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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곽 따라 돌기(2008년 10월 16일 흐림)
아침 7시 집을 나섰다. 오랫동안 마음에만 두고 실행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서울 성곽 따라 돌기. 이제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약간의 흥분감이 엄습해 온다.
일단 시점은 흥인지문(동대문)으로 잡았다. 모처럼 맞은 휴가를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 서울 성곽을 목표로 설정하는 데는 건축가 황두진씨의 체험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2006년도에 서울 성곽을 돈 기록인데 당시는 북악산이 개방되지 않았던 때라 그 구간만을 공백으로 남긴 채 1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악산지역까지 감안할 경우 대략 12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비만 오지 않으면 당장 시작하리란 생각은 바로 결행으로 이어졌다.
집에서 7시에 출발하여 후암 종점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내렸다. 흥인지문 앞에서 심호흡을 가다듬고 출발한 것이 7시 35분이다. 마침내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꿈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지나쳐 온 동대문 운동장을 다시 거쳐 첫 코스인 광희문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1974년) 55회 전국 체전에서 마스게임을 했던 그 동대문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둥근 원형 건물이 형체를 잃은 그곳에는 이제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고, 오랫동안 묻혀있던 성벽의 모습이 일부 빠끔히 내다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인가 광희문을 간 적이 있어 방향은 대강 짐작이 갔지만 아는 길도 물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길을 물었다. 일찌감치 우편배달에 나선 우체부 아저씨는 매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신다. 흥인지문을 떠난 지 불과 20분 만에 첫 기착지에 이르렀다. 광희문(光熙門)은 그 이름만 보면 빛이 번쩍번쩍 날 것 같은 데 사실은 서울 도성의 시신이 나가던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따로 시구문(屍口門)이라는 별명도 함께 달고 살게 되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근본적으로 식량이 해결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들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겨우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70년대 이전에는 먹고사는 자체가 힘에 겨웠던 것이다. 나는 다행이 부모를 잘 만나 굶고 산일은 없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 중에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지금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하루거리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친구들에게는 왠지 모르게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하였다.
1930년대만 해도 평균 수명이 30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우리의 형편이 얼마나 달라지고 좋아 졌는지 알 수 있다. 그때는 다산다사였던 데다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의료시설 따위가 열악하여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때문이리라.
조선시대의 경우 민초들은 거의 해마다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보릿고개는 고사하고 구황작물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고, 초근목피란 일상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현종대의 경신년 대기근 때는 수십만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나 굶주렸기에 심지어 어머니가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풍문까지 나돌았을까? 그러니 말해 무엇 하랴. 기근에 따른 죽음 못지않게 영양실조와 병행하여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으로 인한 사망도 부지기수였다. 시구문밖으로 실려 나가는 시신 중에는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있는 산 사람조차 섞여 있었다고 하니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참담함을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던 시구문, 아니 광희문을 이렇게 나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광희문을 시작으로 어느 정도 성벽이 이어지다 끊어졌다. 장충 체육관 쪽을 지나 동국대 앞에 있는 수표교(水標橋)를 지났다. 하천의 물 높이를 측정하는 수표교도 사실은 근대화의 몸살 속에 제자리를 잃고 이곳에 생뚱맞게 서 있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었다. 근처에는 유관순상이 있어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 나라 이 백성을 보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질기도록 엉겨 붙은 것이던가.
옛 답사 때 기억을 떠올리며 성벽이 있을 법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마침 그 곳에 근무하시는 분이 있어 물어보니 그곳 말고 건물 밖 골목길로 올라가면 성곽이 나타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내심 묻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일러준 대로 가보니 성벽 암문이 나타나고 암문 밖에 기다랗게 성곽의 위용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이게 뭐 잘못되었구나 싶었다. 여태까지 온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다시 이 길을 되짚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성곽을 따라 다시 광희문으로 가기로 하였다.
성벽을 끼고 걸으며 유심히 보니 글자가 여기저기 보인다.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간혹 있었지만 어떤 글자는 뚜렷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흥해시면(興海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등 여러 고을의 이름과 함께 그곳이 그 지역에서 맡은 구역의 시발점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을 찍느라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광희문까지 되돌아갔을 때 이미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광희문을 출발할 당시 황모씨가 출발한 것 보다 20분 정도 빠른 시간이었는데 이제 거꾸로 45분 정도가 늦은 셈이 되었다. 아차 싶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하문에서 북악산 입장이 어려워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만일 거기에서 차단되면 오늘 종주는 반 토막이 되고 말아 나중에 다시 시도해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
하여간 광희문에서 재출발하며 후일을 생각하여 가는 길이라도 정확히 확인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광희문의 성벽 끝자락에서 수구문 길을 따라 큰 길이 나오면 건널목을 건너야 한다. 그러면 좌측에 성당길(신당동 성당)이 나오게 되는데, 그 길을 죽 따라 가야 한다. 가끔 성벽의 돌이 민가의 담장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당길이 끝나는 곳에 희망1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저쪽 길 건너로 다시금 성벽이 희망으로 다가서게 된다. 그 오른쪽에는 아까 지나쳤던 장충체육관이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 응원 때문에 몇 번 인가 왔던 곳으로, 부모님께 마당놀이를 보여드린답시고 또 몇 번인가 찾았던 기억에 낯설지만은 않았다.
성곽이 시작하는 입구 쪽에는 60미터쯤 가면 겨울연가 촬영지라는 간판이 있었지만 현장을 따로 확인할 여가는 없었다. 아까 각자(刻字)를 확인하느라 걸음을 더디게 한 만큼 웬만하면 바로 지나쳐야겠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도 눈은 자꾸 성벽의 판판한 곳을 훑으며 뭔가를 찾아보게 된다.
30분 만에 암문으로 되돌아왔다. 5분쯤 뒤 전망대가 나타나는 곳에서 일단 성벽은 끝나고 있다. 타워호텔 쪽으로 가면 일부 성벽이 있다고 하는 것 같은 데 한창 공사 중이라 길을 막고 있어 갈 수가 없다. 주민의 코치를 받아 성안 쪽으로 길을 틀어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니 한국자유총연맹 건물이 막아선다. 공사 중이기는 하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타워호텔 쪽으로 올라가 성곽을 찾아보았으나 무위로 끝났다. 갈 길은 먼데 또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10시에 국립극장 앞에 섰다. 이제 황모씨 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어졌다.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를 따라 성곽 길을 찾아 나섰다. 순환도로 아래쪽으로 이어지던 성곽은 길로 나뉘어 산을 타고 오른다. 성곽탐방로라고 난 화살표를 따라 시작하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구불구불 위를 향해 저 멀리까지 뻗어 있다. 길이가 250미터나 되고 있음을 안내판은 친절히 말해준다. 아마 성곽이 아니라 나무 계단 길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끔 성벽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개를 훑어보곤 웬만하면 무시하기로 하였다.
나무계단이 끝나는 곳 근처에 남산배드민턴장이 맞이한다. 성벽 길은 일단 작별을 고하고 배드민턴장 뒷길을 죽 따라 오솔길을 한참을 가니 순환도로로 이어졌다(10시 22분).
이제 다시 성곽은 순환도로를 가로 질로 좌측으로 전개된다. 언제부터인가 순환도로로 일반차량의 통행이 금지되면서 훨씬 걷기에 좋아졌다. 한때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자전거를 타고 오른 적이 있는 데 지금은 성곽을 따라 이렇게 걷게 될 줄 어이 알았으랴. N서울타워가 눈에 들어온다(10시 35분). 남산타워가 민영화되면서 바뀐 이름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내게는 남산타워라는 이름이 좀 더 익숙한 편이다.
이곳에서는 남산의 씩씩한 기상을 받아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용고의 건물과 운동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여러 계기로 누차 올라온 남산이지만 오늘은 남산이라기보다 목멱산으로써 도성의 남 주작에 해당하는 곳으로 반기고 있는 것이다. 오성이 그랬다던가? 남산의 나무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만 그루란다. 나무가 빽빽(100×100=10,000)하다나 어쩠다나. 남산의 저 소나무가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열심히 그 노래를 부르며 나라 사랑을 배웠다.
국사당(國師堂)을 가리키는 표지 석은 팔각정 영역 권에 들어 있다. 그런가하면 다섯 개의 봉수대가 케이블카 정류장 위쪽에 덩그마니 솟아 있다. 사실 원래 자리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그 반대편에 있었다고 한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전통시대에 봉수는 중요한 연락 수단 중 하나였다. 봉수대에는 5개의 불을 올리도록 되어 있는 데 평상시에는 봉홧불이 1개이고,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산 봉수대는 바로 궁성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 봉수대 역할을 하였다. 사실 봉수(烽燧)는 봉(烽)과 수(燧)를 합친 말로 횃불과 연기를 뜻한다. 밤에는 횃불을 들지만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하게끔 되어 있었다. 눈과 비가 오면 그마저 무용지물이 될 터이니 그때는 말을 달려 인편으로 연락을 취하였던 것이다. 역(驛)이나 원(院)은 그래서 또 필요했을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명장 관운장이 괄목상대의 주인공인 오나라의 여몽에게 어이없이 당한 것도 여몽의 군대가 봉수대를 급습하여 이루어진 결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곽을 따라 이어진 계단 길을 따라 남산을 내려섰다. 남산도서관을 거쳐 머잖은 곳에 숭례문이 자리하고 있다(11시 10분).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예를 숭상할 만한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어이없이 무너져 내린 국보1호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맞이할 따름이었다. 임진왜란과 6.25라는 대전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잘 버티던 조선의 표상은 한 노인의 말도 안 되는 불장난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차마 오래 있기에 민망한 자리이기에 빨리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조그마한 상처 나마 쓰다듬어 주는 예가 아닐까 싶어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흔적조차 남은 것이 없는 서소문은 찾을 길이 없고 겨우 서소문로를 물어 찾아든다. 덕수궁 길을 끼고 돌려는 데 마침 일군의 무리들이 대오를 갖추어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정동 길에 접어들어 이화여고 안에도 성곽의 자취가 지나간다기에 수위 분께 양해를 구하고 교정에 성큼 들어섰다. 근대여성교육의 발상지답게 전통이 군데군데 묻어나고 규모도 제법 컸다.
한 모퉁이에 성곽이 지나간 모습을 보면서 그런 곳에 조그만 표시라도 남겨두면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련만 하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후문을 빠져나와 창덕여중으로 가는 골목쯤에 또 성곽의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있다. 아예 민가의 담장 기초석이 된 채 옛 영화를 잊은 지 오래인 듯싶었다.
다시 정동 길로 접어들어 이제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을 찾아 나섰다. 돈의문도 남아 있지 않으니 터나 확인해볼 일이다. 삼성강북병원 아래쪽에 돈화문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도로변에 크게 설치되어 있다. 삼성병원이 옛 경교장이었다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총탄으로 쓰러진 곳일 게다. 이 나라는 어쩌자고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국가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국가의 문지기를 자처한 민족주의자인 늙은 정객마저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인가.
삼성병원을 지나 얼마쯤 가다 보면 성곽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고 그 옆에 홍난파 가옥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입구의 표지와 달리 정작 집에는 표시된 부분이 작아 그대로 지나쳤다. 엉뚱하게 행주대첩의 주인공이었던 권율장군이 거주하던 집터를 확인했으니 그냥 허비한 셈은 아니었다. 되돌아 나와 우체국에 들러 다시 길을 물은 끝에 홍난파 가옥을 겨우 찾아냈다(12시 40분). 난파의 가옥을 오른쪽으로 끼고 가다보면 또 성곽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차장 안쪽으로 두부를 자른 듯이 반듯반듯한 성 돌이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그 길을 죽 따라 올라가면 인왕산이 나온다기에 오솔길을 따라 가다보니 사직타운 쪽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암문 같은 것이 보인다. 마주 오는 아주머니께 인왕산 길을 물으니 나무다리 길을 건넌 곳에 보이는 종로 사회과학 자료원 건물을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신다.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한 입 베어 물으며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다시 확인하였다. 등정을 시작할 때 시간은 이미 12시를 55분이나 지나 1시가 가까웠다. 황모씨의 기록을 보니 그 또한 똑같은 시간대였다. 그가 덕수궁을 들르고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그간 벌어졌던 간격을 좁힐 수 있었던 것 같다.
배낭 안에 도시락이 있었지만 먹기가 녹록치 않았다. 적어도 자하문에는 북악산 입산금지 시간인 3시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 못할 짐은 걸머진 배낭보다도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만일 3시까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기껏 세운 계획은 중동무이될 판이니 그도 그럴 수밖에. 그나마 장충동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남대문 시장 앞에서 풀빵을 해치우고, 인왕산입구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힌 것이 위로가 되었다. 동대문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대문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맛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싶어 혼자서 고소를 금치 못한다.
성곽을 안쪽으로 따라 돌까, 아니면 밖으로 따라 돌까를 잠시 망설이다 바깥쪽을 따라 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안쪽보다는 성곽의 윤곽이 보다 뚜렷했고 인가가 정겹게 다가오기 때문에 바깥쪽이 나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런데 웬걸 가다가 길이 끊기다시피 하여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성곽으로 붙고 하다 보니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쨌거나 다시 길을 물으며 성곽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옛날에 따라 올랐던 인왕산 언저리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제 그 길만 죽 따라 올라가면 되리라던 당초 생각은 일단 접어야 했다. 12월까지 공사를 한다며 출입 통제를 하고 있으니 어쩌랴. 지켜 선 군인과 근처에서 작업 중인 인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길을 묻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과 달리 성곽 바깥쪽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였다. 처음에 받침돌 하나를 밟고 올라서니 그래도 길은 있었다.
아무래도 시장기를 무작정 외면할 수만도 없어 배낭을 부려놓고 준비해간 인절미 몇 개와 음료수로 배를 속였다. 성곽 근처를 따라 오르내리다 보니 보수 공사 현장이 보이는 근처에서 성곽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등산객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인왕산(仁王山) 정상에 올라서니 1시 45분이었다. 구름이 끼어 있어 시야가 확 트이지는 않았지만 청와대 정도는 흐릿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인왕산의 왕(王)자를 왕(旺)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친 장난이라고 한다. 도성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은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서인이 되어 궁중을 쫓겨난 비운의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 중종의 비) 신씨(愼氏)의 서글픈 치마바위 전설을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자하문에 도착하는 것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북악산에 들어가서 시간을 끄는 한이 있더라도 자하문은 정해진 시간 내에 접수해야 했다. 하산 길의 성곽은 안으로 걷기도 하고 밖으로 걷기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자하문에 도착하니 2시 25분이었다. 30분 이상의 여유를 가지게 되니 자연 혁명의 성공이 기대되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자하문의 다른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이다. 1623년 김류(金瑬) ․ 이귀(李貴) 등 서인(西人) 세력에 의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졌다. 광해군(光海君)은 명(明)과 후금(後金 : 淸) 사이에서 중거리 외교를 통해 실익을 얻는 유능함을 보였지만 내적인 정치적 문제의 모순을 끝내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그는 30여 가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강화 교동과 제주도 등지로 유배를 전전하다 제주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쳐야 하는 불행한 왕으로 남아야 했다.
남사고(南師古)라는 사람이 일찍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놓고 예언한 일이 있다. 보통 동서분쟁은 이조정랑(吏曹正郞)직을 둘러싸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다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데 김효원이 도성의 동쪽인 낙산(駱山) 근처에 살았고, 심의겸은 안산(鞍山) 근처인 정동(貞洞)에 살았다 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바로 여기의 낙산과 안산을 두고 남사고가 점을 쳤다는 것인데, 동인은 각마(各馬 : 駱자의 파자)하고, 서인은 혁명 후에 안정된다[革安 ; 鞍의 파자]고 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동인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동인은 대서인(對西人) 입장 차이에 따라 강온파간에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를 각각 말을 갈아탔다고 본 데서 각마(各馬)라고 하고, 서인은 서인 중심의 반정인 인조반정 후에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혁명 뒤에 안정을 찾은 것이라 하여 예언이 적중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윤색되거나 각색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한번 웃고 넘기는 이야깃거리로는 충분히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어쨌든 창의문은 인조반정군이 세검정 쪽에서 올라올 때 만나는 첫 관문으로서 그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루 위에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이 종서(縱書)로 쓰여 있다.
입산 절차를 마치고 성곽을 따라 길게 나 있는 돌계단을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오르다보니 제법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백악산(白岳山 : 2시 55분)에 올라 바위에 걸터앉아 남은 인절미로 배를 채웠다. 흐릿한 정경이나마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청운대를 지나치면서 이제 곡장(曲墻)이나 촛대바위는 안중에 없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달리 구태여 해설사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도 없으니 그만큼 시간은 절약된다 하겠다.
이제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 : 3시 30분)에 이르러 간판을 올려다본다. 보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가 쓰이는 법인데 버젓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씨가 쓰인 것으로 보아 최근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정문의 다른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하지만 사실 소지문(炤智門)이라 해야 더 격이 맞을 듯싶다. 적어도 서울의 사대문 이름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어진 것이 아닌 까닭이다. 각 문의 이름은 바로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에 맞추어 지어졌는데, 예컨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소지문(炤智門)은 그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오상의 마지막 신(信)자의 자리는 바로 보신각(普信閣)이 차지하고 있다.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지문만 한 글자가 더 많은 이유로는, 흔히 그 쪽 지대가 낮고 약해서 별 뜻이 없는 지(之)자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는 말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설명을 대신해준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는 고흥문(高興門)씨의 이름도 그 곳 어디에선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북대문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겨우 모습을 드러냈는데 사실 조선시대에도 줄곧 닫혀 있고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의 역할로서 보다 구색을 맞추기 위한 상징성이 컸다고 하겠다. 속설에는 음(陰)에 해당하는 북대문을 열어놓으면 도성의 여자들이 바람을 핀다고 닫아놓았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자못 의문이다. 그러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자유스런 풍조가 만연한 지금은 북대문을 개방해서 그렇다는 말인가? 어쨌든 숙정문 근처의 소나무군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숙정문에서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말 바위 대피소가 있다. 이제 북악의 통제권을 벗어나 보드라운 흙길을 통해 성곽 바깥 길을 따라 걷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곳이 와룡공원(臥龍公園)이다(3시 55분). 내가 아는 와룡은 제갈공명 밖에 없는 데 이곳에 누운 용은 어떤 성향을 띠었는지 모르겠다. 눕지는 못해도 잠시 의자에라도 걸터앉아 물을 들이켜 본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다녔던 보성중고 자리에 지금은 서울과학고가 대신 자리하고 있다. 그 후문에 도착(4시 10분)한 뒤 우리 밀 국시 간판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잡아끈다. 거금 7,000원을 들여 국수를 시켜놓고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킨 다음 남은 여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등산화 끈을 다시 조여 맸다. 바로 앞에 혜화문길이 나 있으니 그 길로 들어서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성곽인지 담장인지 모를 정도로 전통과 현대가 만나 어우러지는 곳에 구기자가 갸름한 얼굴로 아는 체를 한다.
이쯤 어디엔가 전시황의 집이 있다고 했겠다. 한두 번쯤 망설이다 벨을 누르니 시황이 반가이 전화를 받는다. 대충 집 곁을 지나다 전화했노라고 어정쩡한 안부를 묻고 이내 혜화문(惠化門)에 도착하였다(4시 48분). 혜화동 이름이 생기게 했을 그 현판 역시 요즈음 글씨임에 틀림없다는 듯 좌에서 우로 가로질렀다.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다하여 얻은 닉네임은 동소문동을 잉태하였다.
이제 막바지 코스를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낙산에 올라붙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대학로 쪽과 삼선교 쪽 두 곳이 있다고 하는 데 황모씨의 글을 들여다보니 삼선교 쪽을 추천한다. 그저 모를 때는 말 잘 듣는 게 최고다. 삼선교 쪽을 택하여 정확한 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지나는 학생에게 물어보고, 길은 건너선 다시 약국 할아버지에게 여쭈어본다.
혜화동 가는 길을 버려두고 조금 올라가면 주차장과 지물포사이로 언덕배기로 이루어진 비교적 큰 길이 나타난다. 장수길이라고 되어 있다. 장수길을 따라 죽 참을성 있게 올라가면 낙산의 성곽과 마주치게 되어 있다. 좌편에 보이는 것은 한성대임에 틀림없으리라.
골목길을 따라 거의 성곽에 접근했는데 공사장이 길을 막고 있다. 집들이 헐려나가며 무슨 공사인가 하려는 모양인데 다시 내려갔다 돌아가려니 이제 적당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러기에는 꾀가 났다. 그래서 그냥 들어가 무너진 집들을 부여잡고 올라가며 성곽 옆을 지나치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역산이다.
오늘 아침 인터넷이 되지 않아 용두팔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못했더니 여러 친구들의 걱정이 태산이란다. 아마 문자도 보냈던 모양인데 미처 받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산 뿐 아니라 용왕도 문자를 보내와 우려를 표시했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물의를 일으켜 미안하다며 전화하는 사이 어떤 사람이 부른다. 왜 공사장에 들어갔냐며 화를 내고 빨리 나오라고 성화가 여간이 아니다. 그 사람은 만약 사고라도 나면 책임을 져야 할 일 때문에 그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고 그곳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할 수 없이 조금 돌아 다시 낙산 성곽의 암문을 만났다(5시 27분). 이제 거의 저물어가는 때쯤에 낙산 성곽의 안쪽을 따라 내려 오다보니 성 길이 끊긴다. 이대 동대문병원이 떡 하니 길을 막아선 것이다. 한 바퀴 도는 가운데 아예 성 길이 끊겨 남아나지 않은 곳도 있었고, 이렇듯 병원이나 군부대에 의해 돌아가야 하는 곳도 없지 않았다.
성곽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곳곳에 일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사과는 커녕 독도마저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후안무치함에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다. 그러나 끊긴 곳은 끊긴 대로 내 발로 이어가며 성 길은 그렇게 도성을 휘감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5시 53분, 출발한 곳에 다시금 서서 흥인지문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헤매느라 지체한 시간까지 12시간 18분 만이었다. 잠시 낙산 쪽으로 시작하는 성벽 앞에서 음각된 글자에 눈을 주어본다.
康熙四十五年 四月 日 改築
강희 45년(1706년, 숙종 32년) 4월 일 개축
태조 때 처음 도성을 쌓았고, 세종 때 한 번 수축한 다음 숙종대에 다시 개축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아마 최종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인 듯싶다. 책임자들로 여겨지는 인물들의 이름도 여럿 발견된다. 서울을 보듬어 안고 있는 성곽은 500여 년의 세월 속에 말이 없지만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품고 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나마 조금씩 가슴 속 내밀한 사정을 토로하고 있다. 언제 다시 끊어진 성 길을 발로 이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가만히 기대해보며 님과의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몸을 이리저리 부대끼며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 저 편 너머로 성곽을 쌓는 이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겹쳐짐을 느끼며 이제는 서울 한 복판을 가르며 귀가 길을 서두른다.
(*상당 부분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한 관계로 혹여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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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것저것 남들이 이행하지 않은 일들을 두루두루 해내는 너에게 찬사를 보낸다!!! 다음엔 또 무엇???
자칫 왜 괜한 짓을 하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없지 않을 터인데 이해를 해주니 고맙다. 나도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하게 될 지 모르겠다. 일단은 국내에서 가 보아야 할 산들이 구미에 당기지만...
참으로 장한 친구이네 긴여정을 편히 앉아서 즐기려니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ㅎㅎㅎ 구간 구간은 다녀 밨지만 성곽 종주는 생각도 못했는데 인왕산은 엄마와 작년에 다녀왔지 서울과학고 앞에 있는 왕돈까스집에서 거나하게 늦은 점심으로 하루를 마감한 기억이 나누나 친구 수고했네...
허튼 짓이나마 이를 이해해주는 벗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지. 고맙네. 내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친구들과 같이 산행할 시간을 마련해 보련만.. 요즈음은 아직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