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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타는 일 없이 매양 물이 찰랑찰랑 넘칠 듯한 청룡저수지를 지나 청룡사에 든다. 서운산 기슭, 노송 우거진 선경에 자리 잡고 있는 청룡사는 대웅전 기둥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세워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관심을 끈다.
그보다 더 잘 알려진 사연으로는 1900년대부터 등장했던 민중놀이패 남사당의 근거지가 청룡사라는 점이다. 황석영의 소설『장길산』에는 신명나게 광대들이 안성 땅을 지나다가 남사당패와 한바탕 어우러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남사당이 고단한 삶의 애환을 녹여 내며 쉼터로 삼았던 곳이 청룡사 부처님 품안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10여 채쯤 돼 보이는 남사당네 마을과 청룡사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짝 마주보고 있는데 유난히 친근해 보인다.
‘서운산 청룡사’(瑞雲山 靑龍寺)의 현판이 걸린 허름한 문간채를 들어서면 여느 사찰과는 달리 마을 집과 같은 요사채가 앞을 막아선다. 웅장한 대웅전을 제외한 요사채가 마치 여울 건너 남사당네 집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남사당은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부터 추수가 마무리되는 가을까지 마을을 떠나 천지사방을 떠돌며 살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둥지로 찾아들게 마련이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바우덕이는 남사당패를 이끄는 여장부이다 이 노래가 남사당 바우덕이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지만, 노래처럼 돈이 쏟아지는 일은 흔치 않다.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信標)를 챙겨 들고 봄부터 떠돌기는 하였으되 겨우살이 걱정에 쓸쓸해지는 게 이들의 살림살이다.
남사당은 겨울이면 청룡사에 와 둥지를 틀고 일손을 거들며 식솔들을 거뒀다. 청룡사는 적당히 천대받으며, 어렵사리 생존을 꾸려 가는 남사당에게 불복하니 등의 일거리를 제공하고 자연스레 한 식솔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산대제 수륙제 등 가끔 청룡사에서 성대한 의식이 베풀어 질 때면 이들은 장엄한 춤과 음악을 공양했을 것이다.
「청룡사 중수기」에는 이들 남사당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 있다. 불사에 시주하는 일이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을 보듬어 들였던 청룡사는 그래서 더욱 근엄함이 아닌 따스한 인정미가 느껴진다.
청룡사에서500m쯤 올라가면 불당골이 있다.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팔사당집 가운데의 여장부 바우덕이는 노래와 춤, 줄타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 바우덕이 살던 곳이 불당골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7~8호쯤 되는 집에 남사당 후손들이 살고 있다.
청룡사의 내력은 숙종 46년(1720) 동현거사 나준(羅浚)이 지은 청룡사사적비에 남아 있다. 연재 절 어귀에 세워진「청룡사 사적비」가 그것이다. 이사적비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 원종6년(1265)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 1341~1367년에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했다. 이때 나옹선사가 서기어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靑龍)을 보았다 해서 본래 대장암(大腸癌)이었던 절 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어 기록하고 있다.
고려 공양왕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세종 6년(1424)에 다른 곳으로 옮겼고.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원당으로 삼는 바람에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는 대웅전․관음전․명부전․관음청향각․대방 등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9호인 삼층석탑이 대웅전 앞에 서 있으며, 조선 현종 때 주조한 800근이 넘는 동종이 있다. 절 북쪽관음전에 1680년에 조성된 감로탱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청룡사의 전체 규모가 소박하고 아담한 데 비해 대웅전만은 유독 웅장하다, 정면 3칸 측면 4칸 집이 우람해서가 아니라, 대웅전을 매만진 손실 마음길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대웅전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점도 예사 절과는 다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화강석으로 주초석을 놓은 다음 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정면을 피해 양 옆으로 계단이 나 있는데, 양 처마 끝이 호수에 비친 그림자처럼 조화롭다.
날개를 활짝 편 듯한 다포계양식 팔작지붕이 등을 기댄 야트막한 산과 썩 잘 어울려 아름답다. 법당 정면의 처마 밑으로 내달린 공포장식의 쇠서〔쇠서〕윗몸에 청․황․백련의 연봉오리를 쓴 것도 눈길을 끄는데, 사방 칸칸을 받친 큰 기둥을 자연목 그대로 썼음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연륜이 깊어 이리저리 등 굽은 노송을 그대로 옮겨와 가지만을 뚝뚝 잘라내고 기둥을 삼은 것이 천연(天燃)의 미감이다. 부처를 섬김이 그리도 자연스럽고 대범했던 것일까.
법당 밖의 채색도 눈여겨 볼만 하다. 연화문․태평화문․사판화(四瓣花)․육판화(六瓣花) 등 화려한 꽃과 연꽃문양들이 가득 차 있다. 문설주 위에는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약사여래 등 다섯 분의 부처님이 무언의 설법을 들려주고, 여러 모습의 조사(祖師)들이 다양한 그릇의 참배객을 맞이한다.
대웅전 양쪽 추녀 끝에 금강력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청룡사가 아니고선 결코 볼 수 없다. 오른쪽엔 입을 굳게 앙다문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왼쪽에는 입을 벌린 채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천왕문이나 금강문을 따로 세우지 않은 청룡사는 법당 추녀에서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며 부처님을 외호토록 묘안을 짜낸 것이리라.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모셔져있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전생 몸이다. 흔히 선혜보살이라 부르는데, 후에 연등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청룡사 법당은 과거․현세․미래불을 나란히 한 자리에 모신 것이다.
오색구름 속에 노닐며 부처를 외호하는 청룡과 황룡을 청․황색 사자 위에 세운 것도, 나전(螺鈿) 당 초문으로 치장된 화려하고 장엄한 불단도 꼼꼼히 챙겨 볼 일이다. 청룡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랑거리다.
삼존불 후불탱화는 고종15년 (1878)에 전주 이씨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원찰삼아 드나들었던 이씨 왕가의 후손들이다.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우물천장이 시원스럽다. 법당 한쪽에는 현종15년(1674)에 조성된 높이 128cm,800근 무게의 향토유적 제26호인 동종이 있다. 대웅전의 건축 시기나 중수된 내력은 확실치 않으나, 조선후기 건축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제824호이다.
청룡사 사적비
청룡사 입구에 사적비가 서 있다. 숙종 46년(1720) 청룡사 중수를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비석이다 높이189cm, 폭 73cm, 두께31cm인 이비는 방형 기단석에 비신을 앉히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평범한 비석이다. 비문은 동현거사 나준(羅浚)이 짓고, 글씨는 중훈대부 직산현감 황하민(黃夏民)이 썼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진상(金鎭商)이 전액(篆額)하였다.
청룡사는 본래 고려원종6년 (1265)에 명본국사가 창건하고 대장암이라 일렀던 것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서기가 가득한 가운데 청룡이 오르내리매 나옹선사가 이를 보고 서운산 청룡사라 고쳐 부르게 외었다는 내력 등을 기록하고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절의 집터가 마치 청룡의 형상과 같다고 한데서 청룡사가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이다.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사적비의 내력을 뒷받침하는, 청룡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 밭이 있다. 허튼층 막돌 쌓기로 사각형 돌담을 쌓았는데 퍽 가지런해 보인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가 단연 많고, 그 이전 이후의 부도도 더러 눈에 띈다.
남사당
서민사회에서 발생한 민중놀이 예인 집단인데 당초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성립배경이나 연원은 확실치 않으나, 남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사당패․건립패․중매구 등이 있었다. 그 중 규모가 크고 내용이 다양하며 민중의 인기도에서 남사당패가 으뜸으로 꼽힌다.
민중 예인집단과 놀이로는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해동역사』가 전하고 있으며『고려사』『문형통고』등에 괴뢰목우희(傀儡木偶戱)의 광대(廣大)등이 기록되어 있다. 안성남사당패에 관한 기록은 조선 명종 때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 기록으로는 당시 예인집단의 내력을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은 못 된다. 연희자들은 대개 유랑집단이었고, 양반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한결같이 패륜패속(悖倫敗俗)의 무리라는 도식적 평가절하로 몰아붙여졌기 때문이다. 양반계급에 속해 있던 기록자의 입장에서 자세한 언급이 회피될 수밖에 없었다.
연명조차 급급했던 남사당 놀이패의 은거지로는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희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로 알려져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명한 곳이 안성 청룡사 마을이다 이들은 겨울 동면기를 이용해 은거지에 머물며 어린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치고 봄철 농번기가 시작되면 이동을 시작한다.
마을 출입마저 수월치가 않은 것이 남사당의 신분이었다. 서민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에센 멸시의 대상이었다. 남사당은 마을 권력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입성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란 마을에 서 가장 잘 보이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남사당의 기를 흔들고 풍물을 치며 온갖 재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니면 이 특별한 임무를 곰뱅이쇠가 혼자 마을로 들어가 권력자에게 간청하는 방법을 썼으나 성사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곰뱅이란 사당패의 은어로 허가의 뜻이고 이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곰뱅이쇠 이다.
마을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가 오면 의기양양하게 길놀이를 펼치며 들어간다. 이때 큰 멍석 대여섯 장이 깔리고 다양한 연희가 펼쳐지는데, 여기서 행해지던 얼른(요술) 종목은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마을에 들어가 한바탕 신명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일정한 보수는 없고 먹고 잘 곳만 제공되면 언제어디서든 날을 밝히며 놀이판을 벌인다.
남사당이 펼쳐온 놀이는 여섯 가지다,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남사당은 꼭두쇠(우두머리 혹은 모갑이)가 앞잡이가 되어 놀이를 이끌어갔으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단원들이 모이기도, 흩어지기도 했다. 50명 안팎의 단원을 이끌어야 하는 남사당패꼭두쇠의 통솔력은 엄격했다.
꼭두쇠 밑의 뜬쇠는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고, 곰뱅이쇠는 남사당의‘글’(밥)을 책임지는 막중한 소임자이다. 뜬쇠들은 해당놀이에 따라 ‘가열’(보통기능자)을 몇 사람씩 두었다. 가열 밑으로는 초입 자에 해당하는 ‘삐리’를 두는데, 삐리들은 꼭두쇠 의 판단에 따라 적절한 예능분야로 배속을 받고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기예를 익혀간다. 각 연희 분야에서 벌어지는 반반한 삐리들의 쟁탈전 또한 볼 만 했다고 한다. 인기를 끄는 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삐리가 가열이 될 때까지는 여장(女裝)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남사당에도 여자가 가세하게 되었는데 안성 바우덕이는 전국에 유행했다.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안성사당패를 불러 걸판지게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런 사연에 힘입어서였을까.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13년간 안성바우덕이는 안성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거리에 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청룡리 개울가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서민생활을 윤기 있게 했던 남사당은 영화․연극 이 보편화되고,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신명 돋우는 놀이마당이 사라진 만큼 서민들의 여유도 그만큼 잃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