다보면 목을 처 버린다.’면서 문을 밖에서 걸어 놓고 작대기로 문을 죄다 고여 버렸다.”
그 때서야 문고리가 있는 곳을 찢고 밖에 문고리를 풀었다. 그 놈들은 말로만 문을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문을 걸어버렸다.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틀 아래를 더듬어보니 작대기가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작대기를 밀쳐내고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갔다. 비가 개고 있었다. 미친 듯이 뛰어다닌 도둑들의 발자국이 그들의 만행을 고스란히 고자질하였다.
어머니는 며칠 지나지 아니하여 비 오는 일요일에 새로 사온 수탉을 보면서 그 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
아주 새벽이었다. 새벽이었어. 비바람이 아주 세차게 몰아치는 새벽이었어. 문풍지가 윙윙 울면 장독을 덮었던 양은 뚜껑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던 캄캄한 오밤중이었다. 비바람 소리에 마음이 조급하여 밖으로 나가려는데 윗방에서 할아버지가 사람과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롱불도 없이 조금은 큰소리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듯했다. 할아버지 혼자 계시는 방문을 여자인 내가 열기도 멋쩍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는 상대는 밖에서 방안에 있는 닭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어. 그리고 밖에는 한 두 사람이 아니었어. 여러 명의 남자들이 웅성거리며 번갈아 가며 할아버지를 윽박지르는 거였어. 쉽게 내놓을 것 같지 않자 놈들은 방문을 부술 것같이 방문을 잡아 덜컹거리며 흔들었어. 그래도 할아버지가 버티자
‘어린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한 놈이 고함을 쳤어. 섬뜩했지. 너희들을 다 죽인다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나를 돌아보다가 거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곤히 잠든 너희들의 모습을 돌아보았지. 너희들의 목숨을 죄다 앗아가 버린다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나는 참지 못하고 윗방 문을 열어 버렸다. 할아버지는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라고 태연했겠냐? 나는 할아버지에게
‘아버님! 닭 내주세요!’큰소리로 말했지. 밖에 있는 놈들도 들으라고 말이다. 할아버지도 내 말을 듣고서는
‘닭을 내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지’어둠 속에서 성냥을 찾아 불을 켰다. 호롱에 불을 붙이자마자 밖에서
‘불을 끄라’는 말이 들렸다. 할아버지는
‘불을 켜야 닭을 찾을 거 아니어’대꾸했지만
‘수탉 한 마리 허고 암탉 세 마리만 내놓으면 갈 것인디. 무슨 호롱불이 필요 헌 거시여 시방!’고함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불 켜 놓고 우리들 얼굴 알아보려고 그런 것 다 아니 깨 수작 같은 것은 생각 허지 말더라고 이’하는 놈도 있었다.
‘잔 머리 굴리다가 어린 새끼들 죄다 죽여 버리고, 있는 닭 죄다 쓸어 가버릴 수도 있는디. 요로 코롬 존 말로 봐줄 때 순순히 닭이나 빨랑 내놓더라고 이’ 또 한 놈이 말을 마치자
‘애들아 장독을 다 부셔버려. 들고 있는 양은 뚜껑을 세게 두드려 어서어서!’
대장인 듯한 놈이 지시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집이 들 섞일 만큼 쇳소리가 났다.
그 제서야 할아버지는 불을 끄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닭을 차례차례 던졌다. 겁에 질린 닭들이 소리도 못 내고 마당에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놈들의 손아귀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비명도 함께 말이다.
말을 마치면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어머니는
“명재 네가 잠에서 깨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만약 그 소리에 잠에서 깨었더라면 닭 몇 마리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여 버린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아니냐? 세상에 제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냐마는, 저를 죽여 버린다는 말에 날 잡아 갑쇼 하고 목을 내미는 사람 또한 없거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한번 싸워보고 죽으려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마음 아니냐? 그렇지? 달려들어 버릴 것 같아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며
그 순간을 다시 겪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 사건은 할아버지나 어머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이 집을 지을 때부터‘이 집을 지어 한 삼십 년은 운대가 맞을 줄 알았는디.......’
말끝을 흐리면서 자신의 예측이 심하게 빗나갔음을 느꼈다. 그것은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이 자신의 오판(誤判)이었음을 깨달은 것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주역(周易)을 보고 점을 칠 줄 안다고 자부했기에 이런 일이 터진 것은 헛공부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밖에.
자신의 일생이 허물어져 버리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고집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겨울에 형이라고 데리고 왔던 장수황씨라는 청년의 사건도 어머니는 참았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어머니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는 이 집에서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물론 할아버지와 상의(相議) 하에.
이번 가을 농사를 짓고 나서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날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유월 초에 모내기를 끝내고 6.7.8월의 수업료를 납부하려고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오는 길에 이야기를 꺼냈다.
“명재야! 올 가을에 양지뜸 은영이 아저씨 집으로 이사하기로 계약했다. 매년 지붕을 이는 조건과 쌀 한 가마씩을 집세로 주는 조건으로 살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은영이 아저씨가 며칠 전에 계약을 했는데 문제는 내년에라도 그 집이 팔리게 되면 한 달 안에 집을 비워주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단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집은 얼마에 판 데여”
어머니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아서 뭘 하려고, 우리에겐 하늘에 별 같은 것인디”
어머니는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서 계약한 그 집을 나에게 구경시켰다.
나는 어머니가 무언가를 마음에 담고 내놓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어머니 뒤에 든든한 무엇인가 분명히 있다고 느꼈다. 그 집을 사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언제든지 사겠다고 나타나면 비워주어야 하는 위험을 안고 굳이 계약을 서둘러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집은 두 세대가 세를 내어 살고 있었다. 우리가족이 세 들어 살기로 한 것은 별채의 방 한 칸을 제외한 모두였다. 그리고 별채 한 칸마저도 일 년 안에 다른 곳으로 떠나갈 공사판 인부 십장(什長)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을 둘러보고 난 후 동네 고샅을 걸어 나오면서
‘지난 오월에 할아버지께서 임실 청웅면 두복리 북당골에 산 몇 정(町)을 팔았다. 그것을 아버지 병원비로 쓸려고 했었는데 그 때는 살 사람이 없어서 못 팔고 있다가 지난 오월에 팔아서 가져오셨다. 여기 땅에 비하면 쓸모없다시피 한 땅이라서 쌀 열 가마에 파셨단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어머니의 고백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갑자기 알듯 모를 듯
‘소나무는 죽어도 그 뿌리의 호박(琥珀)은 사람의 가슴에 붙어 빛나고, 부자는 망하여도 그 등걸은 삼대를 간다더니 증조할아버지의 땅을 이렇게 팔아 쓰게 되는구나.’
혼자 말을 했다.
형이 없는 농사일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노동을 요구했다. 임실에서 산을 팔아마련한 쌀을 품삯으로 축내며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만 맡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죽 골의 논밭 일도 만만치 않은데 중보들의 논일도 엄청났다. 일도 일이었지만 젊은 과부라는데 남정네 일꾼들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려했다. 매끄럽고 섬세하게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대충대충 끝내려 들 때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속을 가장 뒤집어 놓는 것은, 머지않은 옛날에 우리 집의 그늘에서 덕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더욱 속이 상했다.
‘장맛 본 놈이 흉본다고 했던가.’세상 인심이 그렇게 변한다고 하지만, 덕을 베푼 할아버지의 눈앞에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논에서 호미로 김매기를 할 때면 거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벼를 호미로 찍어 자르기도 했다. 흙덩어리에 짓눌린 벼 포기를 뒤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치워야만 했다. 온 논을 뒤따라 다니면서 무척 많은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고충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일은 그렇게 하면서도‘담배는 진달래 정도는 주어야 하는데 이게 뭐야! 술도 너무 적다! 왜 이렇게 논에 거머리도 많으냐!’투정도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중보들의 논에 일은 거야 마을 사람들이었다. 양지에 살면서도 아직 양지마을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름도 잘 몰랐다.
어머니는 이런 일로 해서인지 점점 거야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는듯했다.
농사일에 바쁜 중에도 어머니는 형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틈틈이 전주 최종문씨 집으로 찾아갔다. 소식이 없었지만 일손이 조금이라도 한가하거나 전주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들렀다. 방송도 다시 내 보낼 수 있게 했다. 라디오도 없던 우리 집은 방송을 들을 수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어머니는 방송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여름, 칠월을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가 형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유월의 장맛비가 줄줄 내리는 유월 하순경 아침에 꿈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는‘믿어도 될 만큼 생생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말을 귀 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할아버지의 꿈 이야기를 요약하여 적어보기로 한다.
‘봄날이었다.
배꽃이 만발한 과수원 옆을 걸어갔다.
좁고 비탈진 길을 오르다가 내려가다가 무심코 걸어갔다.
배꽃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나비가 나(할아버지)를 따라왔다.
나비를 피해 걸음을 달음질치듯 재촉하여 높은 산까지 올라왔다.
산에 올라 달려온 길을 뒤 돌아보았다.
나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배꽃 만발한 과수원 사이에 황재가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해몽을 하기 시작하였다.
‘배’는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황재를 데리고 있거나, 데리고 올 사람이며,
‘나비’는 여자인데 황재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은 집에서
‘담배’는 나쁜 냄새가 진동하는 고약한 곳이고,
‘쉬는 모습’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꿈을 풀었다.
꿈을 해석하면서 할아버지는 내 말이 꼭 맞을 것이라며 신암. 회평. 월평. 주평등 배 과수원을 찾아 나섰다. 장맛비가 며칠 동안 주룩주룩 내리 퍼붓는 날씨에도 연일 찾아 나섰다. 정말 형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어머니는 그 꿈을 믿지는 않았다. 내심으로는 할아버지와 함께 돌아올 것 같은 기대조차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옷이 젖어 들어오는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는 것을 보면 찾아나서는 것 못지않게 형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였다.
그런 꿈도 잊혀 질 무렵 7월 1일.
1967년 7월 1일 오전 11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이 있어 임시공휴일이었다. 학교도 쉬었다.
장맛비가 오다 개다를 반복하는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비가 잠시 갠 틈을 타 오두막집 근처 밭에서 어머니를 도와 김을 매고 있었다. 집 앞 잔등을 넘어 거야 어린애들 둘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둘이 달려오는 것은 우리 집에 오는 길이 너무도 외지고 으슥해서였다. 혼자서는 냉큼 오기에는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혼자서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을 달려오는 것을 보자 무엇 때문에 비에 젖어서 미끄러운 길을 달릴까? 의아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앞에서 달려오던 어린애가 나를 불렀다. 그 애들이 나를 부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말없이 달려오는 애는 진구와 진원이였다. 우리가 이 외딴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 앞집에 살던 상재또래의 머슴애들이었다. 말없이 달리던 그 애들은 나를 지나쳐 마당에서 놀던 상재를 부른다. 매우 다급한 목소리였다. 달려오던 것을 멈추고 큰소리로 외쳤다.
“황재가 돌아왔어! 황재가 돌아왔단 게! 언능 와 봐! 언능!”
듣고 있던 우리 가족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멍해졌다. 어린애들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멍했다.
상재 동갑내기로 보이는 그 애들의 모습으로 봐서 거짓말일 리 없었지만 모두 다 멍할 뿐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그 애들의 손을 잡을 만큼 가까이 갔다. 목이매이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황재를 아느냐? 머리 조그만 황재를 알아? 어디 있단야?”
둘이서 합창하듯이 말했다.
“아이고 우리덜이 황재를 왜 몰라!”
나는 놀랬다. 형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목이 잠겼다.
“어디에 있어? 너희들이 보았냐? 보았어?”
그렇게 재촉하며 물었다.
그 애들은 이번에도 합창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봉기 양반 집에서 머리 깎고 있단 게.”
내가 물었다.
“이발 허는겨? 이발?”
이번에는 애들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우리가 이발이 뭔지 모를까 봐 그러는 겨. 이발 의자에 앉아서 봉기 양반이 머리 깎으며 우리들 보고 산 너머 고산 아주머니 집에 가서 황재가 왔다고 전해주면 우리들도 공짜로 머리를 깎아 준다고 혀 서 달려왔단 게.”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그 애들은 왔던 길을 나보다 먼저 앞서 갔다. 어떻게 그 길을 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말 하얀 것인지 까만 것인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길이 멀다는 생각만 난다. 봉기 양반집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공휴일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은 애들까지 형을 둘러싸고 이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발을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2-4. 형의 귀가
형 이었다!
황재였다!
의자에서 채 내려오기도 전에 끌어안았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웬일인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솥아 졌다. 눈물 속에 어머니가 보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상재도 보였다. 사람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얼굴을 찌푸리고 눈물샘을 바닥부터 쥐어짜고 있었다. 눈물을 담았던 항아리를 뒤엎은 듯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형의 등을 쓸어내린다.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손을 잡아본다. 얼굴을 더듬어 황재를 확인한다. 한동안 구경하던 사람들도 뭐라고 넋두리를 하면서 어머니와 한 덩어리 되어 눈물을 흘렸다. 여기저기서 여인네들이 어머니를 위로했다.
“고산 댁 이제 소원 풀이했으니 고만 울어”
한 이삼십 분이 흘렀을까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고‘누가 데리고 왔는가’를 물었다.
“이렇게 고마운 일을 누가 했대 여?”연이어 물었다.
봉기 양반이 말했다.
“황재 작은아버지 친구 배상근이가 전주 남문시장에서 데리고 왔대 여”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배상근씨를 찾았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또래들과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배상근씨의 얘기는 이랬다.
‘남문시장에서 과일 장사하는 중에도 몇 번인가 라디오 방송을 들었지. 처음에는 어디 잘 나가지도 않는 황재가 집을 나가다니 의아했어. 그래도 여러 번 방송을 듣다 보니 내심으로 걱정도 하면서 황재 비슷한 모습을 한 부랑자들을 눈 여겨 보게 되었지. 간혹 동네에서 오는 사람들을 볼 때면 황재가 집에 들어왔는가 물어 보기도 했지. 그때마다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 오늘은 대통령 취임식도 있고 장마철이라서 과일 장사도 재미없는 차에 집에나 다녀올까 하고 수박이나 몇 덩어리 가지려 점포에 가는데 황재 같은 사람이 보이는 거라. 설마 하고 수박을 싸서 배차장으로 가려는데 그때까지 그 자리에서 서성이지 않겠어. 황재라면 나를 알아봤어야 하는데 나를 몰라보더라고. 그래도 말 몇 마디 안 해서 그냥 황재라는 것을 알았지. 황재가 어디 거야 양지의 황재인가. 그렇지 않아도 유명한데 방송까지 몇 개월을 탔는데 모를 리가 있는가? 황재가 누구인가? 수정아저씨 장손 아닌가? 자네 작은아버지 영록이 하고 나는 친구이고 말이네. 몇 달 동안에 하지 않은 이발을 해야 쓰 것는디 휴일이라고 문을 연 이발소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머리도 난감하지만 집에 가서 감기면 되는 일이었지만, 지난 가을에 입었던 옷을 그냥 입혀 올 수는 없지 않은가. 아는 옷집에 가서 옷을 사서 입히려는데 도저히 아니올시다였어. 목욕을 시키고 나서 옷을 입히니 그제야 황재로 보이더라니까. 목욕 시키면서 보니 양쪽 발 모두 동상으로 성한 데가 없어.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데.’
나를 향해 말을 마쳤다. 형에게 와보니 발가락 사이마다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상으로 고생하다가 여름철이 되면서 밖으로 터져 나타난 것이었다.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우리만치 심했다.
어머니는 옷값도 계산하고 사례도 하려고 하였다. 묻지도 않고 그냥 얼마를 사례하려 하였다. 하지만 배상근씨는
“그 사례비는 형수님에게서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 같은 못난 놈에게도 글을 가르쳐 주신 수정 어른 덕을 생각하면 더 더욱 못 받습니다. 영록이 한 테 술이나 한잔 사라고 하면 되니께 마음 쓰지 마세요. 조카 데리고 왔다는디 그냥 말 것 시요.”
라고 사양했다.
“그래도 그렇지 고마움의 표시는 해야지. 서방님 막걸리라도 한 잔 해야지요”
어머니는 김봉기씨의 부인 동녕리 댁에게 막걸리를 부탁했다.
집에 들어오던 날 오후부터 형의 동상 치료에 박차를 가했다. 동상에 좋다는 약도 어찌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해묵은 가지 나무를 삶은 물. 지우초 뿌리를 찧어 상처에 부치는 것. 생 콩 자루에 발을 깊이 밀어놓는 것. 등등 외우기도 힘들만큼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지우초는 동상을 치료하는데 탁월하였다.
이 약초는 약명으로‘지유(地楡)’라고 하는데, 학교 도서관에 들어박혀 찾아보니 정말 어려웠다. 우리 집에서 줄곧 쓰던 지우초를 우선 국어사전을 살펴보니‘오이 풀’이라고 나왔다. 오이 풀을 찾아보니, 식물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한방에서 뿌리를 지유(地楡)라고 하며 수렴·해열·설사·이질·지혈·월경과다·객혈·피부병·상처 및 화상과 열상 등에 사용하는데, 17%의 타닌과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다. 한국·중국·동부 시베리아·일본 및 캄차카 등지에 분포한다.’
라고 열거 되었다. 동의보감등을 참고하여 사용하였는데 진물이 가시고 나서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매우 탁월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많은 민간요법 중에 위에 세 가지를 병행했다. 여름 방학 내내 치료를 거듭했다. 암담한 증세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방과 후에 산길을 오면서 지우초가 무성하고 오래 된 것이 어디에 있나 샅샅이 수색을 하였다. 일주일이 지나도 진물이 가시질 않았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상태였다. 인간이 맡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냄새였다. 어쩌면 향기와 가장 멀리 동떨어진 냄새였다. 보름 정도는 앉아서 대야에 발을 담그거나 콩 자루에 발을 넣고 있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서서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기에. 형의 몸집은 작년에 집을 나갈 때보다 줄어들었다. 아니 왜소해졌다. 눈에 띄게 왜소해졌다. 내가 몸이 불었고 키가 컸다고는 하나, 나보다 세 살이나 위였으니 나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컸어야했다. 그런데 나의 눈 아래에서 형의 키가 맴돌았다. 조금도 호전 되지 않던 동상이, 칠월이 거의 다 갈 무렵이 되자 상태가 호전 되었다. 악취가 발을 씻지 않았을 때 나는 정도로 누그러졌다. 물론 진물도 보이지 않았다. 논두렁에 나가서 풀도 베었다. 하는 일이 농사짓고 등짐 지던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이나 콩 자루에 발을 담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당시는 몰랐다. 사람이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우울한 것인지를 몰랐다. 물에 발을 담그고 그저 알 수 없는 노랫말을 읊조릴 때가 있다. 옆에서 책을 보며 들어보면 아는 가사를 이 노래 저 노래 맘대로 갔다 붙여 부르지만 내용은 한결같았다. 답답하고 우울한 속내를 혼자서 풀었다.
팔월 어느 날 형과 대화할 여유가 있었다. 나는 작정하고 형에게 물었다.
“작년 추석 전날 원평 장에서 어디로 간 거여”
“어? 작년 추석? 그것이 무슨 말이여?”
“집 나갈 때 말이여. 생각 않나?”
“나 집 안 나갔어. 집을 찾았는디 집이 안 보였어”
“어디서 찾았는디 안보여?”
“중보들 같이 생긴 도랑을 따라 사람들과 같이 집으로 왔단게”
“아는 사람들도 있었어? 모르는 사람들하고 집으로 왔어?”
“생각 안 나는디”
“그러면 사람들하고 이야기 하면서 집으로 왔어? 아무 말도 안하고 걸었어?”
“생각 안 나는디 생각 안나.”
나는 침을 삼키며 그때의 방향을 찾아내려 했다.
“집이 안 나와서 어떻게 했어?”
“우리 집이었는디 들어가 보니 여자들만 많더라고”
“우리 집은 산속인디 들어간 집도 산속이란 말이여?”
“산속으로 많이 들어갔어. 사람들은 동네로 들어가고 나는 산속을 걸어서 우리 집으로 왔단게”
“외딴 집이었어?”
“아니, 밤이라서 잘은 모르 것는디 외딴집은 아니었어”
“거봐, 우리 집이 아니잖여?”
“우리 집이라고 들어가서 얼쩡얼쩡하니까 삼순이 동무같이 생긴 가시내가 오더니 들어오라고 혀서 들어갔어.”
“들어갔더니 저녁밥도 주어?”
“박쩍(바가지)에다가 송편도 주고 밥도 주고, 김치도 주더라고”
“그걸 어떻게 했어?”
“먹었지 배고픈디 안 먹어?”
형은 나를 돌아보며 그것을 거절할 바보가 어디 있냐는 듯 되물었다.
“형이 바보라는 것이 아니라 젖 가락도 없이 먹은 것 같아서 그래. 숟가락 젖 가락 없었지?”
“배고픈데 송편부터 손으로 집어 먹었지. 어두운데 서 먹기가 어려워 불 빛 있는 외양간 앞에서 김치랑 다 먹었어”
“먹고 나왔어? 그 집에서. 어떻게 했어?”
“다 먹고서 배불러서 잤어.”
“그 집에서 사람들이 나가라고 안 해?”
“으으으 응”말끝을 흐리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집사람들을 만났어? 안 만났어?”
“가시네 하나가‘왜 또 왔냐?’고 하기에 ‘안가고 헛간에서 잤다.’고 했지”
“도둑이라고 안 해?”
“내가 도둑이간이.”
“아니 뭐라고 했어? 그 가시내가?”
“아니여. 오늘은 추석이라며 이따가 또 오랬어.”
“그래 또 갔어? 점심때에도 말이여?”
“응 점심때는 숟가락이랑 주면서 잘해주었어. 갈 데가 있냐고 묻기도 하고 말이여. 그려서‘우리 집에 가야 헌다’고 했더니 어디냐고 묻더라고.”
“우리 집 주소를 얘기 하지. 주소 몰라?”
“알았었는디 거기서는 생각이 안 나더랑게. 며칠 있다가 장에 간다고 혀 서 따라 갈라고 헌게 또 잃어버린다고 못 따라오게 허더란 게. 나중에 우리 집이 어딘지 생각났을 때는 그 가시내가 그 집에서 떠났는지 안보였어. 그려서 말을 못혔어”
“그 집에서 방도 주어? 잠자라고 방을 주더냐고?”
“아니. 방은 방인디 곡식을 담은 가마니 위에서 잤어. 잠은 거기서 자고 밥은 방문 앞에다 갖다 주면 거기서 먹었어. 나락도 베고 짚도 묶고 일을 했지. 농사일 끝나고 가차운(가까운)산에 가서 땔나무도 매일 해야 혀. 나무를 안허먼 밥도 잘 안 주어.”
“겨울엔 곡식창고에 불도 때지 않았을 것인데 추어서 어떻게 했어?”
“그런 게 이렇게 발이 얼었지”
형은 동상 걸린 것이 당연한 듯 말했다. 너도 한번 그런 데에서 지내보면 당연히 걸릴 것이라고 항변하듯 하였다.
다음에 더 물어보기로 하고 석양을 따라 논을 둘러보려고 집을 나섰다.
팔월의 한 여름이 가고 서늘해지자 형의 발은 완치되었다. 조금씩이나마 걷기도하고 동네에 놀러 나가기도 했다.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형이 집을 나가 방황 하게 되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형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내고 싶었다. 어머니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응징 같은 것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듯했다. 한 번도 그 사람들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을 보면 응징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형이 원평 장터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혼동한 곳에서 시작하면 어디로 방향을 돌렸는지 알 수 있었다. 형의 말대로라면 원평천 둑을 걸었다. 둑을 걸으면서 멀리 보이는 주평 마을의 입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고 우리 동네의 느티나무로 착각을 한 것이다. 지는 해를 등지고 서둘러 느티나무에 와보니 우리 동네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것보다는 동네 뒷산을 지나면 우리 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평 마을의 고샅을 지나 산을 옆에 끼고 집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우리 동네 같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이 나와야 하는데 우리 집은 없었다. 그래도 걸었다. 이번에 나타난 동네는 술울(행정상 지명은 물이 흐른다는 수류水流이다.)이라는 상두산 아래에 엎드린 동네가 나온 것이다. 해는 점점 서쪽 평야에 머리를 처박으려 한다. 마음은 급하고 술울 동네를 지나 상두산으로 접어들었다. 높은 산에서 원평 쪽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까지 남아있던 해가 들판 아래로 반쯤이나 숨어버렸다. 들판 끝에서 숨어서 희미한 빛을 내고 있다. 혼자였다. 우리 집에 오려면 동네를 넘어 혼자 산길을 걷듯이 이제야 우리 집을 찾은 듯 했다. 오르막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뛰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했다. 무섭다. 어두움이 무서웠다. 상두산을 넘어 조금 내려갔다. 동네가 나왔다. 호롱불이 처마 밑에 걸린 집에 발길을 멈추고 집안을 살폈다. 사립문 앞에서 얼쩡거렸다. 열살 남짓한 가시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렇게 추측했다. 이렇게 추측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을 이었다.
어느 일요일에 형과 산소 옆에 논에서 벼 베기를 하였다. 햇살이 가을 안개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일요일이었다. 형에게 물었다. 그 집에서 무얼 하면서 살았는지 물었다.
“우리 집에 올 생각은 없었어?”
“왜 오고 싶었지”
“그런데 왜 그 집에서 살았어? 우리 집이 거야라는 것을 몰랐어?”
“아니 알지. 거야가 우리 집이잖여?”
“거야라고 그 사람들에게 말해 봤어? 가고 싶다고?”
“그럼. 우리 집이 거야라고 말 혀도 모르더란 게.”
“그러면 금산면 거야라고 허지 그랬어?”
“그렇게는 말 안 했어. 징게(김제) 거야라고는 혔지.”
“그러면 원평 거야라고 허지?”
“가시내들이 원평도 모르고 징게도 모르더란 게”
“그러면 어른들에게 말하지? 그랬으면 원평에 데리고 왔을 것인디?”
“아니어, 어른들은 두 명 밖에 없는디 이름도 안 부른당 게”
“어른들 허고는 말도 안 했단 말이여?”
“그런 것은 아닌디. 말을 하기만하지 내 말은 안 듣는단 게”
“가시내들은 몇 명이나 되었어? 이름도 알어?”
그때 형은 살짝 웃으면서 벼를 베던 낫자루에다가 침을 탁 뱉으면서 나를 옆으로 보았다. 그녀들과의 무엇을 떠올리는 듯했다.
“가시내들이 아홉 명인가 열 명인가. 하여간 많아. 얼마나 많은지 이름을 다 몰라. 정말 많아. 정신이 없었단 게”
형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형은 열까지 제대로 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통 집에서 볼 수 있는 자매들의 수보다는 많았다는 것은 믿을 수 있었다. 딸 부잣집이라는 것은 짐작이 갔다.
“그렇게 많아? 만나면 알 수 있어?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이라도 알 수 있냐고?”
“그럼 알지. 근디 말이여 안 만나고 싶단 게. 아무도 말이여.”
“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었는데 안보고 싶어?”
“그려. 안 만나고 싶어. 그 집 어머니는 정말 무서워. 그 여편네는 정말 무섭단 게”
그 집 마나님은 형에게 매 차게 했음을 단박에 느꼈다.
“그럼 밥은 누가 갖다 주었어? 그 어른들 말고 말이여?”
“그 집 큰 딸이. 나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큰 딸이 쟁반에다가 주었어.”
큰 딸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면서 말이 길어졌다.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이었다. 형은 말을 먼저 꺼냈다.
“내 이름을 불러준 것은 큰 딸 밖에 없었단 게. 세수도 하라고 하고 발도 씻으라고 혔단 게. 수건도 갖다 주고 수건을 빨아주기도 허고 말이여.”
“배는 안 고팠어? 밥은 많이 주었어?”
“아니. 고팠지. 처음에는 큰 딸이 많이 주었는디 여편네가 큰 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후엔 큰 딸도 조금밖에 안 주더라고. 그래도 큰 딸은 밥은 꼭 주었어. 큰 딸 없었으면 나는 굶어 죽었을 거여. 큰 딸은 추수가 끝나고 할일 없을 땐 나 허고 산에 나무도 같이 갔단 게. 나무도 나보다 잘혀.”
“힘도 세었던가 봐?”
“응 나보다 세고말고. 지게지고 다녔는디 정말 나무도 많이 혀 갖고 왔단 게”
“곡식창고에서 잤다며 농사는 얼마나 지어?”
“응 그런 게 부자여. 부자는 부잔 디. 그 집 아버지는 술만 먹고 나무는 안 혀서 그려. 나락도 많고 지푸라기도 마당에 얼마나 크게 쌓아 놓았는지 네 마리의 소가 겨울 내내 먹고도 남았단 게. 큰 딸이 작두질도 허고 쇠죽도 쑨단 게. 쇠죽 쑬 때는 내가 불을 때기도 혔는디 꼭 옆에 와서 불을 같이 땠단 게.”
옆에서 불을 같이 때는 것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화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은 거기까지 생각할 지능이 아니었으니 따듯하게 불이라도 쬐게 한 그녀가 고마웠을 것이다.
아무리 지능이 모자란다 하여도 형의 나이 열아홉 아닌가? 성(性)에 눈을 뜰 때도 되었다. 나이로만 본다면 정말 인생의 황금기였다. 피가 뜨거워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의 나이 아닌가? 성숙한 여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묵히 대답만 하던 형은 딸들의 이야기를 하며 비로소 얼굴을 환하게 피었던 것 아닌가? 그녀도 남자라고는 술주정만 하는 아버지 밖에 없었으니 형은 그나마 유일한 남자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산골 중에 산골인 그곳은 눈뜨면 산 밖에 없었다. 형은 그 동네 이름을 알고 있었다!
“황내는 말이여 고샅이 얼마나 좁은지 나무를 지고 오다 보면 양쪽 담이 내 나뭇가지에 닿는단 게. 삭삭 쓸리는 소리가 난당 게. 누가 따라오는 것 맹키로”
황내! 형은 몇 번이나 황내라는 말을 나에게 했는지 모른다. 그런 단어를 말했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것은 형의 이름과 흡사해서 동네 이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황재’인지 ‘황내’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원평 장터에서 한나절을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생각하고 찾아보았더라면!
정말 아쉬웠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니, 영혼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니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 볼 줄 모르기는 다른 동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뉘우쳤다. 어머니가 올린 수 없는 지극한 기도와 용하다는 점쟁이를 수 없이 찾아 헤맨 것이 너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기도로 돌아올 형이 아니었다. 점으로 찾아낼 형이 아니었다.
찾는데 사고(思考)의 전환이 필요했다. 원평 장터에서 차근차근 더듬었더라면 그보다 쉬운 방법이 또 어디 있었을까!
사람은 풀리지 않으면 운명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씌운다. 운명을 신의 뜻이라고 뒤집어씌운다. 그리고는 만족이니 포기니 하며 제멋대로 생각한다. 이만큼, 나만큼 찾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자만(自慢)에 빠진다. 아집(我執)의 깊은 구렁에서 스스로 밝은 체 한다. 운명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숙명이라고 굴레를 쓰기 전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될 일도 그르치고 만다. 작은 목소리로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함으로도 설득할 수 없다. 일에서 떨어져 냉철한 이성(理性)으로 문제를 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가장 작고 쉬운 곳에 그 해답이 있음을 터득(攄得)했다.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음을 터득했다.
또 물었다.
“그 아가씨가 잘 해주었구먼. 아가씨가 좋았어?”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집에서는 제일 잘 해주었어. 옷도 사다 주고 빨래도 해주었거든.”
“그래서 거기서 나올 생각을 안 헌 겨?”
“아니 랑게. 그것이 아니어. 몰라서 못나왔어. 그 집 어머니가 나무를 맨 날 혀라고 혀서 나올 수 없었단 게. 맨 날 나무 허고 곳간에서 잠자고 허먼 하루가 후딱 가부렀단 게. 곳간에는 불도 없어서 밤에는 잠만 잤어”
동상(凍傷) 걸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이부자리는 있었는지 물으려 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물어 보았자 너무도 아팠던 마음을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그만 묻기로 했다. 나보다 왜소한 형을 보면서 사람이 극심한 고생을 하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실감했다.
그 처참한 환경에서도 산중에 몰아치는 삭풍을 견디고‘그만하기 다행이다’는 감사마저 느꼈다.
어머니는 형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주에 전라북도 경찰청의 최종문씨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 사실을 들은 그는 형이 있었던 그 집을 수사(搜査)하려 들어서 어머니는 극구 말려야 했다. 찾아보아야 척(隻)만 짓지 아무 득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찰로서는 그렇게 방송을 하고 전라북도 경찰청 산하 경찰서와 그 휘하(麾下)의 지서들을 동원하여 찾아내려 했던 사건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괘씸했던 것이다.
‘충분한 수사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인권침해는 물론, 감금이나 다름없는 그 생활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겨울이면 마소(馬牛)에게도 언치를 해주는데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종문씨는 우리 집에 와서 형의 상태를 보고 형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어머니는‘저렇게 낳은 어미 잘못이지 남을 탓할 일이 아니라’며 조목조목 따지는 그를 애써 말렸다.
할아버지도 어머니의 생각에 동조했다. 살아오기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벌은 주지 않았더라도 수사쯤은 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는 형이 정확히 어디에서 생지옥을 겪었는지 몰랐다. 그렇게 당한 장본인 형도 몰랐다. 최소한 그 것만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굴뚝같은 마음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입 밖으로 나와 대롱대롱 매달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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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처럼 혼자인 하루
잠시 엄마역활 아내역활 내려놓고
음악을 듣다가 친구의 카페에 들어와
고향을 생각하며 의미있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추억하나 떠오르네요
초등학교때인가 화독이란는 곳에 보리쌀을 넣고
언니 오백번 나 오백번 갈아서 먹었던기억이
난 지금도 보리밥 안먹습니다
지긋 지긋하게 싫었던 보리밥
막내라는 특권으로 들에나가 밭일안하고 살았지만
가난한 생활은 언제나 따라다녔죠
고등학교때 무수히 걸었던
금평저수지 뚝길도 생각나고
원평다리 지나서 집에 오며 보았던
금산지서도...
글 잘 보았어요
요즘 제대로 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아이셋키우는게 무슨 벼슬처럼 여기며
불만 투성이로 살고 있는데
떠난 엄마는 먹을것 부족했던 그시절에
여섯 자식 먹이고 입히는데 주력해야 함이
기침소리 내고 살았던 그시절을 모두 날려버린
내 엄마의 가슴은 추억으로 남아버린
그시절이 얼마나 버거 웠을까요?
몇일전에 엄마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호두과자 밖에 들고 가지 못했네요.
그리도 싫어 했지만 지금쯤은 술한잔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랫구나 황내 라는곳이 어딘지 궁금하네 아팟던 식구들에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거 같아 눈물겹습니다
판두네 어머니가 황내 댁 아닌가. 안덕이라는 동네의 부근으로 추측됨.
오늘은 정오부터 봄비가 양지골을 적시며 풀내음 가득하게하여 형에 글을따라 주평 술울 밤티 안덕을 지나 구이까지 다녀 왔는데 황내는 지나는 아낙에게 묻고 위치 파악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때 원평장의 지명도를 확인하고 그리 먼길을 다녔구나 하며 돌아 오면서 이해가 되지 안앗습니다 예전엔 왜 원평을 다녀 갓을까? 의문을 남긴체 돌아 왔습니다 다음에 갈때는 그 이유를 알아 오겟습니다
지도상으로는 황내를 찾을수가 없구려. 우리 중학교 동창중에는 안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다가 방을 얻어서 중학교를 다닌 애들이 세명이나 있어. 요사이에 그들을 만나 얘기하면 안덕에서는 전주로 중학교를 다녀야하는 데 걸어서 몇 km를 걸어서 버스를 타야한다는 불편이있어 걸어서 나가는 만큼 화율쪽으로 걸으면 금산중학교가 훨씬 가깝다는 얘기였어. 중학교 동창중에 김주성, 안시철, 김길남 지금도 다 살아있고, 안시철이는 동창회때마다 만나. 물어봐야 모르더라고. 모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내가 형의 귀가 다음부분에 쓸거여. 기다려. 곧올려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