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04 / by. 얼음빙수/
기왓장은 높은 온도에서 구운 황토이기에 항아리 마냥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와는 명백한 무생물이었다.
도경수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반려기와를 찾았다.
도경수는 착해서, 자신의 심술을 용납하지 못할 때 눈물이 났다.
도경수가 수건을 걷기 위해 나간 베란다 건조대에서 못 보던 옷가지들을 발견했다.
도경수는 단번에 수학여행 가서 입을 옷이 없다고 징징대던 한 살 터울 여동생 도은수가 떠올랐다.
도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터져나온 감정의 실체는 화고 서러움이어서 결국에는 부끄러움일 것이었다.
도경수가 서둘러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오래된 임대아파트는 방음이 젬병이었다.
“경수야, 다음엔 경수 것도 사줄게.”
왜 이렇게.
왜 이런 걸로 눈물이 나는지.
/식물인간/ 04/ by. 얼음빙수
‘기와야.’
도경수가 마음으로 반려기와를 불렀다.
‘왜’
‘나는 졸렬한 놈인가 봐. 속 깊은 척 하는 것도 다 위선이고, 실은 나도 철딱서니 없는, 그저 그런 놈이야.’
‘아냐, 그런 거.’
‘저거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알아?
돈 없다면서 도은수 옷은 사주네.
수학여행이 뭐라고, 그깟 수학여행이......’
‘나였음 저 옷을 다 찢어 놨다.’
‘진짜 철없지. 구질구질하지. 다 괜찮은 척했으면서 이제 와서.’
‘아냐. 네가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 그래.’
‘저렇게 사주는 거였으면 없이 살든 말든 나도 필요한 거 갖고 싶은 거 다 사달라고 할걸.
순간 울컥해서 그런 생각까지 드는데, 이게 열아홉 살 먹고 할 생각인가 싶고.......’
‘돈이 없대.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도 항상 모자랐어.’
‘네가 괜히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었네.’
‘최소한의 것만 있었어. 남들한테는 당연한 게 다 사치였어. 나한테는.’
‘어렸을 때부터 서러웠겠다. 도경수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겠지. 내가 이런 애라는 거.
티 안 나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티가 나.’
‘하나두 안 그래. 안 삐뚤어지고 이만큼 자란 게 대단해. 그냥.’
‘수학여행 때도 애들은 다 사복 입는데....... 나는 교복 입고.......’
‘야, 그래서 인마. 나두 그 날 교복 입고 갔잖아.’
‘너 혼자 교복일까 봐.’
도경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 안 나?’
‘너 벌써 나는 잊었구나?’
도경수의 눈알이 눈물 때문에 너무
너무 반짝였다.
/식물인간 /04 / by. 얼음빙수/
열여덟. 수학여행을 떠나는 도경수가
오전 06시 10분경 운동장에 도착했다.
도경수는 시간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50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은 시간 낭비라고 볼 수 있었다.
도경수의 차림은 간단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교복에 책가방이 전부였다.
수학여행을 떠난다고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운동장을 메웠다.
그중에 가장 힘을 준 사람은 도경수의 담임인 장성규 선생님이었다.
도경수는 속으로 으르렁을 부르며 웃었다.
‘역시 성규 쌤. 재밌어.’
사복을 입은 친구들 사이로 교복을 입은 민윤기가 어슬렁대며 걸어왔다.
“야, 민윤기! 웬 교복~? 오늘 같은 날에는 무조건 사복을 입어줘야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가는데~”
“학생이 교복을 입어야지. 무슨. 저 아디다스들 뭐냐. 공동구매 했냐?”
평소에는 입지도 않던 니트 조끼마저 입은 민윤기가 너무 큰 소리로 투덜댔다.
“그치. 교복이 간지지. 도경수가 뭘 좀 아네.”
민윤기가 능청스럽게 도경수를 칭찬했다.
도경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가? 이야~ 그럼 나도 그냥 교복이나 입을걸~ 수학여행과 교복? 컨셉적으로 완벽하잖아~”
도경수와 민윤기의 첫 친한 척이었다.
장성규 선생님이 현재 인원을 파악했다.
그 무렵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새끼가 한 명 있었다.
출발이 13분이나 지난 시각,
우지호가 운동장에 세워진 전세버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왔다.
“지호야, 너는 어떻게 이런 날까지 지각을 하니?
서둘러 자리에 앉으렴! 선생님 어서 떠나고 싶으니깐!”
“선생님, 오늘이 수학여행 가는 날이었어요?
저 짐 하나도 안 들고 왔는데. 어우, 어떡해요?”
징징대는 우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교복차림이었다.
/식물인간/ 04/ by. 얼음빙수/
반별로 줄 지어 선 고등학생들이 김포공항을 점령했다.
도경수는 생애 첫 공항 나들이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도경수는 공항검색대에 붙잡혀 추궁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당연히 무사 통과.
도경수가 기내에 들어서자, 이미 착석한 친구들이
‘왜 신발 안 벗고 탔냐, 비행기 처음 타는 티를 내는 거냐’ 며 놀려댔다.
도경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윙크)
“발이나 가리고 거짓말을 하렴. 애송이들아.”
도경수는 사전조사를 철저히 한 보람을 느꼈다.
김종민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신발을 헐레벌떡 벗더니 용서해달라고 울부짖었다.
사실 김종민은 이번이 7번째 비행이었다.
김종민의 재롱에 수많은 탑승객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어수선한 기내에서
학생들이 거북이의 ‘비행기’를 떼창했다.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나는 전주 때문인지 더해지는 목소리 때문인지 그냥 비행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도경수는 코끝이 시큰했다.
날기 위한 도약, 몸이 떠오르는 사선 구간에서 도경수는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외쳤다.
/식물인간 /04 / by. 얼음빙수/
마동석은 우지호에게 흔쾌히 에메랄드색 향기 나는 미피펜을 대여해주었다.
우지호는 마동석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우지호는 에메랄드 빛 잉크로 에메랄드 빛 스웩을 적었다.
우지호는 고등래퍼였다.
우지호가 빌려갔던 미피펜을 제때 반납하기 위해 마동석을 찾았다.
마동석은 도경수의 옆 분단 바로 앞자리였다.
자연스럽게 도경수의 시야로 교복을 입은 우지호가 침범했다.
오늘 아침,
도경수의 여동생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도경수는 작년 이맘때 다녀온 자신의 수학여행을 기억했다.
전교에 3명밖에 없었던 교복.
우지호가 도경수의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봤다.
“뭘 봐, 동그라미.”
도경수와 우지호는 신기하게도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으나
서로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동석아, 동그라미 청년은 라벤더색이 써보고 싶대.”
“내가 언제 그랬어.”
도경수는 우지호를 부르지도 않았다.
“경수 여름 타니? 라벤다는 무슨 라벤다야.”
마동석이 도경수에게 벚꽃색 향기 나는 미피펜을 쥐여주며 말했다.
“너는 이 색. 벚꽃 같은 글 써 와라.”
우지호가 오우! 하는 감탄사를 내며 박수를 짝짝쳤다.
“동그라미 청년, 기대할게.”
도경수는 얼떨결에 펜을 받아 들었으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벚꽃 같은 글이라니.
“지금 벚꽃이 어디 있다고.”
벚꽃은 진 지 오래였다.
“그럼 뭐 에메랄드는 있냐?”
우지호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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