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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무굴제국의 첫 황제 바부르(1) 2011/03/03 19:54 | 추천 0 스크랩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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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事事佛供 處處佛像( http://blog.chosun.com/ktc39510) 2011/02/03 23:47
*인도 무굴제국의 첫 황제인 바부르 이야기를 연재해 보려고 합니다. 무굴제국은 인도 중세사, 근대사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무굴을 알면 인도가 훨씬 더 보이죠. 그 무굴제국을 연 사내, 바부르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페르가나의 소년 왕, 카불의 술탄, 인도의 황제 바부르]
1. 12살에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다
나는 1526년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황제다. 무굴 제국은 동방의 빛나는 나라였다. 중국의 명나라와 함께 당대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다. 개국 321년 뒤, 영국에 의해 1857년 문을 닫기 까지 세계에 부(富)를 자랑했다. 당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장해 힘을 키우기 이전이었다. 유럽은 우리의 무역 파트너였을 뿐, 인도의 앞 바다인 인도양에 전함을 보낼 정도로 힘을 키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이름 ‘무굴’은 사실 인도인들이 발음을 잘 못해서 생겼다. 올바르게 발음하면? 놀라지 마시라 몽골이다. 몽골인인 내가 세운 나라라고 해서 무굴이라고 인도인들이 불렀다. 인도 사상 가장 완벽하고 영역이 컸던 나라를 인도인이 아닌, 몽골인이 세웠다니? 잘 상상이 되시나. 몽골인의 나라가 인도 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많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그걸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안다. 게다가 나와 내 후손들이 이슬람교도였다는 걸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힌두가 다수인 나라를 통치하는 게 이슬람교도이고 외국인이었으니 말이다. 내 이름은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흔히 바부르라고 불린다. 바부르는 호랑이를 뜻하는 페르시아 말 ‘바브르‘에서 왔다. 내가 용감했다는 뜻에서 사람들이 붙여줬다. 1483년 2월 23일 중앙아시아 생. 나는 페르가나 공국(公國)의 왕자로 태어났다. 왕위를 이을 큰 아들이었으니, 어렸을 때 생활은 행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12살 때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그랬다.
페르가나 공국은 중앙아시아다. 인도 무굴 제국 황제라면서 그런데 고향이 중앙아시아라고. 그렇다. 나는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훗날 인도로 내려가 제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를 인도에서 너무 멀게 생각하지 말라. 중앙아시아 최고의 도시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려가고, 다시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힌두스탄 평원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인도다.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잇는 중간지대라고 보면 된다. 페르가나 공국은 중앙아시아 동쪽 끝 페르가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서쪽 끝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가 맞닿은 곳이다. 페르가나 계곡에서 동쪽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면 오늘날 중국의 끝인 카스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페르가나 계곡을 지나간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선지, 그가 이름을 날린 곳이 이 일대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진리의 불법을 찾아 천축국 인도로 갈 때도 내 땅을 지났다. 중국에서 인도로 바로 넘어가는 길은 없으니까 이 길로 가야했다. 요즘은 한국에서 온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조금씩 찾는다. 유럽의 배낭족은 많이 온다.
페르가나 계곡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 통로다. 페르가나 계곡은 당연히 비단길, 즉 실크 로드의 주요 길목이다. 요즘은 이 땅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들로 쪼개졌다. 낯선 이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내 얘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페르가나 공국의 수도는 안디잔인데, 오늘날의 안디잔에는 한국 자동차 메이커 GM대우의 자동차 공장이 있다. 참 얼마전 이 공장 이름은 GM 우즈베키스탄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한국인이 그래서 가끔씩 왔다간다. 가장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한국으로 시집가는 우즈베키스탄의 처녀들이 많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김태희가 밭을 갈고, 송혜교가 물지게를 매고 있더라는 말이 한국에서 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지역에 미인이 많다는 얘기겠다.
내가 12살에 왕이 되었다니 복도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정 모르는 소리다. 나이에 맞춰 할 일이 있다. 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때에 한 나라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 소년 왕이었다. 더구나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왕의 이름은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 이슬람식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면 그냥 오마르라고 생각하면 된다. 셰이크는 아랍식 존칭이고, 미르자는 이란-중앙아시아-인도의 존칭이다. 셰이크는 부족장, 이슬람 학자, 지도자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미르자는 지도자의 아들, 즉 동아시아 말로는 공자(公子)쯤에 해당한다. 부왕은 그때 왕국의 또다른 주요 도시 아크시에서 계셨는데, 비둘기집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1494년 6월 9일이었다. 아크시의 성채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서있었다. 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당신이 키우던 비둘기들과 같이 절벽에서 허공으로 날았다. 중앙아시아 제국의 황도였던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던 그가 숨졌을 때는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국가적 위기는 아버지가 변을 당했을 때 마침 외적이 침략하면서 증폭됐다. 이웃 나라의 왕이던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각각 동맹을 맺고 페르가나 공국을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급서했으니 10대 초반인 나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외삼촌과 큰 아버지가 왜 쳐들어왔느냐고 묻지 말라.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법이 당시는 그랬다.
(안디잔의 바부르 광장에 서있는 바부르의 기마상)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는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오늘날은 우즈베키스탄의 두 번째 도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나의 6대조 할아버지인 티무르 아미르는 사마르칸트를 황도(皇都)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이란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칭기스칸 이후 초원을 다시 통일한 위대한 군인이었다. 유럽인들은 절름발이라고 그를 놀리지만, 동양과 서양을 잇는 초원의 길은 그로 인해 다시 열렸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길을 따라 상인은 세상의 부를 실어 날랐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의 무덤 ‘구르 아미르’에 누운 뒤 제국은 분열됐다. 아들들이 제국을 나눠가졌다. 그 아들들은 아들들에게 또 영토를 나눴고, 제국은 무한 분열했다. 제국은 사라지고, 작은 영토를 가진 공국들이 세를 다투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친척이었다. 동생의 땅을 빼앗고, 조카의 나라를 노리는 게 당시 초원의 법칙이었다. 할아버지(술탄 아부사이드 미르자)는 사마르칸트의 통치자였고, 아버지는 그의 네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초 아버지에게 카불을 봉토로 떼어줬다. 카불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다. 미국이 밀고 들어가 쑥대밭이 된 나라다. 그때 카불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동부(호라산), 중앙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초원 지대의 남쪽 지방에 해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영을 받자 카불을 향해 출발했다. 할아버지는 카불 출신 바바를 아버지의 보호자로 달려 보냈다. 분가를 꿈꾸던 아버지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 발흐를 지나 데라 게즈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마르칸트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동생들의 할례 행사에 참석하라는 이유였다. 이슬람에서 할례 행사는 의미가 크다. 성인이 된다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의 옛 궁전인 톱카프 궁전에 가보면 할례의 방이 있다. 왕자들의 할례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 사마르칸트에서의 할례 행사가 끝났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남쪽의 카불 대신, 동쪽의 페르가나로 가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생각이 바뀐 건 위대한 아미르였던 티무르 할아버지에게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티무르 할아버지가 그의 아들인 오마르 셰이크 미르자에게 페르가나를 준 걸 떠올린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티무르 할아버지의 아들은 이름이 같다. 티무르가 되기를 꿈꿨던 할아버지는, 티무르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자신의 4남에게도 페르가나를 떼어줬다.
(티무르의 무덤이 있는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미르')
큰 외삼촌(술탄 마흐무드 칸)은 몽골계로 당시 몽골의 한 부족을 이끄는 왕, 즉 가한(可汗)이었다. 몽골의 부족장은 칸이라고 불린다. 투르크와 아랍계의 왕은 술탄이라고 불린다. 중앙아시아는 몽골과 투르크족이 만나는 땅이니 이런 호칭이 두루 사용됐다. 큰 외삼촌의 이름 앞뒤로 술탄과 칸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 이런 정치사회적 배경 탓이다. 외삼촌과 나의 어머니 쿠틀룩 니가르 카눔은 할아버지 유니스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 어머니 이름 뒤 ‘카눔‘은 ’칸‘의 여성형이다. 외삼촌 술탄 마흐무드 칸은 유니스 칸의 큰 아들이었다. 그와 사마르칸트의 왕(술탄 아흐메드 미르자)은 아버지로 인해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사마르칸트의 왕은 아버지의 형이다. 나의 외삼촌과 큰 아버지는 공동 전선 구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고, 사마르칸트의 왕인 큰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걸 고리로 반(反)페르가나 왕국 동맹은 출범했다. 외삼촌인 술탄 마흐무드 칸과 큰 아버지인 술탄 마흐무드 칸은 페르가나 계곡의 서쪽에서 동시에 쳐들어왔다. 페르가나 왕국에 들어오는 길은 이 방면 밖에 없다. 다른 3면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장애물이다. 난 당시 나라의 수도인 안디잔에 있었다. 안디잔 성의 궁성 내의 정원이 아름다운 차르박 궁에서 부왕이 급서했다는 걸 사고 다음날에 들었다. 나는 서둘러 말에 올랐고, 즉각 동원이 가능한 수하들을 데리고 안디잔 성 장악을 위해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공백기에 재빨리 권부를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미르자의 문에 막 도착했을 때 쉬림 타가이가 내 말의 고삐를 쥐고 도시 한 복판의 이드가로 안내했다. 이드가는 이슬람 왕국의 도시에 있는 종교 건축으로, 메카를 향해 절하도록 하는 긴 벽을 갖고 있다. 벽을 향해 일자로 늘어서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쪽으로 기도를 하는 게 무슬림의 전통이다. 나는 불안했다. 사마르칸트의 강력한 지배자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강한 왕이고 많은 병력을 이끌고 접근하고 있는 만큼 안디잔의 귀족들이 나라를 그에게 넘길 수도 있다. 그들이 나라를 들어 바친다면 어떻게 하나. 나는 순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에 끌려가기 보다는 외삼촌인 일체 칸이나 마흐무드 칸 술탄에게 갈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안디잔에서 집안 대대로 이슬람 종교청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집안 출신인 콰자 물라나 카지와, 성에 있던 가신들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냈다. 콰지 무함마드였다. 콰지는 종교 재판관을 말한다.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콰디(qadi)라고도 한다.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신뢰하던 늙은 가신이다. 무함마드를 보낸 건 내가 불필요한 우려를 하지 않도록 위해서였다. 무함마드는 아버지의 딸 중 한 명의 수양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드가 앞에서 나를 맞은 뒤 왕성으로 안내했다. 콰자 물라나 콰지와 신하들은 내 앞에서 대책을 협의했다. 그들은 의견을 교환한 뒤 계획을 세우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나가기로 했다. 핫산 야쿱, 카심 쿠친과 몇몇의 다른 신하들은 당시 마르그히난과 그쪽 지역에 경계를 나가 있었는데 하루 이틀 후에 안디잔으로 돌아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 모두가 한 마음과 몸으로 안디잔을 지키기로 했다. 큰 아버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왕인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도시들을 잇따라 점령한 뒤 카바로 진군했다. 그곳은 안디잔에서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아흐멧 미르자는 그곳에 진영을 차렸다. 적이 압박해오자 안디잔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안디잔의 유명한 한 수피인 데르위스 가오가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수피는 이슬람 신비주의파로 알려져있다. 가오를 즉각 선동 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후 주민들 사이의 불온한 기운은 외견상 가라앉았다. 나는 가신인 콰자 카지와, 우준 핫산, 콰자 후세인을 사절로 사마르칸트의 술탄에게 보내 사태를 해결할 메시지를 전달했다. “해결책은 아주 쉽습니다. 이 나라를 책임질 당신의 종 한 명을 이 나라에 두십시요. 내가 당신의 종이자 아들이 되겠습니다. 이 임무를 내게 맡겨주시면 당신의 뜻은 매우 만족스럽고 쉬운 방법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사마르칸트의 왕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온화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말이 별로 없고, 신하들이 없으면 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탄의 장군들은 내 제안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게 돌아온 건 무례한 답이었으며, 그들은 안디잔을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이들에 제동을 가한 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알라는 적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했고, 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적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이렇다. 검다는 카바는 강 지역에 늪이 많아 다리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그들은 병력 수가 매우 많았고, 좁은 다리 위를 통과하려다 보니 다리 위에서 극심한 혼잡이 일어났고, 많은 말과 낙타가 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이 사건 3, 4년전에도 술탄의 군대는 치르 강을 건널 때 큰 패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그때 사건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병사들은 카바 강을 건너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마르칸트 진영에서는 말들이 집단 발병하기도 했다. 갑자기 많은 말이 죽기 시작했다. 오늘날 같으면 구제역과 같은 병일 것이다. 그들이 퇴각한 세 번째 이유는 나의 병사들과 백성이 한 뜻이 되어 뭉쳐있고, 방어를 하겠다는 의지가 단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울 것이며, 침략자의 정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 굳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적군은 사기가 꺾였고, 큰 아버지 아흐멧 미르자 술탄은 결국 안디잔에 약 5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뒤 무함마드 테르칸을 사자로 보내왔다. 무함마드 테르칸은 안디잔 성 내의 이드가에서 나의 가신인 핫산 야쿱을 만났다. 그들은 평화를 일궈냈고, 침략군은 철수했다. 반면 외삼촌인 마흐무드 칸 술탄은 호젠드 강 북쪽으로 페르가나 공국을 침략, 아크시를 포위했다. 이복 동생 자항기르 미르자가 그곳에 있었고 총리인 셰이크 압달라도 그와 함께 있었다. 웨이스 라가리와 미르 기아스 타가이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일부 오해가 있어 그들은 카산으로 철수했다. 웨이 라가리는 나시르 미르자의 총독이었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아크시 주변에 도착하자 마자, 이들은 그에 굴복했고 카산을 들어바쳤다. 미르 기아스 타가이는 칸과 함께 계속 있었고, 그를 모셨다. 칸이 아크시에 접근, 몇 차례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크시의 귀족들과 젊은 이들은 놀라운 용기를 갖고 싸웠다. 마흐무드 칸 술탄이 병에 걸렸고, 전쟁에 신물이 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12살에 왕이 된 나의 즉위 당시의 위기는 해소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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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한반도로 이어져야.....!!
원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