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려면 자존심을 버려야죠"
프랑스 요리의 명장 박 효 남
명장, 그 마음의 비밀(2)
‘프랑스인보다 프랑스 요리를 더 잘한다’는 한국인 요리사가 있다. 존 메이저 영국 전 총리, 프랑스 요리의 대가인 조엘 로뷔숑까지…. 먹어본 사람이라면 감탄해 마지않는다는 프랑스 요리사 박효남(48) 상무.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 총주방장인 그는 1996년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에서 5개 부문 금상을 수상하는 등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열여덟에 하얏트호텔 주방 보조로 취직할 당시 그의 이력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 조리사 면허증 단 세 줄이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세계적인 호텔 체인의 최초 현지인 총주방장이 된 그는 ‘손님 식사 후, 빈 접시였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천상 요리사다. “무도(武道)나 다도(茶道)처럼 ‘요리 도(道)’도 있다. 요리로 득도(得道)하겠다는 치열한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는 박효남 명장, 그 마음의 비밀을 들어본다.
글 허순희 / 사진 김혜균
마음의 비밀 첫 번째_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열여덟 살에 하얏트호텔에 취직하며 요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박효남씨가 부딪친 최초의 벽은 바로 ‘감자 깎기’였다. 어린 시절 소여물을 만들다 작두에 오른손 검지를 잘린 불편한 손가락으로 하루에 수백 킬로그램의 감자를 깎아야 했던 그는 빨리 못한다고 온갖 구박과 설움을 받았다.
그는 감자 대신 삶은 달걀을 쥐고 출퇴근길은 물론이고 잠들 때까지 손이 아프도록 연습했다. 매일 남들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해 청소를 하고 재료를 정돈해놓았으며 하루에 몇 번씩 누구를 만나도 꼭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업무시간이 끝나도 선배들의 잡다한 일을 도왔고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살펴 가져다주었다. 새로 알게 된 것은 바로바로 메모했고 그날 익힌 요리는 퇴근한 후 남아서 꼭 연습을 했다. 선배들은 그에게 요리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마음의 비밀 두 번째_ 배우려면 자존심을 버려라
1986년 프랑스로 해외연수를 떠났을 때다. 요리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기분 나빠하지도, 기죽지도 않았다. ‘나는 대우 받거나 놀러온 것이 아니라 일을 배우러 왔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바닥 청소도 하고 프라이팬을 닦으며 뭐든 열심히 했다. “자존심 상하지 않았냐구요? 내가 필요해서 간 건데 자존심이 어딨어요.
배우려는 마음보다 자존심부터 내세우면 배울 수 없죠. 하나라도 배우려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해요.” 그런 어느 날 감자를 깎는 외국인 요리사를 도와주면서 능숙한 솜씨로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이후 소스 제조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의 진심은 전해지는 법. 프랑스 본토의 조리법을 익히고도 그는 흉내만 내지는 않았다. 배운 것을 기본으로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프랑스 요리를 개발했다.늘 더 공부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진정한 자존심이었다.
마음의 비밀 세 번째_ 기본에 충실하라, 노력한 만큼 얻어진다 ‘게으른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요리를 배울 때 매일 학원 청소도 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3개월 만에 자격증을 딴 그는, 평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학원 원장의 추천으로 하얏트호텔 주방 보조로 들어간다. 그리고 ‘쫄병’이 ‘고참’들과 똑같이 해서야 뭘 배울 수 있겠냐는 생각에 새벽 5시에 출근해 청소부터 했다.
한편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다녔다. 일이 늦게 끝나 라디오 강의를 듣지 못하는 날은 어머니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주었고 그걸 밤새 들으며 공부했다. 그 후 역시 그를 눈여겨본 외국인 주방장의 제안으로 프랑스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감자를 가져오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당근을 갖다주어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던 그는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낮엔 고된 주방 일, 밤에 영어학원과 방송통신고 공부까지…. 힘들었지만 어느 것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5년 뒤 퍼스트쿡이 되고, 1983년 서울힐튼 호텔에 스카웃되었을 때 그는 이제 고졸이었고 영어회화가 가능한 요리사였다.
마음의 비밀 네 번째_ 프로 정신, ‘요리는 애프터서비스가 없다’
“저는 무도(武道)나 다도(茶道)처럼 ‘요리 도(道)’도 있다고 생각해요. 요리로 득도(得道)하겠다는 치열한 의지, 프로 정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박효남 상무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그날의 첫 끼니를 챙긴다. 손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기 전까지 커피 한 잔 이외의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다. 배가 부르면 최상의 요리를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혀’의 감각을 무뎌지게 하는 술과 담배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에도 힘쓴다.
요리사가 건강하지 않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의 방문 날짜와 주문한 메뉴도 꼼꼼하게 기록해 두는데, 메뉴만 보고도 그 사람의 취향과 입맛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식사 후에는 손님의 표정과 접시를 보고 만족도를 파악한다. 음식을 남겼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므로 손님에게 가서 안 좋았던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요리는 주방을 나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마음의 비밀 다섯 번째_ 먼저 마음을 연다
1983년 서울힐튼 호텔에 처음 왔을 때였다. 당시 스물셋의 어린 나이에 직책이 높은 그를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요리를 그만둘까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요리가 가장 재미있고, 그 일을 하는 나는 참 행복하구나’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한다. 그는 하얏트에서처럼 새벽 5시면 출근했고,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의 진심이 받아들여지면서 불편한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사람 사이가 힘든 것은 마음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그냥 저 사람하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면 말로 풀고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조리 방법을 나누어 후배들이 좋은 조리법을 배우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가 처음 요리를 배울 때 요리 하나 배우려면 정말 고생했어요. 책도 없고, 선배들이 가르쳐주질 않는 거예요. 후배들은 그런 설움 안 당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요리는 아무리 똑같은 재료와 조리법을 써도 같은 맛이 나올 수 없다.
박효남씨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이라고 한다. 그는 ‘가족에게 상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강조한다. “손맛이 좋다고 칭찬을 하시지만, 손에 소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손맛이라는 건 ‘마음의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또 직원들에게 “힘들고 짜증 나는 마음을 출퇴근 카드를 긁으면서 싹 날려버리라”고 한다. 회사로, 가정으로 이어지면 서로 불편하고, 요리하고 식사하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나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효남 상무는 1961년 강원도 고성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직업군인이었던 부친은 전역 후 사업에 실패, 서울로 이사해 연탄가게를 시작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효남은 연탄배달을 도우며 빨리 학교를 마치고 돈을 벌어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동생들을 생각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사환으로 일을 하던 때 기술의 필요성을 느껴 요리학원에 다닌다. 요리가 재미있었던 그는 3개월 만에 중식 요리사 자격증을 땄고, 하얏트호텔 주방보조로 취직, 프랑스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 입사 9개월 만에 정식 요리사인 세컨드 쿡이 되고, 다시 퍼스트 쿡이 되기까지 5년.
그 후 힐튼호텔로 스카우트된 그는 세계 3대 요리대회의 하나인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에서 무려 5개 부문 금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다. 이후 1999년엔 국내 호텔업계 최연소 이사, 2001년엔 요리사 최고의 자리인 총주방장, 2004년엔 상무가 되었다. 전 세계 힐튼호텔 210여 개 체인 중에서 현지인이 총주방장이 된 것은 그가 처음. 2006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농업훈장인 메리트 아그리콜을 받았으며 ‘프랑스인보다 프랑스 요리를 잘한다’는 칭송을 듣는다. 초당대학교 조리과학과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현재 순천대학교 조리과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그는 교수 제안도 마다하고 학생 신분으로 남아 있다. “호텔음식은 계속 변화해야 하고, 나한테 필요한 것은 배움이지 직책이 아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마음수련 2007 6월호 中-
첫댓글 너무 배울게 많은 분이신것 같아용 ^^ “사람 사이가 힘든 것은 마음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그냥 저 사람하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면 말로 풀고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말이 정말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