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송과 칡넝쿨
나는 해송이란다.
먼저 내 소개부터 해야 되겠네?
나는 소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흑송이라고도 하지. 우리나라 산야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소나무 중의 하나야.
우리나라 애국가 2절을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란 가사구절이 있는데, 기억 나니? 하긴 이 가사를 모른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지.
서울올림픽 같은 국제행사의 개회식장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의 크고 작은 온갖 행사장에서, 또 텔레비전방송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데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잖니. 그리고 학교행사 때도 목이 터지도록 불러야 하는 것이 애국가잖니.
그러니 한국인이라면 좋든 싫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귀에 따가리 앉을 정도로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애국가거든.
이 가사야말로 우리 해송의 변함없는 꼿꼿한 정절을 어떤 역경이나 음해, 질곡에도 굴하지 않는 한민족의 표상으로 삼은 게 아니겠냐고.
그러고 보면 우리 해송과 한국인과의 관계는 오천 년 역사보다 더 오랜 세월 줄기차게 이어온 동고동락의 관계로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라 할 수가 있어. 우리 해송과 한국인과의 사이에 얼마나 끈끈한 유대감이 지속되었겠기에 한국인의 문화 속에 우리가 그토록 녹아있었겠냐고.
그 한 예로 솔거의 소나무 그림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화에서 우리가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지.
배경이란 것은 자연과 더 나아가 우주를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포용력, 즉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공간인 집이나 나를 낳아주고 길러 준 부모님과 같이 아늑한 존재를 상징하는 거야.
나는 몰운대 층암절벽 위에서 다대해를 굽어보고 거센 물살을 헤아리며 120여 성상이란 세월을 살아왔어. 인간나이로는 할아비의 할아비 연세에 해당되겠으나 우리 해송나이로는 이제 겨우 청소년기를 맞은 것에 불과하다고.
몰운대가 어딨냐고?
칠백 리 단숨에 굽이쳐 흐른 낙동강의 종착점 하구언에 세계적인 철새도래지 을숙도가 있지. 그리고 그 곁엔 드넓은 황금빛 모래밭을 자랑하는 다대포해수욕장과 나지막이 솟아오른 태고의 비경인 해발 스물여섯 장의 몰운대가 있단다.
오랜 풍상에 깎아지른 위태한 단애와 울울첩첩 시루떡 같은 층암절벽, 그리고 조물주의 작품인양 진귀한 기암괴석들로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로 망망하게 펼쳐져 있는 쪽빛 바다엔 장자도 남형제도 북형제도 목도 동이섬 쥐섬 모자섬 고리섬 자섬 동섬 팔보섬 등 크고 작은 숱한 섬들이 그림처럼 수 놓여 있어 신비경을 마냥 드러내는 곳이란다.
그래. 내가 사는 환경은 모든 것이 완벽하리만큼 잘 갖춰져 있어.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뭘 바라겠니. 그렇지만, 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버겁고 또한 지칠대로 지쳐있어. 왜냐고? 지금 칡넝쿨이 내 몸을 칭칭 감고 조여오는 바람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거든.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어느날 말이야. 칡넝쿨이 슬그머니 내 밑둥치로 다가왔지. 그때까진 친구하자며 다가오는 것으로 알았거든.
“칡아, 안녕!”
“안녕, 해송아!”
“너는 옆으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겠구나.”
“돌아다닐 수만 있으면 뭘 하니? 벗어날 수가 없는데….”
“벗어나다니? 어딜 벗어나려고?”
“땅위에서만 뽈뽈 기어다니면 뭘하냐고. 나도 너처럼 키가 크다면 멀리도 바라볼 수 있을텐데 말이야.”
“난, 오히려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네가 부러워. 한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꼼짝 못한다고 생각해 봐.”
말을 해놓고 보니 정말 그랬어. 해마다 키가 30센티씩 자라면서 점점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는데, 칡은 저 가고자 하는 곳에 넝쿨을 뻗어가며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오히려 칡이 부럽게 여겨지는 것이었어.
“땅위는 너무 복잡해. 온갖 나무와 풀들 등쌀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너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저 멀리 펼쳐져있는 너른 바다라도 실컷 구경하고 싶어.”
칡의 불만어린 투정을 듣고 보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 여겨졌어.
“그렇다면 내 둥치를 타고 올라오렴. 그러면 네가 원하던 대로 먼 바다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니.”
“정말 그래도 되겠니?”
“그럼, 뭘 어때서?”
“고마워.”
그때까진 나도 칡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만으로 만족했었어. 그리고 칡도 한동안 내게 고맙다는 말을 수시로 했었고….
“해송, 고마워.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높은 곳에 올라오고 보니 세상이 과연 넓긴 넓구나.”
그런데 애초부터 칡의 의도는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애.
칡은 내 우듬지까지 기어오르더니 점점 더 많은 넝쿨을 뻗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어.
“칡아! 내 몸을 그렇게 욱죄면 난 어떡하니? 이제 나도 답답하니까 더 이상은 곤란해!”
그 뒤로도 칡은 막무가내로 나갔어. 내 걱정은 전혀 안하는 것 같았지. 넝쿨은 넝쿨대로 자꾸 퍼져나가면서, 줄기마다 마구 부풀리는거야. 어른 팔뚝만큼 부풀려진 넝쿨이 단단한 근육까지 더해지면서 내 몸을 잔뜩 조여왔어.
“칡아! 그 억센 넝쿨줄기로 이렇게 숨통을 죄어오면, 내가 어떻게 숨을 쉴 수 있겠니? 뿐만 아니라 내 잔가지까지 모두 휘감고 있으면 나더러 살라는거니, 아니면 죽으라는거니?”
“미안해, 해송아. 이왕 몸을 빌려준거, 우리 군소리 없기다.”
“그래도 이건 너무 경우가 없잖아. 너만 좋으라고 나만 계속 참아야 한다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거잖아. 내 몸이 절로 자라나는데, 난들 어떡하라고….”
“정말 너무하는구나.”
나는 그때부터 주위의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어. 나보다 더 나이 많은 해송들한테도 부탁을 해봤지만, 그들로서도 도와줄 방법이 딱히 없었던 거야. 아니, 오히려 다른 칡들이 자신들에게까지 기어오를까 겁부터 냈어. 그리고 주변의 칡들 또한 여차하면 다른 해송의 둥치에 기어오르려는 눈치까지 보였으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저 자신만을 위해 남한테 피해를 줘도 된다는 생각들을 할까.”
우리 식물의 세계에서도 엄연히 규칙이란게 있어. 자신의 영역이 소중한 만큼 남의 영역도 소중하게 여겨줘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다양한 수종들이 함께 공존할 수가 있겠어.
“칡아. 네가 갑갑하다며 먼 바다를 바라다보고싶다기에 내 몸에 올라타기를 허락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나를 희생 삼아 내 몸에 기생하여 팔자 고쳐보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지녔구나.”
“해송아. 가만히 있는 내게 자꾸 시비를 거는데, 그렇다면 나 역시 네가 어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다.”
“네가 내 몸을 계속 욱죄어오면서 그걸 어찌 가만히 있는거라 할 수 있겠니. 그리고 내 몸에서 떨어지라는게 어찌 시비를 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니. 내가 어찌되든 네가 알 바 아니란 소리는 또 뭐니?”
“해송아, 너! 자꾸 시비 걸거야?”
“아니, 시비 거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거다. 이제 제발 내 몸에서 떨어질 수 없겠니?”
“안된다고 했잖아.”
그렇게 내가 칡넝쿨에 감겨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어.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윙윙’ 소리를 내는 거친 기계를 들이대어 내 몸에 얽혀있던 칡넝쿨을 가차 없이 걷어내더군.
나중에 듣기로는 사하구청에서 산림정비때문에 나온 사람들이래.
내 몸에 잔뜩 얽혀있던 칡넝쿨로부터 해방되자 나는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어.
“에잇! 쌤통이다!”
남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제 이익만 찾던 칡의 불행이 오히려 내겐 행복으로 다가온 것이야.
칡의 입장에선 ‘된통 당했다’라 하겠지만 난 그 덕에 죽을 뻔했다 살아났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