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제1부 폭풍전야
제4장 신군부와 민중의 대격돌
4. [민족민주화대성회](하)
사회각계 동참 민주화 대장정 불지펴
전대.조대교수협 시국선언문 발표
수천의 고교생 가세 투쟁열기 고양
[5.13] 충정부대 비상대기...8개대학에 병력투입
80년 9월 2일자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에는 [소요사태]의 직접적 요인으로 다음2가지가 첫번째와 4번째로 각각 기록된다.
학원자율화 문교정책이 소요의 온상.
복학생과 복직교수들이 야합하여 정치적 이용목적으로 선동
민족민주화성회 기간부터 사태진압후 수습기간까지 분석된 이 자료는 계엄군의 전투목적상 전략전술측면에서 [민주화]라는 당위를 깡그리 무시한것이지만 광주항쟁의 촉발 주체를 잘 적시한 대목이다.
민족민주화성회는 대학생이 주축이 됐지만 노동자 농민등 기층민중과 교수들을 비롯한 광주의 민주인사와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없다면 5월항쟁을 잉태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서울을 비롯한 여타 대학과 달리 전남대학생회가 성숙한 투쟁을 했던데는 교수들의 동참과 지도가 컸다.
전남대는 기존의 교수협의회에 이어 80년 봄 각 단대에서 2명씩 교수가 선출돼 교수평의회가 결성된다.
안용삼의장(법대. 현 정년퇴직 광주시 동명동 거주), 명노근부의장(영문과), 김동원 대변인(사학과), 이방기평의원(법대) 등이 주도한 평의회는 학교당국과 총학생회 및 복적생 중간에서 기민하게 조정역할을 한다.
김동원 증언. [6명의 어용교수 퇴진문제가 장기화돼 반성과 함께 대학자율화에 동참한다는 선에서 매듭을 질고 가두진출때는 학생들의 질서를 유지하랴. 도경국장을 만나서는 평화시위 보장을 확약받으랴 여러모로 중간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교수평의회도 5월 13일 이상식(사학과) 이정완(영문과) 안장순(농대) 박영근(불문과)등 4명이 초안을 잡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들은 뒤에 모두 계엄사에 연행돼 학생선동혐의가 씌워져 모두 해직교수가 된다.
조선대도 6일 문병권 김종재 이강옥 황인창(이상 경영학과) 서갑성(무역학과) 일동 명의 재단문제로 진통을 겪는 학원자율화와 사회민주화를 요구하는 선언서가 채택된다.
이는 4월 30일 임영청(국어교육과)등 5명의 선언서와 5월 1일 박동철(영문학과)등 9명의 결의문, 5월 3일 국상훈(전기공학과)등 19명의 선언서에 이어 계속된것이다.
지식인들의 참여가 잇따르면서 70년대부터 속속 결성돼 사회운동과연계를 가져오던 노동조합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16일 성회에 로케트 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노총등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특히 로케트전기의 경우 수백명의 여성노동자들이 학생들의 가두시위에 동참키위해 거리로 뛰쳐나온다.
이때 노동자교육에 열심이던 정향자(당시 전남제사 노조위원장 겸 노총부녀회장)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관제어용노조의 행패가 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노동3권과 생존권보장요구등은 짓눌린 노동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희망을 갖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고 말한다.
함평고구마사건의 승리로 전열이 더욱 강화된 농민운동은 이때 민족민주화성회 열기를 농촌지역으로 확산시키위해 치밀한 계획을 짠다. 14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는
▲관제농협 해체
▲재벌등 비농민소유 토지회수
▲생산비보장 및 추곡수매가격 예시
▲강제농정 중단등 7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서 광주전역에 뿌린다.
이미 무안 벌교 등에 농정조사차 내려갔던 학생들과 교감이 있던 가농과 기농회원들은 19일 광주시 북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전남대 총학생회등에 학생동원을 요청한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전남대총학생 기획실의 비밀문건인 [자유]에 다음과 같이 놀랄만한 내용으로 기록돼 있다.
[농촌파급효과를 위해 공용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죽창과 밧데리를 준비하며 방송국.공공건물 예비군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 그러나 총학생회 간부와 이병철(당시 가농전국본부) 노금노 김상윤등은 17일밤 만나 대회 최종점검을 하기 직전 5.17쿠데타낌새를 알아차린 학생회가 산장쪽으로 잠시 피신해 만나지 못한다.
이 계획은 계엄사 군사재판에 [자유]문건이 증거물로 입수돼 내용만큼이나 큰 파문을 일으킨다.
성회기간중 고교생들의 집단참여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1천여명의 전남고생들을 비롯 수천명의 시내고교생들이 16일 횃불시위에 참여하고 어떤 학생은 분수대위에 올라가 [이 나라의 참된 민주주의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바칠것]이라고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시내 고교는 26개 중학교보다 12개 많은 38개교에 달했고 이는 농촌을 떠나 광주로 유학온 농민의 자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5.18때 이들 고교생의 활약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유신에 앞장서면서 민중현장과 끈끈한 연대를 계속해왔던 문화운동도 성회의 분위기고조와 시민들의 일체감 형성에 결정적인 큰 몫을 한다.
김양래가 이끈 전남대 농악대를 비롯해 대학 풍물패는 시위행진때 선두에 서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시민들은 어느덧 [훌라송] [투사의 노래] [농민가]등 의식가요를 함께 따라 부르며 모두가 하나된 박수로 박자를 맞추게 된다.
특히 16일 마지막 행사로 진행된 횃불시위는 [하나의 예술을 방불케하는 장관이었으며 운동과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이었다.
이같은 공동체적인 분위기는 시위진압을 목적으로 대치하고 경찰에게도 감동적으로 다가와 이제 스스로는 적극적인 행동을 못할 정도가 된다.
횃불시위 준비도중 전투경찰에게 빵을 나누어준 송기숙의 말. [학생들은 학생회에서 나누어준 빵을 먹고있었다. 그광경을 보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한층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교수들에게 돈을 좀 걷어주자고 제의를 했다. 삽시간에 10만원이 걷혀져 학생처장이 건네주었는데 나중에 내가 수사를 받을 때 이 돈의 출처때문에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가 손에 잡힐듯한 열기속에서도 도청에 운집한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군부 동태가 계속 어둠속의 공포처럼 다가오면서 근심이 가시지를 않는다.
박석무의 증언. [운동경험이 많은 지도층들은 학생들 걱정을 많이 했다. 16일 도청앞에서 나와 전홍준이 당시 밖의 주문을 정리해 학생회에 전달하던 김상윤을 불러 향후대책을 물었다. 김상윤은 비관론을 펴서 얻을 것은 없고 다른 대안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지막 할수 있는 얘기는 국군에게 쐐기를 박는 메시지를 보내라고 할수 밖에 없었다.]
전남대와 조선대 투쟁지도부에도 비관론이 지배적인 가운데 시위중단을 검토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으나 대세는 밀어붙이자는 것으로 정리된다.
당시 전남대 학생인 양강섭의 증언.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접수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희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
같은날 서울역광장에서 10만여 학생들이 운집했으나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시민의 호응 적은 상태에서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서울역회군]을 결정해버린 서울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다.
16일 민족민주화 성회까지 마친 전남지역 학생들은 정국추이를 관망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키로 하고 쌓인 피로를 풀며 오랜만에 막걸리잔을 나눈다.
그러나 대규모 학생시위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가급적 정명대결을 피한채 유리한 시기를 기다리던 신군부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는다. 전두환일파는 일사천리로 5.17쿠데타를 진행시킨다.
전교사교훈집에는 당시 광주지역 군부대 이동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5.13 17시 : 군충정작전부대 비상대기및 출동준비
. 5.13 19시 : 31사단 병력을 투입 MBC CBS KBS전일빌딩 등 시설보호를 위한 경계병투입
. 5.17 10시 40분 : 31사단 병력에 의하여 전문대학 할 포함한 8개대학에 병력을 진주, 진압작전에 임함.
광주를 피로 얼룩지게할 사전준비가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선출기자>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