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견지동 44번지 현재 조계사 대웅전과 그 앞의 홰나무 사이에 있는
천도교가 운영하는 30평의 2층 건물 보성학원내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야간 인쇄 작업에 켜놓은 등불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공장 내 창은 모두 가렸다.
일반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 사장 이종일은 신임할 수 있는 공장감독 김홍규과
총무 장효근 신영구 등과 함께 좁은 인쇄소 안에서 독립선언문의 인쇄 작업을
이날도 오후 6시부터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25일까지 1차로 2만 5천장을
인쇄 완료했다. 27일 밤까지는 1만장을 더 인쇄해야 했다.
김홍규가 인쇄한 후 이종일이 교정을 보고 다시 인쇄에 돌렸다.
극비에 진행하는 독립선언문의 인쇄 작업이다.
모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긴박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모두 감짝 놀라 기겁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쇄된 선언문을 치우려 하였으나.
"문 열어!" 고함소리가 빛 발치 듯하였다. 문 열라는 소리는 더욱 요란했다.
모든 것을 각오한 이종일은 큰 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한 줄기 불빛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귀(惡鬼)와
같은 형상이었다." 이종일은 신음하듯 던진 말이다.
“아! 이러한 장소에 이 시각에 이 악귀가 찾아오다니!”
악귀는 바로 신승희였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10년 동안이나 우리의 많은 독립 운동가를 붙잡아 갖은 고문을 하고 감옥에
가두는 악명 높은 일본의 앞잡이였다.
이종일은 그 자리에서 애원했다.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들어 날 테니 오늘 하루만 용서해 주십시요."
두 손을 빌며 읍소하였다 .관내를 순시하던 신승희는 보성고보의 뒷담 골목을 지날 때
인쇄소 내에서 작업하던 소리를 듣고 찾아 온 것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창을 굳게 가리고
사람 소리를 들리지 않아 이상히 여기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실내를 둘러보고 단번에
사정을 그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가만히 서있기만 하였다. 무엇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이종일은 그의 소매를 붙들고 다시 사정하였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평소에 자주 들려 농담도 곧잘 하던 그는 무뚝둑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의암 선생님한테 갑시다!" 이종일은 그의 옷소매를 끌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당신이 갔다오오."
뜻밖이다. 형사 신승희가 수그러졌다. 이종일은 곧 밖으로 나와
힘 닷는대로 달음질을 쳤다. 단숨에 의암 손병희선생 집에 도착했다. 그는 숨을 헐덕거리며
위난이 닥쳐왔음을 말하였다. 묵묵히 듣던 의암은 좀 기다리라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잠시 있다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갖다 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무사히 일을 무사히 일을
마치도록 하시오."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이종일은 다시 인쇄소를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는 형사 신승희에게 종이뭉치를 꺼내 주었다.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곧 사라져 버렸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일시에 맥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쪼록 저자가 배신치 말았으면....’ 기도하며 힘을 내어 다시 작업을 계속하였다.
10시가 넘어 작업이 모두 끝났다. 2만 1천여 매의 귀중한 독립선언문을 리어카에
차곡차곡 실었다. 재동파출소 앞을 지날 때 검문을 당했다. 마침 정전으로 가로등이 꺼졌다.
순찰 경찰관에게는 “천도교에서 인쇄한 조선사람의 족보다”라고 속이고
무사히 운반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종일의 숙소로 쓰고 있던 경운동 신축교당의
창고로 옮겼다.
1910년 나라가 일제의 치하로 들어갈 무렵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를 설립하고
천도교 관련서적과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간행했다.
그해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의 경영권을 인수, 그 학교에 속해 있던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고 했다. 당시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인쇄계를 주도해나갔다
최남선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광문회 임규의 일본인 부인의 안방에서
약 3주일 만에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하였다.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월 27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끝마쳤다.
선언서 뒷부분에 첨가된 공약 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전한다. 선언서의 원고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에게 넘겨져 오세창이
인쇄총책임을 담당하였다, 이 인쇄소는 문선(文選)의 기술이 부족하여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이를 재동 최린의 집에
은닉해 두었다가 이미 20일부터 이곳에서 인쇄에 들어간 것이다.
신승희가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하루 앞둔 28일 새벽부터 배포되었다.
선언서 배포를 책임진 오세창은 신표로 청색 헝겊을 주어 사람을
보내면 이종일은 이를 확인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전국 각지에 발송하였다.
이 보성사에서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계속 발행했다.
결국 일제는 보성사를 패쇄, 1919년 6월 28일 불태워버렸다.
신승희는 종로경찰서에 10여년이나 근무한 고등계 형사였다. 그는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일본말이 유창한 그는 일본인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동포들 간에 독사로
불리는 악명 높은 형사였다. 이종일에게 건네받은 종이뭉치에는 5천원이 들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5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3.1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아니 그 후에까지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사로부터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것을 추궁 받았으나 별일 없이 지냈다.
신승희는 그길로 종로서에서 "만주로부터 신의주에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한 뒤
자청하여 만주 봉천으로 출장을 떠남으로써 밀고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5월 14일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일본 헌병대에서는 그를 서울역 구내에서 즉각 잡아
경성헌병분대에 가두었다.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고도 이를 밀고하지 않아
3.1독립 만세 사건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일본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5월 22일
유치장 안에서 준비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가 만약 그때 3.1운동을 눈감아 주지 않고,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신고하였더라면
세계만방에 우리의 위대함을 떨친 3.1 운동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